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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약전론의 전개과정과 쟁점 - 정약전과 천주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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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7-19 ㅣ No.1577

정약전론의 전개과정과 쟁점


- 정약전과 천주교 (1) -

 

 

국문 초록

 

본고는 정약전(丁若銓, 1758~1816)에 대한 천주교회 및 학계에서 진행된 연구의 전개 과정과 쟁점을 살피고, 정약전 연구를 위한 방향을 제언하였다. 정약전은 천주교회사를 비롯한 사학, 문학, 해양학과 관련해서 거론되는 인물이다. 정약전이 쓴 저술의 대부분이 유배기간에 이루어졌는데, 유배를 비롯하여 그의 일생에서 분기점이 된 계기가 천주교이다. 천주교는 정약전의 삶을 바꾸었다. 때문에 정약전 연구에서 천주교와의 영향관계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정약전이 배교자였다는 사실 때문인지 천주교에서조차 정약전에 대한 천주교 관련 학문적 논의가 이어지지 못했다. 

 

천주교계에서 정약전의 복권은 일제강점기인 1936년 송세흥 신부에 의해서 처음 제기되었다. 그러나 정약전에 대한 복권이 정약전에 대한 연구의 활성화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학계와 천주교계의 연구성과의 단절, 정약용 연구를 위한 보조자료 정도로 정약전 저술이 활용된 점 등도 정약전 연구의 한계였다. 이를 극복하는 것에서 정약전 연구가 새롭게 시작되어야 한다. 특히 본고에서는 『자산어보(玆山漁譜)』만이 아니라 『표해시말(漂海始末)』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표해시말』은 『자산어보』가 가능할 수 있었던 정약전 저술의 전환점이 된 저술이며, 문순득을 통해 정약전이 천주교를 다시 조우했음을 보여주는 단서가 남아 있는 저술이다. 앞으로 『표해시말』을 비롯하여 정약전의 시문(詩文) 등 새로 발굴된 자료를 포함하여 그의 저술에서 천주교 관련 논의들이 이어져야 한다. 이를 통해 정약전뿐 아니라 조선 사회에 천주교가 끼친 문화적 영향력을 규명해야 한다. 순교와 배교의 이분법을 넘어 정약전에게 신앙이 어떻게 복음과 문화로 내면화되고 담론화되었는가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본고는 이를 위한 첫 번째 시론(試論)이었다.

 

 

1. 들어가며: 연구목적 및 문제 제기

 

본고는 정약전(丁若銓, 1758~1816)에 대한 천주교회 및 학계에서 진행된 연구의 전개 과정과 쟁점을 살피고, 정약전 연구를 위한 방향을 제언하는 데 목적이 있다. 또한 이후 각론으로 전개할 정약전론을 위한 연구이기도 하다. 정약전은 천주교회사를 비롯한 사학, 문학, 해양학과 관련해서 거론되는 인물이다. 그런데 각 분야에서의 연구성과가 서로 공유되지 못하여 정약전이라는 한 인물에 대한 평가가 온전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에 본고는 현재까지 진행된 정약전론의 전개 과정 및 쟁점을 중심으로 정약전 연구 현황을 고찰하고, 그의 저술에 나타난 천주교와의 영향 관계를 추적하고자 한다. 정약전이 쓴 저술의 대부분이 유배기간에 이루어졌는데, 유배를 비롯하여 그의 일생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이 천주교이다. 정약전 논의를 위해서는 천주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만큼 정약전 연구를 위해서는 천주교와의 영향관계가 전제되어야 한다.

 

정약전의 자는 천전루(天全樓), 누호는 일성재(一星齋), 호는 매심(每心)이며, 섬으로 귀양 가서의 호는 손암(巽菴)이다.1) 당파로는 남인으로 성호 이익의 학맥에 속한다. 또한 서학에 관심이 있어 공부하였고, 조선 천주교 창설을 이끈 인물이기도 하다. 1783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1790년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 좌랑 등의 벼슬을 지냈다. 그러나 1801년 신유박해 때 신지도를 거쳐 현재의 우이도와 흑산도에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해배되지 못한 채 1816년에 16년 동안의 유배를 죽음으로 마쳤다. 그는 이 시기에 그의 대표저술이라할 수 있는 『송정사의』, 『표해시말』, 『자산어보』를 남겼다.2) 이 외에도 학생 교육용 교재로 편찬한 『몽학의휘(蒙學義彙)』, 정약용의 『역학제언』에 남아 있는 주역에 대한 정약전의 설을 모은 『자산역간(玆山易柬)』, 정약용의 『이담속산』에 수록되어 있는 정약전이 수집한 속담 『동언(東諺)』과 제목만 전하는 『논어난(論語難)』 등이 있고, 『여유당집』에 전하는 시 41편, 정약전이 정약용에게 보낸 편지 14통과 황상에게 보낸 편지 1통이 있다. 정약전은 그의 동생으로는 정약용과 정약종이 있었는데, 정약용은 한국 실학자의 대가였고, 정약종은 한국천주교 순교복자다. 학계와 천주교계에서 정약전에 대한 관심은 각각 그 동생들이 갖는 학계와 교계의 영향력 때문이기도 했다. 

 

정약전은 천주교인이었지만 배교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1801년 신유박해 당시 배교를 언명하였으며, 이로써 사형 대신 유배형이 결정되었다. 때문에 순교자를 중심으로 한 한국천주교회사의 기술과 연구에서는 정약전은 관심의 대상이 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일반 학계에서는 정약전의 유배가 천주교 때문이었다 하더라도 그가 배교했기 때문에 정약전은 천주교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거나 천주교와의 관련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연구가 진행되었다.3) 이 양측의 학문 교류가 원활하지 않아서 정약전을 둘러싼 서로의 입장과 성과가 더 풍요로운 담론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2000년대 이후 정약전의 새로운 저술들이 발견되었다. 이를 토대로 정약전과 관련된 문학, 해양학 분야에서의 연구도 이어졌다. 그러나 새로 발굴된 자료와 연구성과들이 아직 천주교계에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고, 그 연구도 활발하지 않다. 학계도 마찬가지다. 정약전에 대한 기본 정보조차 오류가 나타나기도 했다. 본고는 이들을 바로잡고, 현재까지 정약전 연구성과와 쟁점을 분석하여 향후 연구를 위한 토대를 마련하고자 한다. 먼저 2장에서는 천주교계의 논의를 해방 전과 해방 후로 나누어 기술하고, 3장에서는 학계의 연구를 쟁점별로 분석할 것이다. 4장에서는 『송정사의』에서 『표해시말』로, 『표해시말』에서 『자산어보』로 이어지는 정약전 저술의 변모과정을 분석한다. 

 

 

2. 배교자에서 「십계명가」의 저자로: 천주교계에서의 논의들 

 

2.1 일제강점기까지 천주교회에서 정약전

 

정약전에 대한 천주교회의 서술은 샤를르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서 비롯되었다. 이 장에서는 샤를르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안응렬 최석우 역주, 한국교회사연구소, 1979)와 일제강점기 『경향신문』에 소개된 정약전에 대한 서술, 『가톨릭청년』에 소개된 정약전 관련 논의를 살펴보겠다. 이를 통해 한국교회사에서 정약전에 대한 천주교회의 평가를 확인할 것이다.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정약전은 이승훈, 이벽과 함께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최초의 입교자와 지도자로 등장한다. 이벽은 누이의 1주기 때문에 마재의 정씨 집에서 머물다 서울로 향하던 배에서 정약전, 정약용 형제와 함께 천주교 교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4)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에게서 얻은 많은 서적을 읽은 이벽이 정약전과 약용 형제를 찾아가 천주교의 복음을 전파하면서5) 한국의 초대 교회가 준비된다. 그 주역 중 한 사람이 정약전이었다. 달레의 표현에 따르면 서울에서 가까운 지방에서 복음 전파에 공헌을 많이 한 사람은 마재에 살던 정씨 가문으로, 이벽의 첫 번 강화(講話)에 참석한 정약전, 정약용 형제가 이 집안사람으로 거론된다. 이벽의 강학 즉 주어사 강학에서, 이승훈은 서양 도리를 담은 책들을 이벽에게 전하였고, 윤지충의 형제인 정약종, 정약용, 정약전과 이가환 및 다른 사람에게 전했다. 이들은 그 책들을 연구하고 같이 토론하여 그것을 자기들의 처신 규범으로 삼았다.6) 달레는 윤지충이 서학 연구에 그치지 않고 천주 신앙을 받아들여 열심한 신자가 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도 정약전이라고 지목한다.7) 

 

이렇게 초대 교회 지도자이기도 했던 정약전은 1801년 ‘한심한 나약한 본’을 보여서 배교로 목숨을 구하는 비겁함을 보여주었다고 달레는 서술한다. 앞서 서술된 순교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누스와는 대비되는 모습이다. 

 

(1) 나흘 뒤에 갇혀 있는 모든 교우가 사형언도를 받았다.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형제, 정약용 요한과 정약전은 그와 비슷한 경우에 이미 한심한 나약의 본을 보였었는데, 자기들 형의 권고와 간청과 눈물과 고상한 본보기를 짓밟고 배교로써 목숨을 구하는 비겁을 또 한 번 보여주었다. 그들에 대한 사형선고는 유배형으로 감형되었다. 여기에 이내 덧붙여 둘 것은 몇 해 후에 특사로 귀양이 풀린 정(약용) 요한은 자기 죄를 오랫동안 진심으로 통회하였고, 그의 모범적인 열심과 극기로 교우들을 위로하였으며 매우 감화시키는 죽음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여러 종교 저서를 남겼고 특히 복음이 조선에 들어온 데 대한 수기를 남겼는데, 이 역사에 지금까지 기록한 사람들은 대부분 그 수기에 의한 것이다.8) (밑줄 및 강조 논자)

 

인용(1)은 정씨 가문에 대한 서술로 현재까지도 논란이 되는 정약용의 『조선복음전래사』 관련 부분이다. 이 인용문은 정약전의 교회 내 위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정약전은 정약종이나 정약용보다 달레의 『천주교회사』에서 부정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인용(1)에서 정약용과 정약전은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형제’이며, 심지어 ‘자기들 형의’에서와 같이 정약전과 정약용이 모두 정약종의 동생처럼 서술되었다.9) 정약종은 정약전의 동생이며, 정약용의 형이다. 다음에서 논할 『경향신문』 「대한성교사기」에서도 ‘형’이라는 단어로 번역되었으며, 1979년에 교회사연구소에서 출판된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서도 그대로 기술되었다. 프랑스어의 어법에 따라 형 또는 남동생의 의미인 frère가 한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정약종을 정약전과 정약용 두 사람의 형으로 번역한 것이다.

 

인용(1)에서 정약종은 순교자, 정약용은 회심자이지만 정약전은 배교자로 평가된다. 정약용에 대한 서술은 ‘여기에 이내 덧붙여 둘 것은’ 이하 그의 회심과 저술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정약전은 세례명도 소개되지 않았다. 정약전의 세례명은 이후 가톨릭대사전을 비롯한 다른 교회 매체와 저술에서도 확인 불가다. 위키백과나 몇몇 블로그에서는 안드레아라는 세례명으로 소개되고 있는데,10) 그 근거를 알 수 없다. 기해박해로 죽은 순교자 ‘정 안드레아’가 있었는데, 이를 정약전으로 혼동한 것일 수 있다. 혹은 정약전이 『자산어보』라는 수산학 책의 저자이니, ‘어부’라는 세례명이 어울려 12사도 중에 어부였던 안드레아가 그의 세례명으로 거론되었을 수도 있다. 이는 다만 추정일 뿐, 현재까지 정약전의 세례명도 정확한 출처를 통해 알려지지 못한 실정이다.11)

 

1979년 현대 한국어로 번역 소개된 『한국천주교회사』는 그 이전인 1906년부터 『경향신문』 보감에서 이미 「대한셩교ᄉᆞ긔」라는 제명으로 연재되었다. 이것은 샤를르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Historie de l′Église de Corée)를 번역한 것이다. 「대한셩교ᄉᆞ긔」는 1885년부터 1901년 사이에 로베르(김보록) 신부, 리브와(정달영) 신부, 보드네(윤사물) 신부 등이 함께 번역하였던 필사본을 옮긴 것이다.12) 『경향신문』이 일제에 의해 정간당한 1910년 이후에는 『경향잡지』를 통해 「조선셩교ᄉᆞ긔」로 연재를 이어갔다.13) 그 내용은 1979년 안응렬과 최석우가 역주한 『한국천주교회사』와 동일하지만, 정약전 관련 번역에서 차이점이 나타난다. 

