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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인물로 보는 동성학교의 가톨릭 교육 성과와 한국 가톨릭 학교의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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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7-19 ㅣ No.1575

인물로 보는 동성학교의 가톨릭 교육 성과와 한국 가톨릭 학교의 전망

 

 

국문 초록

 

한국 사회는 지난 100년 동안 격동의 시기를 보내왔다. 이러한 시기를 ‘복음화와 전인 교육’이라는 한결같은 신념으로 함께 해온 동성학교의 100년은 의미가 깊다. 지난 시간 동성학교는 진리와 사랑으로 봉사하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애써왔고, 그런 인재들이 한국 사회를 지탱하고 성장시켜왔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마태 7,16) 이 논문을 통해 살펴본 동성인들은 개인의 이익보다는 민족과 교회를 우선하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위해 헌신할 줄 아는 인물들이었다. 이 논문은 동성이 배출해낸 인물들의 면모를 통해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제시하는 가톨릭 학교상(想)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급변하는 시대 상황 속에서도 가톨릭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해온 가톨릭학원과 동성학교 구성원 모두의 노력 덕분이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모진 비바람 속에서도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렇게 제자리를 지킨 덕분에 나무는 많은 열매를 맺으며, 수많은 새들이 깃들이는 생명의 요람으로 자리하게 된다. 오늘날 입시 위주의 교육 현실과 규제 일변도의 국가 교육 정책이라는 비바람이 동성학교를 비롯한 한국 가톨릭 학교에 불어오고 있다. 하지만 가톨릭 학교로서 정체성을 잃지 않고자 굳건하게 버티고 선다면, 우뚝 선 저 나무와 같이 수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동성학교가 버텨낸 저 100여 년의 역사와 인물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1. 머리말

 

2010년 5월 16일 서강대학교에서는 ‘2010 가톨릭 교육자 대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주교회의 교육위원회 총무이자 동성고등학교1) 12대 교장 김웅태 신부는 오늘날 가톨릭 학교 교육 정체성이 위기를 맞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국가가 교육 공공성을 명분으로 사립학교 운영에 개입하게 되면서 가톨릭 학교들이 설립 취지를 살려나가기 어려워졌고, 상급학교 진학이라는 목표에 모든 것들이 집중되어 전인교육을 실시하는 것 또한 힘들어졌다고 보았다.2)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2009년 7월 14일, 동성고등학교는 서울시교육청으로부터 자율형 사립고등학교(자사고) 지정을 받고, ‘진리와 사랑으로 봉사하는 인간’이라는 건학 이념에 따라 가톨릭 학교의 정체성을 살리는 교육을 실시하고자 노력해왔다. 하지만 이마저도 국가의 자사고 규제와 자사고 성격에 대한 학교 및 학부모 간의 인식 차 속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동성고등학교는 2021년 5월 27일경 학교의 지위를 자사고에서 일반고로 전환하기로 결정했다.3)

 

사실 동성학교는 한국 천주교회 역사상 최초로 설립된 일반계 중등 학교로서,4) 한국 가톨릭 학교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끌어나가는 학교이다. 그런데 이 학교마저 국가의 규제와 경쟁 위주의 시대적 환경 속에서 가톨릭 학교의 정체성을 지켜나가는 것이 어렵다면, 다른 가톨릭 학교들이 처한 상황은 어떨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가톨릭 정체성을 실현하는 학교 교육은 불가능한 것일까?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청소년의 아버지요 스승인 성 요한 보스코(S. Giovanni Bosco, 1815~1888)는 “교육은 마음의 일”이라고 단언했다. 따라서 학교 안에 가톨릭 정신을 가진 성직자·수도자·평신도들이 하느님의 마음으로 학생들을 만난다면, 국가의 규제나 경쟁 위주의 시대적 환경을 뛰어넘어 가톨릭 정신에 입각한 교육을 학생들에게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사실 교육의 성과는 그 교육을 통해 양성된 인재를 보면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동성학교가 가톨릭 정체성에 입각해 교육을 실시해왔는지 확인하려면, 상급 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의 숫자보다는 출신 인재들의 면면을 살펴보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이점에서 동성학교는 가톨릭 학교 교육의 정체성을 꾸준히 유지해왔다고 할 수 있다. 동성학교는 서울대목구가 남대문상업학교를 인수한 1922년부터 지금에 이르는 100년의 시간 동안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가톨릭 신앙 안에서 ‘진리와 사랑으로 봉사하는 인간’을 양성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왔고, 그 결과 수많은 인재를 배출해왔기 때문이다.

 

서울대교구가 동성학교를 인수한지 100년이 지난 오늘, 본 논문은 지난 100년간 동성이 배출해낸 인물들을 통해 동성학교가 추구해온 가톨릭 교육의 성과를 돌아보려고 한다. 동성 출신 인재들에게 뿌리내린 가톨릭 학교 교육의 씨앗을 살펴보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앞으로 동성학교와 한국 가톨릭 학교 교육이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2. 가톨릭 학교 교육과 동성학교의 정체성

 

한국 가톨릭 학교의 사명은 복음화와 전인 교육에 있다.5) 즉, 가톨릭 학교들은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신 복음을 선포하고, 교육을 통해 학생들이 복음을 따라 살아가도록 이끈다. 또한 학생들이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가치들을 계발하고 성장해나갈 수 있도록 노력한다. 이를 위해 가톨릭 학교는 그리스도교의 가치를 내면화하는 종교 교육에 특별한 가치를 두고 있으며,6) 교육자의 역할과 교회, 가정, 지역 사회, 국가와의 연대·협력을 강조한다.7)

 

이러한 한국 가톨릭 학교의 사명은 동성학교의 교육 목표에서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 실제 ‘참되자·부지런하자·책임을 다하자’는 동성학교의 교훈은 복음화된·전인적 성장을 이룬 인간상을 지향하고 있다. 동성 4대 교장 전창기 선생의 회고는 이 교훈에 담긴 의미를 잘 드러내고 있다.

 

“교장 단독으로 정한 교훈인데 나는 교회 입장과 개인 취향에 입각하여 경천 애인(敬天愛人)이라는 동양인의 불문율(不文律)을 염두해 두고 참되자는 덕목을 첫째로 내세웠다. 자리를 겸양하고 순수한 입장에서 자기 자세를 지니는 것이 경천이라면 천주를 공경하라는 것과 결부시켜 부끄럼없이 자기 충실을 기하자는 것이 그 근본이었다. 그 다음 부지런하자, 책임을 다하자 하는 것은 우리 일상 생활에 책임이 많겠지만 무엇보다 근본적인 것은 최대한으로 노력하고 능력을 발휘하자는 것으로 스스로 해야 할 일에 충실을 기하자는 것을 중요시한 데 있었다. 처음 하나는 전인 교육에 대한 기본 정신의 강조이고, 나머지 둘은 우리 일상 생활에 있어서 강조해야 할 요점을 간추려 본 것이었다.”8)

 

이는 동성학교의 건학 이념인 ‘진리와 사랑으로 봉사하는 인간’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9) 복음은 인간에게 하느님의 진리와 사랑을 알려주며, 복음화 된 인간은 타인에게 봉사하는 전인적 인간으로 거듭나기 때문이다. 사실 동성(東星)이라는 교명 자체가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다. 1931년경 교명을 남대문상업학교에서 동성상업학교로 변경한 것도 이와 같은 교회의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년전에 남대문상업학교를 동대문과 동소문이 가까운 혜화동으로 이전한 후에도 남대문상업학교라고 부르는 것은 뜻이 모순되는 고로 동성(東星)상업학교로 명칭 변경을 청원하여, 4월 신학기부터 시행하기로 허가되었다. 동성은 동편 별이란 말이니 곧 주 예수 탄생하실 때에 샛별이 동쪽에 나타나 삼왕을 주 예수께로 인도하여 흠숭하게 한 별이로다. 이 동성상업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는 모든 학생도 이 별을 따라, 천상 진리와 세간 정리를 다 통달함으로써 구세주를 흠숭 공경하기에 이르게 될 것이다.”10)

 

한편 동성학교는 한말 애국계몽운동을 위해 설립된 소의학교(昭義學校, 1907년 개교)로부터 애국·애족 정신을 이어받고 있다. 소의학교는 소의문(昭義門) 즉, 서소문과 서대문·남대문 근처 유지와 주민들이 인재 양성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고자 세운 민족 사학이었다. 특히 소의학교의 공동창립자이자 3대 교장이었던 민강 선생(1884~1931)은 1909년에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는가 하면, 1910년 한일합방 이후에는 소의학교를 통해 교육운동에 헌신했다.11) 이러한 그의 애국·애족 정신은 소의학교의 건학이념 속에 녹아들었고12), 이는 1922년에 천주교회가 소의학교를 인수한 후에도 동성학교를 성장시키는 자양분으로써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이처럼 동성학교는 가톨릭 정신과 더불어 애국·애족 정신의 요람으로서, 지난 100여 년 간 진리와 사랑으로 봉사하는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해왔다. 지금부터 자랑스러운 동성인들의 면면을 살펴봄으로써, 동성학교의 교육 성과와 가톨릭 학교 교육의 미래상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특히 이 글에서는 한국 사회에 가톨릭 교육 정신과 애국·애족 정신을 구현한 동성 출신 성직자와 일반 동성인들, 그리고 그들을 길러낸 동성의 스승들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3. 동성이 배출한 인물들, 가톨릭 학교 교육의 결실


1)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세상에 드러낸 동성 출신 성직자들

 

동성학교는 한국 천주교회가 운영하는 대표적인 중등 학교로서 그동안 수많은 천주교 성직자들을 배출했다. 이 가운데 특별히 기억해야할 동성 출신 성직자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그들은 동성에서 배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세상에 드러낸 인물들이다.

 

(1) 하느님의 말씀을 한국어로 번역한 동성인, 선종완 신부

 

1922년에 동성학교(당시 남대문상업학교)를 인수한 서울대목구는 이 학교를 통해 미래의 교회 지도자를 양성하고자 꾸준히 노력해왔다. 예를 들어 인수 당시 학교 사목을 담당했던 크렘프 신부(Krempff, 1882~1946)는 신학교에 입학하면 파리 유학과 1년 치 학교 등록금을 전액 면제해줄 수 있다고 학생들에게 권유하기도 했다.13) 이러한 노력은 1929년경 동성상업학교에 을조 과정14) 즉, 소신학교 과정이 생기면서 더욱 명료해졌다.

 

사실 초기 한국 천주교회는 조선왕조의 박해로 한국인 성직자를 양성하는데 애를 먹었다. 이로 인해 1855년에 설립된 배론 성 요셉신학교(현 가톨릭대학교의 전신)는 1866년 병인박해로 폐교되었고, 신학생들은 말레이시아 페낭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유학을 가서 교육을 받아야 했다. 교회는 박해가 종식되어 가던 1885년경 원주에 예수성심신학교를 세웠고, 『한불조약』(1886) 체결 직후인 1887년에 서울 용산으로 신학교를 옮겼다. 이곳에서는 소신학교(중등 교육)와 대신학교(고등 교육)를 동시에 운영했다. 바로 이 소신학교가 1929년에 동성상업학교 을조 과정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이로써 동성상업학교는 갑조(상업 전공), 을조(소신학교) 과정으로 운영되기 시작했고, 천주교 성직자가 되기 위해서는 누구나 동성상업학교를 거쳐야만 했다.

