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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마리아 트론카티 수녀 시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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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특집] 마리아 트론카티 수녀 시성 예! 주님, 제가 가겠습니다.
아마존의 어머니 마리아 트론카티 수녀의 시성식이 지난 10월 19일 바티칸에서 거행되었다. 모범적인 성덕의 삶을 산 성인을 알아본다.
마리아 트론카티 수녀 약력
1883년 2월 16일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주 코르테노골지에서 출생 1883년 2월 17일 유아세례 1905년 10월 15일 살레시오수녀회 입회 1908년 9월 8일 첫 서원 1914년 9월 8일 종신서원 1915~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중 바라체 야전병원 긴급 간호사로 활동 1919년~ 니차 몬페라토에서 간호 교사로 봉사 1922년 11월 에콰도르 과야킬 선교사로 파견 춘치 쿠엥카 마카스·수쿠아 등지에서 47년간 아마존 밀림 선교 활동 원주민과 백인 이주민의 어머니, 간호사 의사(외과, 마취과, 치과)로 봉사 1969년 8월 25일 수쿠아에서 비행기 추락사고로 선종 2012년 11월 24일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시복 2025년 10월 19일 교황 레오 14세에 의해 시성
1883년 한겨울, 마리아 트론카티는 아버지 자코모 트론카티와 어머니 마리아 로돈디 사이에서 14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탄생 이튿날, 아버지 자코모는 사랑하는 딸의 유아세례를 위해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품에 안고, 본당을 향해 50cm 이상의 눈이 쌓인 험한 길을 서둘러 갔다.
마을에 있는 집과 산마루에 지은 작은 오두막이 서 있는 자코모 트론카티 가족 목장에는 늘 염소가 뛰놀았다. 이 목장은 순박한 사육법으로 인해, 마을 사람들로부터 특히나 양질의 염소 치즈에 대한 평판이 아주 좋았다. 비록 글을 잘 읽고 쓸 줄은 몰랐으나 강인하고 지혜로운 어머니 로돈디는 자녀들에게 기초 교리를 가르쳤으며 무엇보다 하느님의 뜻을 전적으로 따르도록 훈육했다.
어린 시절의 신비로운 체험
열 살 소녀 시절, 목장에서 옥수수 죽을 끓이려 물을 걷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에 염소가 사라져 버렸다. 고원에 짙은 구름이 내려앉았다. 갑자기 날이 어둑해지고 깜깜해진 하늘 아래 마리아는 완전히 방향 감각을 잃고 말았다. 다음 날 새벽녘에 가족이 그녀를 발견하기까지 늑대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중에 관목 피신처에 몸을 웅크리고 누워 수호천사에게 염소를 찾아 달라고 밤새도록 기도를 바쳤다. 참으로 단순한 어린 소녀의 신앙이 명료히 빛나던 밤이 아니던가….
여덟 살, 목동들과 개울가에서 갑자기 소낙비를 만나던 때의 일화다. 젖은 옷을 말리려고 피운 불이 마리아의 양털 양말에 옮겨붙었다. 마침 어떤 사람이 이를 보고 달려와 옷을 찢어 불을 끄고서 오두막으로 피신시켰다. 그는 목동 가운데 한 아이에게 서둘러 기름을 가져오라고 했다. 화상 입은 마리아의 팔다리에 그 기름을 발라주었지만 시커멓게 타서 조막손이 되어 버린 두 손은 절망적이었다. 그런데 연신 기름을 바르며 애쓰던 몇 시간 후, 두 손이 펴지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훗날, 종아리에서 발끝까지 큰 흉터만 남았을 뿐 두 손은 흉터조차 남지 않았다. 길 가던 그는 누구였을까. 그녀가 처음으로 체험한 기적이었으리라.
살레시오가족지를 통해 키운 성소
초등학교 5학년 무렵, 학교에서 선생님이 읽어 보라고 건네준 살레시오가족지를 매달 접하며 그녀의 성소가 싹텄다. 교회와 살레시오회의 사목 활동을 홍보하고 복음 정신을 전파하려는 목적과 선교적 특징을 지닌 이 회보는 1877년부터 존재했다. 살레시오가족지는 마리아의 영혼을 흔들어 깨우고 가슴을 뛰게 했다.
스무 살이 되던 무렵. 그녀는 ‘마리아의 딸 회(신심 단체)’에 가입하여 선교 지평을 지닌 수도회에서 주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열망으로 수도자의 삶을 꿈꾸었다. 이리하여 살레시오 수녀로서 선교사가 되리라는 뜻을 품고 돈 보스코의 첫 후계자 미켈레 루아 총장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로 수도회의 문을 두드렸다. 1908년에 첫 서원을 발한 마리아 수녀는 로시냐노 몬페라토의 작은 센터로 파견되어 주방일과 수예 교실을 운영하면서 오라토리오와 유치원에서 열정을 쏟아 일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직후, 마리아 수녀는 긴급 훈련 간호사로서 바라체에서 의료 보조 과정을 수료하고 적십자 군 병원에서 활약했다. 전쟁의 화염 속에 죽음을 넘나들며 실려 온 부상병들의 험한 상처를 치료하던 연민과 모성적 체험은 훗날 에콰도르 아마존 선교 활동의 근간이 되었다. 그해 유월에 그녀는 바라체의 대홍수로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급작스레 집안으로 들이닥친 사나운 물길에서 가까스로 구조된 그녀는 생명을 더해 주신 주님께 선교지로 떠날 것을 약속했다.
언제나 “예!”라고 응답한 사람
마리아 수녀의 예수님을 향한 열렬한 사랑과 모범적인 성덕은 1922년 아마존 밀림 지역에 선교의 첫발을 딛던 순간부터 마지막 숨을 다할 때까지 한결같이 빛났다. 언제나 새벽 4시에 ‘십자가의 길’ 기도로 하루를 열었고, 한낮에는 손에 묵주를 들고 병자들과 함께하는 순간만이 아니라 어디서든 잠시 쉴 때마다 기도를 잊지 않았다.