 

(2) 강생 후 1783년(正宗癸卯) 4월 15일에 이벽이 마재(麻峴) 정약전(丁若銓)의 집에 가 머무르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올 때 정약전과 그 동생 정약용(丁若鏞)과 벽 3인이 동행하며 마음에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아니하고 오직 교중 도리만 말하여 그치지 아니하다가14) … (「대한셩교ᄉᆞ긔」, 『경향신문』 『보감』 5호, 1906년, 37쪽) (현대어 번역 및 밑줄은 논자)

 

(3) 강생 후 1785년 을사에 곧 성교가 조선으로 들어온지 겨우 1년 만에 관원 김화진(金華鎭)이 성교(聖敎) 번성함을 마음에 질투하여 잔(殘)해 하고자 할 때 이벽과 정약전과 권일신 등은 다 반열이 높기로 감히 대적하지 못하고 오직 김범우(金範禹) 도마를 잡아…(「대한셩교ᄉᆞ긔」, 『경향신문』 『보감』 8호, 1906년, 60쪽) (현대어 번역 및 밑줄은 논자)

 

인용(2), (3)은 천주교가 조선에 처음 들어왔던 초기 교회사를 서술하고 있는 대목이다. 정약전이 한국교회사에서 인정받는 유일한 부분은 바로 이 시기, 초기 교회사에서다. 그는 한국천주교회 형성에 중요한 인물이다. 인용(2), (3)에서는 정약전이 항상 정약용보다 먼저 거론되거나 강조된다. 나이순에 따른 자연스러운 서술이기도 하다. 즉 정약전이 ‘정약용의 형’이 아니라 정약용이 ‘정약전의 동생’으로 기술된다. 마재의 집은 ‘정약전’의 집이고, 을사추조적발사건을 다룬 인용(3)에서도 정약전이 명시되어 있다. 그런데 이 부분이 1979년 안응렬과 최석우 번역의 『한국천주교회사』에서는 다르게 번역되었다. 내용에 큰 변화는 없지만 표현에 차이가 있다. 인용(2)에서 ‘정약전의 집’은 ‘丁氏 집’으로, ‘정약전과 그 동생 정약용’은 ‘정약전, 약용 형제와’로 바뀌었다.15) 인용(3)에서 ‘이벽과 정약전과 권일신 등은 다 반열이 높기로 감히 대적하지 못하고’ 부분은 ‘천주교인들의 이름난 지도자들에게는 감히 직접 손을 댈 수 없으므로’로 대체되면서 정약전의 이름이 사라진다. 이벽과 정약전과 권일신이라는 세 명의 이름 대신에 ‘이름난 지도자들’로 번역한 것이다.16) 1885년부터 1901년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가 한국어로 처음 번역되던 번역본, 즉 프랑스 선교사 신부들에 의해 번역되었던 필사본을 옮긴 『경향신문』본이 1979년 안응렬 최석우의 『한국천주교회사』의 번역보다는 정약전의 비중이 더 컸다. 그런데 프랑스어 원본에 따르면 1979년 『한국천주교회사』의 번역이 직역이다. 『경향신문』 본에서 의역까지 하면서 정약전의 이름을 더 자주 언급한 이유와 배경을 현재로서는 분명하게 알 수 없다. 이는 프랑스 신부들의 필사본을 『경향신문』에 「대한성교사기」로 옮기면서 당시 편집자들이 정약전 이름을 더한 것으로 보이나 현재 프랑스 신부들이 번역한 필사본을 확인하지 못했다.17) 

 

한국천주교회사를 처음 소개하던 시기 ‘정약전의 동생이었던 정약용’은 이후 ‘정약용의 형 정약전’으로 바뀐다. 이러한 관점의 변화는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이후 정약용의 지명도가 높아진 당시 사회의 모습을 반영한 것이다. 1935년과 1936년 송세흥 신부는18) 정약용에 대한 글을 각각 『가톨릭청년』에 발표한다. 송세흥 신부는 1935년 정약용 서거 100주년을 맞아 다산 선생이 초년과 말년에 가톨릭 신자였음을 밝힌다. 또한 다산의 종교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장구한 세월을 두고 참회의 눈물을 흘리던 다산보다도 일시적 실수로 배교하던 다산만을 연구한 모양’이라고 비판한다.19) 송세흥 신부는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를 인용하면서, 1935년 언론매체에 발표된 다산 서거 100주년 기념 기사들의 오류를 지적한다.20) 다산 선생은 가톨릭 신자 중 한 사람이며, 유력한 교회 역사가요 통회극기의 모범을 보여 준 조선가톨릭교회의 광휘 있는 은인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송세흥 신부는 1936년에도 「정다산과 조선가톨릭 창간기」를 발표한다. 그는 1935년 글과 같이 이 글에서도 18세기 조선가톨릭 건설자 중 주요한 인물이요 조선에 선교사를 인도하여 오고 조선교구 설정에 협력한 유공자 중 한 사람이 정약용이며, 특히 배교에 대한 문제까지 적극적으로 변호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정약용뿐 아니라 정약전도 변호한다. 정약용과 함께 천주교회에서 정약전의 복권이 송세흥 신부의 글에 의해 제기된 것이다. 

 

(4) 달레 저 조선가톨릭역사는 안주교의 수기문을 기초로 한 것이다. 우리는 이에 의하야 조선가톨릭의 초창기를 회고하여보면 1777 정유년에 유명한 학자 권철신 정약전 등이 더욱 학문을 연구하기 위하여 고요한 처소를 찾아갔다. 그들은 열흘동안 가장 중요한 천지, 인간의 본성등에 관한 문제의 해석을 구하는 중 예전 학자들의 의견도 일일이 검토하여 보았다. 문제는 마침내 철학적 수학적 범위를 넘어서 종교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중략) 1784년 … 서울과 경기도에 가톨릭을 전하기 위하여 노력한 자는 누구보다도 정약전과 정약용 형제이니 이렇게 다산 선생은 한 번 수입하여 온 진리를 가슴속에만 묻어두지 않고 적극적으로 선전을 시작하여 조선톨릭의 기초를 견고히 하려 하였다.21) (밑줄 논자)

 

(5) 이렇게 다산 선생은 처음부터 항상 지도계급에 있어 교회발전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들의 열성의 결과로 신자도 점차 많아지므로 권 방지거와 정약전, 정약용 형제는 조직적으로 교회사무를 처리하여 나갈 필요를 깊이 깨닫고 이에 가성직 계급을 조직하기에 착수하였다. (중략) 이렇게 견고한 조직으로 가톨릭교회를 이땅에 영구히 보존하고 전하고자한 그들의 열성만은 조선 모든 교우들에게 영구한 사표가 될 것이다. 그들이 조직한 가성직계급에 의하면 (중략) 비록 다산 선생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으나 그 역시 지도계급에 있던 인물인만큼 ‘신부’이었으리라는 추측은 능히 할만하다.22) (밑줄 논자)

 

(6) 당시 조선사회는 이런 진보적 사상을 가진 일류 학자들을 이해치 못하고 드디어 박해의 선풍을 이르켜 이승훈 권철신 같은 인물들도 실수를 하고 정씨형제 역시 같은 길을 밟았던 것이다.23) (밑줄 논자)

 

(7) 다산선생의 선종 백주년을 맞이하는 우리는 그를 본받을 것이 많다. 물론 그의 두번 실수를 꺼리는 자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를 세 번 배반하고서도 다시 회개한 성베드로 종도를 생각하면 그런 생각은 연기와 같이 흩어질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다 실수하기는 쉬운 것이다. 우리 중에 허물없는 자는 누구이랴? 다산선생의 절실하고 장구한 참회생활을 다시 생각하면 실로 그는 모든 회개자의 모델이다.24) (밑줄 논자)

 

인용(4)와 (5)는 정약전과 정약용이 교회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했던 노력을 강조하고 있으며, 인용(6)과 (7)은 두 사람의 배교를 실수로 변호하면서 베드로의 예를 통해 비난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가톨릭청년』이 가톨릭교회에서 출판 간행한 잡지였지만, 교회 안팎의 영향력 있는 잡지였음을 고려한다면, 송세흥 신부는 이러한 주장으로 한국 지성계에 정약용과 더불어 정약전이 가톨릭 신자임을 알리고 이를 확고히 하고자 했던 것이다. 1936년 송세흥 신부에 의해서 정약전은 정약용과 함께 배교자에서 회심자요 초기 교회의 열성적인 신자요, 베드로 사도와 같은 사도로 평가받았으며, 청년들이 따라야 할 청년투사요 사표로 특히 강조되었다. 정약전은 정약용 서거 100주년을 맞아 정약용과 함께 교회에서 배교자라는 오명을 벗고, 정약종 정하상 정정혜 그리고 유세실리아 등 정씨 가문의 순교자들과 더불어 교회창립의 주역이자 지도자로 강조되었다. 이 역시 정약전 자체의 행위나 저술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약용을 비롯한 정약종과 그 가족들과의 관계 안에서 정약전의 복권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2.2 해방 이후 천주교계 연구에서 정약전 

 

해방 이후 정약전에 대한 교회에서의 최초의 학적 연구는 무엇보다도 천주가사 「십계명가」의 저자로 소개되면서이다.25) 천주교회에서 정약전이 독자적으로 소개되고 연구 대상이 된 것은 하성래의 천주가사 연구를 통해서였다. 1973년 하성래는 「정약전의 십계명가와 이벽의 천주공경가」를 발표, 한국 초기 교회의 성립과 천주가사의 등장을 『만천유고』에 전하는 「십계명가」를 통해 분석한다. 이 논문에서 하성래는 정약전의 생애를 소개하고, 「십계명가」 전문을 인용한 후 그 형식과 내용을 분석하였다.26) 그는 「십계명가」가 정약전, 권상학, 이총억이 합작하여 이승훈에게 준 것이지만,27) 그 중 정약전이 대표 저자라고 지목한다. 정약전은 정약종이나 정약용의 형으로서만이 아니라 주어사 강학을 주도했던 인물이자 무엇보다도 「십계명가」의 저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십계명가」의 저자는 정약전에서 정약종으로, 다시 윤민구에 의해서 정약전 정약종 둘 다 「십계명가」의 저자가 아니며, 무엇보다 이 작품이 천주가사가 아님이 주창되었다. 변기영은 「십계명가」의 저자를 정약전이 아니라 정약종이라고 주장했다. 변기영의 주장을 수용해서인지 2009년 발간된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펴낸 『한국천주교회사』에서도 「십계명가」를 정약종 저자로 기술하고 있다.28) 이후 윤민구에 의해 정약전 정약용 저자 부인설 및 「십계명가」가 개신교의 노래임이 증명되었다. 2019년에는 이승훈의 문집으로 알려진 『만천유고』나 여기에 실린 「성교요지」가 개신교 선교사 윌리엄 마틴의 책을 번안 혹은 표절한 것으로 밝혀졌다. 본고에서는 그간의 연구성과를 받아들여 『만천유고』에 실린 「십계명가」는 정약전의 천주가사로 볼 수 없으며, 정약전 정약종 둘 다 「십계명가」의 저자로 보지 않는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정약전의 저술로 「십계명가」를 논하지 않을 것이다.29)

