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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한국의 주교좌 성당: 한국교회 최초의 자치 교구, 전주교구 주교좌 중앙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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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7-15 ㅣ No.868

한국의 주교좌 성당 (4) 한국교회 최초의 자치 교구, 전주교구 주교좌 중앙 성당

 

 

전주교구 주교좌 성당은 중앙 성당(주보 : 예수 성심)이다. 전동 성당이 아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당연하지 않게 되는 순간 우리는 궁금해진다. “왜?” - 중앙 성당을 주교좌로 정한 것은 제3대 교구장 김현배(金賢培, 바르톨로메오, 1905~1960) 주교다. 1957년 3월 7일 전주지목구가 대목구로 승격하고 김현배 신부는 아그비아 명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이에 따라 주교 성성식이 예정되었는데 날짜가 가까워도 김 주교는 식을 거행할 장소를 밝히지 않았다. 다만 ‘성성식을 거행하는 곳이 곧 주교좌 성당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1957년 5월 21일 중앙성당(당시 대동 성당)에서 성성식을 거행한 김현배 주교는 주교좌를 이곳으로 이전하였다.1) 그러나 전동 성당이 주교좌가 되어야 한다는 인식은 당시 전주교구 신부와 신자들에게는 당위(當爲)였고, “주교가 역사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주교좌를 결정한다.”고 항의하였다.2)

 

한편, 1946년 1월 22일 전주 지목구장 서리에 임명된 김현배 신부는 1960년 선종할 때까지 격동기를 온몸으로 받으며 교구를 이끌었다. 한국전쟁으로 전주교구에도 많은 희생이 있었고 다수의 성당과 공소들이 전화(戰禍)되거나 파괴되었다. 전동 성당은 전라북도 인민위원회, 차량 정비소, 보급 창고로 사용되어 성당 외벽만 남고 내부는 거의 파괴되었다. 이렇듯 폐허에서 재건을 이뤄내야 하는 교구장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김현배 주교의 사목 목표는 ‘1군(郡) 1본당’이었다. 전주교구는 1954년부터 1959년까지 전쟁으로 소실된 성당을 재건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주교좌의 면모를 스스로 모색해 온 점에서 중앙 성당과 광주 주교좌 임동 성당은 닮았다. 1954년 제4대 중앙 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박성운(朴聖雲, 베네딕토) 신부는 성전 신축을 계획하고 기성회를 조직했다. 1955년 7월 기공식을 갖고 1956년 8월 6일 김현배 지목구장 집전으로 새 성전 봉헌식과 영세식을 거행하였다.3) 영세식에서는 성전을 설계한 건축가 김성근(金成根, 요셉)4) 등 80명이 세례를 받았다. 성당 외부 정면에는 예수 성심상, 왼쪽에 성 베네딕토상, 오른쪽에 김대건 신부상을 설치했다. 당시 남한에서 두 번째로 큰 성전이었다. 1957년 6월 28일 주교좌 성당으로 봉헌되었고, 그에 걸맞은 위상을 정립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69년 4월에는 성당 유휴지를 활용해 중앙상가를 준공했다. 교회 사업을 위한 자금 조달과 자선사업 기금을 확보하기 위한 상가 건립은 교회의 목적뿐 아니라 전주시의 중심이라는 입지를 활용해 시민들과 좀 더 저렴하고 신뢰할 수 있는 임차 관계를 맺으려는 의도였다.

 

그러고 보면 1937년 ‘한국 최초의 자치 교구’가 된 전주는 처음부터 자립을 간구해야 했었다는 측면에서 전동 성당의 상징성보다 중앙 성당의 실용성이 당시 ‘교구의 거점 공간’이 갖춰야 할 요건에 더 부합했는지도 모른다. 중앙 성당은 지금도 중앙시장 가운데 우뚝 서서 지역사회와 함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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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호남교회사연구소, 『천주교 전주교구사』 II, 1998, 176-204쪽.

 

2) 드망즈 주교는 1931년 전라 감독 대리구를 설정하면서 전주교구의 모태인 전주(현 전동) 본당을 주교좌로 생각하고 있었다. 전주는 전라 감영 소재지였을 뿐만 아니라 전라북도 신앙 공동체의 첫 출발지였다. 그중에서도 전동 성당은 윤지충 · 권상연 그리고 유항검과 그 동료들이 처형당한 ‘순교 1번지’였으니 드망즈 주교는 그곳에 교구청과 주교좌를 정하고 싶었던 것이다. 또 이것은 순교자의 무덤 위에 제대와 성당을 세우는 교회의 전통에도 걸맞은 생각이었다(김진소, 『천주교 전주교구사』 I, 1998, 1040~1043쪽).

 

3) “이날 첫 영세자 80명 가운데 전주지방법원장 나항윤(羅恒潤, 토마스) 씨 같은 사회적 명사도 있었으며, 특히 자기 손으로 완성한 새 성전을 헌당하는 미사성제 중에 가톨릭 신자로서 처음으로 성체를 모시게 된 청년 건축사 김성근 씨의 감격에 넘친 모습은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김 씨의 뒤를 따라 그의 직원 8명이 현재 영세를 준비 중에 있다. 금번 신축된 성당은 건평 3백 평으로 3천 명(2층 성가대석만 25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다. 제단을 바라보는데 장애들이 되는 기둥은 하나도 없고, 통풍과 채광에도 많은 배려를 한 신식 건축이며, 공사비는 3천 백만 환이라 한다”(「남한 제2의 대성전, 신축 중의 전주 중앙교회 낙성」, 『가톨릭신문』 1956년 8월 26일자, 영인본 686쪽).

 

4) 전라북도 건축사회 초대 회장(재임 1965년 11월 18일~1968년 12월 21일).

 

[교회와 역사, 2022년 4월호, 이오주은 미카엘라(한국교회사연구소 미디어콘텐츠사업부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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