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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진에 담긴 고요한 아침의 나라22: 안중근 토마스 의사 가족과 빌렘 신부 그리고 청계동성당 (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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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담긴 고요한 아침의 나라] (22) 안중근 토마스 의사 가족과 빌렘 신부 그리고 청계동성당 (하) 빌렘 신부, 안중근 의사의 당당하고 숭고한 죽음 ‘찬탄’
- <사진 1> 노르베르트 베버, ‘빌렘 신부와 청계동 교우들’, 유리건판, 1911년 5월,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대한민국 만세!” 외치고 순국한 안중근 의사
안중근(토마스) 의사 집안은 3대에 걸쳐 20여 명이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그들은 모두 가톨릭 교우였다. 모두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본당 교우였던 이들을 신앙으로 이끈 이가 바로 빌렘 신부였다.
빌렘 신부는 한국에 진출한 첫 번째 남자 수도회인 독일 상트 오틸리엔연합회의 선교 수도승들과도 남다른 교분을 맺었다. 독일 선교사들이 빌렘 신부의 성당에 몇 달간 머물면서 그에게 한국어를 배웠다. 프랑스 선교사 가운데 독일어를 할 줄 아는 이가 빌렘 신부뿐이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가 1911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플라치도 포겔 원장 신부와 함께 그해 5월 빌렘 신부가 사목하고 있는 황해도 청계동성당을 방문했다.
우선 안 의사 순국 이후 독일 선교 잡지 「가톨릭 선교」에 실린 빌렘 신부와 안중근에 관한 글을 잠시 살펴보자. 이 글에서 빌렘은 안중근 의사의 숭고한 죽음을 찬탄(讚歎)한다.
“안중근 토마스는 처형장으로 끌려와서 기도할 시간을 청했고, 10분간 무릎을 꿇고는 용감하게 일어나 제 발로 교수대에 섰다. 그리고는 ‘대한민국 만세!’라고 크게 외치고 순순히 머리를 올가미에 집어넣었다. 주님 부활 대축일의 기쁨을 누리던 청계동에 슬픈 전보가 도착했다. ‘사형 집행 완료’. 기쁜 소식을 알렸던 종은 이제 그 불행한 사람의 애처로운 죽음을 알리고 있었다. 교우들이 흐느껴 울면서 작은 성당에 모였다. 가엾은 사람을 위한 뜨거운 기도가 하늘로 올라갔다.”
빌렘 신부는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와의 불화로 1914년 한국을 떠난 뒤 파리에서 한국인 망명자들과 접촉할 때에도 베네딕도회 수도승들과 계속 연락했다. 그는 1919년 안봉근(요한)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다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해 유럽으로 온 이미륵을 상트 오틸리엔연합회 뮌스터슈바르작수도원으로 피신시켰다. 안봉근은 안중근 의사의 사촌 동생으로 빌렘 신부의 복사였다.
빌렘 신부는 안중근 일가뿐 아니라 청계동 교우들과도 끈끈한 연을 맺고 있었다. 그는 군수와 포졸들의 폭정에 맞서 늘 청계동 교우 편에 섰다. 교우들을 부당하게 잡아가거나, 재산을 약탈해 가면 빌렘 신부가 앞장서서 해주와 안악 군수를 찾아가 석방과 재산 반환, 그리고 배상금을 요구했다. 배상금을 받으면 빌렘 신부는 현장에서 한 푼도 남김없이 공소에 모인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이렇게 빌렘 신부는 청계동 교우들과 주민들에게 무한정 사랑과 도움을 베풀었다. 그는 정의로웠고 사심이 없었다. 빌렘 신부의 이러한 모습에 입교자들이 더 늘었다.
- <사진 2> 노르베르트 베버, ‘안씨 가족’, 유리건판, 1911년 5월,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늦은 밤까지 베버 총아빠스 기다린 교우들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1911년 5월 14일부터 26일까지 청계동성당에서 묵었다. 제법 산이 깊어서인지 청계동 가는 길에 호랑이 함정도 보고, 주막에 들러 막걸리 몇 사발도 했다. 어처구니없게도 베버 총아빠스 일행이 쉬는 동안 짐꾼들이 미사주 한 병을 홀랑 다 마셔버렸다. 총아빠스 일행은 밤 11시가 넘어서야 청계동성당에 도착할 수 있었다. 깊은 밤에도 교우들은 잠들지 않고 성당과 선교본부, 앞마당과 울타리, 담장에 초롱을 밝혀 손님을 환대했다.