 

「십계명가」 외 정약전에 대한 본격적인 천주교 관련 연구의 출발은 정두희에 의해서 제기되었다. 한국 사학계에서 정약전의 대표저술은 『자산어보』이다. 정두희 역시 정약전의 『자산어보』에 주목한다. 그는 앞서 「천주교 신앙과 유배의 삶, 다산의 형 정약전」이라는 글을 발표한 바 있다.30) 이후 가톨릭 영성으로 정약전의 삶을 조명하고자 한 글이 「고통 속에 꽃피운 영성: 흑산도에 유배된 정약전의 생애에 대한 재조명」이다.31) 16년이라는 흑산도에서의 유배 시절의 고통을 『자산어보』로 이끌어낸 정약전의 영성을 이해하는 것이 정약전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게 정두희의 주장이다. 그에 따르면, 흑산도 유배시절 정약전은 끝없는 절망감과 감정을 배제한 채 『자산어보』를 썼다. 특히 정두희는 정약전의 서실기인 정약용이 쓴 「매심재기」에 주목하여, 정약전의 영성을 도출한다. ‘매심’ 즉 ‘뉘우침의 철학’이 정약전의 영성이었고, 이를 통해 정약전은 모든 감정을 배제한 채 절망의 고도에서도 『자산어보』를 남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정두희는 정약전의 흑산도 생활에 대한 교회 자료를 제시한다. 그것은 1901년 프랑스 선교사 드예(Deshayes Albert, 1871~1910) 신부가 흑산도를 사목 방문한 후, 1902년 6월 6일자로 뮈텔 주교에게 제출한 사목보고서에 실린 내용이다. 

 

(8) 저는 정약전이 흑산도에 있는 박인수네 집에 귀양 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박인수도 교우가 되었습니다. 정약전은 한국어 성가의 가사를 만들었는데 제가 그것을 받게 되면 곧 주교님께 보내드리겠습니다. 이 최초의 교우에 대한 평판은 존경에 가득 찬 것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를 겸손과 정결함의 모범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32) (밑줄 논자)

 

정두희는 드예 신부의 사목보고서가 정약전이 세상을 뜬 후 80년 이상이 지난 후 흑산도 신자들의 구전을 전한 것이며, 정약전이 유배시절 다시 신앙을 되찾았다고 확정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흑산도에서의 정약전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해석한다. 물고기의 생태를 관찰하고 언젠가 사람들에게 유익하게 읽히기를 바라며 『자산어보』를 쓴 정약전은 이지적인 인물, 절박한 삶에서도 사색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인물이었다.33) 구체적인 분석이나 근거보다는 심성사적인 서술이라는 한계는 있으나, 정두희의 연구는 정약전을 순교자 중심의 교회사에서 벗어나 한 명의 영성가로 제기했으며, 정약용이나 정약종과의 형제 관계보다는 『자산어보』를 쓴 저술가로 강조했다. 또한 인용(8)의 정약전 관련 구술 자료를 통해 유배 시절 정약전의 신앙생활에 대한 가능성을 서술했다. 

 

그 외 정약전과 천주교 관련 연구로는 「정약전과 서교-흑산도 유배 이전을 중심으로」(조성을, 『교회사연구』 44, 2014), 정약전의 유배 시절을 소설화한 김훈의 『흑산』을 다룬 「조선후기 천주교 배교에 관한 재현적 글쓰기 연구」(윤인선, 『기호학연구』 54, 2018)가 있다. 조성을의 연구는 한국 초기 천주교 형성 시기 정약전의 천주교 입교 과정을 다루고 있으며, 윤인선의 연구는 김훈의 소설 『흑산』에 대한 연구라 정약전에 대한 구체적인 성과는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정약전과 관련한 문학 작품과 영화가 꾸준히 창작되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창작물 안에서 정약전 관련 내용이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가를 고려할 때 참고할 연구다.34) 서종태의 「손암 정약전의 실학사상」에서는 정약전이 유학자이면서도 과학자였으며, 서학 중 과학에 대해서만은 배교 후에도 계속 탐구하였음을 주장하였다.35)36)

 

 

3. 『玆山魚譜』에서 詩文의 저자로: 학계에서의 쟁점들 

 

정약전이 학계의 주목을 받은 가장 중요한 저서는 『자산어보(玆山魚譜)』이다. 『자산어보』가 주목받으면서, 정약전 생애 연구가 본격화되었고, 『자산어보』 외 그가 남긴 다른 저술들까지도 발굴 및 연구가 이어졌다. 특히 그의 대표저술이라 할 수 있는 『자산어보』, 『송정사의』, 『표해시말』의 성격이 상이하여, 각각 다른 영역의 학문 탐구로 이어졌다. 이 장에서는 정약전 관련 연구 중 특히 그의 저술과 관련해서 중요한 쟁점들을 살펴보도록 한다.

 

3.1 『玆山魚譜』 독음 문제 

 

정약전의 대표저술로 알려진 『자산어보(玆山魚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자산어보』 연구에서 가장 뜨거운 논쟁거리로 현재도 이견이 존재한다. 정약용과 관련된 한문학 연구에서 『자산어보(玆山魚譜)』 독음 문제가 제기되었고, ‘玆’자의 음에 대해 학자들은 독음으로 ‘현’ 또는 ‘자’음을 주장하였다. ‘玆’을 ‘현’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 대표는 임형택이다. 그는 이우성(李佑成)의 뜻을 취하여 『玆山魚譜』가 흔히 ‘자산어보’으로 독음되나 ‘현산어보’으로 읽는 것이 옳다는 입장을 밝혔다.37) 그 뒤 김언종, 이태원, 장정욱 등이 이 주장을 받아들였다. 2002년 다섯 권에 이르는 『현산어보를 찾아서』라는38) 대중서가 발간되면서 “현산어보”라는 독음은 대중들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그런데 이후 김언종은 자신의 주장을 뒤집고 중국 음운학사에서 ‘玆’를 어떻게 읽었는지를 통해 ‘자’음을 주장한다. 그는 ‘玆’의 문자학(文子學)적, 성운학(聲韻學)적 고찰을 통해 ‘현’음 지지자와 ‘자’음 지지자의 주장을 살핀 후, 이 글자를 동문회의자(同文會意字)로 보고, 다산이 이 글자를 어떻게 읽었는가에 주목한다.39)

 

김언종에 따르면 黑자의 어두운 이미지를 싫어했던 다산이 왜 『천자문』을 통해 ‘검을 현’이란 훈음(訓音)으로 알려진 ‘玄’자를 쓰지 않고, ‘玆’를 썼을까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것은 玄이 玆나 黑이 의미하는 순수한 검은색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현(玄)은 검붉은색, 흑적색(黑赤色)이다. 김언종에 따르면 이 차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은 흑산도를 현산이나 현주로 부를 수 있었을 것이나 문자학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다산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는 근거를 통해 다산의 이 글자에 대한 음독은 ‘현’이 아니라 ‘자’였다는 결론에 이른다.40)

 

본고에서는 ‘현산어보’로 읽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고려하면서도 다산이 ‘자산어보’라고 읽었을 가능성에 더 중심을 둔 김언종의 견해를 따른다. 특히 『자산어보』의 서명(書名)과 내용 구성 및 편집에 영향을 준 사람이 누구보다 다산 정약용이기 때문이다. 『자산어보』라는 제목은 정약용에 의해 부쳐졌다. 집필 당시 정약전은 이 책을 처음에 『어족도설(魚族圖說』로 명명했으나, 정약용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저술의 방향을 수정한다. 정약전이 죽은 후 정약용은 자신의 제자 이청을 통해 이 책을 보완하게 했다. 때문에 정약용이 『玆山魚譜』를 무슨 음으로 독음했는가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김언종의 주장이 현재로서는 더 타당하다. 그러나 이견이 여전히 존재한다.41)

 

3.2 흑산도 이주시기와 「부해기(浮海記)」의 발견 

 

정약전의 저술은 그의 유배지와 연관성이 깊다. 정약전의 유배지와 유배 시기는 정확한 구분이 연구자들마다 차이가 있다. 흔히 정약전은 흑산도에 유배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42) 조선시대 흑산도는 현재의 흑산도인 대흑산도와 현재의 우이도인 소흑산도(내흑산도)를 모두 포함했다. 정약전은 처음에 우이도에서 유배 생활을 시작했다가 흑산도로 이주하였고, 다시 우이도로 돌아와서 그곳에서 죽는다. 1801년부터 1816년까지 16년 동안 그는 한 장소에 머물지 않았으며, 우이도에서 흑산도로, 다시 흑산도에서 우이도로 이주했고, 각각의 섬에서도 거주지를 옮겼다. 이 때문에 정약전의 저술 활동과 관련된 전기 연구에서 첫 번째 쟁점은 정약전이 우이도에서 흑산도로 이주한 이유와 시기 문제다. 

 

정약전과 정약용은 1801년 2월 9일 투옥되어 2월 29일 정약전은 신지도에 정약용은 장기에 유배되었다. 그해 겨울 황사영백서 사건으로 다시 투옥되어,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길에 오른다. 1801년 11월 5일 한성에서 출발한 형제는 과천, 공주를 지나 11월 21일 나주목 율정주점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고 22일에 헤어진다. 이후 정약전은 우이도에 도착하였다.43) 11월 22일은 음력이니 양력으로 환산하면 12월 27일이고, 무안 다경포에서 배를 타고 출발하여 우이도까지 걸린 시간을 고려한다면, 정약전이 우이도에 도착한 것은 양력으로는 1802년이다.44) 1801년 귀양을 시작하여 1802년 초 우이도 진리에 도착하여 유배 생활을 시작했던 정약전은 흑산도로 거주지를 옮긴다. 그 시기는 정약용이 쓴 「사촌서실기(沙村書室記)」를 기준으로 할 것이냐, 『표해시말』을 기준으로 할 것이냐에 따라 1807년이냐, 그보다 빠른 1806년이냐로 나뉘었다. 정약전은 흑산도 사리마을로 이주한 후 서당을 여는데, 그 이름을 ‘사촌서실(砂村書室)’이라고 정했고, 이에 대해 정약용이 쓴 글이 1807년에 쓴 「사촌서실기(砂村書室記)」이다. 이 글을 근거로 했을 때, 흑산도로 정약전이 이주한 것이 1807년이다. 

 

그러나 『표해시말(漂海始末)』이 발견되고, 이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1807년보다 이른 1805년에서 1806년이 사이에 정약전이 흑산도로 이주했다는 설이 제기되었다. 『표해시말』은 2005년 신안문화원에서 발간한 『유암총서(柳菴叢書)』에 원문과 국역문이 최초로 소개되었다.45) 『표해시말』은 홍어잡이를 나갔다가 표류한 문순득의 표류기를 정약전이 기술한 책이다. 문순득은 1805년 우이도로 귀환하였고, 그가 귀환한 1805년 1월에서 1806년 사이에 정약전의 『표해시말』이 집필되었다. 흑산도로 거주지를 옮겨야 했기 때문에 『표해시말』의 집필 기간이 짧았고, 이것을 보충한 글이 이강회의 문집 『유암총서(柳菴叢書)』에 있는 「운곡선설(雲谷船設)」이다.46) 이 내용을 이강회는 「운곡선설」 서문에 기술하였다. 더불어 자신의 문집인 『유암총서』에 정약전의 『표해시말』을 필사하여 함께 수록하였고, 이 문집이 발견되면서 정약전의 『표해시말』의 실체가 알려질 수 있었다. 이전까지는 『표해록』이라는 제목만이 정약용의 편지에 전해졌다. 