선교사로서 마리아 수녀의 하느님 사랑에 맞닿은 인류학적 관점과 그 방향성은 결코 자신이 지닌 문화를 원주민에게 주입하고 설득하려는 토착화(Inculturation)의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 오로지 토착민 본래의 문화를 존중하고 수용하려는 문화적 동화(Acculturation)의 자세로 조심스럽고도 섬세하게 그들 사이에 현존했다.
먼저, 젊은 여성들이 글을 읽고 쓸 줄 알도록 가르쳤다. 문맹 퇴치를 위한 대장정의 꿈이 그녀의 강인한 인내와 지극한 정성으로 아마존 밀림 지대의 문명화를 가져왔다. 무엇보다 교리 교육으로써 원주민들이 차츰 하느님을 알게 되도록 도왔다. 그들이 기도와 성사 생활을 영위하고, 청년들이 혼배성사를 통해 새로운 그리스도인 가정을 이루도록 극진히 돌보았다.
사랑하는 어머니, 마리아 트론카티 수녀
1963년, ‘비오 12세 병원’에서 함께 일하던 아르투로 바로스 박사가 마리아 수녀를 ‘의료 행위 남발’이라는 이유로 고발했다. 이 사건의 여파는 병원을 폐쇄할 지경에 이를 정도로 강력했다. 다행히 슈트카 신부의 변호와 반대 증언으로 평화가 찾아오긴 했으나, 뒤이어 온 경제적 이해관계는 복지적 임무가 마비되는 어려운 현실로 봉착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약값을 지불하기 어려운 가난한 이들을 위한 중재에 언제나 즉각적으로 개입하곤 했다. 마리아 수녀는 모든 이를 사랑하고 모든 이의 사랑을 받았다.
에콰도르에 도착하면서부터 춘치, 마카스, 과야킬, 세비야 등 어디서든 대부분 공동체 책임직을 맡게 되었던 마리아 수녀는 각 개인의 유약성에 대해서만큼은 늘 관용을 베풀었다. 반면, 매사에 있어서는 명확한 의도와 강직함, 섬세한 주의력으로 공동체를 이끌었다. 노년에도 변함없이 사람들 사이에서 신뢰와 권위를 잃지 않았으며 뛰어난 선구자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그녀의 모성적 사랑은 단지 원주민만을 위해 드러나지 않았다. 현지에서 함께하는 살레시오 형제들과 수도자들, 젊은이들에게도 한결같았다. 모두의 건강을 섬세히 보살피는 지극한 정성과 관심, 기도와 신뢰로 우정을 쌓으며 누구에게나 영적인 지주요 온화하고 겸손한 어머니로 현존했다.
1969년 8월 15일, 예기치 못한 비행기 추락 사고가 발생했다. 마리아 수녀는 블랑카 수녀, 이멜다 수녀와 함께 피정에 참석하기 위해 쿠엥카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비행기가 이륙한 지 몇 분도 안 되어 공항 500m 전방의 사탕수수밭으로 추락해 버렸다. 불덩이처럼 달아오른 기체 밖으로 조종사들이 뛰어내렸다. 의식을 잃은 이멜다 수녀와 척추가 완전히 부러진 블랑카 수녀는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그러나 풀 위에 고개를 숙인 채 누워 있는 마리아 수녀의 영웅적 수도 삶의 숨결은 그대로 멈추어 있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39 참조; 요한 15,12-13 참조)
[살레시오 가족, 2025년 11월호(195호), 최경숙 수녀(살레시오수녀회)] 0 12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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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브레시아 코르테노골지(Corteno Goigi)의 소박한 농가에서 나고 자란 마리아 트론카티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일손을 도와 염소를 돌보며 집안일과 밭일을 거들었다. 이렇게 그녀는 노동의 신성한 가치를 체득해 가는 가운데 생명의 소중함을 인식하며 성장해 갔다.
1954년 4월 25일, 드디어 ‘아부엘리타’(사랑하는 할머니)가 된 칠순의 ‘마드레시타’(사랑하는 어머니라는 의미로 늘 원주민들로부터 불리던 호칭)의 30여 년 꿈이 실제로 이루어졌다. 밀림의 수쿠아 진료소가 ‘비오 12세 병원’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당시 마리아 수녀는 쇠약해지고 아픈 데가 많았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뱀독이 올라 사경을 헤매며 황급히 병원을 찾는 환자를 비롯하여 어느 여인의 무릎에 생긴 악성 종양 덩어리를 적출하는 등, 그 어린 시절 사고로 검게 타 작게 오그라든 ‘조막손’은 죽음을 넘나드는 수많은 환자의 생명을 구해냈다. 특히, 치료를 받으러 올 수 없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그녀는 정글 속 온갖 위험을 감수하며 지속적으로 순방 진료를 감행했다. 장시간 도보 이동으로 마리아 수녀의 다리는 퉁퉁 부어오르기 일쑤였으나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마리아 수녀는 늘 “예”의 여인이었다. 마을에 천연두가 심하게 퍼지던 때에도 전염의 위험을 무릅쓰고, 즉시 “예! 주님, 제가 가겠습니다.”라고 응답하며 전적으로 봉사의 길에 나섰다.
마리아 수녀의 선종 이후, 악성 말라리아 원충이 뇌에 들어 용혈 현상으로 혼수상태에 빠졌던 에콰도르의 욜란다 여인의 완치를 비롯하여 지금까지 그녀의 전구로 일어난 치유의 기적과 관련하여 수많은 일화가 계속 소개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