 

1933년 을조 과정의 첫 졸업생들이 배출된 이후(동성 8회), 동성학교에서는 한국 천주교회사에 큰 획을 그은 교회 지도자들이 다수 배출되었다. 우선 성서학자이자 성모영보수녀회 창립자인 선종완 신부(1915~1976, 동성 11회, 소신학교 4회)를 소개할 필요가 있다. 1915년 8월에 강원도 원주시 용소막에서 태어난 그는 1930년에 어린 시절부터 키워온 사제의 꿈을 이루기 위해 서울로 건너와 동성상업학교 을조 과정에 입학했다. 소신학교 학생 시절 그는 규칙을 엄격하게 지키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로 인해 “성인답다.” 또는 “신부보다는 수도자가 되는 것이 적성에 맞을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15) 1936년에 동성상업학교를 졸업한 선종완 신부는 같은 해 4월에 예수성심신학교에 입학하여 1942년 2월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후 그는 일본 중앙대학에 유학을 갔다가 1945년 6월에 대신학교 성서학 교수로 취임했다. 1948년에 다시 유학을 떠나 로마 우르바노 대학과 안젤리쿰대학·성서대학, 예루살렘 성서연구대학원에서 성서학을 공부했다. 1953년에 귀국한 그는 다시 대신학교 교수로 임용되어 임종할 때까지 그곳에서 사제를 양성하고 성서학 연구에 매진하였다.

 

그의 탁월한 공적은 성경 번역과 성모영보수녀회 창립을 통해 드러났다. 그는 1958년에 『창세기』를 한글로 번역했고, 『출애굽기·레위기』, 『민수기·신명기』, 『요수에기·판관기·루트기』, 『사무엘 전후서』, 『열왕기 상·하』를 잇따라 번역했다.16) 이는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었는데, 당시 한국천주교회의 성경 번역 작업이 매우 더디게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17) 특히 그는 1968년부터 시작된 개신교회 측과의 공동 성경 번역 작업에 참여하여 교회 일치 운동과 성경 보급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처럼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접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었다는 점에서, 동방 박사들을 구세주께 이끈 동방의 별(東星)과 같이 한국 사회에 그리스도를 널리 알린 인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한편 그는 성경 번역에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신학교에서 메추리를 사육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얻게 된 수익금과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처분하여, 경기도 부천군 소래면에 땅을 구입했다. 그는 1958년에 홀어머니와 함께 이곳에 이사를 왔다. 이후 계속하여 성경을 번역했는데, 발생한 수익금으로 수도 공동체를 설립할 계획을 세웠다. 그렇게 설립된 수도회가 성모영보수녀회였다. 당시는 수녀원에 들어가려면 일정 수준의 학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선종완 신부는 배우지 못한 여성들도 수도자의 삶을 원한다면 수도자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랐다.18) 그것은 한국 천주교회가 학교 교육 사업을 통해 실천했던 복음 정신의 연장선이었다. 그가 학교를 다녔던 일제강점기 당시, 교회는 심각한 재정난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어려운 사정을 고려하여 사정이 허락하는 한 무료 교육을 실시하고자 했다.19) 돈이 없어 교육을 받지 못하는 학생들이 없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교육을 받은 선종완 신부가 배운 것이 없어 수도자가 될 수 없는 여성들을 위해 수녀원을 만든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2)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의 기틀을 닦은 동성인, 최석우 몬시뇰

 

1941년 졸업생 즉, 동성 16회(소신학교 9회) 졸업생 가운데는 유난히 빛나는 교회 지도자들이 많이 배출됐다. 이들 가운데 최석우 몬시뇰(1922~2009)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는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의 기틀을 닦은 동성인이었다. 황해도 신천군에서 태어난 그는 1935년에 동성상업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졸업 후 대신학교에 입학하여 1950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는 그해 11월에 소신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당시 소신학교는 동성상업학교로부터 분리되어 성신대학부속중학교로 운영되고 있었다.

 

소신학교 과정이 동성상업학교에서 분리된 것은 1942년 2월경 일제가 갑작스럽게 예수성심신학교 폐교를 통보하면서 비롯된 것이었다. 당시 신학생 양성 과정은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대신학교)와 동성상업학교 을조과정(소신학교) 체제로 운영되고 있었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는 총동원령을 선포하고, 모든 조선인을 전쟁에 끌어들이고자 했다. 이를 위해 종교지도자들을 일본인으로 바꾸려고 시도했는데, 이미 일본에서는 1930년대 후반부터 진행되고 있었던 작업이었다.20) 이를 눈치 챈 서울대목구장 라리보 주교(Adrien Jean Larribeau, 1883~1970)가 한국 천주교회는 한국인이 맡아야 한다고 판단하여 교황청에 긴급히 노기남 신부(1902~1984)를 후임 대목구장으로 추천하였다. 이윽고 1942년에 노기남 신부가 서울대목구장 주교로 임명되었다. 이를 문제 삼은 조선총독부는 한국 천주교회의 성직자 양성 자체를 금지시킬 목적으로 대신학교인 예수성심신학교를 폐교시켰다.21) 이로 인해 한국 천주교회는 상당한 곤란에 처하게 되었는데, 가까스로 1945년 5월에 총독부로부터 새로 인가를 받아 경성천주공교신학교를 설립할 수 있었다. 이때 소신학교도 동성상업학교에서 분리되어 경성천주공교신학교 내로 흡수되었다. 동성상업학교는 광복 후인 1946년 9월에 6년제 인문 중학교인 동성중학교로 조직과 교명을 변경했으며, 이때 을조 과정이 폐지됐다. 이후 소신학교는 경성천주공교신학교가 성신대학으로 정식 인가를 받은 1947년 4월에 성신대학부속중학교로 함께 인가를 받아 운영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새로 마련된 성신중학교에서 최석우 몬시뇰이 소신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가 교회사 연구를 시작하게 된 것은 동성 선배이자, 신학교 은사인 선종완 신부의 권고 때문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선종완 신부는 최석우 몬시뇰을 불러 벨기에 루뱅대학에서 한국 교회사를 공부할 것을 권고하였다. 이에 최 몬시뇰은 1953년 12월 루뱅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후 독일 본대학에서 “조선에서의 첫 대목구 설정과 가톨릭교회의 기원”이라는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때 그가 발굴해낸 서한과 문서들은 초기 한국천주교회사 연구의 기틀을 닦았다는 점에서 매우 뜻깊은 것이었다.22) 한국에 돌아온 그는 대신학교 교수로 임용되었고, 1964년에 한국교회사연구소를 창립하였다. 이후 교회사연구소를 통해 다양한 자료를 수집·정리하고, 이를 자료집으로 간행하여 교회사 연구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특히 『뮈텔 문서』의 발굴과 번역은 한말에서 일제강점기에 이르는 시기의 한국 천주교회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뮈텔 대주교가 작성한 일기에는 교회가 남대문상업학교를 인수할 때 겪었던 어려움도 언급되고 있어 동성 100년의 역사를 돌아보는 데도 매우 유익한 사료적 가치가 있다. 예를 들어 학교 인수 당시, 뮈텔 대주교는 “고등학교의 유익성에 대해 나는 그들과 같은 의견이지만 우리를 주저하게 하는 것은 오로지 재정 문제”이며, “학교의 책임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교구는 필연적으로 그 재정을 책임지게 될 것”23)이라면서 자신의 일기에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었다. 이처럼 최석우 몬시뇰의 선구자적인 교회사 연구 여정은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와 더불어 동성학교의 역사를 정립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3) 한국인의 영원한 정신적 지도자가 된 동성인, 김수환 추기경

 

김수환 추기경(1922~2009)은 동성이 배출한 교회 지도자이자, 한국인의 영원한 정신적 지도자이다.(동성 16회, 소신학교 9회) 대구에서 태어난 그는 1935년에 동성상업학교 을조 과정에 입학하여 사제가 될 준비를 했다. 그는 1941년에 동성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조치대학(上智大學)으로 유학을 갔지만,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갖은 고생을 했다. 광복 후 한국 성신대학에 편입하여 신학 공부를 마치고, 1951년에 대구대목구 소속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독일 뮌스터대학에서 그리스도교 사회학을 공부하였으며, 한국에 돌아와 가톨릭시보사 사장을 맡았다. 1966년에 마산교구장, 1968년에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되었으며, 1969년에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이로써 그는 한국 최초이자, 당시 전 세계를 통틀어 최연소 추기경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었다. 이후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세상 속 교회’라는 사목 목표를 세우고, 사회 곳곳에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을 보살폈다. 특히 사람들의 자유를 억압하는 군부 정권과의 대립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그는 전국에 생중계 된 1971년 12월 25일 예수성탄대축일 강론을 통해 박정희 정권의 유신헌법 제정 시도를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고, 1974년 지학순 주교(1921~1993)가 구속되었을 때 정권의 협박에도 지학순 주교를 끝까지 옹호했다.24) 또한 그는 1980년 5·18민주화운동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고,25) 1987년경 경찰의 고문에 의해 사망한 박종철(1964~1987)의 고문치사 사건을 세상에 알렸으며, 전두환 정권의 호헌조치에 반발하여 시위를 벌이다 명동성당으로 피신한 대학생들을 끝까지 지켜주었다.26) 이렇듯 김수환 추기경은 복음과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사회적 약자와 민주주의를 위해 평생을 헌신했다. 때문에 그는 지금까지도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히고 있으며, 한국 천주교회 내에서는 그를 성인(聖人)으로 추대하려는 시복 운동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27)

 

한편 김수환 추기경이 동성상업학교에 다니던 시절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일제가 한국인을 전쟁에 총동원하던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었고, 학교 측은 이를 보고도 묵인해주었다. 더욱이 갑조(상업 과정) 선생님들은 을조 수업에 들어오면 “3·1운동, 일제 식민통치 만행 등 민족혼을 일깨워주는”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해주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선생님의 그런 얘기를 들을 때면 피가 역류하는 듯 울분이 치밀고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그럴 때는 신학생이 아니라 나라를 빼앗겨 신음하는 백성이었다. 선생님들이 조국애를 부추긴 건지, 아니면 정의감이 부쩍 자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일제에 대한 울분이 치솟을 때마다 그 심정을 일기장에 토해놓곤 했다. 서랍에 넣어둔 그 일기장을 들켜 교장 신부님께 불려가서 호되게 꾸지람을 들은 적도 있다.”28)

 

또 이런 일도 있었다.

