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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가톨릭신문으로 보는 한국교회 100년42: 상계동 철거반 수녀 집단 구타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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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가톨릭신문으로 보는 한국교회 100년] (42) 상계동 철거반 수녀 집단 구타 사건 베일 빼앗고 인권 짓밟은 독재도, 정의의 요새는 무너뜨리지 못했다
“지난 11월 4일 오전 서울 상계5동 철거 지역에서 철거민 위로차 이곳을 방문했던 수녀 10여 명이 철거반으로부터 집단 구타를 당하고 이 중 2명의 수녀가 머릿수건 ‘베일’을 빼앗기고 머리카락을 뜯기는 등 일련의 불상사가 발생, 교회 내외에 큰 충격을 던져 주고 있다. 이와는 별도로 서울 신당동·암사동 지역에 잇달아 철거 문제가 일어나면서 해당 지역 본당이 대책 마련에 나서는 등 도시 철거 문제에 대한 교회의 관심이 전에 없이 크게 고조되고 있다.”(가톨릭신문 1986년 11월 16일자 7면)
전쟁터 같은 철거 현장
1986년 11월 4일 오전 11시경, 서울 상계5동 철거 지역은 전쟁터와 다름없었습니다. 강제 철거를 위해 철거반 1000여 명과 가옥주 100여 명이 진입했고, 전투경찰 250여 명이 이들을 호위했습니다. 주민 100여 명이 저지선을 구축했고, 양측이 격돌하면서 난투극이 벌어졌습니다.
폭력은 현장을 찾은 성직자와 수도자들에게까지 향했습니다. 철거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방문한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선교 수녀회 소속 수녀 10여 명이 현장을 빠져나가지 못했습니다. 철거반원들은 수녀들을 골목으로 몰고 집단 구타를 가했습니다.
폭력은 구타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2명의 수녀가 머릿수건을 빼앗겼고, 머리카락이 뽑혀 나갔습니다. 폭력은 성적, 인격적 모독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들은 “수녀들 옷 벗겨라”, “머릿수건을 빼앗아 수녀 화형식을 하자”는 등 폭언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같은 날, 현장에서는 빈민들과 동고동락하며 그들의 생존권을 옹호해 온 미국 출신의 예수회 정일우(요한) 신부도 표적이었습니다. 옥상으로 피신, 깨진 장독을 들고 필사적으로 저항해 가까스로 부상을 피했지만, 정 신부로 오인된 다른 한 신부가 구타를 당했습니다.
성직자와 수녀들이 대낮에, 그것도 공권력의 비호 아래 자행된 폭력에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은 충격과 분노를 불러왔습니다.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은 사태 종료 2시간 후인 오후 4시50분경,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벼랑 끝 빈민촌 철거민들
1980년대 대한민국은 독재 정권의 철권통치가 극에 달했고, 압축적 자본주의 성장이 불평등을 극대화하던 시기였습니다. 1960년대 이후 급격한 공업화 정책과 이농으로 수많은 농촌 인구가 대도시로 유입, 도시 빈곤층으로 전락했습니다. 이들은 도시 외곽에 ‘달동네’ 빈민촌을 형성했습니다.
1980년대에 접어들어 전두환 정권은 아시안게임(1986년)과 서울올림픽(1988년)을 유치했고, 이를 빌미로 도시 미관 개선과 불량 주택 정비에 나섰습니다. 이 과정에서 국가와 건설 자본, 투기 세력이 ‘합동재개발’ 방식을 도입해, 토지 및 가옥 소유주에게만 개발 이익을 분배하고, 영세 세입자와 무허가 정착민들을 폭력적으로 축출하는 정책을 강행했습니다.
곤궁한 삶이나마 그런대로 생존을 영위하던 철거민들은 벼랑 끝으로 내몰렸습니다. 강제 철거는 국가 공권력과 결탁한 개발 자본이 도시 빈민의 인권과 생존권을 철저히 유린하는 구조적 폭력이었습니다. 철거 현장에서는 용역 반원들의 물리적 폭력과 경찰의 묵인 속에서 수많은 인권 유린이 자행됐습니다.
