2026년 6월 1일 (월)
(홍)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소작인들은 주인의 사랑하는 아들을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레지오ㅣ성모신심

허영엽 신부의 나눔: 우리는 왜 고통의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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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16:57 ㅣ No.1014

[허영엽 신부의 ‘나눔’] 우리는 왜 고통의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가?

 

 

“나는 용서한다. 그러나 잊지는 않겠다.” 정확한 출처는 모르겠지만 많은 글이나 연설에서 인용되는 구절입니다. 용서는 나에게 고통을 준 대상에 대해 잘못을 받아들이고, 미움과 원망을 마음속에서 비워내는 과정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통스러운 기억은 일부러 대면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기억일수록 잊었다 생각하지만 무의식 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가 고통을 기억한다는 것은 과거의 상처를 애써 모른 척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경험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큰 사고를 당하거나 황망하고 억울한 죽음을 당한 유가족들의 공통적이고 일반적인 마음은 다시는 이런 불행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일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여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1-22 참조)

 

나에게 죄를 지은 사람을 단죄하는 것은 정의로운 일입니다. 그런데 일곱 번 아니고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유다인들에게 ‘7’이라는 숫자는 매우 중요합니다. 완벽과 성취를 상징하는 숫자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무한대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실상 우리들은 나에게 잘못한 이를 한 번이라도 제대로 용서할 수 있을까요? 과연 진정한 용서가 인간의 능력으로 가능할까요? 진정한 용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파스카 축제와 무교절에 대한 설명에서 7이란 숫자가 자주 나옵니다(레위 23,6-8). 이는 순결한 신앙(로마 11,4)이나 완전한 안식을 의미합니다. 요한묵시록에도 거의 각 장마다 일곱이라는 숫자가 나옵니다. 그리스도교에서 성령의 칠은과 성사 등 일곱은 매우 중요한 숫자로 돼 있습니다. 이처럼 일곱은 ‘완성’과 ‘성취’를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용서’는 없었던 일로 덮고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기억은 하지만 나의 마음이 미움이나 증오로 지배되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용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만 가능

 

솔로몬 왕이 죽은 후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분리됩니다. 북쪽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 의해 비참한 멸망에 직면합니다(B.C. 722년경). 다행히 남쪽 유다왕국은 수도 예루살렘을 기반으로 정치적 종교적 중심을 갖고 있었으며,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을 초대 왕으로 해서 20명의 왕이 계승해 역사를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587년 남 유다왕국도 신 바빌론 제국의 느부갓네살 2세에 의해 침략당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은 완전히 파괴됐습니다. 왕족과 귀족들, 일반 백성들이 죽음을 당하고, 수천 명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포로로 붙잡혀서 바빌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이때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늘날에 비유하면 국가의 중요한 인재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바빌론까지 약 1,300km에 이르는 거리를 죽음의 행진으로 끌려가야 했습니다. 신의주에서 부산까지의 거리가 약 927km인 것에 비하면 얼마나 긴 거리인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포로들 중에는 유다왕국의 마지막 왕 시드키야도 있었는데 바빌론 병사들은 시드키야의 눈을 도려내어 소경을 만들었습니다. 유다왕국으로서는 역사적으로 가장 큰 수치를 맛보았습니다. 당시 바빌론은 현재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에서 페르시아만에 이르는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 하류 유역에 이르는 메소포타미아 남동쪽의 지역이었습니다.

 

 

삶에서 하느님이 함께하셨던 기억은 고통을 극복하는 방법

 

“바빌론 강기슭 거기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우네. 거기 버드나무에 우리 비파를 걸었네. 우리를 포로로 잡아간 자들이 노래를 부르라, 우리의 압제자들이 흥을 돋우라 하는구나. ‘자, 시온의 노래를 한 가락 우리에게 불러 보아라.’ 우리 어찌 주님의 노래를 남의 나라 땅에서 부를 수 있으랴? 예루살렘아, 내가 만일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이 말라 버리리라. 내가 만일 너를 생각 않는다면 내가 만일 예루살렘을 내 가장 큰 기쁨 위에 두지 않는다면 내 혀가 입천장에 붙어 버리리라. 주님, 에돔의 자손들을 거슬러 예루살렘의 그 날을 생각하소서. 저들은 말하였습니다. ‘허물어라, 허물어라, 그 밑바닥까지!’ 바빌론아, 너 파괴자야! 행복하여라,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너에게 되갚는 이! 행복하여라, 네 어린 것들을 붙잡아 바위에다 메어치는 이!”(시편 137, 1-9)

 

이스라엘 백성들의 처절한 삶이 절절하게 배어있는 시편 구절입니다. 이스라엘인들은 이후에도 시편을 읊으며 자신의 가장 비참한 역사를 기억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굴종의 역사를 떠올리며 후세에는 이러한 불행이 반복되지 않기를 기도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빌론 유배지에서 큰 의문을 갖게 됩니다. 왜 하느님이 약속하신 땅이 이민족에 의해 짓밟혔는가? 이스라엘 민족을 선민으로 부르셨던 하느님은 왜 자신들을 버렸는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이 유배 시대는 최악의 고난 시대였으나 또한 동시에 종교적으로도 하느님을 더 알고, 더 가까이 다가가는, 더 성숙하고 성장할 수 있었던 시간이 되었습니다. 많은 위대한 예언자가 배출된 것도 바로 이 시대였습니다. 우리 자신도 고통 속에서 더 성숙하고 발전됩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느님이 함께하셨던 기억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고통을 극복하고 회복하는 방법이 아닐까요.

 

[성모님의 군단, 2026년 5월호,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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