 

“동성학교에 다닐 때의 일이었습니다. 선생님들이 수업 시간에 한일합방 때의 이야기를 많이 들려 주었는데, 그럴 때마다 일기에다가 반일적인 이야기를 쓰곤 했습니다. … 또 한 번은 수신 시험을 보는데, ‘청소년 학도에게 보내는 일본 천황의 칙유를 받들고 황국 신민으로서의 소감을 써라’하는 문제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시험지를 받고 ‘① 나는 황국 신민이 아님 ② 따라서 소감이 없음’이라고 써냈습니다. 그것 때문에 학교에서 쫒겨날 뻔했는데, 당시 교장이신 장면 박사님이 이해해 주시고 타일러서 괜찮았습니다.”29)

 

이러한 그의 민족주의적인 성향은 민족자강 운동으로 설립된 소의학교로부터 이어오는 동성학교의 애국·애족적 학풍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앞서 언급했듯 소의학교의 3대 교장이었던 민강 선생은 교육을 통해 독립운동을 펼쳤고, 이러한 분위기는 1929년에 발생한 광주항일학생운동에 동참하려는 남대문상업학교(동성상업학교의 전신) 학생들의 만세 운동으로 분출되기도 했다.30) 그것은 중일전쟁(1937~1945)이 태평양전쟁(1941~1945)으로 확전되며 일제의 압박이 극단으로 치닫는 상황 속에서도 일제의 만행을 알려주던 동성상업학교 교사들 속에서, 반일·항일적인 태도를 보이던 김수환 신학생을 감싸준 교장 장면 박사의 태도 속에서 다시 확인된다. 바로 이러한 분위기에서 김수환 학생이 동성상업학교를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김수환 추기경은 서울대교구장 재임 기간 동안(1968~1998) 동성중·고등학교의 모(母)법인인 천주교 서울대교구 유지재단과 학교법인 가톨릭학원의 이사장을 맡아, 동성학교의 성장을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특히 그는 교회가 보다 적극적으로 학교 교육 사업에 매진할 수 있도록 1994년 9월에 학교법인 가톨릭학원을 설립하여, 기존의 천주교 서울대교구 유지재단으로부터 학교 운영 조직을 분리시켰다. 또한 그는 2005년 『사립학교법』 개정안에 대해 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힘으로써, 국가로부터 가톨릭 학교의 정체성과 종교의 자유를 지켜내기 위해 노력했다.31) 이와 같은 그의 분명한 입장을 통해, 일제에 맞서 가톨릭 학교의 정체성을 지키려고 했던 교회 지도자들과 동성상업학교 교사진 그리고 그들과 함께 동성의 정체성을 유지해나간 수많은 동성인들의 자취를 발견할 수 있다.32) 가톨릭 학교의 정체성을 지켜내려는 김수환 추기경의 의지는 후일 동성고등학교의 자사고 지정을 위한 노력으로 이어졌다. 비록 지금은 자사고 지정을 철회하였지만, 앞으로도 가톨릭 학교 교육을 향한 김수환 추기경의 정신은 동성학교가 가톨릭 학교로서 정체성을 유지해나가는데 큰 밑거름이 될 것이다.

 

(4)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새로운 복음화와 교회의 가치를 추구한 동성인, 염수정 추기경

 

2012년부터 2021년까지 서울대교구장직을 수행한 염수정 추기경(1943~ ) 역시 동성 출신(1959년 졸업, 동성 33회)이다. 그는 동성중학교와 성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신대학에 입학하여 1970년 12월에 동성 선배인 김수환 추기경으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후 후배들을 양성하기 위해 성신고등학교 교사로 활동하고, 서울대교구 여러 본당의 주임 사제로 신자들과 희노애락을 함께 해왔다. 또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로 후배들과 함께 지내기도 했다. 2001년 12월에 서울대교구 보좌 주교로 임명을 받았다. 2002년부터 서울대교구 총대리 주교로서 교구 행정업무를 총괄했다. 2012년 5월에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되었고, 2014년 2월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염수정 추기경은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신자들의 신앙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노력해왔다. 이를 위해 그는 교구장 재임 이후 첫 사목교서를 발표한 2013년부터 매년 사목교서의 주제를 ‘새로운 시대, 새로운 복음화’(2013), ‘말씀으로 시작되는 신앙’(2014)과 ‘기도로 자라나는 신앙’(2015), ‘교회의 가르침으로 다져지는 신앙’(2016), ‘미사로 하나되는 신앙’(2017), ‘사랑으로 열매맺는 신앙’(2018)으로 설정했다. 이를 통해 교구민들의 신앙을 튼튼하게 다져 전임 교구장 정진석 추기경이 제안한 ‘새로운 복음화’가 교구 안에 실현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독려했다. 또한 2019년부터는 ‘선교의 기초이며 못자리인 가정 공동체’(2019), ‘복음의 기쁨을 선포하는 본당 공동체’(2020), ‘복음의 기쁨을 증거하는 교구 공동체’(2021)로 주제를 설정하여, 교구민들이 튼튼해진 신앙을 바탕으로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강조하신 『복음의 기쁨』33)을 각 가정과 본당, 교구에서 살아갈 것을 촉구했다. 실제로 그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이하 코로나-19)으로 모두가 움츠리던 2020년경 한국 천주교회의 심장인 명동성당에 한 끼 식사도 마련하기 힘든 가난한 이들을 위한 무료 급식소 ‘명동밥집’ 설립을 준비하고, 2021년 1월에 개소식을 열어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에게 먹을 것과 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했다. 그것은 팬데믹 시대에 신앙인이 살아가야할 복음의 기쁨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한 염수정 추기경은 사회적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교회가 추구하는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예를 들어 그는 낙태 찬성 분위기에 결연히 반대함으로써 생명 경시 풍조에 맞서왔다.34) 그리고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과 공격은 비판했지만, 동성혼은 반대하였다.35) 이러한 그의 행보는 한국 천주교회가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빛과 소금(마태 5,13-16)의 역할을 다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사실 새로운 복음화의 실현과 교회의 가치를 지키려는 염수정 추기경의 사명감과 노력은 보좌신부 시절에 벌어진 한 사건 속에서 일찌감치 확인된다.36) 1972년경 서울 당산동성당 보좌신부였던 그는 중고등부 학생들과 함께 인천 덕적도에 여름신앙학교를 떠났다. 그런데 첫날밤 불량배들이 여학생 텐트를 덮치다 발각되어 남학생들에게 두들겨 맞았다. 이윽고 다음날 아침 여러 명의 불량배가 흉기를 들고 찾아와서 학생들을 위협했다. 그때 염수정 신부가 학생들을 대신해 홀로 앞으로 나섰다.

 

“나는 여기 인솔자이며 천주교회 신부요, 여기 학생들의 모든 일은 내가 책임지게 되어 있습니다. … 모든 책임은 내게 있소. 그러니 바로 내가 가해자요, 나를 당신들 손에 맡길 터이니 여기 학생들은 손대지 마시오.”

 

불량배 두목은 염수정 신부를 무릎 꿇린 뒤, 학생들에게 두들겨 맞은 부하에게 야전삽으로 그를 때려죽이라고 했다. 염 신부는 아무 말 없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야전삽을 든 불량배는 차마 염 신부를 치지 못하고, 오히려 울면서 그에게 용서를 빌었다. 이처럼 염수정 추기경은 자신에게 맡겨진 양떼와 교회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데 망설임이 없던 동성인이었다.

 

그것은 순교로 신앙을 증거한 집안 조상의 모범을 따르는 것이기도 했다. 순교자의 후손인 염수정 추기경은 교구민들의 신앙 생활을 위해 순교자에 대한 공경과 신심을 고취시키고자 노력했다. 대표적인 사업이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조성이었다. 서소문 밖 네거리는 19세기에 벌어진 박해[신유박해(1801), 기해박해(1839), 병인박해(1866, 1868, 1871)]로 총 82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한 땅이다. 염수정 추기경은 서울대교구 보좌주교 겸 총대리였던 2011년에 서울특별시 중구청장을 만나 서소문 밖 네거리에 대한 성지 개발을 요청하였고,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였다. 결국 서소문 밖 네거리는 2019년 6월 1일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으로 다시 태어나게 됐다.

 

한편 염수정 추기경은 소신학교 과정이 성신중·고등학교로 분리되어 나간 후였던 1956년에 동성중학교에 입학했다. 즉, 그는 소신학생이 아닌 일반 중학생으로 동성중학교를 다녔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하는 과정 중에 교회 기관지였던 『경향잡지』에 게재된 성신고등학교 입학 안내문을 보고 사제가 될 결심을 하게 되었다.37) 다시 말해 비록 동성학교는 더 이상 소신학교로 기능하지 못했지만, 여전히 사제 성소의 못자리로서 많은 동성인들을 성소의 길로 초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이어져온 동성의 역사는 2010년에 예비신학생반이 동성고등학교에 설치되며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됐다. 그것은 2009년에 동성고등학교가 자사고 지정을 받게 되면서, 국가 교육 정책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율성을 갖는 종교 교육 과정을 실시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38) 그렇게 입학한 동성고등학교 예비신학생반 학생 가운데 14명이 2013년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 입학하는 결실을 맺게 되었고,39) 후배들이 그 뒤를 이어가고 있다.

 

사실 1983년에 성신고등학교가 폐교되면서40) 한국 천주교회 안에 소신학교 제도는 사라졌다. 이후 예비신학생들은 각 교구나 수도회가 운영하던 성소 모임(예비신학생 모임)을 통해 관리 및 양성을 받아왔다. 하지만 부실한 예비신학생 관리와 사제 성소의 감소로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소신학교 성격의 예비신학생반이 동성고등학교에 부활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동성 선배이자 서울대교구 총대리, 교구장이면서 동성고등학교의 모법인인 학교법인 가톨릭학원 이사장이었던 염수정 추기경의 전폭적인 지지가 없었다면, 동성고등학교 예비신학생반의 설치와 운영은 아마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2) 동성의 빛을 받아 세상을 비추는 동성인들

 

동성학교는 ‘진리와 사랑으로 봉사하는 인간’을 양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다. 그 결과 많은 동성인들이 한국 사회의 누룩으로서 제 역할을 다해왔다. 그들은 동성학교에서 배운 바를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다. 여기서는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는 동성인들을 소개하려고 한다.

