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7월 27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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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가정 안에서의 환대: 가족관계 – 나를 살린 5초간의 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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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6-07-26 ㅣ No.1219

[가정 안에서의 환대] 가족관계 – 나를 살린 5초간의 눈빛

 

 

벌써 40년이 지난 이야기다. 대학을 갓 졸업한 나는 가슴 한가득 설렘을 품고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다. 저명한 교수들의 강의를 듣고, 세미나에서 뜨거운 토론을 나누며 학문의 세계로 걸어 들어가는 유학 생활을 꿈꿨다. 그러나 막상 발을 디뎌보니 현실은 달랐다. 전공 수업 전에 반드시 어학 코스를 통과해야 했는데, 유럽권 밖에서 온 유학생이라면 빨라야 일 년, 길면 이 년을 매달려야 넘을 수 있는 관문이었다.

 

도착 직후 치른 수준 평가에서 나는 6단계 중 겨우 2단계에 배정되었다. 통상적인 경로라면 기초 과정 두 학기를 밟은 뒤 시험 준비반에서 한 학기를 더 보내야, 비로소 어학시험에 도전할 수 있었다. 일 년 반을 독일어 하나에만 쏟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나는 하루라도 빨리 심리학 강의실 문을 열고 싶었다. 오기와 간절함을 연료 삼아 온 힘을 다해 달렸고, 한 학기 만에 시험 준비반으로 올라섰다.

 

그러나 기쁨은 짧았다. 탄탄한 기초를 쌓아온 학생들 사이에서 제 속도를 내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실력은 좀처럼 늘지 않았고, 쪽지 시험 점수는 번번이 최하위를 맴돌았다. 자존감은 한 꺼풀씩 벗겨져 내렸고, 좌절이 켜켜이 쌓였다. 매일 누구보다 일찍 학교로 향했지만, 교실 안에서는 언제나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구석 자리를 골랐다. 낮은 점수가 반복되면서, 선생님도 나를 달갑지 않게 여기실 거라는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날도 며칠 전 제출한 에세이를 돌려받았다. 내가 쓴 글보다 빨간 펜 자국이 더 많아 보이는 답안지였다. 가슴 밑바닥에서 묵직한 절망이 차오르며, 온몸이 책상 아래로 허물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수치심이 파도처럼 밀려와 고개조차 들 수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무심결에 눈을 들었더니, 선생님이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마치 내가 고개를 들기를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계셨던 것처럼. 나는 그 시선에 붙잡혀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 순간, 선생님은 두 눈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리고 깊게 감았다가 떠 주셨다. 입가에는 따뜻한 미소를 가득 담은 채로. 고작 5초 남짓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짧은 눈빛 속에는 수많은 말이 고요히 담겨 있었다.

 

“괜찮아. 너무 실망하지 마. 나는 네가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알고 있어. 낮은 점수를 부끄러워하지 마. 너는 내 소중한 학생이야.”

 

지금도 그 눈빛을 떠올리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그 5초가 나를 살렸다. 나는 더 이상 스스로를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했고, 희망의 끈도 놓지 않았다. 그 선생님의 이름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뢸러 선생님’

 

뢸러 선생님의 그 눈빛을 가슴에 새기고 매달린 끝에, 마침내 그 학기 안에 어학 코스를 통과했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이 때로는 단 5초의 눈빛 하나로도 가능하다는 것을, 그 선생님은 그렇게 내게 가르쳐 주셨다. 나는 오늘도 가족에게, 학생들에게, 내담자들에게, 그날 뢸러 선생님이 건네주셨던 그 눈빛을 조용히 되돌려 주려 한다.

 

* 이레지나 : 심리학박사, 부부가족치료전문가, 서울부부가족치료연구소 소장, 한국상담대학원대학교 교수

 

* 그동안 ‘가정 안에서의 환대’를 연재해 주신 이레지나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2026년 7월 26일(가해) 연중 제17주일(조부모와 노인의 날) 인천주보 2면, 이레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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