 

정약전 관련 연구에서 『자산어보』에 집중되었던 주제는 『표해시말』의 발견과 함께 새로운 영역으로 확대되었다. 『표해시말』 관련 연구로는 김경옥의 「문순득의 표류담을 통해 본 선박건조술」47), 박현규의 「문순득 행적과 기록에 관한 차기(箚記)」48), 최성환의 「조선후기 문순득의 표류노정과 송환체제」49)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주로 『표해시말』에서 표류자였던 문순득에 대한 논의와 그의 표류 여정 및 『표해시말』의 내용 중 선박 관련 연구였다. 『표해시말』의 저자인 정약전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최성환에 의해 전환점을 맞는다. 최성환은 『표해시말』 연구를 통해 『자산어보』의 저자로만 알려졌던 정약전의 또 다른 면모를 알리고, ‘문순득’과 관련한 조선 후기 표류사를 일괄했다. 특히 『문순득 표류 연구』50)에는 『표해시말』 국역과 원전을 함께 싣고 있어 후속 연구자들에게 유익한 자료로 제공되었다.51) 

 

문순득 연구와 『표해시말』 연구는 정약전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표해시말』의 저자가 정약전이기 때문이다. 최성환은 표류자 문순득을 중심으로 한 『표해시말』 연구에서 정약전에 대한 연구로 전환하여 「정약전의 흑산도 유배생활과 저술할동」을 발표했으며, 이를 통해 정약전이 흑산도로 유배되는 과정, 유배지 흑산도에서의 주요 일상과 교류 관계, 그리고 저술 활동에 담긴 섬 문화 인식을 분석하였다.52) 그 과정에서 정약전의 흑산도 이주 시기는 1807년이 아니라 1806년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53)

 

2020년에는 정약전이 우이도에서 흑산도로 이주한 시기에 대한 좀 더 정확한 근거자료가 한문학 연구를 통해 발견되었다. 정약용의 둘째 아들 정학유의 흑산도 기행문인 「부해기(浮海記)」가 그것이다. 「부해기(浮海記)」는 정약용의 둘째 아들 정학유가 1809년 2월 3일 강진을 출발하여 흑산도에서 정약전과 함께 지내다 다시 강진으로 돌아온 51일간의 여정을 날짜별로 기록한 글이다. 「부해기」는 김영호가 소장하고 있는 다산 집안 가장본 『유고(遺稿)』 10책 중 9책에 수록되어 있다. 정민은 2016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김영호 선생의 주도로 진행된 「세계사 속의 다산학」 연구 프로젝트 당시 공동 연구 참여자 전원에게 제공된 다산 집안 가장본 『유고(遺稿)』 10책 중 9책에 수록되어 있는 「부해기」 원문과 번역문을 학계에 알렸다.54) 「부해기」 2월 13일에 정학유는 정약전과의 대화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본고는 정민이 번역 소개한 「부해기」를 인용한다. 

 

(9) 흑산도에는 큰 섬과 작은 섬이 있다. 작은 것을 우이도라 하는데 방언에는 소개라 하고, 『여지승람』에는 우개도라 한다. 보장(堡將)은 언제나 우이도에 머물다가 다만 여름에만 한 차례 큰 섬으로 와서 보리를 거두고 고혈을 짜서 돌아간다. 귀양 온 사람이 있으면 가시울로 우리안치한 자만 우이도에 살게 하고, 그 나머지는 자기가 선택한 대로 들어준다. 중부께서도 처음에는 우이도에 계시다가, 집과 곡식 마련이 불편한지라 을축년(1805) 여름에 큰 섬으로 이주하셨다. 처음에는 보촌(堡村)에 사시다가 얼마 안 있어 사미촌으로 옮기셨다.55) (밑줄 논자)

 

인용에서와 같이 정약전은 우이도에서 지내다가 1805년 여름에 큰 섬, 즉 흑산도로 이주한다. 이주의 이유도 이 글에 따르면 집과 곡식 마련의 불편함, 즉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다. 이강회가 쓴 「운곡선설(雲谷船設)」에서는 “손암이 기거가 불안하여 흑산도로 옮겨가야 할 형편이어서 그 대강만을 취하였기에 그 뒤를 이어 누락된 것을 보충하려 한다.”56)고 했다. ‘기거가 불안하여’는 「부해기」에서 ‘집과 곡식 마련이 불편한지라’와 상통한다. 경제적 이유로 흑산도로 이주한 것이다.57) 조선시대 유배인들은 스스로 생계를 해결하거나, 주민들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했는데, 가난한 우이도에서 게다가 천주교 때문에 유배를 온 정약전에게는 경제적인 부분이 쉽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흑산도에서 정약전은 사미촌 즉 현재의 사리마을에서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부해기」를 통해 사리마을에 정착하기 전, 일정 기간 보촌, 즉 진리마을에서 머물렀음을 알 수 있다. 정학유의 「부해기」 3월 1일 일기에는 “보촌의 소교(小校) 이행묵(1765~1850)의 집은 중부(仲父)께서 살던 곳이다. 사람됨이 넉넉해서 온 섬의 어른 노릇을 했다. 집은 정결하고 넓어서 서울과 다름이 없었다.”58)는 내용이 있다. 이에 따르면 정약전은 흑산도로 이주한 후 처음 얼마간 보촌, 현재의 진리마을에 있었던 이행묵 집에서 잠시 지냈다. 그러므로 정약전은 우이도 문순득 집 근처 → 흑산도 진리, 이행묵의 집 → 사리마을 정착, 사촌서실 → 우이도로 거처의 이동을 확인할 수 있다. 우이도로 돌아간 후의 거처는 명확하지 않지만, 문순득의 집 근처로 구전된다. 

 

인용(9)에서와 같이 정약전이 흑산도로 이주한 것은 이전 논자들의 견해와 다르다. 「부해기」에 따르면 정약전은 1805년 여름 우이도에서 흑산도로 이주했다. 따라서 『표해시말』은 1805년 1월 문순득이 집으로 돌아온 후부터 여름 전까지의 기간에 우이도에서 집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정약전은 흑산도 진리 이행묵의 집을 거쳐 사리마을에 정착하여 사촌 서실을 열고,59) 그곳에서 『자산어보』를 집필했다. 『부해기』를 쓴 정학유가 중부(仲父)인 정약전을 찾아뵌 곳도 사리마을의 거처이다. 

 

정약용의 「사촌서실기」에 이름이 남아 있는 정약전의 흑산도 서당은 복성재(復性齋), 사촌서당, 서당터 등으로 불렸고 현재는 ‘사촌서당’으로 복원되었다.60) 이 중 복성재(復性齋)라는 이름은 정약전과 정약용의 글에서 전혀 나오지 않는 명칭이다. 다만 일제강점기부터 『자산어보』를 주목하여 연구를 시작했던 정문기가 일본어 번역본을 출간하기 위해 1945년에 작성한 서문에 ‘사촌에서 복성재라는 서당을 설립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다른 사람의 서실이 주민들 사이에서 구전되면서 복성재로 불린 것이다.61)

 

이상 정약전의 저술을 유배지에 따라 정리하면, 처음 우이도에서는 『송정사의』와 『표해시말』을, 흑산도 사리마을에서는 『자산어보』를 썼다. 정약전이 죽은 이후 우이도에서 정약용의 제자 이강회에 의해 『표해시말』이 필사되었고, 그 후속편이라 할 수 있는 『운곡선설』이 집필되었으며, 마찬가지로 정약용의 제자 이청에 의해 『자산어보』가 보완되었다. 기타 서간과 시문 역시 이주 시기를 기준으로 우이도와 흑산도에서 쓴 것으로 나뉜다. 특히 『자산어보』를 집필한 흑산도뿐 아니라 우이도 시절 정약전의 생애와 저술 활동 관련 연구가 앞으로 더 구체적으로 이어져야 한다. 

 

3.3 사리마을 정착의 이유와 우이도로의 재이주

 

경제적 문제 때문에62) 흑산도로 이주한 정약전은 흑산도 사리마을에 정착한다. 그렇다면 왜 사리마을이었을까? 당시 사리마을(사미촌)보다는 진리마을(보촌)이 주거지로 더 적합한 곳이었다. 사리마을은 우이도에서도 외진 곳이었다. 이 이유로 최성환은 두 가지를 제기한다. 하나는 사리마을 주민 가운데 천주교 신앙 때문에 유배된 손암에게 우호적인 인물이 있었을 가능성이며, 다른 하나는 물고기 연구에 가장 적합한 마을이기 때문에 정약전이 스스로 『자산어보』 발간에 몰두할 수 있는 사리마을을 택했다는 것이다.63) 그런데 이는 모두 근거가 아니라 영향을 받은 결과로 해석해야 한다. 본고의 2장 정두희가 소개한 드예 신부의 사목보고서를64) 근거로 최성환 역시 사리마을에 천주교 신자와 관련된 인물이 있어서라고 제기한다. 박인수라는 인물이 어떤 경로로 천주교 신자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천주교 신앙을 접했고, 지역에서 상당히 존경받는 인물이었다면 손암이 사리마을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65)본 것이다. 

 

그러나 당시 흑산도에 천주교 신자가 있었는지는 역사를 통해 고증할 수 없으며, 천주교 때문에 유배를 간 정약전이 천주교인 집에 기거했다는 것도 설득력이 약하다. 박인수의 집이 사촌서실 터인지, 박인수의 집에 머물다 근처 사촌서실로 이주했다는 것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천주교인 박인수 때문에 사리마을로 이주했다는 것보다는 정약전의 영향으로 박인수 집안이 후에 천주교로 입문하게 되었다는 것이 오히려 설득력이 더 있으나 현재 근거자료가 없다. 박인수의 세례 여부와 그 시기를 밝힐 수만 있다면 정약전 유배 이후의 삶에서 천주교와의 관련성을 논하는 데도 중요한 근거로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박인수의 천주교 관련 내용은 드예 신부(Albert Deshayes)의 사목보고서 내용이 유일하다. 