 

(1) 한국 만화의 대부, 고우영 화백

 

고우영 화백(1938~2006)은 동성고등학교 32회 졸업생이다.(1958년 졸업) 동성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추동성’이라는 필명으로 만화계에 입문하였다. 그의 필명은 동성고등학교에서 따온 것인데, 그의 만화 세계에서 동성이 빠질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졸업 후였던 1972년경 그는 『임꺽정』을 연재해 큰 호응을 얻으며 본격적인 만화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후 『수호지』 · 『삼국지』 · 『초한지』 · 『십팔사략』 · 『가루지기전』 · 『일지매』 등 중국과 한국의 고전을 재해석한 연재물을 연달아 발간하여 한국을 대표하는 만화가로 우뚝 서게 되었다. 그는 고전 문학을 자신의 것으로 흡수하여 만화로 재탄생시키는 데 탁월한 역량을 보였고, 만화와 현실을 절묘하게 조화시켜 현실 비판적인 메시지를 독자들에게 전하는데 능통했다. 또한 그의 만화는 조선시대 풍속화를 연상시키는 매력이 있었다. 이처럼 그는 만화라는 매개를 통해 우리나라의 과거와 현재를 가장 한국적으로 표현한 천재 만화가이자, 한국 만화의 대부로 평가받고 있다. 동성인이 함께 부르는 교가처럼 그는 만화계에서 “크게 쓰는 일꾼이 되어 거룩한 빛을 내는” 자랑스런 동성인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동성고등학교에 다닐 때, 그는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다. 다른 종립학교들과는 달리 동성학교는 1922년 서울대목구가 학교를 인수할 당시부터 학생들에게 종교를 강요하지 않았고, 천주교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익숙해지도록 할 뿐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학교를 다닌 학생들은 오랜 시간이 흘러 천주교에 입교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41) 고우영 화백의 경우가 그러했다. 그는 50대 중반이 되어 세례를 받고 성당에 다니기 시작했다. 이후 동성에서 뿌려진 복음의 씨앗이 조금씩 그에게서 꽃피기 시작했다. 그는 많은 청년들을 사제 성소의 길로 이끈 A.J. 크로닌의 1941년 작 『천국의 열쇠』(The Keys of the Kingdom)를 만화로 각색하여 출간했고,42) 홍문택 신부와 협업하여 『교리책 밖의 교리 이야기』 시리즈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43) 이어서 성경 전체를 만화로 옮길 구상을 하기도 했으나, 전에 앓았던 대장암이 재발하여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2) 미국인에게 한국의 정신을 알린 태권도 대부, 이준구 사범

 

동성학교의 교기(校技)는 태권도이다. 국가로부터 “우리 민족 고유 무도(武道)”44)로 인정받고 있는 태권도를 애국·애족 정신의 요람인 동성학교가 교기로 삼고 있는 것은 일면 자연스러워 보인다. 동성학교는 1977년에 태권도를 교기로 삼았다. 이후 학교 차원에서 유단자를 배출하는 등 학생들에게 적극적으로 태권도 수업을 진행하였다. 또한 같은 해에 태권도부를 창설하여 태권도 선수들을 양성했다. 이후 동성고등학교 태권도부는 다수의 국가대표를 배출하고 수차례 전국대회 우승을 차지하는 등 태권도 명문 사학으로 모교의 이름을 드높였다.45) 특히 동성 68회 김경훈 선수가 2000년 시드니올림픽 태권도 남자 헤비급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어 국위를 선양함으로써, 100여 년 전 민족자강운동의 일환으로 세워진 동성학교의 설립 취지를 새삼 일깨웠다.46)

 

그러나 동성학교의 태권도에서 잊어서는 안 될 인물이 있다. 미국 태권도의 대부 이준구 사범(Jhoon Rhee, 1932~2018, 동성 24회)이다. 그가 동성중학교에 다니던 1946년 당시 우리나라에는 9대 태권도 체육관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그 가운데 하나인 청도관에 다니며 태권도를 연마했다. 1950년에 동성중·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1956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태권도장을 차렸다. 이후 미국 국회의원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치는 등 미국에 태권도를 알리는데 헌신했다. 중국계 무술 배우 이소룡(Bruce Lee, 1940~1973), 권투계의 영웅 무하마드 알리(Muhammad Ali, 1942~2016)와 교류할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다. 한편 그는 태권도의 대중화를 위해 태권무(Martial Ballet)를 창안하여 미국인들에게 보급했다. 음악에 맞춰 태권도 동작을 할 수 있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쉽게 태권도를 따라할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47) 후일 태권무는 미국에서 한국으로 역수입되기도 했다.48) 그가 창안한 태권무는 여러 흐름의 태권도 율동·공연의 뿌리가 되어 오늘날 한국 태권도계에 널리 확산되어 있으며, 태권도를 활용한 문화융합 컨텐츠 개발의 주요 사례로 소개되고 있다.49)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은 그는 미국 레이건 대통령(Ronald W. Reagan, 1911~2004), 부시 대통령(George H. W. Bush, 1924~2018)의 ‘체육·교육 특별고문’과 대통령 ‘아시아 태평양 정책자문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또한 그는 1996년에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오늘의 등불상을 받았고, 2000년에는 ‘미 역사상 가장 성공하고 유명한 이민인 203인’에 선정되었다. 2003년에는 미국 수도 워싱턴 D.C.가 6월 28일을 ‘준리(이준구의 미국명: 필자 주)의 날’로 선포하기도 했다.50) 이처럼 그는 우리 민족의 고유 무도인 태권도를 미국 사회에 널리 전파하고, 미국 지도층의 모범이 됨으로써 한국인의 정신을 온몸으로 증명해보였다.51)

 

한편 중학생 시절 이준구 사범은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 1926~1962)가 출연한 영화를 본 뒤, 금발의 미국인 미녀와 결혼하겠다고 결심했다. 그가 이러한 꿈을 이루기 위해 실제 미국으로 떠날 수 있었던 것은 동성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영어 교사였던 김광 선생님52)이 그에게 뿌린 칭찬의 씨앗 때문이었다. 당시 특별한 두각을 보이지 않았던 그에게 선생님께서 영어 교과서의 일부를 읽고 해석을 해보라고 권하셨다. 그가 일어나 지목한 부분을 해석하자, 선생님은 동료들 앞에서 “혼자 하기엔 좀 어렵다 싶은 부분이었는데 준구가 잘”했다고 그를 칭찬해주셨다. 이를 계기로 그는 영어에 자신을 가지게 되었고,53) 열심히 영어 공부를 했다. 선생님의 칭찬은 미국에 가고 싶었던 이준구 학생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이처럼 어린 시절 교사가 뿌리는 칭찬은 한 아이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데, 그 긍정적인 사례가 동성고등학교의 사제지간에 벌어졌던 것이다.

 

(3) 진리와 사랑으로 봉사하는 영화배우, 안성기

 

안성기(1952~ )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영화배우이자, 동성고등학교를 졸업한 동성 43회 출신이다.(1969년 졸업) 아버지 안화영54)을 따라 다섯 살 때인 1957년에 영화계에 데뷔했고, 지금까지 60년 이상 배우로서 국민들의 끊임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 그는 어린 시절 시작된 연예 활동으로 젊은 날 많은 방황을 했지만, 그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의 자신이 있다고 고백했다.55) 동성고등학교는 그 어려운 시기를 그와 함께 했다. 어린 시절 얻게 된 인기로 혼란스러웠던 그를 붙잡아준 것은 동성고등학교였다. 공부와 거리가 멀었던 그가 고3 내내 학교 도서관에서 살았던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당시 그는 친구들끼리 작심하여 머리까지 삭발했으며, 그때를 잊을 수 없다고 회고했다.56) 그만큼 교우 관계도 좋았던 것이다. 그렇게 젊은 날의 방황을 끝내고 영화계로 돌아온 그는 수십 편의 영화에 출연하면서도 그 흔한 구설에 휘말리는 법이 없었다.

 

이처럼 자타공인 누구나 인정하는 훌륭한 배우이지만, 그는 “과연 훌륭한 배우는 어떤 배우일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동료들 속에서 그 해답을 찾는 겸손한 배우이기도 했다.

 

“어느날 나(안성기: 인용자 주)는 우연한 기회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당시 나는 최인호 형의 원작인 ‘깊고 푸른 밤’에 캐스팅되어 촬영을 하고 있었다. 여관 방에서 밤새 시나리오 작업을 하는 감독과 형에게 가끔 먹을 것을 사들고 가서 일도 도와주고 이야기도 나누었는데, 내 마음을 읽었는지 인호형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모든 일에 있어서 기술적인 것보다는 인격적인 것이 앞선다고 생각한다. 영화도 마찬가지야. 좋은 사람이 좋은 연기를 하고 좋은 영화도 만들 수 있겠지.” 바로 그 말이 내게 해답을 주었다. 육체와 마음이 건강해야 살아 있는 연기를 할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작품을 빛낼 수 있는 것이다. 훌륭한 인격자가 바로 훌륭한 배우의 밑거름이라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해준 말이었다.”57)

 

“훌륭한 연기는 기술보다 인격이 앞선다.”는 그의 글 속에서 ‘진리와 사랑으로 봉사하는 인재 양성’이라는 동성중·고등학교의 건학 이념이 떠오른다. 실제 그는 말 뿐만 아니라 삶으로 동성인의 삶을 살아왔다. 예를 들어 일본인 무라야마 도시오(村山俊夫)는 1994년에 열린 도쿄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을 맡은 안성기의 통역을 일주일 간 맡았다. 이때 그는 안성기의 인품에 반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안성기의 평전 『청춘이 아니라도 좋다』58)를 직접 저술하기까지 했다.59) 한편 안성기는 1980년대부터 유니세프의 각종 행사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하고, 1992년 12월에는 유니세프한국사무소 특별대표, 1993년 5월에는 유니세프 친선대사에 임명되어, 지금까지 전 세계의 가난한 아이들을 돕는데 헌신하고 있다.60) 최근에는 서울성모병원에 1억 원을 기부하는 등 자선 행위도 이어가고 있다.61)

 

안성기는 교회의 사람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2005년에 황우석 교수가 배아줄기세포 생산에 성공했다고 발표를 하면서 일약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하지만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은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대체할 수 있는 성체줄기세포 연구를 위해 100억 원을 지원하고, 교구 내에 생명위원회를 발족하는 등 황우석 교수의 연구 활동을 적극 반대했다.62) 이 때문에 정진석 추기경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당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진석 추기경은 안성기에게 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 생명 홍보대사를 맡아달라고 부탁했는데,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수락했다.”고 한다. 당시 상황에 대해 그는 “걱정이 없지 않았지만, 교회에 순명하는 마음이었다.”63)고 회고했다. 자신에 대한 사회적 평판과 이익을 뛰어넘어 ‘진리에 봉사’하는 동성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언행이었다. 이밖에도 그는 교회와 관련된 일이면 서슴지 않고 참여했다. 2014년에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명동성당에서 집전한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에서 독서를 낭독하고, 2022년 11월에 개봉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1821~1846)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탄생’에서는 성 유진길 아우구티노(1791~1839)의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는 “유진길이 큰 역할은 아니지만 제가 신자이기 때문에 의무감을 가지고 있다.”면서 자신이 천주교 신자임을 당당하게 밝혔다.64)

 

(4) 위인들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아주는 전기 작가, 이충렬

 

작가 이충렬(1954~ )은 우리나라에서 찾아보기 힘든 전기 작가로서, 한국 전기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연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 역시 동성중·고등학교를 다닌 동성인이다.(동성 46회) 동성학교에 다니던 시절 그는 문학가를 꿈꾸며 청계천의 헌책방을 오갔다. 이후 문학가로서의 꿈을 이루기 위해 단국대 국문학과에 입학했지만, 아버지의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1976년에 급하게 파라과이로 농업 이민을 떠났고, 1980년에 미국으로 넘어갔다. 어렵게 생활고를 넘기던 그가 의지하기 시작한 것은 글쓰기였다. 그렇게 1994년 ‘실천문학’ 봄호에 단편 소설 『가깝고도 먼 길』로 등단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잡화점 일을 하면서 틈틈이 위인들의 전기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출판된 전기가 2010년에 나온 『간송 전형필』65)이었다. 이후 그는 『혜곡 최순우, 한국미의 순례자』,66)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67) 등 미술 관련 위인들의 전기를 연달아 출간했다. 이후 보다 다양한 분야의 위인들을 다루기 시작하여 『국제법학자, 그 사람 백충현』,68) 『아름다운 사람 권정생』,69) 『천년의 화가 김홍도』70) 등의 전기물을 출간했다. 이렇듯 우리 사회에 잘 알려지지 않거나,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위인들의 생애를 독자들에게 새롭게 드러내 보인 그의 작업은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드높이는데 기여했다. 동성학교의 저변에 깔려있던 애국·애족 정신이 그의 열정적인 전기 집필의 원동력이었다면 과장된 것일까?

