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9월 1일 (화)
(녹) 연중 제22주간 화요일(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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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승수 신부 님 [ 연중 제22주일 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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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cornelia2] 쪽지 캡슐

2026-08-30 ㅣ No.191574

[연중 제22주일 가해] 마태 16,21-27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한 때는 예수님으로부터 교회를 지탱할 ‘반석’이라는 칭찬을 들었던 베드로가, 오늘은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가로막는 ‘걸림돌’이자,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께서 하실 일을 방해하는 ‘사탄’이라는 꾸지람을 듣습니다. 말 그대로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셈입니다. 그런데 이런 ‘영적 추락’은 베드로 뿐만 아니라 우리도 살면서 자주 경험하게 되지요. 인간이란 참으로 부족하고 약한 존재여서, 자주 생각이 바뀌고 갈대처럼 흔들리는 우유부단한 존재여서 그렇습니다. 어제만 해도 당장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오늘은 작은 유혹 하나 이기지 못하고 속절없이 무너지는 내 모습을 볼 때 그렇습니다. 어제만 해도 뜨거운 신앙 체험을 통해 하느님과 더 가까워진 것 같았는데, 오늘은 하는 짓이 마귀나 다름 없이 비열하고 간사한 나를 발견하게 될 때 그렇습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내 마음 안에 하느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는 일에 하느님의 뜻과 계획은 온데간데 없고 내 생각 내 계획 내 욕심만 남았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에서 하느님과 그분 뜻을 이루기 위한 열망이 사라지고 그저 삼시세끼 먹고 즐기는 일에만 신경쓰다보니 나도 모르는 새 ‘사탄’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지요.

 

오늘 복음은 그런 수많은 ‘베드로들’에게 예수님께서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를 통해, 어떻게 해야 우리가 천국과 지옥 사이에서 갈팡질팡하지 않고 하느님 곁에 항구하게 머무를 수 있는지 그 길을 찾을 수 있는 겁니다. 먼저 베드로의 말을 살펴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당신께서 겪으셔야 할 수난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시자, 베드로가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서지요. 이는 스승님을 걱정하고 아끼는 제자의 마음에서 그러시지 말라고 간곡하게 말린 수준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선’을 넘어도 한참 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붙들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는 예수님을 다른 이들로부터 따로 떼어놓기 위해 자기 쪽으로 강하게 끌어당기는 행동에 가깝습니다. 말 그대로 예수님을 쥐고 흔들려는 모습이지요. 또한 ‘반박하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의 원뜻은 ‘꾸짖다, 책망하다’입니다. 즉 베드로는 제자로서 예수님께 충언을 한 게 아니라, 부모가 자식의 잘못을 꾸짖듯이 예수님의 위에 서서 강한 어조로 훈계하고 통제하려 든 것입니다. 이 정도에서 끝났다면 선을 넘었다고는 하지 않았을 겁니다. 베드로의 가장 큰 잘못은 그 다음 말에서 나오지요.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번역된 부분은 히브리어 관용구에서 온 것인데, 이는 “하느님이 원치 않으시기를!”이라는 뜻입니다. 단순히 개인적 바람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감히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바꾸려고 든 것입니다. 게다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강한 부정표현 안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자신이 반드시 막고야 말겠다는 베드로의 강한 의지와 고집이 담겨 있지요.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심한 꾸지람을 듣게 됩니다. 그를 ‘사탄’이라고 부르신 것은 베드로가 윤리 도덕적으로 사악한 잘못을 저질러서가 아니라, 베드로가 보인 모습이 바로 사탄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 ‘사탄’은 하느님께 반대하고 그분의 길을 막아서는 ‘반대자’, ‘적대자’를 가리키지요. 베드로는 자기 행동이 다 예수님의 안위를 걱정해서 그런 거라고 항변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르고 반대한 베드로의 행동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지요. 베드로는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기꺼이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는 예수님의 앞을 가로막음으로써 하느님께도 예수님께도 ‘사탄’이 되고 만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그렇게 된 이유가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베드로 뿐만 아니라 우리도 그렇지요. 공부를 잘해야 하고 돈도 많이 벌어야 하고 높은 자리에도 올라야 하고 그렇게 해서 풍족하고 안락한 삶을 누리는 게 행복이라 여기는데, 그 모든 걸 버리고 굳이 고통과 시련의 길을 택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꽃길이 아닌 가시밭길을 가시면서 ‘나를 따르라’라고 초대하시는 그분의 손을 잡기 싫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일’은 아무리 많이 해봐야 우리의 구원과 참된 행복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내가 그것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일’을 선택하면 그분께서 나의 삶을 참된 행복과 보람으로 충만하게 채워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의 일’을 선택하고 실행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일은 당신 나라에 들어가 영원한 생명과 참된 행복을 누리도록 우리를 이끄시는 일입니다. 문제는 하느님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 그분께서 우리를 이끄시는 섭리의 길이 어느 방향으로 진행할 지 우리는 모른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당신 뒤를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베드로에게 하신, “내게서 물러가라”라는 말씀도 사실 같은 뜻이지요. 이를 그리스어 원문 그대로 직역하면 “내 뒤에 서라”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앞길을 가로막는 ‘사탄’이 되지 않으려면 자신을 버리고 겸손하게 그분의 ‘뒤’에 서야 합니다. 내 고집, 주관, 편견, 욕심 등을 다 비우고 그 자리에 하느님을 모시는 것이 겸손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가시는 길 그대로 순명하며 따라가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라면 고통과 시련이라는 십자가마저 기꺼이 끌어 안는 것이 순명입니다. 이같은 겸손과 순명의 마음으로 묵묵히 주님의 뒤를 따르다보면, 우리는 그 길의 끝에서 ‘하느님 나라’를 만나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이 신앙의 길을 끝까지 걷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번째로 필요한 것은 ‘분별력’입니다. 이것이 좋다 혹은 저것이 좋다는 식으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현세의 풍조에 동화되지 말고,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분별은 그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사랑의 마음’으로 해야 하지요.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두번째입니다. 그렇게 식별해야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이 보입니다.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이끄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보입니다. 그러면 자신을 버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그저 서운하게만 느껴지지 않을 겁니다. 제 십자가를 지라는 그분의 권고가 그저 무리한 요구로만 들리지 않을 겁니다. 어떻게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참된 행복을 주고자 하시는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될 겁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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