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0일 (금)
(백)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 병인박해의 시작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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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2-28 ㅣ No.1534

[특별기고] 병인박해의 시작을 기억하며


참혹함 속에서 핀 한국 교회의 저력

 

 

병인박해는 “그 규모에서, 그 가혹함에서, 그 계속된 기한에서 또 그 사이 희생된 수에서 볼 때 일찍이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하고 처참하였습니다.” 8년여의 박해 기간에 포도청은 신자로 넘쳐났으며, 조선의 교우 총수가 2만 명을 넘겼을 당시 1만 명에 가까운 신자들이 이 박해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흔히 박해의 원인으로 러시아의 남침 위협이 없어졌고, 중국에서의 선교사 처형 사실이 전해졌고, 조선 정부의 방침이 쇄국정책으로 선회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당시 세도정치로 일관하던 기득권 세력의 자기 이익 때문입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복음의 진리, 신분 평등이라는 천주교의 가르침을 조선 정부는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지요.

 

이 병인박해가 그토록 길고 험한 시기가 될 줄은 처음에는 몰랐을 것입니다. 가까스로 탈출한 리델 신부는 중국 남부에 도착해 프랑스 함대와 함께 통역 자격으로 선교사 살해에 대해 문책하러 조선으로 돌아옵니다. 한강의 서강까지 진입한 사건을 1차 병인양요, 강화도를 점령한 사건을 2차 병인양요로 부릅니다. 그런데 「리델 일기」에도 나와 있듯이 이러한 프랑스 함대의 부적절한 보복은 병인박해를 더 강화했습니다. 양화진 앞까지 프랑스 함대가 들어왔다고 하여 절두산이 새로운 사형 터가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일가족을 동시에 사형시키고, 왕의 재가 없이 사형시키고 이후에 보고하라는 ‘선참후계’ (先斬後啓) 지침마저 생겨났습니다. 1871년 미국 함대가 침입해 온 신미양요로 흥선대원군은 집권하던 1873년 말까지 전국적으로 ‘척화비’를 세우며, 쇄국정책을 펼쳤습니다.

 

불행하게도 천주교는 서양에서 온 종교이기 때문에 이 쇄국정책에 따라 배척해야 할 제1순위에 들어가 있었고, 그 가르침이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지도 않은 채 8년여 동안의 긴 박해와 누명을 써야 했습니다.

 

150년 전 교회를 뿌리째 뽑으려던 병인박해의 시작을 되돌아보며, 다시금 우리 선조 신앙인들의 첫 마음을 배워 보고자 합니다. 성사와 미사를 위해, 선교사들은 상복을 입고 위험한 길을 건너오고, 교우들은 공소예절을 위해 먼 길에서 와, 입에서 입으로 교리를 외워서 전하던 순수한 그때, 그곳에 한국천주교회의 저력이 있음을 다시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죄 없이 사는 인생이 없다”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간은 모두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필요로 하는 존재입니다. 많이 배운 사람이나 적게 배운 사람이나, 많이 가진 자나 적게 가진 자나 상관없이 이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에 대한 궁극적인 체험이 있어서 “이 땅에서 이미 하늘을 본 사람들”이 우리 선조 신앙인들이 아니었는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꺼이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었고, 순명할 수 있었고, 순교의 길 마다치 않고 걸으실 수 있었다고 믿습니다. 

 

오늘날 목숨을 잃지 않고도 자기희생의 실천을 통해 가능한 ‘백색순교’의 의미를 이야기해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자기 희생이 더는 규범이지 않았으면 합니다. 사랑이었으면 합니다. 머리로 하는 사랑이 아닌 가슴으로 하는 사랑, 그래서 오늘을 살아가는 신앙인들도 이 땅의 현실에서 하늘을 만들어 나가는 사람들이 돼야겠다고 생각합니다.

 

[평화신문, 2016년 2월 28일, 원종현 신부(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 부위원장 겸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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