 

한편 이충렬 작가는 교회 인물에 대한 전기 집필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그렇게 출간된 첫 작품이 『아, 김수환 추기경』 1-2권이었다.71) 그의 동성 선배이기도 했던 김수환 추기경의 삶과 정신은 우리 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그의 일생을 총체적으로 정리한 전기는 아직까지 없었다. 특히 추기경의 생애에는 공백이 많았는데, 그는 꾸준한 자료 수집을 통해 그 공백을 메울 수 있었다. 이후 그는 의사이면서 아프리카 아이들을 위해 헌신하다 선종한 이태석 신부(1962~2010)의 일대기를 그린 『신부 이태석』72)과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신부의 전기 『김대건, 조선의 첫 사제』73)를 연이어 출간했다. 그는 이러한 교회 위인전을 통해 한국 천주교회 구성원들이 교회 위인들의 생애를 쉽게 접하고, 이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아나갈 수 있도록 이끌고 있다. 특히 그가 출간한 교회 위인전들은 한국교회사연구소와 살레시오회, 교회사 연구의 권위자 조광 교수 등의 감수를 거친 공식(정본) 전기물로써 사료로서의 가치도 매우 높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점에서 그의 교회 위인전은 동성 선배 최석우 몬시뇰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으며, 또 그것을 대중들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전기의 형태로 책을 출간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동성학교는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와 저술의 기틀과 방향을 선도적으로 제시하는 인물들을 지속적으로 배출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 천주교회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3) 빛나는 동성을 일구어낸 스승들

 

수많은 동성인들이 세상 속에서 동성의 빛을 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빛을 전해준 동성의 스승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성학교에는 유난히 타의 모범이 되는 스승들이 많았는데, 그들이 있어 오늘의 동성학교와 동성인들이 존재할 수 있었다. 그들 가운데 특별히 기억해야할 스승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1) 동성학교의 기틀을 닦은 박준호 선생

 

지난 100년 간 동성학교가 동방의 빛으로서 한국 사회에 크게 기여할 수 있었던 것은 복음화와 전인 교육을 위해 헌신해온 스승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1924년 5월에 동성상업학교 2대 교장에 취임한 박준호 선생(1884~1936)은 취임 2년 전(1922) 서울대목구가 인수한 남대문상업학교를 진정한 가톨릭 학교로 탈바꿈시킴으로써 오늘의 동성학교를 있게 한 참 스승이었다.

 

박준호 선생은 1908년 전라북도 고산 되재성당에서 운영하는 태극계명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태극계명학교는 되재성당 주임 베르몽 신부(Jules Victor Marie Bermond, 1881~1967)가 기존에 있던 본당 학교를 ‘태극계명학교’로 명명하고, 4년제로 운영하던 학교였다. 여기서 그는 사재를 털어 학교 부설 ‘측량강습소’를 설립하고 직접 소장을 맡아 학생들에게 근대적 실업교육을 제공하면서 교육 사업에 헌신했다.74)

 

이후 서울로 상경한 박준호 선생은 36세에 경성 전수학교에 입학하여 법률을 공부했으며, 졸업 후 원주 재판소 서기보를 거쳐 전주 지방 법원, 경성 재판소에서 판사로 활동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서울대목구 청년회연합회 회장을 맡는 등 교회 활동에 전념하였고, 서울대목구가 남대문상업학교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재정 문제로 학교 인수에 난색을 표하던 서울대목구를 설득한 것도 그였다. 그와 “청년회 회원들은 모금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약속했다.”75) 그의 노력으로 서울대목구는 학교를 인수하기로 결정했고,76) 오늘의 동성중·고등학교가 있게 됐다.

 

박준호 선생은 남대문상업학교 초대 교장이었던 방규환 선생(1889~?)이 1924년에 사임하자, 후임으로 교장에 취임했으며 계성보통학교 교장까지 겸임하게 되었다. 그의 취임 이후, 남대문상업학교는 1회 졸업생 배출(1926), 을조 과정(소신학교 과정) 설정(1929), 혜화동으로 교사(校舍) 이전(1929, 본래 남대문 인근 봉래동에 있었음), 동성상업학교로 학교명 변경 등(1931) 급속도로 성장하는 시기를 보냈다. 이 시기 박준호 선생은 제자들의 사회 진출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노력하였다. 이로 인해 대부분의 학생들이 졸업 전에 직장이 결정되어 있을 정도였다. 이로 인해 동성 졸업생들은 은행과 금융 조합 등 주요 기관과 개인 사업체에 취직할 수 있었고, 사회의 주역으로 성장해 나갔다.77) 밤낮으로 동성상업학교를 위해 일하던 그는 1936년 5월경에 위암을 발견했고, 교장으로 재직 중인 9월 19일 선종했다. 당시 한국 천주교회는 박준호 선생을 이렇게 기억했다.

 

“동성상업학교장 요안 박준호씨는 천만몽외(千萬夢外)의 난치병에 걸려 양양한 전정을 중단하고 53세를 일기로 드디어 금월 19일에 이 세상을 떠나가고 말았다. … 씨(박준호 선생: 인용자 주)의 노력으로 해를 따라 발전의 도정에 쾌주하고 있는 동성, 계성 양 학교는 뜻하지 아니하였던 찬 공기의 저기압이 다다랐다. 씨는 신덕자요, 교육가요, 사업가였다. … 이런 사업을 위하여 하루에도 대 경성 바닥에 거미줄을 늘이는 듯이 몇 번이고 발길을 다시 곱처 동분서주로 노력과 희생을 생명과 같이 알았었다. 교회사업과 교육을 위하여 관적을 바치고, 물질을 바치고, 시간을 바치고, 폼을 바치고, 정신을 바쳤으며 결국은 이런 입장에서 생명을 마쳤었다. 씨는 신성한 교회와 악화된 사회의 서있기 어려운 반대적 기로에서 진리와 도덕과 양심과 종교적 교육을 위하여 땀을 많이 흘렸을 뿐더러 심혈까지 기울인 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씨는 과연 신덕이 깊었었다. 주교의 명령과 성직자의 말이라면 맹목적으로 순종하였었다. 그러한 관계로 그의 사업은 주의 강복을 받았었다. … 우리 교중으로서는 씨를 모방하여 저러한 열성과 희생을 제공할 자가 속출하기를 기대하여 마지않는다.”78)

 

박준호 선생의 교회 사랑은 그의 자녀에게로 이어졌다. 아들 박병래(1903~1974)는 1924년 경성의학전문학교(현 서울대 의과대학)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교수로 활동했다. 하지만 1936년에 서울대목구가 성모병원을 설립하자, 지체 없이 교수직을 내려놓고 성모병원 초대 원장을 맡았다.79) 당시 원장의 월급은 300원이었지만, 아버지 박준호는 젊은 아들에게 돈이 많으면 안 된다면서 월급을 200원만 받도록 했다.80) 돈보다는 의술 그리고 봉사가 중요하다는 것을 아들에게 알려준 것이었다. 그러한 아버지 곁에서 성장한 박병래는 헌신적인 노력으로 성모병원을 이끌었으며, 그 결과 지금의 가톨릭중앙의료원(CMC)이 존재하게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2) 한국 가톨릭 학교 교사의 모범을 보여준 장면 박사

 

박준호 선생의 뒤를 이어 동성 3대 교장으로 취임한 선생은 장면 박사(1899~1966)였다. 일찍이 그는 천주교 학교인 인천 박문학교 보통과와 고등과를 다녔다. 이후 수원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한 그는 1917년부터 용산예수성심신학교에서 소신학교 과정 학생들에게 중등 교육에 해당되는 일반 교과를 가르쳤다. 평신도가 신학교의 정교사로서 신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한국 천주교회사를 통틀어 최초의 일이었다. 그는 신학생들 사이에서 “약관의 젊은 청년이었지만 신앙이 깊고 인격이 높고 덕망 있는 초빙 교사로 … 신학생으로부터 상당한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81) 그는 1921년에 미국 맨해튼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25년경 한국에 돌아온 그는 평양지목구의 일을 돕다가 1930년부터 동성상업학교 교사와 서무주임(행정실장)으로 활동하였다. 1936년 11월 박준호 선생의 갑작스런 임종으로 공석이 된 동성상업학교 교장에 취임하게 되었다.

 

장면 박사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일제의 압박이 강하게 밀려오던 1930년대 후반 동성상업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그의 탁월한 리더십은 위기의 상황에서도 동성상업학교를 굳건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어 장면 박사가 동성상업학교 교장에 취임했을 때, 동성상업학교는 서울대목구 소유의 학교임에도 학교 모법인이었던 경성구천주교유지재단의 이사장은 서울대목구장이었던 라리보 주교가 아니라 평양 출신 전좌현이라는 인물이 맡고 있었다. 장면 박사는 이를 바로잡기 위해 재단 이사들을 설득했고, 특히 총독부 측근이었던 일본인 이사 후꾸지마(福島之助)를 설득하기 위해 일본까지 다녀왔다. 그 결실로 1938년 11월 21일자로 라리보 주교가 경성구천주교유지재단 이사장에 취임할 수 있었다.82) 이로써 동성상업학교는 명실상부한 가톨릭 학교로서 제자리를 찾게 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장면 박사는 총독부에서 비밀리에 파견되어 동성상업학교를 좌지우지하던 일본인 교사를 학교에서 내보내고, 한국인 교사를 우대하는 등 서슬 퍼런 일제의 압박 속에서도 동성상업학교를 민족 정신이 살아있는 학교로 만들고자 노력했다.83)

 

이후 그는 동성상업학교 교장으로 1947년까지 총 17년간 재직하며 학교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였다. 강당을 건축하고, 혜화동로터리 도로 공사를 계기로 운동장을 새롭게 옮겼다. 졸업생들은 계속하여 취업에 성공하였고, 소신학생들은 대신학교에 입학하여 사제가 되었다. 앞서 살펴본 김수환 추기경과 최석우 몬시뇰을 비롯하여,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와 제주교구장 김창렬 주교(1927~ ) 등 저명한 교회 지도자들이 장면 박사와 사제 관계를 맺었다. 또한 그는 광복을 맞게 된 한국 사회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상업학교를 일반 인문계 학교로 전환하였다. 이 과정에서 동성상업학교 을조에 속해 있던 소신학교를 경성천주공교신학교 부설로 옮기는데 협력하고, 1946년 9월 1일자로 동성상업학교를 동성중학교로 변경했다. 그는 동성학교에 재직하던 기간동안 학생들 사이에서 신앙의 모범이 되었다.84) 노기남 대주교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그는 수천 명의 학생을 교육하는 교직자로 봉급이나 어떤 물욕에는 초연하고 언제나 궁극의 목적은 ‘종교’ 거기에 두었다. 별로 말이 없이 묵묵히 실천만 하는 그는 모든 일을 은연중에 신앙의 정신으로 이끌었다. 교장직에 있으면서도 모든 행동과 교육 방법을 그리스도 정신으로, 전교의 목적 의식에 투철하여 자연히 학생들도 그의 신앙적 교육에 감화되었으며 많은 학생들이 이를 본받아 입교하기도 하였다.”85)

