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8월 13일 (목)
(녹)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레지오ㅣ성모신심

교본 다시 읽기: 마니피캇과 참행복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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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6-08-05 ㅣ No.1022

[교본 다시 읽기] ‘마니피캇’과 ‘참행복 선언’

 

 

신약 성경 루카 복음서 1장 46-55절의 ‘마리아의 노래’(the Canticle of Mary)는 마리아 신학의 백미와 핵심으로서, 우리 레지오 마리애 기도문의 ‘까떼나’(catena)를 구성한다. 이는 ‘마니피캇’이란 이름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이것은 그 라틴어 가사 첫째 구절 “Magnificat anima mea Dominum(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의 첫 단어를 딴 것이다. 이 내용은 기존 가치관이나 세상의 현실적 흐름과는 질적으로 다른 매우 참신한 메시지이다.

 

‘마니피캇’을 통해, 하느님의 구원은 이 세상의 힘 있는 권력자들이 아니라 가난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복음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는 낮고 미소한 사람들을 향해 이루어짐이 선포된다. 그래서 마리아가 동반하는 성자 예수님의 삶은 구유의 탄생으로부터 시작해 십자가상 죽음에 이르기까지 가난하고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하며 그들에게 특별한 공감과 사랑을 드러낸다.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선포의 첫 메시지는 ‘참행복 선언’(마태 5,3-12; 루카 6,20-26)인데, 사실 이는 ‘마니피캇’의 내용과 매우 긴밀히 연결되어 동일한 구원 메시지를 선포한다.

 

이처럼 어머니이신 마리아의 ‘마니피캇’ 찬가에 담긴 역동적 메시지를 다시 새로이 조명하는 나자렛 예수님의 ‘참행복 선언’은 마태오 복음서 5장과 루카 복음서 6장 두 곳에 나온다. 이 두 가지 내용을 비교하면 몇 가지 차이점이 나타난다.

 

첫째, 마태오 복음서의 9개 행복 선언(5,3-10 참조)과는 달리, 루카 복음서에서는 4개의 행복 선언(6,20-23 참조)과 더불어 4개의 불행 선언(6,24-26 참조)이 나온다. 

 

둘째,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는 그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5,1) 하고 나오기에 ‘산상 설교’이다. 하지만 루카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6,17)라고 증언하기에 ‘평지 설교’이다. 여기서 그 지형적 정확성보다 중요한 것은 메시지의 맥락과 의미이다. 구약 성경과의 연관성을 중요시하는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구약의 전통을 따라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로서의 ‘산’을 암시하기에, ‘산상 설교’란 곧 나자렛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구약에서부터 믿어온 동일한 하느님의 말씀이 여기서 결정적으로 선포됨을 강조한다. 

 

하지만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특별한 관심과 돌봄을 강조한 루카 복음서는 의도적으로 낮은 곳, 즉 평지를 택한다. 마치 ‘낮은 데로 임하소서’라는 지향을 암시하는 것과 같다. 가장 고귀하고 거룩한 하느님의 말씀이 이제 나자렛 예수님의 입을 통해 선포되어 가장 낮고 비천한 사람들에게 구원의 역동적인 메시지로 전달됨을 의미한다.

 

셋째, 마태오 복음서의 저자는 “하느님의 나라”라는 표현 대신 “하늘 나라”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여기서 ‘하늘’은, 거룩한 하느님의 이름을 직접 발설하지 않는 유다인의 언어 관습을 고려해 ‘하느님’ 대신에 우회적으로 사용된 용어다. 마태오 복음서는 주로 유다교에서 개종한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서 기록된 것이기에 ‘하늘 나라’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사실상 그 의미는 루카 복음서에 나오는 ‘하느님의 나라’와 동일한 것이다.

 

넷째, 루카 복음서에서는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6,20) 하는 데 비해서,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5,3) 하고 “마음이”라는 단어 하나를 추가한다. 사실, 원문 그대로를 직역하면 “영(靈)으로 가난한”이 되어야 한다. 원래 나자렛 예수님 말씀은 “가난한 사람들”이었는데, 그 의미를 분명히 드러내려고 “영으로”(in spirit)라는 단어 하나가 추가된 것이다.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란 온전한 마음과 정신으로 하느님의 뜻을 찾아 이웃과 나눌 줄 아는 겸허한 사람을 가리킨다. 이는 강한 자들이 누리는 권세의 지배와 재물의 소유로부터 유리되어 그 혜택을 누리지 못한 약자와 박탈당한 사람들을 가리키지만, 그들은 그러한 조건 자체 때문에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재물의 힘에 의한 구속과 지배를 받지 않고 하느님 앞에 자신을 낮추어 자비를 간구하기에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에 합당한 자 될 수 있다.

 

오직 하느님께만 마음을 두고 영원한 생명을 간절히 염원하는 사람, 내가 가난과 소외의 고통을 알기에 이웃의 아픔을 모른 척하지 않고 나눌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 “부서지고 꺾인 마음을 하느님, 당신께서는 업신여기지 않으시기에”(시편 51,19)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실 것이다. 그래서 장차 하느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 되리라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다.

 

여기서 “영”은 하느님께서 그 위에 작용하시는 인간의 영적인 중심을 가리킨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367항의 설명에 따르면, ‘영’이란 인간이 그 창조 때부터 자신의 초자연적 목표를 향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용어이다. 하느님의 영이시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인간 위에 작용하시어 그 인간의 영을 정화, 쇄신해 초월적 완성을 향해 인도하시며 성장하게 하신다. 그래서 에제키엘 예언서는 주 하느님의 영에 의해 변화되는 인간의 새로운 영을 강조한다. “나는 그들에게 다른 마음을 넣어 주고, 그들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에제 11,19)

 

따라서 “가난한 사람들”이란 하느님께 자신의 영을 온전히 맡겨드려 하느님의 인도와 역사하심에 따르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영으로 가난하기에(poor in spirit) 영으로 겸허하고(humble in spirit) 또 그만큼 영으로 자유롭기에(free in spirit), 하느님 영의 역사하심에 자신의 영을 온전히 맡겨드릴 수 있다. 이 가난함과 겸허함과 간절함의 상태를 가리켜, 루카 복음서 6장 21절에서는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과 “지금 우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서 5장에서는 이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6절)과 “슬퍼하는 사람들”(4절)이라고 설명한다. 그들은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마태 6,33) 사람들이기에 참으로 행복하다. 하느님의 나라가 그들에게 먼저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레지오 단원으로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정체, 고정되어 윤리적 의무를 수동적으로 반복하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의 사명과 임무는 레지오 총사령관이신 성모 마리아의 모범과 인도를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신비를 살아내기 위한 역동적인 노력 속에 거룩하게 됨으로써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는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하느님의 뜻과 계획을 찾아야 한다. 그러한 헌신 가운데에서, 마리아의 노래 ‘마니피캇’과 나자렛 예수님의 ‘참행복 선언’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고 좌표를 잡아주는 참된 길잡이로서 언제나 우리를 인도한다.

 

[성모님의 군단, 2026년 7월호, 박준양 세례자 요한 신부(가톨릭대학교 성의교정 교수, 전 서울 무염시태 Se. 영적 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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