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ㅣ기도ㅣ신앙
|
[신앙] 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 신앙은 지식을 요구한다 |
|---|
|
[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 신앙은 지식을 요구한다
신앙은 지식을 요구한다. 지식이 없으면 신앙은 그 완성에 이를 수 없다. 왜 그러한가? 첫째로, 믿음을 가능하게 하는 신뢰는 ‘왜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하느님께 내 삶을 걸어야 하는가?’에 대한 합리적 근거가 확증될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믿을 때 무턱대고 믿지 않는다. 그 사람이 믿을 만한 사람인지를 살피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신앙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세상의 온갖 부조리와 고통 속에서도 우리가 선하신 하느님의 실존을 믿는 이유는 단순히 막연한 낙관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십자가 위에서 인간의 고통과 죄를 친히 짊어지신, 우리와 인류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체적인 사랑의 역사를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삼위일체 교리를 맹목적으로 외우기보다 깊이 이해할 때 신앙의 질적 차이가 생긴다. 삼위일체 교리의 핵심이 ‘사랑’이며, 그 사랑 안에서 세 위격이 하나를 이루신다는 하느님의 신비를 이해할 때, 이 교리는 비로소 우리 삶의 이정표가 된다. 이처럼 신앙의 신비를 교리적 지식으로 명확히 인식할 때, 우리의 믿음은 단순한 정서적 위안을 넘어 흔들리지 않는 깊은 확신으로 나아간다.
둘째로, 신앙은 삶 속에서 그 참됨이 증명됨에 따라 평가되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했다는 것을 믿을 때, 정말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으며, 더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하고 의문을 던지기도 한다.
따라서 이는 삶을 통해 계속해서 합리적으로 검증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신앙인들이 일상의 구체적인 삶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으며 기쁘게 살아갈 때, 비로소 세상 사람들도 부활을 더 잘 믿게 된다. 그리스도인이 가장 큰 고통인 죽음 앞에서도 부활 신앙을 고백하며 평화롭게 눈을 감는 모습을 볼 때, 신앙의 진실함은 더욱 강력하게 증명된다.
셋째로, 신앙은 본질적으로 지식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는 은총이 자연을 전제하고, 완전함이 불완전함을 전제로 하는 것과 같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를 두고 “신앙은 자연 인식을 전제하는 것이며, 그것은 마치 은총이 자연을, 완성이 완성될 수 있음을 전제하는 것과 같다”(「신학대전」 참조)고 했다.
우리는 인간의 이성적 지식보다 아래에 있는 존재들, 이를테면 성황당의 고목나무, 호랑이 혹은 토정비결 같은 것을 맹신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지식을 초월하여 그 위에 계시는 하느님을 믿는다. 따라서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신앙은 본질적으로 ‘이성적 신뢰’이다.
즉, 이성과 지식이 밑받침되고 이를 통과한 신앙이지, 결코 허무맹랑한 신앙이 아니다. 그렇기에 인류 역사 속의 수많은 과학자와 석학들도 하느님을 고백하고 믿었던 것이다.
넷째로, 믿음은 지식의 영역에 속하는 한 역사적 사건, 곧 ‘나자렛 예수의 역사적 사건’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역사에 관한 지식이 정확하면 정확할수록 더 큰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 예수의 역사가 지닌 깊은 의미를 이해하고 깊게 인식한 사람이 계속된 믿음의 결단을 통해 굳은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 따라서 예수의 역사에 대한 참된 지식이 없으면 신앙은 그 완성에 이를 수 없으며, 그 신앙의 기초가 흔들릴 수 있다.
[가톨릭신문, 2026년 8월 2일, 김석태 베드로 신부(대전교구 도룡동본당 주임)] 0 5 0 |
| 번호 | 제목 | 등록일 | 작성자 |
|---|---|---|---|
| 2298 |
[신앙] 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 신앙은 지식을 요구한다 |
2026-08-05 | 주호식 |
| 2297 |
[기도] 묵주기도 학교: 은총의 비 |
2026-08-05 | 주호식 |
| 2296 |
[영성] 영성의 샘: 성모님과 함께 걷는 마음의 순례 (7) 공동체의 길 위에서 만나는 진 ... |
2026-08-05 | 주호식 |




게시판 운영원칙
Help Des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