 

이는 교사들이 “자신들과 학생들에 대한 사랑으로 서로 결합되고 사도정신으로 충만하여 삶과 가르침으로 유일한 스승이신 그리스도께 증거를 보여 드려야 한다.”고 선언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가르침을 떠올리게 한다.86) 이처럼 장면 박사는 공의회가 열리기전부터 이미 가톨릭 학교에 재직하는 교사의 임무를 깨닫고 실천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광복 후, 장면 박사는 1946년에 열린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으며, 1947년 8월에 동성상업학교 교장직을 사임하고 정계에 진출했다. 그리고 1948년에 열린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해 12월에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총회 한국 대표단 대표로 참석하여, 신생 국가 대한민국의 국제 승인을 얻어냈다. 이후 주미 한국대사로서 미국의 승인을 받았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국제 사회의 지원을 얻는데 전력을 다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1948년에 맨해튼대학, 1950년 영국 포담대학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1년 국무총리가 되었으나, 이후 이승만 정권의 대안으로 부상하면서 이승만 대통령(1875~1965)과는 정적(政敵)이 되었다. 이후 민주당을 창당하고, 1956년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해 피격사건이 벌어지는 등 장면 박사에 대한 이승만 정권의 노골적인 탄압이 지속되었고, 1960년에 있었던 3·15 정·부통령 선거에 부통령으로 출마했으나, 부정선거로 인해 낙선했다. 4·19혁명 이후, 의원내각제의 제2공화국이 수립되고, 이어진 총선에서 그가 속한 민주당이 집권하게 되었다. 이때 장면 박사가 국무총리로 선출됐다. 그는 집권했던 9개월의 시간동안 다양한 개혁 작업을 추진했으나, 독재 정권으로부터 억눌려있던 민의가 폭발하면서 한국 사회는 혼란기를 맞았다. 이를 틈탄 군부세력이 1961년 5월 16일에 쿠데타를 일으켜 제2공화국을 무너트렸다. 이때 장면 박사는 총리직을 사퇴하고, 박정희 정권의 감시와 탄압 속에 살다가 1966년 6월에 선종했다.87)

 

한편 정계 활동을 통해 확연히 드러난 민주주의를 향한 그의 신념은 그가 몸담아 온 동성학교에 그대로 살아남아 있었다. 예를 들어 그가 1960년에 일어난 4·19혁명에서 동성학교 학생들은 목숨을 걸고 시위에 나섰다. 다음은 시위에 나섰던 동성고등학교 학생회 결의문의 일부이다.

 

“이 나라의 창백한 민주주의를 우리의 의로운 투쟁으로써 건전히 하고, 세계사의 자랑스런 일력을 이루려 하는 뜻으로서 파괴적이 아니며, 건설적인 의의를 띠는 이 운동은 영웅심으로서가 아니라 새롭고 건전한 아이디어를 세상에 알리며 불의에 떨고 부패에 침식당하는 저들 방관자와 말뿐의 나약한 지성인의 분기를 촉구하는 것이며, 그들이 떳떳한 국민으로서 이 의로운 운동에 참여하기를 바란다.”88)

 

동성학교 학생들은 경찰의 총격 앞에서도 시위를 이어갔고, 이는 4·19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밑거름이 되었다. 당시 동성고등학교 3학년으로 시위에 참가했던 이병태는 직접 만든 전단지와 그날 기록한 일기를 보관하다가 2014년에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기증하였는데89), 이는 동성인들이 한국 민주주의를 바로 세운 역사적 현장 한가운데 함께 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3) 한국사와 한국 천주교회사의 초석을 마련한 유홍렬 선생

 

동성학교에는 연구자로서도 뛰어난 교사들이 즐비했다. 특히 그리스도인으로서 학생들에게 좋은 표양을 보이면서, 동시에 한국 역사학계에 뛰어난 업적을 남긴 유홍렬 선생(1911~1995)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유홍렬 선생은 1925년에 경기도 장단군에 소재한 장단고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0년에 서울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1935년에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했다. 1936년에 장면 선생을 대부(代父)로 하여 천주교 세례를 받았고, 1938년 4월부터 1945년까지 동성상업학교 교사로 활동했다. 이때 그는 학교 훈육 주임을 맡아 일본인 교사로부터 학생들을 보호했다.90) 또한 그는 역사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인상적인 수업을 펼쳤다. 특히 일제의 감시 몰래 한국사를 학생들에게 알려주었다.91) 제자 신태민(동성 19회)은 그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역사를 가르쳐 주셨다. 정열적인 강의와 억양에 특색이 있었다. 최영정이란 친구는 류 선생의 강의 내용보다 강의, 그 특색을 연구하여 레크레이션 때는 항상 류 선생 강의를 재연(흉내)하여 어리광을 부렸는데 그런 때도 응석으로 받아 주시는 자비가 있었다. ‘장미 전쟁’이니 ‘희랍 문화’이니 서양사도 배웠지만 사실은 일본 국사를 가르치시는 체하면서 간간히 한국 국사를 말씀해 주신 것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철학하는 마음을 깨우쳐 주신 것도 잊을 길이 없다. <칸트 이성론>이니 <헤겔 변증법>이니 하는 것도.”92)

 

광복 후인 1946년경 유홍렬 선생은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로 자리를 옮겨 한국사 연구자 양성에 매진하였다. 이후 대구대학교 학장, 성균관대학교 교수, 인하대학교와 세무대학의 초빙교수로 생애 끝까지 후학을 양성하는데 애를 썼다. 그는 진단학회 이사, 백산학회 이사, 한국사학회 회장을 맡아 한국 역사학 연구의 성장을 위해 노력하는 등 오늘날 한국 역사학의 기초를 닦았다. 이처럼 유홍렬 선생과 같은 인물이 민족자강운동의 일환으로 설립된 소의학교의 후신인 동성상업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했다는 사실은 사뭇 그 의미가 남다르다고 하겠다.

 

한편 유홍렬 선생은 1937년에 라리보 주교로부터 불어판 『한국천주교회사』(Histoire de l’Eglise de Corée) 1, 2권을 받은 것을 계기로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1949년 2월에 『조선천주교회사』 상권을 집필했고, 1962년에 『한국천주교회사』, 1975년 『증보 한국천주교회사』, 1983년 『간추린 한국천주교회 역사』 등의 저서를 잇달아 출간했다.93) 때문에 그는 앞서 살펴본 최석우 몬시뇰과 함께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의 초석을 다진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의 기틀을 닦은 두 거목이 모두 동성상업학교와 관계되어 있다는 사실은 동성학교가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적 뿌리를 탐구하는 지식인의 요람이었음을 보여준다.

 

 

4. 결론: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 볼 수 있다

 

한국 사회는 지난 100년 동안 격동의 시기를 보내왔다. 500년을 이어온 조선왕조의 몰락,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과 수탈, 외세의 개입에 따른 한반도 분단과 한국전쟁, 이어진 군부 독재와 이에 저항하는 민주화 운동, 이 과정에서 진행된 산업화까지 가세하면서, 한국 사회는 단 하루도 멈추지 않은 채 앞만 보고 달려왔다. 이러한 격동의 시기를 ‘복음화와 전인 교육’이라는 한결같은 신념으로 함께 해온 동성학교의 100년은 그래서 더욱 의미가 깊다. 지난 100년 간 동성학교는 진리와 사랑으로 봉사하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애써왔고, 그런 인재들이 한국 사회를 지탱하고 성장시켜왔다. 실제 수많은 동성인들이 사회 곳곳에서 제 역할을 다해왔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마태 7,16) 앞서 살펴본 동성인들은 개인의 이익보다는 민족과 교회를 우선하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위해 헌신할 줄 아는 인물들이었다. 그것은 동성학교가 추구해온 가톨릭 교육의 열매이자, 동성학교라는 나무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동성학교는 가톨릭 정신 안에서 참되고, 부지런하고, 책임을 다하는, 즉 진리와 사랑 안에서 봉사하는 인재를 만들어내는 든든한 나무로서 제 역할을 다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선언을 떠올리게 한다.

 

“가톨릭 학교는 다른 학교에 못지않게 문화적인 목적과 청소년의 인간 형성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가톨릭 학교의 고유한 사명은 자유와 사랑의 복음 정신으로 활력에 넘치는 학교 공동체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청소년들이 자기 인격의 계발과 함께 세례를 통하여 새로 난 사람으로서 자라나도록 도와주고, 또 학생들이 점차 습득하여 가는 세계와 인생과 인간에 대한 지식을 신앙으로 비추어 주도록 모든 인간 문화를 궁극적으로 구원의 소식과 결부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가톨릭 학교는 발전하는 시대 상황에 마땅히 자신을 개방하면서, 학생들이 지상 국가의 복지를 효과적으로 증진하도록 가르치고, 하느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봉사하도록 준비시켜, 사도직 생활의 실천과 모범으로 인간 사회에서 이를테면 구원의 누룩이 되게 한다.”94)

 

이처럼 우리는 동성이 배출해낸 인물들의 면모를 통해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제시하는 가톨릭 학교상(想)을 구체적으로 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급변하는 시대 상황 속에서도 가톨릭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해온 가톨릭학원과 동성학교 구성원 모두의 노력 덕분이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모진 비바람 속에서도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렇게 제자리를 지킨 덕분에 나무는 많은 열매를 맺으며, 수많은 새들이 깃들이는 생명의 요람으로 자리하게 된다. “강한 바람으로 나무가 뿌리째 뽑히기도 하지만, 그 바람을 견뎌 내면서 뿌리를 더 깊이 내릴 수”95) 있는 것이다. 오늘날 입시 위주의 교육 현실과 규제 일변도의 국가 교육 정책이라는 비바람이 동성학교를 비롯한 한국 가톨릭 학교에 불어오고 있다. 하지만 가톨릭 학교로서 정체성을 잃지 않고자 굳건하게 버티고 선다면, 우뚝 선 저 나무와 같이 수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동성학교가 버텨낸 저 100여 년의 역사와 인물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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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성학교는 1907년 소의학교로 시작되었다. 이후 1920년에 소의상업학교, 1922년에 서울대목구(서울대교구)가 학교를 인수하면서 남대문상업학교, 1931년에 동성상업학교로 교명을 변경했다. 이후 1946년에 상업학교에서 일반 인문계 학교로 전환을 도모하여 동성중학교로 재출범했으나, 1949년 12월 31일에 공포된 『교육법』(법률 제86호)에 따라 고등학교를 새로 설치하고, 동성중학교와 동성고등학교 두 학교 체제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당시 공포된 『교육법』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후 최초로 제정된 교육 기본법으로써,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 체제를 규정했다. 이 글에서는 100여 년의 장구한 시간 동안 이어진 동성학교의 역사로 인해 여러 교명이 혼용되어 사용될 수 있으나, 학교 전반을 통틀어 지칭할 때는 교가(校歌)에서 지칭하는 바에 따라 ‘동성학교’라고 부르겠다.

