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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9월 17일 (목)
(녹) 연중 제24주간 목요일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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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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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08:37 ㅣ No.191939

김건태 신부님_죄가 아니라 사랑 

 

살아가면서 그 사람 덕이 있다.또는 그 사람 덕망이 높다.하는 평가는 꼭 한번 들어보고 싶은 소리일 것입니다. 덕이란 것이 그렇게 쉽게 쌓을 수 있고 갖출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관대함 또는 사랑이 그렇습니다. 무엇보다도 자기중심적인 옹졸한 마음을 털어버리고 이웃을 향해 무게 중심을 옮기는, 이타적인 마음을 갖출 때 비로소 가능한 일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과 훈련, 희생과 양보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향해 늘 보여주신 마음이며, 특별히 오늘 복음 말씀이 너무나 좋은 예를 보여주는 마음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당신을 식사에 초대한 어떤 바리사이의 집에 들어가 식탁에 앉으십니다. 복음 저자 루카는 복음서에서 세 번에 걸쳐 바리사이들로부터 접대를 받으시는 예수님을 소개하며, 예수님은 이를 마다하지 않으십니다. 이는 유다인들의 세계에도 예수님께 그리 적대적이지 않은 부류의 사람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좀 더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합니다.

식사 중에 그 고을의 어떤 여인, 죄인으로 취급되던 여인 하나가 들어섭니다. 용서에 대한 간절한 믿음 하나로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입니다: “그 여자는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려,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남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는 거침없는 행동입니다.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의 반응은 충격과 분노의 범벅입니다. 그는 죄인과의 접촉 자체를 죄의 물듦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큰 가르침이 펼쳐집니다.

 

예수님은, 초대한 집주인의 생각을 잘 알고 계셨기에, 마음을 고쳐잡을 수 있도록 간단한 예를 하나 드십니다. 답하기가 너무 쉽고 상식적인 질문을 담고 있는 예입니다.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 더 많이 감사할 수밖에 없는 이치를 담고 있는 예입니다. 정결하다는 바리사이와 부정하다는 죄인 사이에 잘못의 정도는 같을 수 없을 것입니다. 죄인의 잘못은 강하고 진하나, 의인의 잘못은 엷고 가벼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용서받은 여인은 용서해 주신 예수님보다 훨씬 강력한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에게 중요한 것은 용서받은 그 큰 죄보다 자비를 불러일으킨 사랑이라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따라서 이 여인은 바리사이보다 더 큰 사랑 속에 머물러 있는 존재가 되며, 바로 이 점이 훗날 우리에게까지 널리 전수되고 회자될 메시지로 남게 됩니다. 결국 죄가 아니라 사랑에 무게가 실립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큰 노력 없이도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귀담아듣고 눈여겨보고 따라 하기만 하면 덕을 쌓을 수 있다는 것이, 한마디로 인격을 함양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선물이고 은총인지 모르겠습니다. 세례성사를 통해 당신 자녀로 불러주신 하느님께 그저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오늘 하루, 이웃의 부족한 점까지 다 받아들일 수 있는 너그러운 신앙인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기도하며 애쓰는, 뜻깊은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 “눈물로 그 발을 적시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놀라운 역설을 보여 준다. 바리사이 시몬의 집에 초대받으신 예수님 앞에 한 여인이 등장한다. 그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죄인”이었지만, 주님 앞에서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눈물로 발을 씻기고, 머리카락으로 닦고, 입을 맞추며, 향유를 바른 것이다. 바리사이는 그녀의 과거와 사회적 낙인을 보았지만, 주님은 그녀의 믿음과 사랑을 보셨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48절)라는 선언은 단순한 사면이 아니라, 존재 전체의 새로움, 즉,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는 부활의 은총이었다. 

 

교부들은 이 장면을 회개의 눈물로 해석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한다. “눈물은 영혼의 상처를 씻어내는 샘물이다. 눈물이야말로 참회하는 이의 제사다.”(In Matth. Hom. 요약) 여인이 흘린 눈물은 단순히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죄의 어둠을 씻고 하느님의 빛을 받아들이는 신비로운 세례의 행위였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이러한 회개의 눈물을 “영혼의 두 번째 세례”라고 불렀다. 이는 성사적 세례는 한 번뿐이지만, 눈물의 회개가 그 은총을 새롭게 하고 깊이 있게 살게 한다는 뜻이다. 성 암브로시오는 말한다. “하느님께서 기꺼이 용서하시는 것은 그분의 자비가 인간의 죄보다 크기 때문이다.” 여인은 무거운 죄를 지녔지만, 더 큰 사랑으로 주님께 나아갔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랑 속에서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드러내셨다. 죄는 깊지만, 그리스도의 용서는 더 깊다. 성 아우구스티노 역시 이렇게 가르친다. “사랑은 죄를 사라지게 하는 불과 같다. 네가 사랑한다면 죄는 타 없어질 것이다.” 여인의 행위는 바로 사랑의 불길이었고, 그 불길 속에서 죄는 사라졌다. 

 

교회는 이 여인의 모습을 교회의 신비와 연결해 해석한다. 교회는 죄인으로서 주님께 나아가 눈물로 그분 발에 입 맞추는 신부이다. 성 예로니모는 말한다. “교회는 주님의 발에 입 맞추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이는 신부의 신랑을 향한 사랑의 고백이다.”(그리스도의 신부 주석) 여인의 몸짓은 교회의 몸짓이다. 교회는 언제나 죄의 그림자 안에서 주님의 발치에 엎드려, 사랑과 겸손으로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고백한다. 베드로 사도는 말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한결같이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많은 죄를 덮어줍니다.”(1베드 4,8) 여인은 사랑으로 죄를 덮었고, 주님은 사랑으로 그녀를 덮으셨다. 바리사이는 율법으로 판단했지만, 주님은 사랑으로 구원하셨다. 교부들의 가르침은 분명하다. 눈물은 회개의 제사요, 사랑은 죄를 불태우는 불이다. 교회는 언제나 신부처럼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 입 맞추며, 주님의 용서와 사랑을 새롭게 고백한다. 이제 우리가 받은 사랑을 이웃에게 흘려보내며, 주님과 함께 새로운 생명을 살아가는 제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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