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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 묵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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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하느님의 역설적 지혜
어떤 사람들인지 또는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지 관계없이, 언제나 그저 모든 것을 부정하기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상당한 동족들, 부정할 수 없는 가장 분명한 사실까지도 부정하려던 상습적인 불신자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이 세대 사람들’이라 칭하십니다. 이 표현은 심판의 성격을 띠고 있는 표현입니다. 40년 동안 광야에서 직접 보고 들은 놀라운 사건들을 체험했으면서도, 하느님 따르기를 마다한, 선민(選民)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종종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부산스럽고 고집스러운 아이들,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 무리에 비교하십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혼인 잔치에서 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춤을 추라고 들볶고, 초상집에서 생각이 없는 사람들에게 곡을 하라고 부추기는 무리입니다. 우리가 불신의 늪에 빠져 있다면, 그 무엇도 우리의 귀를 열게 할 수 없고, 우리의 눈을 뜨게 할 수 없습니다. 탁월한 금욕주의자였던 ‘세례자 요한’이 먼저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사람들은 그를 마귀 ‘들린 사람’으로 단정했습니다. 이어서 ‘사람의 아들’이 와서,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하듯, 먹고 마시자, 이번에는 그를 ‘먹보요 술꾼’으로 취급합니다. 먹보요 술꾼, 결코 호의적인 평가가 아닌 것은 분명함에도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고 비난하면서, 이 비난이 그분을 모욕하는 길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최우선시하던 유다인들, 그 가운데서도 지도자들에게 이 비난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하나의 모독적 언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역설적으로 이 모독은 예수님의 존재와 사명을 밝혀주는 언사였습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죄와 윤리적 결함으로부터 그들을 치유하기 위하여, 결국 그들까지도 구원으로 이끌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과 특히 행동을 통하여 줄곧 이 사명을 수행하실 것이며, 그러할수록 그분의 적대자들, 곧 상습적인 불신자들은 저항과 분노의 정도를 높여나갈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세리와 죄인들, 나아가 사회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예수님을 따르려는 모든 신앙인은 자비와 용서 베풂과 거리가 먼, 고집스러운 무리의 저항에 부대낄 각오를 세워야 할 것입니다. 역설을 통한 하느님의 지혜, 이것이 바로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 하는 선언의 토대가 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구원사업을 지속시키고자 사도들을 기초 삼아 이 지상에 교회를 세우셨으며, 구원의 대상에는 마귀 들린 사람이든, 먹보요 술꾼이든, 세리와 죄인이든, 누구도 제외될 수 없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오늘 하루, 내가 속해 있는 사회 단위에서 따돌림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서, 그들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보람 있는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길 수 있을지 말씀하신다. 아이들이 장터에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하여도 울지 않는 고집스러운 아이들 같다고 하신다. 요한 세례자가 금욕의 삶을 살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33절)라고 하고, 사람의 아들인 예수님이 잔치 자리에서 먹고 마시자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34절)라고 비난한다.
문제는 하느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고 자기 생각으로만 판단하는 태도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교만한 자는 하느님의 지혜가 자기 눈앞에 있어도 보지 못한다. 그는 자기 기준으로만 재단하며, 결국 하느님의 지혜를 거부한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문제는, 그들의 눈이 이미 자기 확신과 고집으로 가려졌다는 데 있었다.
예수님은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35절)라고 말씀하신다. 집회서는 “지혜는 자신의 아들들을 키워주고 자신을 찾는 이들을 보살펴 준다.”(4,11)라고 한다. 지혜의 자녀란 곧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고 받아들이는 이들이다. 성 이레네오는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이야말로 지혜의 열매를 맺는다.”라고 했다. 우리도 신앙인으로서 단순히 이름만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하느님의 지혜 안에서 살아가는 참된 자녀가 되어야 한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도 거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참된 자유는 하느님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진리의 광채”(Veritatis Splendor)에서 “진리는 인간의 자유를 인도하며, 자유는 진리 안에서만 완성된다.”라고 요약했다. 우리가 고집스럽게 자기 뜻을 고수한다면, 결국 하느님의 은총을 거부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래서 회개란 단순히 죄를 뉘우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기중심에서 벗어나 하느님께로 향하는 근본적인 전환이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요한 세례자의 고행을 통해서도, 예수님의 식탁 친교를 통해서도 하느님은 구원을 베푸신다. 문제는 우리가 그분의 현존을 알아볼 준비가 되어있는지, 그리고 즉시 응답할 순명의 자세가 되어 있는지의 여부이다.
우리는 신앙 안에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해도 울지 않는’ 완고한 아이들처럼 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지혜의 자녀로서,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고, 겸손히 순명하며, 자유롭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참된 기쁨과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 번호 | 제목 | 등록일 | 작성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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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25 |
김건태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 묵상 |
10:13 | 최원석 |
| 191924 |
전삼용 신부님_어리석음의 자녀와 지혜의 자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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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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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 | 최원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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