 

물고기 연구에 가장 적합한 마을이기 때문에 정약전이 스스로 『자산어보』 발간에 몰두할 수 있는 마을로 사리마을을 택했을 가능성66) 역시 근거가 필요하다. 이 역시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하나는 사리마을에 정착하기 전에, 우이도에서 정약전이 이미 『자산어보』에 대한 집필 계획을 하고 집필하기에 적합한 장소를 물색했다는 근거가 제시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근거는 박성환의 연구에서 제시되지 않았을뿐더러 정약전의 유배 생활을 고려할 때 설득력이 약하다. 경제문제 때문에 흑산도로 이주한 게 아니라 책을 쓰기 위해서 흑산도로 간 것이 되어야 하는데, 이는 선후가 바뀐 것이다. 그보다는 불가피하게 흑산도에서 진리보다는 사리마을로 갈 수밖에 없었고, 그곳에서 장덕순(창대)과의 만남을 통해 『자산어보』가 가능했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하다.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연구가 이준곤의 연구이다.67) 이준곤은 흑산도와 우이도에 구전하는 최익현과 정약전의 유배 설화를 수집하고 설화 자료를 분석하여 그들의 유배 생활을 구체적으로 비교한다. 75년의 시차가 있었지만, 최익현은 흑산도 주민들에게 호국충절의 의사로 추앙받으면서 지낼 수 있었고, 정약전은 천주교인이기 때문에 전통적인 유교 이념에 배치된 죄인으로 취급당하면서 고난이 가중된 생활을 했을 것이며, 이는 정약전이 거주했던 생활공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그래서 정약전이 흑산도의 중심지였던 진리마을보다는 구석진 사리마을로 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사리마을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 없어서 주민들이 전적으로 바다에 의존해서 어업으로 살아가던 곳으로 대흑산도에서 어업이 가장 발달한 마을이었다. 특히 정약전이 살던 흑산도 사리마을 사촌서실 터는 바람이 세고 음습한 곳이었다. 사리마을에서도 가장 바람이 세고, 춥고 그늘진 열악한 장소에서 집을 마련하여 정약전은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생활한 것인데, 이는 정약전이 천주교 신자로 지목받아서 유배당한 일과 무관하지 않다.68) 이와 같은 악조건 속에서 정약전은 학문과 사람들에 대한 애정으로 현실을 극복하면서 그들과 동화되고 지역 문화를 저술로 완성했다. 흑산도로 거주지를 옮겨서 서실을 열어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면 흑산도의 중심지였던 진리에 정착하는 게 더 적격이었다. 그러나 그는 더 가난하고 열악한 사리마을에 정착했다. 천주교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인륜을 저버리고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사학죄인 정약전에 대해 주민들의 태도가 처음부터 호의적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정약전은 흑산도 사리마을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자산어보』를 썼다. 1814년 『자산어보』 집필이 마무리된 이후 정약전은 다시 우이도로 거주지를 옮겼다. 정약용이 쓴 「선중씨묘지명(先仲氏墓誌銘)」에 따르면, 동생이 해배되면 필시 본인을 찾아올 텐데, 바다를 두 번 건너게 할 수 없다는 애틋한 마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약용의 소식을 손꼽아 기다리던 정약전은 1816년 병자년 6월 6일에 우이도에서 59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쳤다. 우이도에서 유배 시기는 정약용에 「선중씨묘지명」에 따라 1814년부터 1816년으로 알려졌지만, 정약전은 우이도로 바로 이주하지 못하고 1년 후에 우이도로 이주했으며, 정약용의 해배 소식이 1814년에 4월에 있었으니 이 날짜를 고려한다면 정약전이 다시 우이도로 간 것은 1815년 경이다.69) 우이도에 재입도한 이후의 저술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다.70)

 

3.4 새로 발견된 정약전의 시문(詩文) 

 

한국 문학 연구에서 정약전 연구는 정약용과 정약전 서간에 대한 논의 정도였다. 이마저 정약전보다는 정약용 연구 중의 일부였으며, 정약전 편지를 번역한 정도에 그쳤다. 정해렴의 『다산서간정선』(현대실학사, 2002)은71) 정약용의 문집에서 특히 다산이 남긴 서간들을 엮어 번역문과 원문을 실은 책이다. 이 책 2부 유배지에서 형제간에 주고받은 편지에서는 정약용의 편지만이 아니라 정약전의 편지도 함께 싣고 있다. 이는 정약용의 문집에 정약전의 편지가 남아 있어서 가능했다. 형제의 편지는 『다산서간정선』에서 양적으로 많을 뿐 아니라, 가장 비중을 두고 다루어서인지 정해렴은 이 책의 저자를 ‘정약용 정약전’으로 명시하였다. 그렇다고 정약전 서간에 대한 분석이나 연구가 진행된 것은 아니다. 

 

정약전의 글이 한국 문학 연구에서 본격적으로 제기될 수 있었던 것은 『여유당집』이 발견되면서이다. 『여유당집』은 2012년 연세대에서 정약용 탄생 250주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이로써 이전 저술에 없었던 서간이 추가되었고, 무엇보다도 정약전이 남긴 시문(詩文) 연구의 토대가 마련됨으로써, 정약전이 한국 문학 연구의 대상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김영원의 「연세대본 『여유당집』에 대한 서지적 검토」는 『여유당집』을 찾은 김영원이 이 책의 서지 사항을 논한 연구이다. 윤석호의 「유배기 정약용과 정약전의 왕복 편지」는 새로 발견된 정약전의 편지를 포함하여 정약전 형제가 주고받은 편지의 현황과 내용, 학술적 가치를 논했다. 정약전 편지에 대한 기존 논의가 주로 정약용 가족사에 대한 생애 재구성으로 활용되었듯이 이 논문 역시 동일한 입장이지만, 분석 과정에서 정약전이 다산의 지기(知己)이자 스승이었음을 강조하였다.72)

 

『여유당집』의 발견 이후 가장 주목할 만한 연구성과는 허경진의 연구다. 『여유당집』에는 정약전의 시 31제 41수가 실려있다. 허경진의 「새로 발견된 손암 정약전의 시문집에 대하여」는 정약전 시에 대한 최초의 연구이다. 허경진은 이 연구와 『여유당집』에 실린 정약전의 시와 산문 2편을 번역하여 『손암 정약전 시문집』(민속원, 2015)을 출판하였다.73) 이로써 정약전이 남긴 시의 전모가 드러났다. 

 

정약전이 남긴 시 중에는 그가 섬에 살면서 나무꾼, 고기잡이들과 어울리며 지은 작품들이 있어서 여느 사대부들의 시와 비교되는 독특한 시 세계를 보여준다. 『자산어보』의 서문에 나오는 장창대에게 지어준 시도 있다. 정약용과 함께 나눈 시에는 깊은 형제의 정을 보여준다. 허경진의 논의 이후 정약전 시문 연구는 더 이상 없다. 정약전의 시와 글 등을 통합적으로 고찰하는 연구들이 이어져야 할 것이다. 특히 정약전의 시는 그의 사상 및 종교와의 연관성 속에서 심도 있는 분석이 필요하다. 

 

 

4. 『송정사의』에서 『표해시말』로: 유배지에서 찾은 언어와 천주교 

 

4.1 백성을 향한 연민과 슬픔, 백성의 대변자 

 

정약전의 저술 중에서 『자산어보』만큼 주목받지 못하고 있지만 중요한 저술이 『송정사의』와 『표해시말』이다. 우이도에서 쓴 『송정사의』와 『표해시말』, 흑산도에 쓴 『자산어보』 모두 정약전의 배교 후 저술이다. 배교 후 그의 삶과 정신에서 천주교가 다 소멸했다고 보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인정할 수 있지만 그의 내면까지 그러하였는지는 확증할 수 없다. 정약전이 세례를 받은 시점을 기준으로 유학과 무관한 사람으로 변한 것이 아닌 것처럼 그가 배교를 표명했다고 해도 이후의 삶에서 천주교의 영향이 모두 사라졌다고 할 수 없다. 이장에서는 정약전이 배교 이후 쓴, 즉 유배 중에 쓴 저술의 변모 과정을 통해 정약전과 그의 저술에 나타난 천주교적인 것을 추적한다. 이를 위해 『송정사의』에서 『표해시말』로, 『표해시말』에서 『자산어보』로 이행하는 저술의 변모 과정에 주목한다.74) 이와 관련한 선행 연구는 없다.

 

『송정사의(松政私議)』는 현전하는 글 중에서 정약전이 유배 이후 쓴 첫 번째 저술이다. 유배 이후 정약전의 현실 인식를 보여주는 글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소나무 정책은 금송(禁松)정책이었다. 금송정책이 조정에 있었던 지배자들의 입장에서 마련된 정책이라면, 『송정사의』는 유배지에서 백성들의 고통을 목도한 이가 쓴 탄원서이다. 송목(松木)은 조선 건국 초기에는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할 수 있는 물적 토대로 이용되었으며, 이후에는 이를 유지하기 위한 정책으로 지속적으로 시행되었다.75) 왜구의 방어를 위한 선박과 신 도읍 건설을 위한 건축재로 송목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 중기 금송을 관리해야 할 정책 집행자가 건축, 땔감 등의 사적인 목적을 위해 송목을 몰래 남벌하자, 송목의 효과적인 보호가 어려워졌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송목의 수요는 급증하는데 관리와 아전에 의한 착복, 화전(火田) 등으로 송목의 확보가 어려워졌다. 결국 금송정책은 백성들의 고충만 가중했다. 이에 대한 현실 인식이 정약전의 『송정사의』에도 나타나 있다. 

 

정약전은 우이도라는 조선의 외진 섬에서 중앙정부가 편 금송정책의 실효성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한다. 때문에 금송령을 완화하고 더 많은 소나무 확보를 위해 오히려 자율적인 경쟁을 독려하여 소나무를 심을 수 있도록 권장하며, 그에 대해 보상을 줄 수 있는 해결책을 제안한다. 물론 유배를 온 정약전의 제안이 조정에 받아들여질 수 없음은 정약전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이러한 글을 남겼을까? 그가 『송정사의』를 쓰게 된 배경과 저술 동기를 동생 정약용에게 보낸 편지에서 찾을 수 있다. 

 

(10) 송금정책은 벌써 그 잘못을 알았고 남쪽으로 귀양 온 뒤에 더욱 그 시급함을 보았네. 우물쭈물하면서 그대로 따르고 고치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가 있겠으므로 『송정사의』 1편을 지었으나 캄캄한 방에 있는 사람의 말을 누가 있어 이를 살피겠는가. 일찍이 이러한 사정을 알았으면 어찌 정조 24년(1800) 전에 죽음을 무릅쓰고 한마디 말을 아니하였으리오. 뉘우치고 탄식한들 미치지 못하니, 다만 아이들이나 경계하여 조심스럽게 간직해 두었다가 뒷날 주보언(主父偃)이 얻어 웃고 말하며 백성을 편안케 함이 어떠할까.76) (밑줄 논자)

 

정약전은 중앙정부의 잘못된 정책이 백성들의 삶을 얼마나 괴롭히는가를 우이도의 주민들을 통해 발견한다. 그가 중앙정부에 있을 때는 알지 못했던 현실이다. 인용(10)에서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한마디 말’을 하지 못한 아쉬움은 정약전이 백성들의 고충에 민감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이를 알고도 해결해 줄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통탄하고 있다. 유배를 왔기에 백성의 어려움을 알았고, 백성의 어려움을 알지만 어찌할 수 없는 처지, 이 둘 사이에서 ‘뒷날’을 기약하며 쓴 글이 『송정사의』였다. 정약전은 언젠가 자신이 남긴 한 편의 “글”이 백성들의 고통을 해결해 주는 빌미가 되기를 바라며 『송정사의』를 썼다. 

 

(11) 지금 극에 달한 폐단으로는 환곡(還穀)과 송정(松政)이 있다. 만약에 이 글 덕분에 과부의 걱정이 가벼워지고 백성과 국가의 호흡이 편해진다면 비천한 신하는 비록 외진 바다에서 죽어 없어지더라도 결코 한스럽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아아! 서시(西施)가 오물을 뒤집어써도 사람들이 모두 코를 감싸건만, 나는 너무도 깨끗지 못한 사람이라 아무리 천하가 결백하다고 한들 그 누가 돌아다보랴. 슬프고도 슬프구나. 갑자년(1804) 11월 손관에서 쓰다.77) (밑줄 논자)

 

인용(11)은 『송정사의』의 마지막 부분이다. 인용(10)의 정약용에게 보낸 편지에서와 같은 어조와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유배지에서 마주한 백성들의 고통과 이를 해결할 수도 없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절절한 통한이 드러나 있다. 또 ‘과부의 걱정’이라는 표현도 주목해야 한다. ‘과부’는 고통받는 백성 중에서도 첫 번째로 정약전이 강조하는 대상이다. 몇 년 후 아들 정학초의 부고를 들은 후 정약용에게 쓴 편지에서 정약전이 애통해하며 걱정하는 존재도 과부가 된 며느리였다.78) 이 글에서는 어떤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과부를 옹호하며, 백성과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는 모습을 통해 정약전의 인간성, 그의 연민을 알 수 있다. 

