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18일 (일)
(녹) 연중 제29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전교 주일)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

따뜻한이야기 신앙생활과 영성생활에 도움이 되는 좋은 글을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2020년 12월 9일 대림 제2주간 수요일

스크랩 인쇄

강헌모 [kanghmo7] 쪽지 캡슐

2020-12-09 ㅣ No.98506


 

 

 

 

 

2020년 12월 9일 대림 제2주간 수요일


복음 마태 11,28-30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러시아의 소설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이야기는 아주 유명합니다. 그는 정치적 희생양으로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총살형이 집행되기 바로 직전에 형 집행이 중지되었지요. 죽음의 문턱까지 경험한 그는 다시 살았다는 기쁨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다짐을 했습니다.

“이제 내 인생은 바뀔 거야. 나는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 거야. 삶은 선물이야. 삶은 행복이야. 인생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어.”

실제로 그는 이 체험 후에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1분 1초도 헛되이 보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 뒤 최고의 작품이라는 평을 받는 책을 출판할 수가 있었지요. ‘죄와 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등이 이 사건 이후에 나왔습니다.

도스토옙스키처럼 극적인 체험이 있어야만 변화될 수 있을까요? 사실 그와 똑같지는 않겠지만, 절망의 체험을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절망 안에만 머물러 있다 보니, 이 순간이 극복되는 순간을 잘 기억하지 못할 뿐입니다.

그래서 절망 안에서 희망을 찾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야만 진정으로 변화될 수 있는 자신을 만날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절망과 시련이 찾아오면 불평불만이 먼저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 그냥 머물러 주저앉을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어린 나약함을 잘 알고 계십니다. 절망과 시련을 이겨내고 그 안에 담겨 있는 희망을 찾기 힘들어한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 용기가 되는 말씀을 해주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주님의 멍에는 적당히 무거워 그것을 멘 이들에게 오히려 힘을 북돋아 줍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은 강을 건너갈 때 머리나 가슴에 무거운 돌을 짊어지고 간다고 합니다. 강 중간쯤에 세찬 급류가 흐르는데, 무거운 돌로 인해서 급류에 휩쓸리지 않고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거운 짐이 자신을 살리는 것입니다.

이 무거운 짐이 주님의 멍에입니다. 짐이 없으면 편할 것 같지만 더 위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불편할 것 같은 멍에가 편한 것이 되며, 주님께서 주신 모든 짐이 그렇게 무겁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은총을 떠받치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우리를 떠받칩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용서할 줄 아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사랑할 줄 아는 힘도 가지고 있지 않다(킹 목사).



수원교구 성지, 어농 성지 성당


기대치 낮추기

갓난아기 때 목을 가누고 웃는 표정을 짓기만 해도 주변에서 손뼉을 치며 좋아합니다. 여기에 약간의 시간이 더해져서, 일어나 걷고, 어리숙하지만 말을 하게 되면 더 큰 힘찬 응원의 손뼉을 칩니다. 그런데 갓난아기가 아니라 더 큰 성인이 이렇게 한다면 어떨까요? 그 모습에 어떤 사람도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어른이라면 당연히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행동을 누가 했느냐에 따라 반응은 이렇게 다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대치의 차이 때문입니다.

어린아이에 대한 기대치는 그렇게 높지 않기 때문에 별것 아닌 행동에도 크게 와 닿고 또 반응을 보입니다. 그러나 성인 어른에게는 전혀 다른 기대치를 가집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와 똑같이 한다면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을 받아들이는 조건 중 하나는 이 기대치를 낮추는 것이 아닐까요? 너무 높은 기대치로 인해서 계속해서 부정적인 인간관계가 형성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대치가 낮아진다면 어떤 행동도 못 받아들일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명령하신 사랑의 실천이 그렇게 어렵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수원교구 성지, 어농 성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760 1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