총아빠스 일행이 성당 입구로 들어서자 종을 울리고 폭죽을 터뜨렸다. “다들 몰려나와 밤늦도록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주 멀리서 온 사람도 적지 않았다. 성당은 금방 가득 찼다. 우리는 성당으로 들어가 이 멋진 여정을 무사히 마친 데 대해 짧은 감사기도를 올렸다. 피곤한 몸으로 밤참을 먹으려는데, 아이들은 저녁도 거른 채 좋아라고 우리 곁을 떠날 생각을 않는 것이었다. 밤도 깊었는데 얼른 집에 가서 밥이나 한술 뜨고 자라고 억지로 쫓아내야 할 판이었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385쪽)
베버 총아빠스는 청계동성당을 배경으로 빌렘 신부와 교우들을 촬영했다.<사진 1> 기백과 결기가 온몸에서 뿜어져 나온다. 남자든 여자든 노인이든 아이든 눈이 살아 있다. 꼿꼿하고 단아한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베버 총아빠스는 이들을 자긍심 강하고 유쾌하며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기록했다. 또 놀라울 정도로 신심이 깊다고 했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황해도 지역에서 명망이 자자한 빌렘 신부의 보호 아래 들고 싶은 이들도 많았지만, 그보다 거룩한 세례와 그리스도교를 진지하게 갈망하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고 베버 총아빠스는 회고했다.
베버 총아빠스 일행은 청계동에 도착한 다음 날인 15일 맨 먼저 안중근 일가 집을 방문했다. 빌렘 신부는 집 주인을 안 진사 가족이라고 소개했다. 총아빠스는 그의 가족을 마당에서 또 안방에서 촬영했다.<사진 2, 안방 모습은 2025년 3월 16일 자 1801호 참조> 총아빠스 일행이 이 집을 찾은 이유는 아마도 안중근 의사에 대해 간접적으로나마 존경을 표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그 집안은 청계동의 내력과 밀접히 얽혀 있을 뿐 아니라 최근 한국 역사에서도 중요한 몫을 했다. (⋯) 청계동 내력에 스민 낱낱의 사건들은 한국 최근세사의 한 단면을 여실히 보여준다. 방만한 내정과 부실한 경제에 신음하는 백성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388~389쪽)
안 진사의 가족이라는 것으로 보아 안중근 의사의 삼촌, 곧 진사였던 아버지 안태훈의 형제 가족인 듯하다. 다복한 가정이다. 주인은 손주를 넷이나 뒀다. 아들인 듯한 장정은 영락없이 안중근 의사의 친척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이목구비가 닮았다.
- <사진 3> 노르베르트 베버, ‘부군나무와 빌렘 신부 그리고 아이들’, 유리건판, 1911년 5월,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청계동 지키고 서 있는 부군나무에 매료
베버 총아빠스는 청계동 ‘부군나무’에 매료됐다. 부군나무는 마을 수호신으로 모신 당산나무를 말한다. “이 나무는 옛날 암울한 이교 시대부터 박해 시대를 거쳐 지금의 복된 그리스도교 시대에 이르기까지 청계동을 지키고 서 있다. 휘늘어진 가지가 작은 연못과 운치 있는 나무 기둥 정자 위로 그늘을 드리웠다. 이 나무는 한때 신령한 나무였다. 과거 이 나무가 마을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지금과 비교도 되지 않았다. 지금도 고즈넉한 모습으로 마을의 자랑거리가 되고 있다. 이교 시대에는 해마다 두 번, 봄가을로 이 나무에 제사를 지냈다. 우리를 안내한 남자들 가운데 이 제사에 참여한 이가 여럿이었다. 그들은 세 번 절하면서 술과 고기를 제물로 바쳤다고 말했다. 나는 이 나무에 끌렸다. 매번 올 때마다, 늙은 잿빛 가지들이 막 돋아나 봄날을 즐기는 새싹들에 청계동 사람들이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이 나무 밑에서 의논하고 공유했던 사연들을 은밀하게 들려주는 것 같았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288~389쪽)
베버 총아빠스는 부군나무를 배경으로 빌렘 신부와 아이들을 사진에 담았다.<사진 3> 청계동 주민들이 마을의 안녕과 집안의 화평, 개인의 복을 위해 이 나무를 찾았지만 이제 그 나무 그늘에서 가톨릭 사제와 세례받은 주민들이 쉼과 놀이를 즐긴다.
[가톨릭평화신문, 2025년 3월 23일, 리길재 선임기자] 0 12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