철거민들의 집단적 저항
도시 빈민의 인권 침해가 본격화된 첫 사례는 1971년 경기도 광주대단지 철거민 강제 집단 이주 폭동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개신교계와는 달리, 천주교는 전통적 의미의 구호와 복지사업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지만 천주교회는 곧 이 문제가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집약된 현상임을 인식하고, 보다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게 됩니다.
가톨릭신문 1986년 10월 19일자 4면에는 “‘복지’ 차원에서 ‘참여’로 전환… ‘도시빈민사목’ 방향이 바뀌고 있다”라는 제하로 이러한 변화의 양상을 분석했습니다. 이 보도에 따르면, 1976년 서울 난곡동 빈민 지역에 공동체가 형성됐고, 특히 1977년 경기도 소래에 ‘복음자리’가 탄생함으로써 교회의 도시빈민사목이 본격화됐습니다.
1980년대 빈민들의 저항이 조직화된 사회 운동으로 발전하게 된 결정적인 무대는 1983년에 시작된 서울 목동 신시가지 개발 현장이었습니다. 목동 철거 투쟁에서 주민들은 공권력의 무자비한 폭력과 자본의 탐욕에 직면해 견고한 연대와 집단적인 저항을 선택했습니다.
교회는 목동 철거민들의 절박한 투쟁에 적극 화답하며 참여의 폭을 넓혔습니다. 1970년대 빈민사목은 소수 개인의 활동에 머물렀지만, 이제 지역교회 전체가 전면에 나섰습니다. 목동본당을 구심점으로, 서울 제7지구에 속한 본당 사제들이 연대해 철거 현장에서 미사를 집전하고 경찰의 폭력을 저지하는 방패막이가 되어 주었습니다. 일반 신자들 사이에서도 철거민들을 돕기 위한 성금 모금 운동이 일어나는 등 지구 차원의 조직적 연대가 이루어졌습니다.
들불처럼 번진 연대 투쟁
목동에서의 혹독한 경험과 연대 투쟁은 한국 도시빈민 운동이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토양이 됐습니다. 목동 철거민들이 틔운 연대 의식의 싹은 상계동 등 타 지역의 철거 투쟁으로 번져나갔습니다. 이는 특히 1986년 상계동 합동 재개발 철거 투쟁에 이르러 가장 치열하고 비극적인 양상을 띠며 폭발했습니다.
당시 정부와 서울시는 올림픽을 코앞에 두고, 국가의 위신을 떨어뜨리는 ‘불량 주택’ 밀집 지역으로만 여기던 상계동 일대에 전면적인 재개발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상계동 이외에도 신당동과 암사동을 포함한 서울 전역이 재개발의 광풍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상계동 철거 과정은 공권력의 비호 아래 자본이 자행하는 폭력의 극치를 보여주었습니다. 철거반원들은 쇠 파이프와 해머로 가옥을 부수고 가재도구를 길거리에 내동댕이쳤습니다. 하지만 굴삭기의 삽날이 삶의 터전을 무너뜨리는 가운데서도 주민들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폐허가 된 집터 위에 천막을 치고 토굴을 파서 겨울의 혹한을 견뎌냈고, 바리케이드를 쌓아 철거반의 침탈에 맨몸으로 맞서는 처절한 생존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남성들이 일터로 나간 사이, 마을을 지키고 바리케이드 뒤에서 투석전을 벌이며 끝까지 저항한 이들은 여성들과 어머니들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발생한 수녀 집단 구타 사건은, 물리적 폭력이 종교적 신성함과 인간의 기본적 존엄을 어떻게 철저하게 짓밟았는지를 고발하는 한국 철거 운동사의 가장 충격적인 사건 중 하나로 남아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이후에도 인권 유린이 난무하는 철거민 문제는 여전히 반복됐습니다. 그 연장선에서 2009년 용산 참사가 발생했습니다. 재개발에 반대하며 농성하던 철거민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화재가 발생해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사망했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재개발 갈등을 넘어, 국가 권력, 개발 정책, 시민권 문제를 드러낸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가톨릭신문, 2026년 3월 22일, 박영호 기자] 0 1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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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6년 11월 4일 서울 상계동 철거민들이 강제 철거에 항의하면서 농성을 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가톨릭신문 1986년 11월 16일자 7면. 가톨릭신문 자료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