 

정약전은 자신이 깨끗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자아 인식과 천하가 깨끗해도 자신은 깨끗하지 못하니, 자신의 글을 읽어줄 이가 없음도 안다.79) “아무리 천하가 결백하다고 한들”은 자신의 깨끗하지 못함을 천하의 결백과 대조적으로 표현하여, 자신의 절망감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정약전은 백성이 처한 고난에 대한 현실 인식, 자기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분명한 자각 속에서 논리적인 견해로 송금정책의 부당함을 고발하고 해결책을 제시한다. 글을 마치면서 슬픔을 거듭 고백했지만, 그 슬픔은 정약전 자신만의 슬픔이 아니라 백성의 슬픔이었고, 현실의 슬픔이었다. 『송정사의』와 함께 정약전은 유배지에서 새로운 글을 쓰는 논자가 되고, 슬퍼하는 백성들과 함께 글로 표현할 수 없었던 백성들의 대변자가 되었다. 

 

4.2 문순득과 천주교와의 재회, 백성의 언어 

 

『송정사의』를 쓰며 백성의 대변자가 되었던 정약전의 모습에서는 불의한 현실을 직시하고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는 성경에서의 예언자적인 모습도 드러난다. 백성의 대변자가 되어 탄원하는 예언자와 같은 모습이 『송정사의』의 저자, 정약전이었다. 그러나 『송정사의』에서는 섬의 주민들보다는 조정의 신하로서의 모습이 여전히 지배적이다. 유배인이지만 유학자로서의 모습, 사대부로서 임금에게 간언하는 싶은 신하의 모습이다. 그런데 『표해시말(漂海始末)』에서의 정약전은 백성의 언어에 조금 더 가까워진다. 백성과 일치하여 또 다른 세계를 발견하고 천주교와 재회한다. 

 

『표해시말』은 우이도의 홍어장수 문순득(1777~1847)의 표류기이다. 그는 우이도의 특성을 활용하여 해상교역을 하던 상인이었는데 표류를 통해 유구(현 오키나와), 여송(필리핀), 오문(마카오), 중국을 거쳐 3년 2개월 만에 우이도 집으로 돌아온다. 문순득의 표류에서 귀환까지의 시기는 정약전이 우이도에서 지내던 시기였다. 『송정사의』가 우이도에서 경험한 소나무 정책으로 인한 폐해와 그 해결책에 대한 글이라면, 우이도에서의 두 번째 저술인 『표해시말』은 우이도에서 만난 문순득의 경험을 옮긴 글이다. 이 글은 이강회의 문집, 『유암총서』에 실려있다. 『유암총서』 역시 『운곡잡저』와 함께 문순득의 후손인 우이도 문채옥 씨가 소장하고 있던 문집이다. 신안문화원에서 신안문화원 향토사료지로 『유암총서』를 2005년에 출간하였다.80) 이강회는 자신의 문집 『유암총서』에 자신의 글 『운곡선설』, 『거설답객난』, 『제거설』을 실었는데 정약전의 『표해시말』도 필사해서 함께 묶었다. 다음은 이강회가 『운곡선설』에서 밝힌 내용이다. 

 

(12) 손암 정공이 이곳 바닷가로 유배와 있으면서 순득의 구술을 받아 적어 표해록 한 권을 지었는데 그 역화(譯話), 토산(土産), 풍속(風俗), 궁실(官室)을 상세하게 모아 분류하고, 선제(船制)에 있어서도 또한 죄다 갖추어 놓았다. 그러나 문순득이 말하기를 당시 정공(丁公)이 기거가 불안하여 현산(玆山)으로81) 옮겨 가려하였던 까닭에 그 대강만을 취했을 뿐이오 세세하고 정교한 것은 다 알려주지 못하였다고 한다.82) (밑줄 논자)

 

이강회는 정약전이 『표해시말』에서 간략히 소개한 선박 건조술에 관심이 있었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정약용이 해배되어 강진을 떠난 다음 해, 우이도 문순득의 집에 와서 선박 건조술에 관한 글인 『운곡선설』을 집필한다. 이강회는 이 책을 『표해시말』의 후속작으로 집필했다. 그래서 『표해시말』을 자신의 문집에 함께 필사해서 수록했고, 덕분에 『표해시말』이 현전할 수 있었다. 이강회의 문집 『운곡선설』이 발견되기 전까지 정약용의 책에 『표해록』이라는 제목만 있어서 『표해시말』의 실체를 알 수 없었다. 『표해시말』은 우이도 시절에 쓴 『송정사의』에서 흑산도에서 쓴 『자산어보』로 이어지는 정약전 저술의 변모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인데, 그 중요성이 그동안 정약전 저술 활동의 전 과정 안에서 인식되지 못했다. 게다가 정약전이 유배지 우이도에서 천주교를 다시 만났음을 알 수 있는 글이 『표해시말』이다.

 

『송정사의』가 우이도에서 목격한 백성들의 고통을 해결하고자 그들을 대신하여 쓴 글이라면, 『표해시말』은 그곳에서 만난 홍어 장수 문순득이 표류를 당해 3년 2개월 만에 집에 돌아온 후, 그의 구술을 바탕으로 쓴 글이다. 정약전은 백성 중에서도 문제적인 한 사람을 만난다. 그 사람이 문순득이다. 최성환은 『표해시말』은 한 개인의 표류경험담이지만, 그 저술의 이면에는 손암의 이용후생의 정신이 짙게 깔려있다고 분석했으며, 특히 『표해시말』의 내용 중에서도 선박에 대한 서술에 대해 높이 평가하였다.83)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었다. 『표해시말』은 정약전에게도 전환점이 된 글이다. 그는 백성의 대변자, 백성의 예언자적인 화자에서 백성의 목소리가 되고 백성과 일치한다. 『표해시말』은 정약전이 문순득이 되어 쓴 글이다. 이 글을 통해 그는 문순득과 함께 표류하고 문순득과 함께 다시 우이도에 돌아온다. 이 여정에서 만난 사람들과 세계에 대한 글이 『표해시말』이다. 거기에는 천주교에 대한 것도 포함되어 있다. 정약전은 문순득을 통해 우이도에서 “천주교”와 재회할 수 있었다. 

 

(13) 신묘(神廟)는 3~40칸의 긴 집으로 비할 곳 없이 크고 아름다웠으며(이로써 신을 모시는 대중을 대접하였다) 신상을 모셔 놓았다. 신묘 한쪽 꼭대기 앞에 탑을 세우고 탑 꼭대기에 금계(金鷄)를 세워 바람에 따라 머리가 바람이 오는 방향으로 스스로 돌게 하였다. 탑 꼭대기 아래 벽의 밖으로 크기가 같지 않은 종 4~5개를 걸어 제사와 기도 등 일에 따라서 다른 종을 친다. 한 사람이 종을 치면 듣는 사람이 각자 소리에 따라와서 예배를 드린다.84)

 

인용(13)에서 ‘신묘’는 천주당이다.85) 문순득의 표류 이야기를 들으며, 또 그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면서 정약전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찾을 수는 없다. 『표해시말』 전체가 표류의 여정과 표류 중 체류한 장소에서의 견문을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논조를 유지하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편집 의도를 보면 『표해시말』을 쓴 정약전의 사유를 알 수 있다. 문순득이 표류 기간 중 가장 오래 머문 지역은 중국이었다. 그러나 『표해시말』은 여송과 오문의 견문이 중심이 되었다. 여송과 오문은 당시 천주교의 영향을 받아 서구의 문화와 천주교가 조선보다는 훨씬 활발했던 지역이었다. 그곳이 조선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서구 문화의 세례를 받은 지역이고, 이 지역에 대한 견문을 통해 정약전은 자신이 익히고 믿었던 서학과 서교, 즉 천주교와 관련한 것들을 문순득을 통해 확인하였으며, 이를 중심으로 『표해시말』을 구성하였다. 정약전이 유배 시절에 천주교와 관련된 내용을 글로 쓴 것은 남아 있지 않다. 만약 썼다면 그것은 현전하는 글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표해시말』에는 정확하게 천주교에 대한 기록이 ‘신묘’를 통해 남아 있다. 정약전은 ‘천주당’이라고 쓰지 못하고, ‘신묘’라고 적었다. 

 

『표해시말』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 부분은 날짜별로 쓴 항해일지와 표류 노정, 두 번째 부분은 표류 중에 체류한 지역에 대한 주제별 내용으로 ‘풍속’, ‘궁실’, ‘의복’, ‘해박’, ‘토산’이라는 제명으로 전개된다. 마지막 세 번째 부분은 여송과 오문의 언어를 소개하는 데 이 부분은 한문뿐 아니라 한글로도 정리되어 있다. 두 번째 부분인 주제별 내용에서는 문순득이 유구와 여송에서 체류하면서 목격한 유구와 여송의 모습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져지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인정이 소개된다. ‘신묘’가 서술된 ‘궁실(宮室)’ 장에서는 유구의 집, 여송의 집, 창고, 신묘를 설명하고, ‘성곽과 울타리가 없다’는 말로 끝을 맺는다. 이 장은 유구와 여송의 건축에 대한 내용이지만, 주로 여송에 대한 이야기이다. 유구의 집에 대한 묘사는 체류 순서에 따른 약술이다. 여송, 즉 필리핀에서의 내용이 양으로도 많고 특이점도 많다. 문순득은 여송에서 9개월을 체류했다. 여송의 집에 대한 소개를 마치고 바로 나오는 내용이 인용(13)의 ‘신묘(神廟)’이다. 

 

궁실 장에서 ‘신묘’는 독립된 항목으로 다른 건축물보다 자세하게 소개된다. ‘신묘’는 현재의 성당을 이른다. 정약전은 문순득이 목격한 여송(필리핀)에서 지극히 아름다운 곳이자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는 장소인 천주당을 자세히 기술한다. 문순득을 도와주었던 사람들, 난민을 후대하는 이들은 그 지역의 천주교인이었다. 정약전은 이곳과 이들을 천주당과 천주교인이라고 쓰지 못하고 ‘신묘’라는 용어로 옮기고 『표해시말』 한 구석에 필리핀의 천주당의 모습을 담았다. 다음 장, 여송의 의복을 소개하는 부분에서도 “수도하는 사람은 검은 비단으로 장포(長袍)를 만드는데 길이는 발에 이른다.”86)라고 문순득이 만난 천주교 수도자를 기술한다.

 

천주교 때문에 조선의 절해고도 우이도로 유배를 온 정약전이 천주교의 성당과 수도자들과 신자들, 그들의 문화,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고 온 문순득을 우이도에서 만났다. 그리고 문순득의 말을 받아 옮겨 『표해시말』로 완성하였다.87) 『표해시말』에서 정약전은 유배의 이유였던 서학과 서교 즉 천주교를 옹호하고 있으며, 이용후생의 정신을 바탕으로 조선의 앞날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이상을 표현하였다. 

 

정약전은 문순득의 언어를 자신의 언어로 삼았고, 문순득의 표류 여정을 글을 통해 함께했으며, 어부이자 상인이었던 문순득의 견문을 자신과 조선의 견문으로 확장하고자 하였다. 백성의 대변자가 아니라 백성의 동반자, 더 나아가서는 자신도 백성이 되어 함께 표류하고 함께 말하며 함께 쓴 책이 『표해시말』이다. 그의 저술 중에서 유일하게 『표해시말』에 한글이 나올 수 있었던 이유도 이 때문이다. 유구어와 여송어를 옮겨오는 과정에서 정약전은 한자만이 아니라 그들의 말을 옮겨적기에 유용하며 문순득이 썼을 한글을 그대로 사용한다. 정약전은 우이도 주민인 문순득의 언어를 옮기고 적는다. 그 과정에서 조선의 말뿐 아니라 유구와 여송에서 살아가던 이들의 말 또한 익히고 배운다. 문순득과의 만남은 정약전에게는 또 한 번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그래서 가능했던 것이 『자산어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기존 논의에서 『표해시말』과 『자산어보』의 관련성에 대한 분석이 없었다. 

