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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가톨릭신문으로 보는 한국교회 100년 (28) 교회의 사회 참여에 대한 이견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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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가톨릭신문으로 보는 한국교회 100년] (28) 교회의 사회 참여에 대한 이견들 사회 참여에 비난 시선… 불의 앞에 움츠러드는 한계 드러내
1974년 7월 6일, 원주교구장 지학순(다니엘) 주교가 박정희 정권에 의해 전격 구속되고, 같은 해 8월 12일 재판에서 징역 15년의 중형을 받았습니다. 초유의 고위 성직자 구속 사태에 충격을 받은 전국의 신자들은 지 주교 석방을 요구하는 시국 기도회를 잇달아 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천주교 사제들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정의구현사제단)’을 결성했습니다.
정의구현사제단은 11월 20일까지 세 차례의 시국선언을 발표해 독재정권에 맞선 투쟁을 천명했고, 이후 한국 민주화 운동의 핵심 세력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사제단은 불의에 맞서 인간의 존엄을 수호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이루는 것이 교회의 의무이자 권리임을 분명히 하며, 사회 구조의 불의에 대한 고발과 저항, 변혁을 위한 행동이 복음 정신에 기초한 시대적 요청임을 천명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그해 12월 18일 성탄 메시지에서 지학순 주교 구속 사건은 우리 교회에 정교분리와 교회·사회 관계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추기경은 “우리는 사람이 정치에 질식해 죽는 한이 있더라도 교회는 침묵을 지켜야 한다고 보지 않는다”고 단언했습니다.
교회의 사회 참여를 둘러싼 부정적 의견들
그러나 교회가 불의한 사회 구조에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고 구체적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에 모두가 동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회 참여에 적극적인 선교사들을 비판하는 원로 사제들이 있었고, 정의구현사제단의 활동에 반대하는 평신도들의 집단적 움직임도 확인됩니다.
특히 ‘한국천주교 정의신자단’이라는 정체가 불명확한 단체가 발행한 인쇄물 ‘횃불’이 교회 안팎에 배포된 사례가 나타났습니다. 4쪽 분량의 이 인쇄물은 인권 회복을 위한 기도회를 ‘위장된 정치집회’로 규정하며, 정의구현사제단을 비난했습니다. 발행·편집인이 본당 회장과 군종후원회 부회장을 지낸 꾸르실리스타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시각을 가진 신자들이 교회 안에 상당수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사회 참여를 둘러싼 이견은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독재가 더욱 강화되고 교회의 민주화 활동이 한층 격화되던 1978년에는, 정의구현사제단의 움직임을 제지해야 한다는 원로 사제들의 호소문이 발표되기도 했습니다. 그해 7월 문정현 신부와 함세웅 신부가 구속되고, ‘오원춘 사건’에 대한 교회의 강한 항의가 막 시작되던 시점이었습니다.
‘교회 현실을 우려하는 연장사제 49명’은 〈주교단에 드리는 호소문〉에서 시국 문제를 바라보는 주교들의 불일치를 우려하며, 교회의 사회 참여에 관한 명확한 지침을 요구했습니다. 아울러 사제들의 사회참여 활동을 비판하면서, 성직자들은 평신도 교육이라는 ‘제2선’에 머물도록 조치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른바 ‘구국사제단’으로 불린 이들의 요구는, 비인준 단체인 정의구현사제단의 활동을 교도권을 통해 제지하려는 뜻을 담고 있었다고 판단됩니다.
주교회의와 정의구현사제단
지학순 주교 구속 이후 주교회의의 대응을 두고도 비판이 적지 않았습니다. 교회 전체가 흔들리는 상황 속에서도 주교회의가 고위 성직자 구속 사건에 대한 입장을 즉각 발표하지 않아 침묵으로 일관했다는 지적이었습니다.
전국 평신도사도직협의회는 지 주교 구속 두 달 뒤인 9월 정기총회를 마치고, 주교회의 의장에게 보낸 건의문에서 주교단의 일치된 입장 표명을 요구하며, 불의에 맞서 정의를 지킬 수 있도록 교회 공동체에 명확한 지침을 내려달라고 촉구했습니다. 정의구현사제단 역시 결성 논의 과정에서 같은 요청을 한 바 있습니다.
주교회의가 공식 메시지를 통해 지 주교 사건에 대한 입장을 밝힌 것은 1·2심 판결이 모두 종결된 이후였습니다. 10월 18일 가을 정기총회에서 주교단은 비로소 지 주교 사태에 대한 ‘심각한 유감과 우려’를 표하며, “교회의 사회 참여에 선구적 역할을 한 지 주교께 깊은 존경과 양심적 지지를 보낸다”고 밝혔습니다. 지 주교가 구속된 지 3개월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1975년 2월 28일, 주교회의는 그동안의 행동을 ‘반성’하고 교회 내부의 ‘일치를 도모’하며 외부의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사회 참여와 관련한 행동 지침을 제시하는 메시지를 발표했습니다. 메시지는 교회가 정치 질서에 대해 윤리적 판단을 내려야 하지만, “언제나 모든 정치 세력에서 초연한 입장에 서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에 따라 정의구현사제단은 그간의 활동을 ‘반성’하고, ‘분열을 야기할 우려’를 이유로 공식 활동을 자제해야 했습니다. 이후 주교단이 책임지고 정부와의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섰고, 사제단의 활동은 중단됐습니다.
현실 안주적인 가톨릭시보의 보도들
안타깝게도 가톨릭시보 역시 교회의 사회 참여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1971년 12월 12일자 가톨릭시보는 지학순 주교의 성탄 교서 발표를 전했습니다.
교서는 당시 한국 사회의 불평등·억압·빈곤과 소수 특권층의 부정부패를 강하게 비판하고, “교회의 사회적 책임과 불의에 대한 투쟁”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주인 12월 19일자에서 이 교서를 두고, 교회 문헌이라기보다 정치적 요소가 강한 ‘격문’에 가깝고, 지나치게 구체적 사안을 다룸으로써 비현실적이며, “정부가 종교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시각은 ‘과격한 주장’이라고 평가했습니다.
1975년 5월 18일자 사설에서는 국가와 교회 간 견해차의 대표적 사례로 정의구현사제단과 정부의 갈등을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서술했습니다.
“정의구현사제단은 국가의 안보보다 인권 유린과 부정부패, 불신 사조의 규탄에 열을 올렸고, 정부는 국가 안보를 인권이나 부정부패보다 앞세웠다. … 주교회의 상임위원회가 정부와의 대화를 통한 시정을 가로맡고 나섰다는 것은 불행 중 다행한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1970년대, 한국교회는 고위 성직자에 대한 정치 탄압과 이에 대한 저항의 과정을 거치며 인권 수호와 사회정의 실현, 민주화의 긴 여정에 직접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정신적 배경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있습니다.
그러나 오랜 박해와 일제강점기의 경험 속에서 자기 보호적 태도가 강했던 한국교회 안에는 여전히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과 행동에 주저하는 이들이 존재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1980년대의 비극적 사건들과 험난한 민주화 투쟁을 거치며 근본적인 도전을 받게 됩니다.
[가톨릭신문, 2025년 11월 23일, 박영호 기자] 0 4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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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 지학순 주교 구속 사건을 계기로 한국 천주교회는 인권 수호와 사회 정의 실현을 위한 투쟁에 직접 투신하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교회 안에는 사회 참여에 대해 거부감을 갖는 이들이 없지 않았다. 정의구현사제단이 1999년 9월 7일 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대성당 성모동산에서 국가보안법 폐지 단식 기도회를 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가톨릭시보 1975년 5월 18일자 2면 사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