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7일 (수)
(백)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본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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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6주일 ... 독서, 복음서 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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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군 [ahyin70u] 쪽지 캡슐

2021-05-08 ㅣ No.146666

1독서<다른 민족들에게도 성령의 선물이 쏟아져 내렸다,>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0,25-26,34-35.44-48

25 베드로가 들어서자 코르넬리우스는 그에게 마주 나와 그의 발 앞에 엎드려 절하였다.

26 그러자 베드로가 그를 일으키며, “일어나십시오. 나도 사람입니다.”하고 말하였다.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였다. “나는 이제 참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35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

44 베드로가 이야기하고 있을 때, 말씀을 듣는 모든 이에게 성령께서 내리셨다.

45 베드로와 함께 왔던 할례 받은 신자들은 다른 민족들에게도 성령의 선물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46 이 다른 민족 사람들이 신령한 언어로 말하면서 하느님을 찬송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에 베드로가 말하였다.

47 “우리처럼 성령을 받은 이 사람들에게도 물로 세례를 주는 일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48 그러고 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그들에게 지시하였다. 그들은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러 달라고 청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1독서 주해

25

발치에 엎드리는 자세는 상대방의 권위를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엎드려 절하는 자세는 고대 근동지방의 궁정에서 예를 갖추는 행위로 인식되었고 흔히 예배한다는 말로 번역된다.

 

26

베드로는 하느님께나 합당한 예배 동작을 자신에게 보여주는 고르넬리오를 만류한다. 이런 식의 만류는 리스트라에서의 선교여행중에 바오로와 바르나바에 의해 다시 반복될 것이다.

 

34

입을 연다라는 표현은 장중한 선언에 앞서 나온다.

차별대우하다라는 표현은 레위 19.15에서 외모를 보고 또는 뇌물을 받고 한 사람을 다른 사람보다 더 좋아한다는 뜻을 지닌다.

 

35

영접받아는 칠십인역에서 하느님이 제물을 받아들이신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더 나아가 하느님이 반기시는 삶을 의미하기도 한다. 특히 충실한 행동과 의인들의 기도가 하느님께 영접받는다고 말하는 잠언 12.2215.8의 내용은 이 구절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로마 2,10-11에 보면 의로운 행동의 개념이 하느님의 공평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베드로의 말을 통해 루카는 그리스도교의 구원 앞에서 인종적 장벽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44

사도행전에서 네 번째 내리는 성령이다. 루카는 베드로가 아직 설교를 하는 도중에 성령이 내려왔다고 진술하지만, 사실은 베드로를 통해서 그가 하고 싶은 말을 다 마친 후에 이 일이 일어났다. 똑같은 기법이 사도행전 후반부에 자주 나온다. 이 대목들에서 바오로의 설교 또는 연설이 중단된것처럼 되어 있으나 루카가 바오로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은 다한 뒤였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빠에서 내려온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고르넬리오와 그의 가족들이다.

 

45

세례를 받기도 전에 성령이 이방인들에게 내린 사건은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이방세계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하느님의 거역할 수 없는 결정이다.

 

46

성령이 실제로 내려오는 모습은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지 않지만 외적인 현상, 곧 기이한 언어와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을 통해 알아차리게 된다.

 

47

베드로의 질문은 함께 요빠에서 내려온 6명의 유다인 그리스도인에게 던져진 질문인 동시에 독자들에게도 해당되는 질문이다. 성령의 내림은 하느님이 이 이방인들을 받아들이셨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따라서 세례 예식은 교회가 이 하느님의 활동을 인정한다는 표시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처럼이라는 말은 먼저 믿은 자들과 지금 믿는 자들 사이의 연결점이 다름아닌 성령의 체험임을 밝혀준다.

 

48

베드로 자신이 세례를 주지는 않는다. 그들이 받은 세례는 아직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는 세례가 아니다.

며칠 더 머물러 달라는 그들의 요청은 베드로가 가이사리아의 새 신도들 집에서 묵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 축측이 맞다면 베드로는 그들을 온전한 의미에서 깨끗한 그리스도인들로 받아들인 셈이다.

 

 

 

 

2독서<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4,7-10

7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8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9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10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2독서 주해

9

9절에선 하느님 아들의 강생을 논한다. 하느님의 아들을 수식하여 외아들이라 한다. 요한계 문헌에선 하느님의 하나뿐인 아들이라 하고 공관복음에선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한다. 두 수식어 모두, 하느님과 예수의 관계는 극히 독보적이란 뜻이다. 9.14절에 나오는 세상은 하느님께서 사랑하신 세상이다.

 

10

10절은 예수의 죽음을 대속사건으로 본다. 아울러 이 사건은 하느님 사랑의 발로라고 풀이한다. 요한 1서의 경우 1.7; 2.2; 3.5.16;4.10에 대속신앙이 나타난다.