 

정약전은 『표해시말』에서 바닷길에 주목했다. 『표해시말』의 첫 부분은 날짜별로 정리한 항해일지이자 체류일지다. 일자별 정리는 표류의 일정을 기록한 것을 넘어 다른 세상으로 이어지는 바닷길을 기록한 것이기도 했다. 날짜별로 출발지와 도착지, 걸린 시간, 배의 방향과 풍향을 기록함으로써 정약전은 문순득의 표류기를 새로운 세상을 향한 지도로 바꾸어 나갔다. 『송정사의』가 현실의 부조리, 정책의 문제점에 대한 현실인식에서 비롯되었다면 『자산어보』는 『표해시말』를 쓰는 과정에서 체득한 바다와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인식을 흑산도가 지니는 가능성으로 열어나간 저술이다. 정약전은 지배층이 현실의 부조리를 해결하고 정책의 문제를 개선해 나갈 때까지 기다리는 수동적인 모습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자기 생존의 주체가 되며, 미래 세계의 건설자가 되는 길을 유배지에서 터득한다. 우이도에서 백성들의 생생한 삶의 현장을 만났고,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지켜야만 하는 바다가 아니라, 세상과 통할 수 있는 길로서의 바다, 그 바다가 이어주는 세계를 만난 정약전이 새로운 학문의 길이 열어 기술한 책이 『자산어보』이다.

 

『자산어보』는 18~19세기 근대 생물학 태동기의 자연 분류법 및 자연 명명법과 비슷한 측면을 지닌다. 『자산어보』는 창명을 토대로 한 분류 체계에서 어떤 종이 어떤 류에 속하고, 어떤 특징이 있는지를 알 수 있도록 류와 종을 분류해 놓은 최초의 시도였다. 이것이 과학사에서 『자산어보』가 확보한 의의이기도 하다.88) 이처럼 새로운 분류법은 『표해시말』를 저술할 때도 표해록의 일반적인 방식이 아닌 분류와 편집을 이용한 것에서도 나타난다. 새로운 창명의 방식과 분류법은 기존 세계를 따르기만 하지 않고 새로운 세상을 기대하는 정약전의 사상을 반영한 것이다.

 

어보 저술은 한강가에 살던 정약전에게 계획하지도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유배 초기 우이도에서 『송정사의』를 쓸 때만 해도 정약전은 유학자로서의 정체성이 우세했다. 그러나 우이도와 흑산도에서의 유배, 문순득과의 만남은 그를 다른 세상으로 이끌었고, 다른 책을 쓰게 했다. 그것이 『자산어보』이다. 

 

『자산어보』 서문에서 정약전은 이 책을 쓴 또 한 명의 동료를 소개한다. 『표해시말』이 문순득과 함께한 저술이라면, 『자산어보』는 장덕순(창대)과 함께다. 문순득의 말을 대신하여 자신의 편집 의도로 저술한 책이 『표해시말』이라면, 『자산어보』는 장덕순과 함께 “궁리하여” 지은 책이다. 문순득은 어부 상인이었고, 장덕순(창대)은 섬에서 고독하게 홀로 옛 서적을 좋아하며 글을 읽던 이였다. 정약전은 장덕순을 “비록 손에서 책을 놓지는 않았지만 보는 눈은 넓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성품이 차분하고 꼼꼼해 귀와 눈에 수용되는 모든 풀·나무·새·물고기 등의 자연물을 모두 세밀하게 살펴보고 집중해서 깊이 생각해 이들의 성질과 이치를 파악했기 때문에 그의 말은 신뢰할 만했다.”89) 라고 소개한다. 그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와 깊은 애정이 드러난 문장이다. 그렇다고 장덕순을 자신의 제자로 호명하지도 않는다. 장덕순은 자신과 함께 궁리한 동료이며, “신뢰할 만한” 사람이다. 직분이나 신분이 아니라, 차분한 성품과 세밀한 관찰력, 깊은 사고력, 그리고 책을 좋아하는 품성만으로 장덕순(창대)을 동료로 삼아 그와 함께 저술한 책이 『자산어보』이다. 섬에서 독서를 좋아했던 가난한 사람 장덕순은 『자산어보』를 통해 정약전의 동료로 존중받으며 자신의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자산어보』의 저술 목적은 어족과 해양조류와 해양채소까지 총망라하여 훗날의 연구에 바탕이 되도록 하겠다는 것이니, 박물로 학문을 이루어 연구와 실용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고증할 수 없는 생물은 이름을 새로 지어냈다. 새로운 생물을 기술하기 위해 정약전은 고증할 수 없는 것을 생략하거나 버리지 않고 창명(創名)을 한다. 어족을 창조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새로 발견한 어족에 창조주처럼 이름을 붙인다. “민간에서 부르는 이름”이 그대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그마저 없으면 자신이 이름을 새로 만들어 정한 것이다. 어족을 분류하고 고증하고 창명 하면서, 장덕순과 함께 『자산어보』가 저술될 수 있었다. 정약용의 제자 이청은 이것을 다시 보완한다. 

 

유배자가 거주자와 함께, 양반이 무명인과 함께,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 함께하며 새로운 시대를 위한 백성의 학문으로 탐구한 저술이 『자산어보』이다. “함께 함”을 통해 정약전이 유배지에서 살면서 피조물 안에서 만난 창조주, 바다를 통해 만난 천주, 신분을 초월한 구세주, 사람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복음의 정신이 그의 저술에 내재하여 있었던 것은 아닌가. 이에 대한 더 면밀한 분석과 검토가 천주교와의 관련성 속에서 앞으로 더 이어져야 할 것이다. 

 

 

5. 나가며: 요약 및 남은 과제 

 

이상 본고에서는 정약전에 대한 기존 논의 및 연구성과를 천주교와 학계에서의 연구로 나누어 검토하였다. 천주교 관련 정약전 연구를 위해서는 천주교인으로서의 역사적 체험과 신앙감각이 필요하다. 정약전의 글들과 생애를 천주교와의 관련성 속에서 연구하는 것은 정약전 연구를 위해서뿐 아니라 한국천주교회의 역사와 문화를 더 풍요롭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정약전의 삶과 저술을 통해 천주교가 어떻게 한국문화에 뿌리내렸는가를 탐구하는 일 역시 복음화의 학문적 실천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본고는 정약전 관련 연구성과와 쟁점, 정약전의 저술 활동의 변모 과정을 분석하였다. 각 장의 내용을 요약하고 앞으로 정약전 연구의 방향을 제언하는 것으로 결론을 대신하겠다. 

 

첫째, 『한국천주교회사(HISTOIRE DE L’ÉGLISE DE CORÉE)』(1874)에서 달레는 정약전이 순교자였던 정약종과 회심자였던 정약용의 형제이며, 신앙을 저버린 배교자로 기술하였다. 이 책은 1885년부터 1901년에 로베르 신부, 리브와 신부, 보드네 신부 등이 번역하였던 필사본을 거쳐 1906년부터 『경향신문』 보감에서 「대한성교사기」라는 제명으로 연재되었다. 정약전과 관련해서 1906년 「대한성교사기」 번역문에는 프랑스어 원본에 없는 정약전 이름이 기록되기도 했다. 

 

둘째, 1935년 다산 정약용 서거 100주년 기념을 계기로 정약전 역시 정약용과 함께 천주교회에서도 재평가되기 시작하였다. 배교자였던 정약전에 대한 본격적인 복권은 송세흥 신부에 의해 제기되었다. 1936년 송세흥 신부는 정약전을 정약용과 함께 배교자에서 회심자, 초기교회의 열성적인 신자, 베드로 사도와 같은 사도로 평가했으며, 청년들이 따라야 할 청년투사요, 교회 창립의 주역이자 지도자로 강조했다.

 

셋째, 해방 이후 천주교계에서의 학적 연구에서 정약전은 1973년 하성래에 의해 천주가사 「십계명가」의 저자로 소개되었다. 이후 「십계명가」의 저자는 정약종으로 기술되기도 했으나, 『만천유고』가 개신교 선교사 윌리엄 마틴의 책을 번안 혹은 표절한 것으로 밝혀졌으므로 「십계명가」의 저자 역시 정약전이나 정약종이 아니다. 

 

넷째, 정두희를 필두로 한 『자산어보』와 관련된 논의는 흑산도 천주교 신앙 전파와 연관되면서 확산되었다. 정두희는 정약전을 영성가요 저술가로 부각했다. 그가 제시한 드예 신부의 사목 보고서는 흑산도 시절 정약전의 신앙생활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 준 글이지만, 박인수 세례 여부와 생애 등 근거자료가 더 발굴되어야 한다. 

 

다섯째, 해방 이후 학계에서 정약전 연구는 『자산어보』를 중심으로 본격화된다. 정약전의 서간과 시문, 『송정사의』와 『표해시말』 등 정약전의 저술이 새로이 발굴되면서 각 분야 연구로 파급되었다. 『자산어보』 연구에서 『자산어보』 독음 문제, 우이도에서 흑산도로의 이주 시기 문제 등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우이도에서 흑산도로 이주한 시기는 2016년 정학유의 글 「부해기」 발견으로 1805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여섯째, 정약전 유배지와 관련해서는 우이도에서 흑산도, 다시 우이도로의 이주뿐 아니라 흑산도와 우이도 내에서의 이주 경로 연구도 병행되어야 한다. 정약전은 1802년 우이도에 도착, 1805년 여름 흑산도로 이주했다. 정약전이 사리마을에 정착하게 된 배경은 흑산도의 천주교 전파와 관련해서도 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또한 정약전이 다시 우이도로 간 것은 1814년이 아니라 1815년이다.

 

일곱째, 정약전의 시문이 발견되면서 정약전 문학 연구의 장이 열렸다. 정약전의 시문은 그가 어부들, 나무꾼들과 어울리며 지은 작품들이다. 앞으로 정약전 시문 연구를 통해 그의 사상과 내면이 더 구체적으로 논의되어야 한다. 

 

여덟째, 정약전의 『송정사의』가 유배 초기 우이도에서 목도(目睹)한 백성들의 고통과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 희망으로 쓴 탄원서라면, 『표해시말』은 백성 문순득과 일치하여 저술한 책이다. 『표해시말』은 1805년 1월 이후부터 여름 전까지 우이도에서 집필되었다. 『표해시말』은 『자산어보』를 이끈 저술로, 『송정사의』에서 『자산어보』로 이어지는 정약전 저술의 변모 과정을 보여주었다. 특히 정약전은 이 책을 통해 우이도에서 ‘천주교’와 재회한다. 『자산어보』는 그의 실학사상과 과학지식의 결정체이지만, 천주교로 인한 유배와 문순득과 장창대 등 우이도와 흑산도에서 살아가던 백성들, 이웃들과의 만남 때문에 가능했던 저술이기도 하였다. 

 

앞으로 정약전에 대한 연구는 『자산어보』뿐 아니라 『표해시말』을 비롯하여 새로 발굴된 시문 연구, 우이도 시절 정약전의 생애와 저술 활동 연구, 정약전의 생애 및 작품을 현대화한 소설과 영화 연구로 이어져야 한다. 아직 발견하지 못한 『논어난(論語難)』을 비롯하여 다른 자료 발굴에 대한 노력도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천주교와 관련한 논의도 계속되어야 한다. 순교와 배교의 이분법을 넘어 복음과 신앙이 한 개인의 삶과 사회 문화에 어떻게 생명력을 키웠는가를 탐구하는 것은 정약전 연구뿐 아니라 한국천주교 연구가 나아가야 할 방향 중 하나이다.

 

 

참고 문헌

 

1.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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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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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약용, 「선중씨묘지명」, 박석무 역주, 『다산산문선』, 창비, 2014 개정판, 247쪽.

