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5일 (월)
(녹) 연중 제27주간 월요일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구역반장 월례연수: 평화 -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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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6-10-04 ㅣ No.2316

[구역반장 월례연수] 평화 <정의>


- 정의로운 세상을 위하여 -

 

 

인간은 누구나 정의로운 세상을 갈망합니다. 그러나 정작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정의는 단순히 법을 지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다수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선택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서구에서 시행 중인 안락사, 마리화나, 낙태법에서 볼 수 있듯 법으로 허용된 일이라고 언제나 정의로운 것은 아니며,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한 사람의 존엄과 권리를 희생시키는 것 역시 정의라 부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정의는 무엇일까요?

 

그리스도교에서 정의는 “마땅히 하느님께 드릴 것을 드리고 이웃에게 주어야 할 것을 주려는 지속적이고 확고한 의지”(「가톨릭 교회 교리서」 1807항)를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마땅히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인간에게 마땅한 것은 사회가 허락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그 존재 자체로 존엄하며,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권리를 지닙니다. 따라서 정의로운 사회란 강한 사람이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각자에게 마땅한 권리가 보장되는 사회입니다.

 

 

1. 성찰 : 누구의 권리가 잊히고 있는가!

 

오늘날 세상에는 수많은 불의가 존재합니다. 전쟁과 폭력, 빈곤과 경제적 불평등, 노동 착취와 인신매매, 성적 학대와 차별, 강제 이주와 난민의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혐오와 배제 역시 인간의 존엄을 훼손합니다. 이러한 불의가 개인들의 죄와 선택을 통해 사회의 제도와 관행 속에 자리 잡고 다시금 새로운 불의를 낳게 될 때, 교회는 이를 ‘죄의 구조’라고 부릅니다(『간추린 사회교리』, 119항 참조).

 

성경은 이러한 현실 앞에서 침묵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구약 성경은 가난한 이의 권리를 왜곡하거나 죄 없는 이를 희생시키고, 뇌물을 통하여 정의를 뒤엎는 일을 명백히 거부합니다(탈출 23,6-8 참조). 특히 예언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착취와 권력 남용을 단순한 사회적 잘못이 아니라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훼손하는 죄로 바라봅니다(아모 2,6-7 참조).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과 인간을 정의롭게 대한다는 것은 결코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성경은 반복하여 가난한 이, 고아와 과부, 이방인과 억압받는 이들을 기억합니다. 이는 그들이 다른 사람보다 더 귀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마땅한 권리가 가장 쉽게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정의는 모든 사람의 존엄을 인정하면서도 특별히 권리를 빼앗긴 사람의 목소리를 듣도록 요청합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정의를 성찰한다는 것은 이러한 질문을 요구합니다. 우리 사회는 누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까? 누군가의 고통이 쉽게 묻히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누리는 편리함과 풍요 뒤에서 누군가의 존엄이 희생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2. 증거 : 예수님의 정의를 살아가는 사람들

 

예수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정의는 단순히 율법을 충실하게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외적인 행동을 넘어 마음을 바라보셨고, 율법의 근본정신인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회복시키셨습니다. 결국 신약에서 정의는 율법의 외적인 준수를 넘어 하느님의 뜻에 대한 내적 순종과 이웃의 선을 돌보는 삶으로 완성됩니다.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교 정의의 독특함이 있습니다. 정의는 사랑을 동반하며 사랑은 정의를 완성합니다. 정의가 “당신에게 마땅한 것을 돌려주겠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사랑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당신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기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정의에서 요구되는 것은 사랑에서도 요구되며, 사랑은 정의를 포용합니다. 그렇기에 사랑이 없는 정의는 차가운 규칙이 되기 쉽고, 정의가 없는 사랑은 진리를 왜곡하는 동정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2027 서울 WYD는 영적 가치들 중 하나를 “정의”로 선포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정의를 어떻게 실천해야 할까요? 차별받는 이의 곁에 서는 것, 혐오와 조롱에 동조하지 않는 것, 다른 국적과 문화와 종교를 지닌 사람을 존중하는 것,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 나의 선택이 다른 사람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돌아보는 것에서 정의는 시작됩니다. 더 나아가 불의한 제도와 구조를 발견했을 때 무관심하지 않고 공동선을 위하여 목소리를 내며, 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능력과 재화를 나누는 것 역시 정의의 구체적인 실천입니다.

 

 

3. 열매 : 정의에서 화해와 평화로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단순히 잘못한 사람을 찾아내어 처벌하고 세상을 정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으로 나누는 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정의의 궁극적인 목적은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 곧 화해와 평화입니다. 정의가 없는 화해는 피해자에게 불의를 참으라고 요구하는 거짓 화해가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화해를 향하지 않는 정의는 끝없는 보복과 적대의 논리로 변질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정의를 평화의 필수적인 조건으로 바라보면서 동시에 정의에 사랑의 정신이 함께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진리 안의 사랑』 6항 참조).

 

이러한 요청은 특히 폭력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이들을 향해야 합니다. 납치와 착취, 조직범죄와 인신매매, 성적 학대와 정치적 억압, 극도의 빈곤으로 고통 받는 이들, 그리고 고향을 떠나 이민자와 난민이 된 이들은 단순한 통계 속 숫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꿈을 꾸고 사랑하며 자신의 미래를 희망하는 형제자매들입니다. 그들과 동행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빼앗긴 ‘마땅한 것’을 되찾아 주는 정의의 실천입니다.

 

2027 서울 WYD는 세계 곳곳에서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 서로 다른 상처와 희망을 지닌 젊은이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사건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대답은 예수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그분께서 보여 주신 정의는 사람을 밀어내는 정의가 아니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정의이며, 죄를 외면하는 정의가 아니라 죄로 깨어진 관계를 치유하는 정의입니다. 그러므로 정의를 향한 우리의 갈망은 사랑으로 나아가고, 사랑은 화해를 이루며, 화해는 마침내 평화라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2027 서울 WYD를 통해 한국 사회가 바로 이러한 정의를 새롭게 발견하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불의를 보고도 침묵하지 않고, 가장 약한 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자신의 권리만큼 다른 사람의 권리를 소중히 여기고, 정의를 실천하면서도 미움과 보복이 아니라 사랑과 화해를 선택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세상이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통해 많은 이들이 복음의 가치에 감동하고, 우리 사회가 더욱 정의로운 공동체로 변화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때 정의는 더 이상 우리가 외치는 하나의 구호에 머물지 않을 것입니다. 정의는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방식이 되고, 함께 살아가는 방식이 되며, 세상 안에서 복음을 증거 하는 방식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정의를 통하여 우리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존엄을 되찾고, 서로가 서로에게 형제자매가 되는 세상.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평화의 길을 함께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소공동체와 영적 성장을 위한 길잡이, 2026년 10월호, 방종우 야고보 신부(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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