 

2) 김웅태, 「가톨릭 학교교육의 새로운 방향 모색, 그리고 협력과 연대의 필요성」, 2010 가톨릭 교육자 대회, 2010년 5월 16일; 홍장학·김경원, 『동성 100년사』, 동성중고등학교, 2011, 463쪽에서 재인용. 한편 현재 동성고등학교에서 사목 활동을 하고 있는 조영관·김홍주 신부는 오늘날 가톨릭 중등학교가 처한 현실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첫째, 한국의 교육 정책 때문에 가톨릭 학교 정체성 구현이 어렵다. … 둘째, 가톨릭 학교는 세속화의 진행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다. … 셋째, 종교교육 목적 및 방식에 대한 논란이 있다. … 넷째, 가톨릭 학교에 대한 교회 내의 관심이 부족하다.” 김홍주·조영관, 「한국 가톨릭계 중등학교 종교교육 현황 및 방향성 탐색」, 『종교교육학연구』 57, 한국종교교육학회, 2018, 106~107쪽.

 

3) 조영관, 「자율형 사립 동성고등학교의 일반고 전환에 대한 본교의 입장문」, 동성고등학교, 2021년 5월 27일자. 한편 2011년에 자사고 지정을 받았던 대구대교구의 대건고등학교 역시 유사한 이유로 2022년 6월 7일에 자사고에서 일반고로 전환하기로 결정했다는 입장문을 발표했다. 박규장, 「2023년도 신입생부터 대건고등학교 일반고 전환에 대한 입장문」, 대건고등학교, 2022년 6월 7일자.

 

4) 물론 교회가 운영하던 중등 수준의 초창기 교육 기관은 배론에 세워진 성 요셉 신학교(1855)와 실업학교인 숭공학교(1910), 사범학교인 숭신학교(1911)가 있었다. 하지만 이 학교들은 성직자, 직업인, 교사를 양성하기 위한 특수학교의 성격이 강했다.

 

5) 한국천주교주교회의 교육위원회, 『개정 한국 가톨릭학교 교육 헌장 및 지침서』, 한국천주교주교회의 교육위원회, 2021, 16~17쪽.

 

6) 같은 글, 25쪽.

7) 같은 글, 33~36, 38~40쪽.

8) 전창기 전 교장의 회고, 홍정학·김경원, 2011, 『동성 100년사』, 동성중고등학교, 213쪽.

 

9) 동성고등학교 8대 이사장이었던 정진석 추기경(1931~2021)은 개교 100주년 축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동성학교의 교육이념은 동성가족이면 누구나 다 알다시피 진리와 사랑입니다. 이것을 풀어서 말한다면 우리 학교는 우리 학생들이 믿음과 사랑으로 봉사하는 사람이 되게끔 길러내고자 하는 교육적 포부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진석, 「동성학교 개교 100주년을 축하합니다」, 2007년 1월 1일자.

 

10)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남대문상업학교는 동성상업학교로」, 『경향잡지』 705,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31, 103~104쪽.

 

11) 민강 선생은 오늘날 동화약품의 전신인 동화약방을 운영하면서, 이를 거점으로 독립운동을 펼쳤다. 1924년 상하이 교민단의사회의 학무위원으로서 한인사회의 계몽과 교육 사업에 헌신했고,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다가 일제에 잡혀 옥중에서 순국했다. 조동걸, 「민강(閔橿)」,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1996.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0066

 

12) 홍정학·김경원, 『동성 100년사』, 70~75쪽.

13) 홍정학·김경원, 『동성 100년사』, 110쪽.

 

14) 실업학교는 5년제 갑종학교와 3년제 을종학교로 구분되며, 당시 법규정상 구분은 사라졌으나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조금 더 자세히 보면, 갑종학교는 전문학교 입학자격이 주어지는 학교를 말하고, 을종학교는 졸업을 통해 그 학생의 교육 과정이 완료되는 학교를 말한다. 안홍선, 「식민지시기 중등 실업교육의 성격 연구: 실업학교 학생 특성과 입학동기 분석을 중심으로」, 『아시아교육연구』 16(2), 서울대학교 교육연구소, 2015, 155쪽. 동성상업학교는 5년제 갑종학교로 인가를 받아 운영되고 있었으며, 을조 과정에 속해있었던 소신학교 학생들도 동성상업학교의 교육 과정에 따라 5년간 수업을 받았다. 이원순, 『사제 성소의 작은 못자리: 소신학교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7, 108쪽.

 

15) 평화신문, 「빛과 소금의 길」, 『평화신문』 60, 1995년 4월 23일자.

16) 정인준, 「선종완 신부의 삶을 통한 가르침」, 『가톨릭신학과사상』 51, 신학과사상학회, 2005, 167쪽.

 

17) 당시 교회는 1910년에 네 복음서, 1941년에 서간을 번역한 상태였다고 한다. 장석만, 「선종완(宣鍾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1997.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8930

 

18) 이유림, 「성모 영보 수녀회를 창설한 성서학자 선종완 신부」, 『교회와 역사』 280, 한국교회사연구소, 1998, 15~16쪽.

19) 노영택, 「일제하 한국천주교회의 교육사업연구(2)」, 『한국교회사논문집I』,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255쪽.

20) 윤선자,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일제의 인적 지배와 그리스도교계의 대응』, 집문당, 2005, 94쪽.

 

21) 이장우, 「식민지시대 말기 조선 천주교회와 총독부의 종교 통제-노기남 주교의 대응을 중심으로」, 『교회사연구』 35, 한국교회사연구소, 2010, 45~46쪽.

 

22) 최석우, 「나의 교회사 연구」, 『민족사와 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691~700쪽.

 

23) 『뮈텔 주교 일기』, 1921년 11월 23일;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뮈텔 주교 일기 7: 1921~1925』, 2008, 한국교회사연구소, 99쪽.

 

24) 장영민, 「한·미 외교문서로 본 지학순 주교의 민주화 운동」, 『기억과전망』 31, 한국민주주의연구소, 2014, 54쪽.

25) 박승찬, 「김수환 추기경의 공동체 영성을 통한 5·18 정신의 계승」, 『신학전망』 205. 광주가톨릭대학교 신학연구소, 2019.

26) 김수환,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평화신문 엮음, 평화방송·평화신문, 2004, 307쪽.

27) 이승훈, 「故 김수환 추기경 시복 운동 탄력 받나」, 『가톨릭신문』 3297, 2022년 6월 5일자, 1면.

28) 김수환,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4] 동성상업학교 시절(下)」, 『평화신문』 727, 2003년 6월 8일자.

29) 김수환, 『참으로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 신치구 엮음, 사람과 사람, 1996, 98쪽.

 

30) 당시 남대문상업학교 학생들은 학교 밖으로 나가 만세 운동에 동참하려고 하였으나, 교문이 봉쇄되어 교실과 교정에서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정세현, 『항일 학생 민족운동사 연구』, 일지사, 1975, 282쪽.

 

31) 당시 제시된 『사립학교법』 개정안은 개방형 이사제 도입을 골자로 했다. 개방형 이사제란 사립학교 재단 이사회의 일정 비율의 이사진을 교사와 학부모 등으로 구성된 학교운영위원회나 대학평의원회에서 추천해 선임하는 제도를 말한다.

 

32) 일제는 서양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종교, 특히 그리스도교에 대해 직접적인 통제를 가하지 않고, 그들이 운영하는 학교를 통제하는 방식을 취했다. 일제는 『조선교육령』(1911), 『사립학교규칙』(1911), 『개정사립학교규칙』(1915), 『사립학교규칙』(1920), 『조선교육령』(1922), 『조선교육령』(1938), 『조선교육령』(1943) 등의 교육 법령들을 통해 지속적으로 가톨릭 학교 교육의 정체성을 위협했다. 한국 천주교회는 이러한 위협에 맞서 다양한 방식으로 가톨릭 학교 교육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33) 프란치스코,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2013),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

 

34) 2019년 4월 헌법재판소의 낙태 금지 조항(『형법』 제269조 제1항과 제270조 제1항) 위헌 판결로 국가가 낙태를 허용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에 대해 염수정 추기경은 “형법이 낙태를 허용한다 하더라도 신앙인은 낙태가 무고한 인간 생명을 죽이는 범죄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한다는 교회의 가르침을 대내외에 천명했다. 이지혜, 「형법이 낙태 허용한다 하더라도 신앙인은 낙태가 범죄임을 명심해야」, 『가톨릭평화신문』 1592, 2020년 12월 13일자.

 

35) 염수정, 「생명주일 담화문: ‘가정과 혼인’에 관한 가톨릭교회의 가르침」, 천주교서울대교구, 2021.

36) 수도여자고등학교 총동문회 http://sudolily.com/pages/page_28.php?sn=898

 

37) 실제 염수정 추기경이 동성중학교에 다니던 당시(1956년 3월~1959년 2월) 『경향잡지』에서는 1957년 5월호(1070호)부터 1959년 3월호(1092호)까지 「제일 중요한 사업은 신학교」라는 주제로 사제 성소자 발굴과 신학생 교육 등 신학교 관련 특집 기사를 지속적으로 내보내고 있었다.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제일 중요한 사업은 신학교」, 『경향잡지』 1070~1092,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57~1959.

 

38) 동성고등학교는 2021년 5월경 자사고 지위를 반납하고 일반고로 전환하기로 결정했다. 이로 인해 예비신학생들은 ‘인문중점학급(Humanitas class)’을 통해 양성될 계획이다. 조영관, 「자율형 사립 동성고등학교의 일반고 전환에 대한 본교의 입장문」.

 

39) 이주연, 「동성고 예비신학생반 첫 신학교 입학생 배출, 어떤 의미인가」, 『가톨릭신문』 2830, 2013년 1월 27일자.

 

40) 성신고등학교의 폐교 원인은 모집정원 미달, 높은 소신학생 중도 탈락률, 재정적 어려움, 예비신학생 제도 활용 등이 꼽힌다. 이원순, 『사제 성소의 작은 못자리: 소신학교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7, 238~242쪽.

 

41) 홍정학·김경원, 『동성 100년사』, 95쪽.

42) 고우영, 『천국의 열쇠』, A.J. 크로닌 원작, 기쁜소식사, 2006.

 

43) 홍문택·고우영, 『교리책 밖의 교리 이야기 1: 신부님은 왜 큰 성체를 드시나요?』, 가톨릭출판사, 1998; 홍문택·고우영, 『교리책 밖의 교리 이야기 2: 신부님, 전화로 고해 성사 보면 안되나요?』, 가톨릭출판사, 1998; 홍문택·고우영, 『교리책 밖의 교리 이야기 3: 신부님, 주일 미사 빠지고 평일 미사 보면 쌤쌤 아닌가요?』, 가톨릭출판사, 1999. 홍문택·고우영, 『교리책 밖의 교리 이야기 4: 신부님, 주교님은 양말도 빨간색인가요?』, 가톨릭출판사, 1999.

 

44) 대한민국, 2007, 『태권도 진흥 및 태권도공원 조성 등에 관한 법률』, 법률 제8746호, 2007년 12월21일 제정, 제1조.

45) 홍정학·김경원, 『동성 100년사』, 297~298쪽.

