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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가톨릭신문으로 보는 한국교회 100년53: 르완다 난민 돕기 특별 모금 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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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가톨릭신문으로 보는 한국교회 100년] (53) 르완다 난민 돕기 특별 모금 운동 지구촌 아픔 어루만진 사랑의 기적… ‘복음적 나눔’ 새 지평 열다
“최악의 내전과 기아, 질병으로 죽어가는 르완다 난민을 도웁시다.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와 가톨릭신문사는 오늘부터 약 3개월 동안 르완다 난민 돕기 특별 모금 운동을 함께 전개합니다. 거듭되는 종족 간의 분쟁으로 인구 700만 명 중 100만 명이 학살됐으며 죽음을 피해 이웃나라로 피신한 200만 명의 르완다 난민들은 물, 식량의 부족과 콜레라 등 질병으로 인해 1분에 한 명꼴로 하루 수천 명이 죽어가는 실정입니다.
지구 저편에서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가는 르완다 난민들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어진 우리의 한 형제자매이며 ‘목마르다’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이번 특별 모금을 통해 모아진 성금은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 로마 본부인 국제 카리타스를 통해 르완다 난민 구호 사업에 직접 전달될 예정입니다.”(가톨릭신문 1994년 8월 21일자 1면 사고)
탈냉전 시대의 도래는 세계 평화에 대한 장밋빛 기대를 낳았지만, 실상은 민족, 종교, 인종 간의 갈등으로 인한 유혈 분쟁의 시기였습니다. 특히 아프리카 대륙은 자연재해에 내전과 학살이 겹치면서 극심한 인도주의적 위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1994년 르완다에서 발생한 집단학살(Genocide)은 100여 일 동안 100만 명이 희생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국제사회는 초기 대응에 실패하며 수많은 무고한 생명이 마체테(정글용 칼)와 수류탄에 스러져가는 것을 무기력하게 방관했습니다.
그러나 사태의 참상이 전 세계로 전해지면서 각국 정부와 비정부기구(NGO), 그리고 종교계를 중심으로 뒤늦은 자성과 함께 대대적인 구호 움직임이 시작됐습니다. 당시 한국교회는 서구 선진국의 원조를 ‘받는 교회’였지만, 1990년대를 기점으로 ‘주는 교회’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도모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점에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와 가톨릭신문은 1994년 8월부터 약 3개월간 대대적인 ‘르완다 난민 돕기 특별 모금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식민 지배가 초래한 참극
르완다의 집단학살극은 우발적인 부족 갈등이 아니라, 서구 제국주의의 폭력적 식민 통치 방식이 자아낸 구조적 모순의 폭발이었습니다. 원래 르완다에서는 트와족, 후투족, 투치족 등이 평화롭게 공존해왔습니다. 하지만 독일에 이어 르완다를 식민 지배한 벨기에는 효과적인 식민 통치를 위해 인위적으로 인종을 구분하고, 소수(15%)인 투치족이 다수(약 85%)인 후투족을 지배하는 구조를 고착화했습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권력을 장악한 후투족은 과거의 억압에 대해 보복하기 시작했고, 이는 지속적인 내전으로 이어져 르완다는 극도의 분쟁과 갈등의 늪에 빠져들었습니다. 여기에 가파른 인구 증가에 따른 토지와 자원 소유 경쟁의 심화로 종족 간 분쟁이 임계점으로 치달았습니다.
그러던 중, 1994년 후투족 출신 대통령이 암살되자 후투족 지배자들은 이를 투치족 반군의 소행으로 규정하고 모든 투치족을 말살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에 따라 투치족과 온건파 후투족들은 ‘바퀴벌레’로 불리며 집단학살의 희생자가 됐는데, 그해 4월 7일부터 7월 중순까지 100만여 명이 학살당하는 참극이 벌어졌습니다.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로
학살을 피해 인접국으로 탈출한 200만 명의 난민들이 겪는 고통은 참담했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내전 책임자들에게 즉각 살상 행위 중단을 촉구했고, 전 세계에 긴급 원조를 호소했습니다. 가톨릭교회의 국제원조기구인 ‘국제 카리타스(Caritas Internationalis)’는 즉각 르완다 국내와 탄자니아, 우간다, 부룬디 등지의 난민수용소에 인력과 자원을 지원했습니다.