 

 

 

복음<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9-1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10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1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12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15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16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17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서 주해

9

예수는 자기 자신이 아버지에게 받은 그 사랑으로 제자들을 선택하고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예수에게 받은 사랑의 삶을 살아 예수의 뜻을 실천하라는 뜻이다. , 제자들은 참으로 예수의 제자임을 드러내 보이고 증언함으로써 예수의 사랑 안에 머문다.

 

10

예수의 계명들을 지킴으로써 예수의 사랑 안에 머문다는 것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예수의 사랑은 아버지의 사랑에 근거하고, 예수가 아버지의 계명들을 지킨 것은 동시에 제자들도 그렇게 할 수 있게 하는 동기가 된다는 뜻이다.

 

11

이것들은 예수의 비유말을 가리키고 이제 그 비유말이 끝났음을 시사한다.

기쁨은 예수와 결속되어 있고 제자들에게 선사된 것이며 예수와 함께한 공동체 안에서 가득 찰 수 있는 종말론적 기쁨이다. 그리스도의 현존과 더불어 주어지고 체험되는 기쁨이므로 그 누구도 빼앗지 못하는 영원한 기쁨이다.

 

12

예수의 계명들을 지킴으로써 그의 사랑 안에 머물게 된다는 내용에 대한 설명이다. , 계명들서로 사랑하라는 하나인 계명으로 요약된다. 이 사랑의 계명은 그것을 지킴으로써 예수의 참된 제자임을 드러내는 핵심 계명이며 예수가 제자들을 사랑한 모범적 사랑에 근거한다. 즉 예수를 통해 이미 제자들에게 드러난 사랑에 근거한 계명으로 강조된다.

 

13

친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사랑의 최고 실증이라는 일종의 격언이다. 이 말은 14-15절에 연결되어 예수와 제자들의 관계가 친구관계로 설명된다. 문맥상 예수의 사랑을 가장 값진 친구 사랑으로 시사할 뿐 아니라, 목숨까지 바치는 예수의 헌신적 사랑을 모범으로 제시하여 제자들로 하여금 그런 사랑을 실천할 준비를 갖추도록 촉구하는 의미도 지닌다.

 

14

예수를 본받아 사랑의 계명을 지키면 예수의 친구가 되는 기쁨을 가지게 된다는 뜻이다. 즉 친구라는 칭호는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가 명하는 사랑의 계명을 지키게 하는 동기가 된다.

 

15

예수와 제자들의 새로운 관계를 시사한다. 예수는 하느님과 자기 앞에서 으로만 여겼던 제자들을 친구로 생각하게 이끌고 동시에 그런 관계를 선사한다.

제자들은 예수가 행한 일에 대해 이미 알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제자들이 예수에게 선택되었을 때 이미 예수의 친구였다는 뜻이다. , 예수는 제자들을 하느님과 자기 자신에 대해 강압적인 주종관계가 아니라 자유롭고 선의에 가득 찬 친구관계로 선택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따라서 이 우정관계의 주도권은 예수에게 있다.

예수는 아버지에게 들은 것을 제자들과의 우정관계 속에서 계시했고 또한 아버지의 사랑도 전달했다는 것이다. 예수의 계시는 제자들을 종이 아니라 친구관계로 머물도록 자유롭게 한다.

 

16

예수의 주도권을 시사하고 동시에 제자들에게 예수와의 우정관계가 선물임을 일깨운다.

제자들의 임무수행을 파견사상의 맥락에서 언급한다. 이 임무수행은 예수에게 무상으로 선택되었다는 의식에서 솟아나고 예수의 부름에 대한 응답이다. “(떠나)가서 열매를 맺는다란 표현은 문맥상 예수 안에 머물러 열매를 맺으라는 말을 회상토록 촉구하는 뜻이다. “그 열매가 남아 있다란 예수 자신과 그의 사람 안에 머무는 것을 가리킨다.

 

제자들이 맺은 열매는 사람들 가운데서 사는 그리스도인다운 삶과 하느님의 사랑을 가리킨다.

예수와의 결속관계에서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 그 청을 들어주신다는 확신과 약속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언제나) 남아 있는 열매를 원하고, 제자들의 그런 간청은 아버지께서 들어주신다고 약속한다. 예수의 이름으로 청한다는 것은 제자들이 열매를 맺도록 예수 자신도 함께한다는 것을 뜻한다.

 

17

12절이 거듭 강조된다. , 제자들에게 열매를 맺도록 당부한 예수의 훈계 또는 경고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에서 절정을 이룬다. 예수 안에 머물러야 결실을 맺을 수 있다는 비유말이 제자들을 친구로서 사랑한 예수의 사랑을 그들도 서로 나누어야 한다는 말로써 구체적으로 설명된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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