 

46) 김경훈 선수는 고등학교 때 많이 졌던 경험이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고 회고했다. 잦은 패배에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자기 성장의 발판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동성고등학교 교사들과 동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올림픽에 참가하기 전부터 저는 많이 져봤어요. 심지어 고등학교 때 처음으로 참가한 국제대회에서 저만 금메달을 못 따고 들어왔던 적도 있었죠. 그렇게 많이 졌던 경험 때문인지 오히려 올림픽에서는 마음이 편했어요. 그리고 여기서 지더라도 또 도전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고요. 그래서 남들보다 편하게 올림픽에 임할 수 있었어요.” 태권도원, 「신예인 듯 신예같은 신예아닌 김경훈 과장의 금메달 이야기」, 태권도원 공식 블로그, 2015.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tkdwon_blog&logNo=220464061333 한편 그는 금메달을 따게 되면서 받게 된 격려금을 어려운 동료들에게 나눠주는 선행을 베풀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홀어머니와 단칸방에서 살고 있었다. 부산일보, 「[하이라이트] 시드니 태권도 ‘금’ 김경훈 미담」, 『부산일보』, 2001년 1월 13일자. 이러한 그의 모습에서 ‘진리와 사랑으로 봉사하는’ 동성인의 모범을 발견하게 된다.

 

47) 이준구, Grand master Jhoon Rhee, 매경출판(주), 2005, 134~136쪽.

48) 동아일보, 「인터뷰 무술발레 공연차 서울 온 재미 태권도사범 이준구씨」, 『동아일보』, 1982년 11월 22일자.

 

49) 김민지, 「뉴노멀시대 Martial Arts 문화융합 컨텐츠 개발 연구: 태권도를 중심으로」, 『대한무도학회 학술대회 자료집』, 2020년 10월, 26쪽.

 

50) 1996년 오늘의 등불상 수상 당시 부시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준구 사범은) 진실하고 위대한 봉사자로 우리 미국을 위하여 많은 일을 했다. 그는 미국에서 아주 유명한 인사로서 우리의 가장 중요한 우방국가인 한국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저는 그분을 존경하며 그분에게 제721호 ‘오늘의 등불상’을 증정함을 대단히 기쁘게 생각한다.” 이종환, 「[사족]이준구 사범은 누구?」, worldKorean, 2018년 5월 1일자.

 

51) 이준구 사범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 세계에 퍼져 나가서 타향에서 고생하시는 한국 교포 여러분! 무슨 일이 있더라고 좌절하지 마시고 대한민국은 앞으로 세계의 등불을 밝힐 나라라는 자부심을 갖고 열심히 일해서 그 나라를 위한 좋은 일을 많이 해 그 나라 사람들이 야! 한국사람은 역시 다르다. 이런 칭찬을 받기를 바랍니다.” 같은 글.

 

52) 『동성고등학교 100년사』 말미에 기재된 동성중·고등학교 역대 교직원 명단을 교차 대조해본 결과, 이준구가 다니던 시절 재직했던 ‘김광’이라는 교사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추후 확인할 필요가 있다.

 

53) 이준구, Grand master Jhoon Rhee, 56~57쪽.

54) 안화영은 동성고등학교 체육 교사로 재직한 경력이 있다.

55) 허영엽, 「인간 안성기가 국민 배우로 사랑받을 수 밖에 없는 이유」, 『가톨릭평화신문』 1639, 2021년 11월 28일자.

 

56) 심영섭, 「한국영화를 빛낸 스타들⑨ 미워할 수 없는 남자 안성기」, 『신동아』 2004년 5월호, 2004년 4월 29일자. 안성기는 2008년에 출간된 최인호의 청춘소설 『머저리 클럽』에서 추천사를 썼다. 여기서 안성기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1970년대 초 고교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내 인생의 가장 찬란했던 시절이 거기에 있었다.”고 회고하였다. 무라야마 도시오, 『청춘이 아니라도 좋다: 안성기의 길, 안성기의 영화』, 권남희 역, 사월의책, 2011, 52~53쪽.

 

57) 안성기, 「훌륭한 연기는 기술보다 인격이 앞선다」, 『샘터』 28(1), 샘터사, 1997, 23쪽.

58) 무라야마 도시오, 『청춘이 아니라도 좋다: 안성기의 길, 안성기의 영화』.

 

59) 신두영, 「이중섭, 리영희, 이소선…일본에 소개하고 싶습니다: 안성기 평전 <청춘이 아니라도 좋다> 쓴 무라야마 도시오」, 『시네21』, 2011년 11월 29일자.

 

60) 「안성기 친선대사」, unicef 한국사무소 https://www.unicef.or.kr/about-us/people/ahnsung-ki

61) 김찬혁, 「국민배우 안성기, 서울성모병원에 1억원 기부」, 『청년의사』, 2021년 10월 21일자.

 

62) 정진석, 「배아줄기세포 연구는 반 생명 행위」, 『평화신문』 827, 2005년 6월 19일자; 이연숙, 「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 출범...생명운동 중심으로 역량 집중」, 『평화신문』 842, 2005년 10월 16일자.

 

63) 허영엽, 「인간 안성기가 국민 배우로 사랑받을 수 밖에 없는 이유」.

64) 김소연, 「‘탄생’ 안성기 “작은 역이지만, 천주교 신자로 의무감 가진다”」, 『스타투데이』, 2021년 11월 11일자.

65) 이충렬, 『간송 전형필』, 김영사, 2010.

66) 이충렬, 『혜곡 최순우, 한국미의 순례자』, 김영사, 2012.

67) 이충렬,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유리창, 2013.

68) 이충렬, 『국제법학자, 그 사람 백충현』, 김영사, 2017.

69) 이충렬, 『아름다운 사람 권정생』, 산처럼, 2018.

70) 이충렬, 『천년의 화가 김홍도』, 메디치미디어, 2020.

 

71) 이충렬, 『아, 김수환 추기경 1: 신을 향하여』, 김영사, 2016; 이충렬, 『아, 김수환 추기경 2: 인간을 향하여』, 김영사, 2016.

 

72) 이충렬, 『신부 이태석』, 김영사, 2021.

73) 이충렬, 『김대건, 조선의 첫 사제』, 김영사, 2022.

74) 전병구, 「일제강점 이전 전라도 천주교의 교육현황과 활동」, 『전북사학』 46, 전북사학회, 2015, 219~220쪽.

75) 『뮈텔 주교 일기』, 1921년 11월 23일;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뮈텔 주교 일기 7: 1921~1925』, 98~99쪽.

76) 『뮈텔 주교 일기』, 1921년 11월 26일;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뮈텔 주교 일기 7: 1921~1925』, 99쪽.

77) 홍정학·김경원, 『동성 100년사』, 109쪽, 128~129쪽, 131쪽

 

78)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고 동성상업학교교장 박준호씨를 추억하며」, 『경향잡지』 838,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36, 545~546쪽.

 

79) 맹광호, 「[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3> 아버지 박준호로부터 배운 박병래의 교회 사랑」, 『가톨릭평화신문』 1358, 2016년 4월 3일자.

 

80) 소진탁, 「박병래(朴秉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7.

81) 노기남 대주교의 회고, 이원순, 『사제 성소의 작은 못자리: 소신학교사』, 66쪽.

 

82) 홍정학·김경원, 『동성 100년사』, 138~139쪽. 1999년 8월 동성고등학교 교정에 장면 박사 흉상을 세우는 제막식에서 동성고 교장 김운회 신부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즉 박사님께서 동성에 부임하던 당시 동성 상업학교는 허울뿐인 천주교 학교였을 뿐, 실제 운영은 총독부에서 임명된 관선 인사들이 재단을 구성하여 운영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교장으로 취임하신 다음 박사님께서는 관선 이사들은 사임하게 하고 천주교 유지 재단을 설립하여 법적인 수속을 밟음으로써, 동성이 명실상부한 가톨릭 교육 이념을 실현할 수 있는 교육기관이 되게끔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박사님은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일례로 그 당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실력자였던 일본인 관선 이사를 사퇴시키기 위해 일본까지 찾아가서 설득했다고 하는데, 일인(日人)들도 박사님의 이러한 정성과 인품에 감복한 나머지 사퇴서에 날인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김운회, 「운석 선생 흉상 제막식 기념사」, 1999년 8월 27일.

 

83) 유동진, 「교육가로서의 운석」,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가톨릭출판사, 1999, 376~377쪽.

84) 장면 박사의 아들인 전 춘천교구장 장익 주교(1933~2020)가 한국 천주교회의 지도자로 성장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85) 노기남, 「거룩한 평신도 장 요한」,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가톨릭출판사, 1999, 336쪽.

86) 제2차 바티칸공의회, 『그리스도인 교육에 관한 선언-교육의 중대성(Gravissimum Educationis)』, 바티칸, 1965, 8항.

 

87) 이후 김수환 추기경은 장면 박사가 성인이 될 수 있도록 교회 차원에서 시복 운동이 추진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이처럼 장면 박사는 교육자, 정치가로서 신앙인의 모범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희용, 「김추기경, 제2공화국 재평가 주장」, 『연합뉴스』, 1999년 8월 27일자.

 

88) 홍정학·김경원, 『동성 100년사』, 233쪽.

89) 이용석,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주요 기증자에게 수증증서 전달」,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보도자료』, 2014년 5월 20일자.

 

90) “(내가) 동성상업학교의 교사시절에는 학생들의 풍기를 바로잡는 훈육주임의 일을 맡아봄으로써 교무주임이란 일본인 교사의 행패를 막아주었다. 이에 따라 학생들을 마구 때리던 일본인 교무주임으로 하여금 결국 그 학교를 그만두게까지 한 일도 있었다.” 유홍렬, 『흐르는 江물 따라』, 미문출판사, 1971, 52쪽.

 

91) 이러한 동성상업학교의 민족사학적 특성은 노기남 대주교의 사례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노기남 대주교는 신부 시절이던 1930년대에 동성상업학교에 매주 토요일마다 출강하여 종교교육을 했다. 이때 그는 일제의 압박 속에서도 반드시 우리말로 강의를 하였다고 한다. 조영관, 「II. 한국 가톨릭 학교교육의 역사」, 『한국의 가톨릭 학교 교육』, 가톨릭교육재단협의회, 1999, 45쪽. 또한 그는 종교 교육 시간에 “…일본 천황은 절대의 신이 아니다. 절대의 신은 오직 하느님뿐이시다.”라고 학생들에게 강의를 했다가, 반일 혐의를 받고 경찰에 붙들려 간 적도 있었다. 노기남, 「거룩한 평신도 장 요한」, 336쪽.

 

92) 홍정학·김경원, 『동성 100년사』, 163~164쪽.

93) 박광용, 「유홍렬의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와 그 특성」, 『교회사연구』 43, 한국교회사연구소, 2014, 118쪽, 122쪽.

94) 제2차 바티칸공의회, 『그리스도인 교육에 관한 선언-교육의 중대성(Gravissimum Educationis)』, 8항.

95) 손희송, 『겨자씨 자라나서 큰 나무 되듯이』, 가톨릭출판사, 2022, 187쪽.

 

[교회사 연구 제61집, 2022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김선필(서강대학교 신학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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