한국교회도 이에 적극 동참했습니다. 1990년대 초반은 한국교회가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로 도약하는 중대한 전환기였습니다. 1989년 서울 세계성체대회를 계기로 시작된 ‘한마음한몸운동’ 등을 통해 나눔 의식을 고양한 한국교회는, 1992년 주교회의 추계 정기총회에서 공식적으로 사회복지위원회에 해외원조 사업을 위임했습니다. 1993년 소말리아 돕기 모금 운동은 한국교회가 공식적인 해외원조를 시작한 중요한 기점이 됐습니다.
르완다 사태가 발생하자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는 7월 11일 국제 카리타스를 통해 1차로 미화 5만 달러(한화 4000만 원)를 긴급 송금했고, 이어 10만 달러(한화 8000만 원)를 추가로 송금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수백만 명의 난민이 콜레라와 기아로 1분에 한 명꼴로 사망하는 아비규환의 한계 상황에 다다르자,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는 8월 8일 총회를 통해 전 교회 차원의 대대적인 특별 모금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했습니다.
작은 정성으로 엮는 구원의 연대
가톨릭신문은 주교회의의 모금 결의에 적극 호응해 8월부터 3개월 동안 대대적인 르완다 난민 돕기 특별 모금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이미 1993년 소말리아 돕기 모금에서 보여준 독자들의 놀라울 정도로 높은 관심과 참여는 르완다 돕기 모금에서도 이어졌습니다.
당시 가톨릭신문은 르완다 사태를 단지 먼 나라의 정치적 상황이나 재난으로 대상화하지 않았습니다. 비참하게 죽어가는 르완다 난민들을 하느님의 모상으로 지어진 형제자매이자, 목마름을 호소하는 주님의 모습으로 여겼습니다. 그럼으로써 한국 신자들이 르완다 돕기를 신앙적 의무이자 십자가 고통의 동참으로 해석하도록 이끌었습니다.
또한 일반 언론이 정치적 이해관계나 선정적 폭력성에 주목할 때, 가톨릭신문은 난민들의 구체적인 고통과 생명의 위협, 인간의 존엄성에 집중했습니다. 아울러 3개월에 걸친 캠페인 기간 내내 전국 각지에서 접수되는 성금 현황과 미담 사례를 지속적으로 보도함으로써, 독자들이 자신들의 작은 정성이 교회를 통해 거대한 구원의 연대망으로 결속되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나눔의 기적’ 보여준 경이로운 참여율
한국교회 신자들은 최악의 참상에 대한 간절한 호소에 전례 없는 규모와 열기로 응답했습니다. 모금이 시작된 지 불과 석 달 만에 총 12억여 원이라는, 당시로서는 초유의 성금이 모였습니다. 이는 1993년 한국교회가 1년 동안 아프리카 전체 국가를 돕기 위해 모금했던 해외 원조 성금 총액(약 10억 원)을 단일 캠페인으로 뛰어넘은 놀라운 기록이었습니다.
이러한 물리적 액수보다 더욱 값진 성과는 참여한 기부 주체들의 광범위함과 헌신적인 사연들이었습니다. 거액의 뭉칫돈이 아니라 평범한 신자들과 사회적 약자들의 십시일반으로 모여 이룬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이들은 “부족한 가운데서도 어려운 이들을 돕는 것이 진정한 나눔”이라며 모금에 동참했고, 고통받는 이가 또 다른 고통받는 이에게 내미는 연대의 손길이야말로 복음의 진수임을 보여주었습니다.
[가톨릭신문, 2026년 6월 21일, 박영호 기자] 0 4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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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톨릭신문은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와 1994년 8월부터 3개월 동안 ‘르완다 난민 돕기 특별 모금’을 실시했다. 1995년 2월 르완다 현지를 방문해 난민들의 상황을 기록한 사진.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가톨릭신문 1994년 8월 21일자 1면 사고. 가톨릭신문 자료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