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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부활 제3주간 목요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세계교회ㅣ기타

사유하는 커피46: 색과 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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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4-13 ㅣ No.651

[사유하는 커피] (46) 색과 본성


흰색 부활 제의의 의미는

 

 

보라색에서 흰색으로 바뀌는 풍경을 떠올려본다. 색채가 사라지는 아쉬움보다 싱그런 아침을 맞이하는 정결한 기쁨이 차오른다. 브룬펠지아 꽃은 보라에서 하양으로 변모하며 자신의 향기를 완성시킨다. 재스민향이 어찌나 선명하고 풍성한지 화려한 꽃들의 천국인 아마존 열대 우림에서도 한동안 꽃 앞에 머물게 만든다.

 

16세기 독일의 식물학자 브룬펠스가 유럽인으로서 처음 이 꽃을 발견했을 때 ‘아마존의 재스민’이라고 경탄했을 법하다. 브룬펠지아의 꽃, 뿌리, 잎, 줄기 등 모든 부위가 해독, 관절염, 기관지염, 열병 및 결핵 치료 등에 유익하다. 아마존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구해준 이 꽃에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뜻하는 ‘마나카(manaca)’라는 이름을 붙여 보답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는 브룬펠지아에게서 그리스도의 모습이 비친다. 사순절 동안 보라색 제의를 입던 사제들이 부활을 맞아 흰색으로 갈아입는다. 이런 색의 변화는 브룬펠지아처럼 ‘완성’을 은유한다.

 

보라색을 뜻하는 퍼플(Purple)은 뮤렉스(Murex)라는 조개를 칭하는 라틴어 퍼퓨라(Purpura)에서 유래했다. 고대 서양에서 퍼플은 최고의 지위를 상징했다. 보라색 직물 1㎡를 지으려면 퍼퓨라 2만 개가 필요했기 때문에 귀족 중에서도 손으로 꼽히는 자들만이 보라색 옷을 입을 수 있었다. 이런 사연 때문에 중세에는 고위 성직자를 상징하는 색깔이 됐다. “레이즈드 투 더 퍼플(Raised to the purple)”이 “~추기경이 되다”는 관용구가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보라색은 신앙심을 나타내기도 한다. ‘색채의 예술’을 집필한 요하네스 이텐은 “보라색은 사랑을 의미하는 빨강과 신뢰를 나타내는 파랑이 합쳐진 색으로 신앙심을 표현한다”고 했다.

 

보라색이 사순절과 연결되는 것은 ‘죽음(또는 왕가의 상복)’도 상징하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는 왕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보라색 눈물(purple tears)’에 비유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오디세이(Odyssey) 공연에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오디세우스를 표현할 때 보라색 옷을 입혔다.

 

죽음에서 극적인 반전을 이끌어낸 부활을 흰색이 상징하는 사연은 무엇일까? 흰색 상복은 단지 슬픔을 표현하는 게 아니다. 가장 밝은색으로 죽은 자의 영혼을 좋은 곳으로 인도하려는 주술적 의미가 들어 있다. 왕을 태양의 아들과 동일시한 이집트인들은 흰색을 숭배했고, 북방 기마 민족들은 흰색 말을 신의 축복이라 반겼다. 일본인들은 흰색 고양이를 복을 부르는 상서로운 존재로 받아들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빛(흰색)이 어둠(검은색)을 달래며 세상의 모든 색이 만들어진다고 직관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흰색을 ‘비어 있음’이 아니라 세상 모든 빛깔을 품고 있는 ‘근원’이라고 봤다. 이런 인식에서 교황청은 19세기에 접어들어 성모 마리아의 의상을 흰색으로 채택하기에 이른다. 이런 인식은 일상에 퍼져 속옷의 색깔이 탐욕적 육체를 덮고 순결한 정신을 지킨다는 의미에서 흰색으로 자리 잡게 된다.

 

예수 탄생과 부활에 사제가 흰색 제의를 입는 것은 “하늘엔 영광이 가득하고 땅에는 환희가 넘치는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의미하는 것이다. 본성은 이처럼 색에도 스며든다.

 

커피도 마찬가지이다. “씨앗을 먹는 것인데 열매가 빨갛게 잘 익었는지 알 수 있겠냐”며 덜 익은 푸른 열매를 마구 수확했다가는 반드시 한 잔에 담긴 커피의 향미에서 들통이 난다. 밍밍한 맛이 우리를 허망하게 하고 쓰고, 떫은 뒷맛이 관능을 괴롭힌다. 색은 가도 본성은 남는 법. 보라색과 흰색에 담긴 절대자의 섭리가 두고두고 우리를 사유로 이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4월 11일, 박영순(바오로, 커피비평가협회장, 「커피인문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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