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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사목] 신앙공부의 기쁨과 즐거움: 몸과 마음의 사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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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공부의 기쁨과 즐거움] 몸과 마음의 사랑
부부의 사랑은 몸과 마음의 사랑입니다. 마음의 소통과 몸의 친교가 함께 이루어지는 사랑입니다. 부부의 사랑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사랑이 아닙니다. 부부 사이에는 마음의 소통과 대화, 몸의 결합과 친밀성 둘 다 필요로 합니다. 영과 육이라는 이원론적 사유와 경향이 강했던 시기에는 몸의 영역을 불온시하기도 했습니다. 사랑에서 몸이 차지하는 부분을 경시하고 천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압니다. 몸과 마음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인간 존재의 전체성 안에서 몸과 마음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동정(virginity)과 독신(celibacy)에 대한 올바른 이해
영과 육에 대한 이원론적 구분은 몸의 영역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낳았습니다. 동정성에 대한 왜곡된 집착은 극단적인 금욕주의를 우상시하는 경향을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부활 때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마태 22,30)라는, “하늘 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다.”(마태 19,12)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혼인보다 동정을 더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혼인 문제에 대한 사도 바오로의 견해(1코린 7,1-40)를 근거 삼아 혼인보다 독신을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교회는 하느님을 향한 길에서 동정과 금욕주의가 갖는 건강한 측면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동정과 금욕주의가 혼인보다 우월한 것이라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동정과 혼인은 비교의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는 그저 동정성이 갖는 복음적 의미를 강조했을 뿐입니다. “동정성은 사랑의 한 형태입니다. 동정성은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의 중요성과 그 선포에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 주는 표징입니다”(‘사랑의 기쁨’, 158항). “동정성은 상대방을 소유할 필요 없는 사랑의 상징적 가치를 담고 있어서 하늘 나라의 자유를 반영합니다”(161항).
사도 바오로의 서간들을 보면, 분명 사도 바오로는 동정성을 권장하였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오로의 이러한 권고를 단순히 혼인은 열등하고 동정과 독신이 우월하다는 주장의 근거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몸에 대한 깊은 통찰을 통해 일종의 ‘몸의 신학’이라는 영역을 발전시킨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역시 사도 바오로의 권고를 그렇게 단순하게 해석하지 않았습니다(159항 참조).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의 재림이 곧 이루어질 것이라 기대했기 때문에 모두가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집중하기를 바랐을 뿐입니다. 또한 사도 바오로는 “동정성의 권장이 그리스도의 명령이 아니라 개인적인 선택이나 바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였습니다”(159항).
거듭 말하지만, 혼인과 동정(또는 독신)은 대립과 우열의 문제가 아닙니다. “동정과 혼인은 사랑의 서로 다른 방식”(161항)이고, 하느님을 향한 서로 다른 길일 뿐이며, 상호 보완을 통해 더욱 완덕의 길에 가까이 도달할 수 있습니다(160항 참조). 동정과 혼인은 둘 다 그리스도론적 표징입니다. “동정성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표징입니다. 반면, 혼인은 지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을 위한 ‘역사적’ 표징, 곧 우리와 하나 될 것을 선택하시어 피 흘리시기까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으신 지상 그리스도의 표징입니다”(161항).
동정과 독신의 진정한 의미는 정절 그 자체가 아니라, “복음적 권고를 바탕으로 하는 삶 전체와 관련된 것입니다”(160항). 동정과 독신은 그 자체로 우월하고 특별한 것이 아니라, 복음적 헌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복음적 헌신이 없는 동정과 독신은 오히려 많은 위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독신은 안일한 고독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독신은 자기 마음대로 활동하고, 장소와 일과 선택을 바꾸며, 자신의 돈을 마음대로 쓰고, 기분에 따라 여러 사람들과 만나는 자유를 줍니다”(162항). 동정과 독신은 오직 복음적 헌신과 봉사 안에서만 그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변모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영화 ‘봄날은 간다’에 나오는 배우 유지태의 유명한 대사입니다. 사랑은 시간 속에서 변합니다. 몸도 변하고 마음도 변하고 감정도 변합니다. “우리가 평생을 살아가면서 서로 한결같은 감정을 지니게 된다고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163항). 또한 오늘의 세상은 수명의 연장으로 인해 혼인이라는 “친밀하며 배타적인 관계”를 60년 가까이 살아내야 하는 시대입니다. “자신의 배우자에게 더 이상 강렬한 성적 욕망으로 끌리지 않는”(163항) 경우도 많고, “부정의 유혹과 배우자를 떠나라고 부추기는 유혹이 많은”(162항) 시대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혼인의 사랑을 유지하고 혼인 관계를 성숙시키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즉, “상대방의 육체만이 아니라 고유한 개성을 포함한 그 사람 전체를 사랑하는”(164항) 일과 “자기의 삶과 역사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모든 것을 함께하는 ‘동반자’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163항) 일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혼인의 사랑은 시간 속에서 다른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사실 사랑은 서로 다른 차원을 가진 하나의 실재입니다. 때로는 이 차원이, 또 때로는 다른 차원이 더 명확히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164항). 혼인의 사랑은 젊은 날에는 몸과 격정의 사랑으로, 늙은 날에는 마음과 은은한 사랑으로 표현될 수도 있습니다. 혼인 유대의 성숙함은 사랑의 모든 단계와 모든 새로운 과정에 자연스럽게 적응하는 일에 달려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혼인 유대는 새로운 양식을 찾아내고 이 유대를 새롭게 다지려는 결심을 필요로 합니다. 이는 날마다 함께 노력하는 길입니다”(164항).
혼인의 사랑은 이성과 감정보다는 의지적 결심을 통해 완성을 향해 나아갑니다. “부부가 맹세하는 사랑은 모든 감정, 감성, 마음의 상태를 포함하고 있지만, 이 모든 것을 초월합니다. 이는 한평생 지속되는 마음의 결단이 따르는 좀 더 심오한 의지입니다. 해소되지 않는 갈등과 혼란스러운 감정의 상황에서조차, 서로 사랑하고 서로에게 속하며 삶을 함께 나누고 끊임없이 사랑하고 용서하겠다는 결심입니다”(163항). 진정한 사랑은 어떤 환경과 변화 속에서도 사랑하겠다는 다짐과 결심 속에서 완성됩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의지입니다.
혼인의 사랑은 의지와 노력 속에서 유지되고 성숙됩니다. 이성적이고 논리적 생각만으로 사랑이 유지될 수는 없습니다. 사랑은 감정의 변덕스러움을 견뎌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는 것이 사랑의 본질”(162항)입니다. 사랑은 사랑하려는 의지입니다. 사랑은 사랑하려는 의지와 노력 속에서 유지되고 성장합니다. 사랑의 지속과 성숙에는 의지가 이성과 감정보다 더 큰 역할을 수행합니다.
하지만 계속 사랑하겠다는 의지와 다짐과 결심 역시 우리의 힘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이성과 감정보다는 의지가 힘이 더 세지만, 의지 역시 인간의 조건 속에 존재합니다. 우리의 의지와 노력 역시 한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성령께 청원하지 않으면, 날마다 은총을 탄원하지 않으면, 성령의 초자연적인 힘을 찾지 않으면, 이 모든 것이 불가능합니다”(164항). 혼인의 사랑은 오직 신앙과 기도 속에서 완성될 수 있습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3년 12월호, 정희완 사도요한 신부(안동교구)] 0 72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