 

2) 정약전 지음, 안대회 이현일 역해, 『안대회 이종묵 정민의 매일 읽는 우리 옛글 33: 소나무 정책론 외』, 민음사, 2014, 15~16쪽.

 

3) 이러한 입장은 그의 동생, 정약용의 경우도 비슷하다. 

4) 샤를르 달레, 안응렬 최석우 역, 『한국천주교회사』 상, 302~303쪽.

5) 같은 책, 307쪽. 

6) 같은 책, 576~578쪽.

7) 같은 책, 334쪽. 

8) 같은 책, 446~447쪽.

 

9) ‘자기들 형’에서 ‘형’이 아니라 ‘형제’로 번역해야 했다. 『경향신문』 「대한성교사기」(원문은 「대한셩교ᄉᆞ긔」에서도 ‘형’으로 번역했다. 이는 모두 달레의 프랑스어본 번역 과정에서 ‘frère’를 ‘형’으로 직역한 결과다. 프랑스어 frère는 형이나 남동생을 의미하며, frères는 형제다. “아우구스티노의 형제, 정약용 요한과 정약전은”에서 ‘형제’의 프랑스어 원문은 ‘frères’이며, “자기들 형의 권고”에서 ‘형’은 ‘frère’이다. 이를 그대로 직역한 것이 인용문 (1)인데 한국어에 맞게 번역하기 위해서는 “자기들 형(원문 frère)의 권고” 부분도 앞에서처럼 ‘자기들 형제의 권고’로 하거나 ‘정약용의 형이자 정약전의 동생인 정약종의 권고’로 풀어써야 맞다. 이렇게 번역되는 과정에서 정약종이 두 사람의 형이 되고, 정약전이 정약종의 동생처럼 오인되는 경우가 생기기도 했다. (HISTOIRE DE L’ÉGLISE DE CORÉE 2,121쪽 참조.)

 

10) 위키백과에서 정약전은 정약용과 정약종의 형으로 종교는 천주교이며 세례명은 안드레아로 소개된다. (https://namu.wiki/w/정약전 참조). 

 

11) 이는 필자가 찾지 못한 것일 수 있다.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 모든 버전들을 확인했지만 이 책을 통해서는 정약전의 세례명을 찾을 수 없었다. 기타 다른 교회 자료에서는 찾지 못했다.

 

12) 김윤선, 「김대건 신부의 한글 편지, 교우들 보아라」, 『복음과 문화』 26, 대전가톨릭대학교, 2021, 115쪽. 프랑스 선교사 신부들이 한국에 와서 한국식 이름을 하나 더 작명하였다. 그래서 김보록, 정달영, 윤사물이라는 이름을 프랑스 이름 옆에 병기했다. 

 

13) 『경향신문』 보감과 『경향잡지』에 대한 서지적인 내용은 김윤선, 『다시 읽는 천주교미담 1911~1957』(소명출판, 2016) 895~904쪽을 참고할 것. 

 

14) 원문은 “강후일쳔팔십삼년(正宗癸卯)월십오일에리벽이마(麻峴)뎡약젼(丁若銓)의집에가머무르다가다시셔울노올나올뎡약젼과그동뎡약용(丁若鏞)과벽삼인이동며에다거각지아니고오직교즁도리만말야긋치지아니다…” 이하 인용에서 원문은 생략한다.

 

15) 샤를르 달레, 앞의 책, 302쪽. 달레의 원문에서 해당 번역문은 “dans la fammile Tieng”, “avec les deux frères Tieng Lak-tsien et Tieng Lak-iong”이다. (HISTOIRE DE L’ÉGLISE DE CORÉE 2,16쪽 참조.)

 

16) 샤를르 달레, 앞의 책, 317쪽. 해당 원문은 “aux chefs bien connus des chrétiens,”로 “이름난 지도자들”이라는 번역이 직역에 더 가깝다. 즉 같은 본을 번역했다면 『경향신문』 번역이 더 의역에 가깝다. 그 과정에서 정약전이라는 이름이 거론된 것이다. 

 

17) 이는 『경향신문』 「대한성교사기」의 저본이 된 1885년부터 1901년에 로베르 신부, 리브와 신부, 보드네 신부 등이 함께 번역하였던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 필사본을 통해 더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사항이다. 즉 원전에 없는 ‘정약전’ 관련 사항은 프랑스 신부 필사본과 『경향신문』 「대한성교사기」 비교 연구, 『경향신문』 「대한성교사기」 편집 및 발행 과정 등에 대한 연구를 통해 더 정확하게 밝혀져야 한다. 필자는 현재 신부님들의 번역 필사본을 구하지 못했다.

 

18) 1922년 한국에 입국한 삐숑 신부, 한국명 송세흥 신부(Léon Pichon, 1893~1945)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신부로 한국교회사에 관심이 많았으며, 1938년에는 한국에서 프랑스어로 쓴 『Pro Corea documenta 朝鮮聖敎使料』를 출판하기도 했다. 

 

19) 송세흥, 「丁茶山의 信仰與否」, 『가톨릭청년』 30, 1935, 29~33쪽. 

 

20) 송세흥 신부는 기사에 대해 조목조목 반론을 펴는데, 특히 달레의 책을 인용한다. 그가 인용한 글에 따르면, 정약용은 1801년(신유)의 배교한 죄를 통절히 뉘우쳐 세속을 멀리하고 대재를 지키고, 보속과 묵상을 많이 하였다. 그가 저술한 서적은 혹은 박해 중 땅에 파묻거나 궁벽한 곳에 깊이 두었으므로 썩기도 하고 좀도 먹어버렸으며 혹은 가족 중에 보존된 바도 많았다. 유배에서 돌아온 후 다산은 여전히 은둔생활을 계속하며 그의 열심은 교우들을 즐겁게 하며 많은 감명을 주었다. 1835년 파치피코 유신부가 조선에 들어온 후 그의 손으로 최후성사를 받고 선종하였다. 송세흥, 앞의 글, 31쪽.

 

21) 송세흥, 「정다산과 조선가톨릭 초창기」, 『가톨릭청년』 35, 1936, 70~71쪽.

22) 같은 글, 72쪽.

23) 같은 글, 73쪽.

24) 송세흥, 「정다산과 조선가톨릭 초창기」, 75쪽.

 

25) 해방 이후 천주교회에서 정약용에 대한 연구와 복권은 특히 최석우를 통해 강조되었다. 최석우는 「달레가 인용한 정약용의 한국복음전래사」(『이해남박사 화갑기념논총』, 일조각, 1970, 205~216쪽 참조)에서 정약용을 배교자가 아니라 신앙인이라고 주장했으며, 1986년 4월 5일 정약용 서거 150주기를 맞아 추도미사를 주도했고, 천주교인으로서 정약용의 생애와 신앙을 발표하였다.(「다산 정약용의 생애와 신앙」, 『교회와 역사』 130,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4. 참조.) 

 

26) 하성래, 「정약전의 십계명가와 이벽의 천주공경가」Ⅰ, 『신학전망』 21, 광주가톨릭대학교 신학연구소, 1973, 136~154쪽. 

 

27) 하성래, 앞의 글, 140쪽.

하성래의 논문에서 정약전 생애에 대한 부분은 수정되어야 하는 부분들이 있다. 그중 하나는 가족을 소개하는 내용에서 형제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정약전은 아버지 정재원과 어머니 윤덕렬의 딸 사이에서 다섯 아들 중 둘째 아들로 소개된다. 그러나 정약전은 어머니 윤씨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아들이다. 그의 형 정약현의 어머니가 죽은 후 정재원은 둘째 부인을 얻었고, 그 둘째 부인인 윤씨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아들이 정약전이다. 이러한 오류가 있지만 하성래의 연구는 정약전의 생애를 본격적으로 주목한 연구의 시작이었다고 할 수 있다. 

 

28) 『한국천주교회사』 1, 한국교회사연구소, 2009, 228쪽.

 

29) 「십계명가」 저자와 관련된 논의는 각주26) 하성래의 논문과 변기영의 『한국천주교회 창립사 논증』(한국천주교회창립사연구원,1988, 155~157쪽), 윤민구의 『초기 한국천주교회사의 쟁점연구』(국학자료원, 2014, 313~346쪽)를 참고할 것. 서종태 역시 「손암 정약전의 실학사상」에서 논문의 주제는 아니지만, 『만천유고』의 신빙성을 문제 삼으며, 정약전의 「십계명가」가 정약전이 지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표명한다.(서종태, 「손암 정약전의 실학사상」, 동아연구 24, 276쪽, 각주19 참조). 

 

30) 정두희, 「인물평전 천주교 신앙과 유배의 삶, 다산의 형 정약전」, 『역사비평』 13, 역사문제연구소, 1990.11. 302~317쪽. 

 

31) 정두희, 「고통 속에 꽃피운 영성: 흑산도에 유배된 정약전의 생애에 대한 재조명」, 『신학전망』 147, 광주가톨릭대학교 신학연구소, 2004.12. 78~103쪽. 

 

32) 뮈텔문서, 1902.6.6 보고서. 프랑스어본으로는 Lettres du Mokpo(albert Deshayes, Lettres de 1896 à 1908, 영인본, 143쪽). 이 보고서에 대해서 조광은 「노래에 담긴 믿음: 천주가사」(『경향잡지』 1991년 5월호)에서 1902년 목포의 드예 신부가 흑산도 사람들을 선교하던 과정에서 그곳에서 귀양살이를 했던 정약전이 ‘성가의 가사’를 지었다는 사실을 보고 한 바 있으며, 이 보고는 정약전과 천주가사와의 관계를 제시해 주는 것이지만 1840년대까지 어떤 종류의 천주가사가 있었는지를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정약전이 지었다는 성가 가사를 찾을 수 있다면 정약전의 천주교 관련 근거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나 현재까지는 찾지 못했다. 

 

33) 정두희, 「고통 속에 꽃피운 영성: 흑산도에 유배된 정약전의 생애에 대한 재조명」, 101쪽. 103쪽. 

 

34) 정약전 관련 창작물에 대한 연구도 이어져야 한다. 필자 역시 이와 관련한 연구를 진행할 예정이다. 정약전을 소재로 한 소설은 김훈의 『흑산』 외에도 한승원의 『흑산도 하늘길』(2005), 김영주의 『자산 정약전』(2011), 오세영의 『자산어보』 1·2가 있다. 2021년 이준익 감독의 영화 <자산어보>가 개봉하였다. 이외 정약용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도 있다. 

 

35) 서종태, 「손암 정약전의 실학사상」, 『동아연구』 24,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1992, 306쪽. 이 외에도 논문은 아니지만 임송은 대중적인 칼럼을 통해 정약전의 삶을 꾸준하게 전파하고 있다. 현재 그의 칼럼은 <한국복지신문>에 연재 중이다.

 

36) 정약전은 아니지만 정약용과의 관련 하에서 천주교와 관련된 참고할 만한 연구로 「다산 정약용의 생애와 신앙」(최석우, 『교회와 역사』 1986.4.5), 「정약종 가문의 천주교 신앙 실천」(주명준, 『전주사학』 1, 1984), 「초기 교회시대 경기북부 지역의 천주교: 경기도 마재의 나주 정씨 가문을 중심으로」(차기진, 『교회사연구』 31, 2008), 「다산 정약용과 서학/천주교의 관계에 대한 연구사적 검토-다산의 천주교 신앙 문제를 중심으로」(원재연, 『교회사연구』 39, 한국교회사연구소, 2012), 「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 재론-<자찬묘지명>을 중심으로」(김수태, 『한국교회사연구』 42, 2013), 「다산의 <비본 묘지명 7편>과 천주교」(김상홍, 『동아시아 고대학』 30, 2013), 「다산과 천주교 관련 인물들과의 관계 고찰」(김봉남, 『대동한문학』 41, 2014)이 있다. 특히 김봉남의 연구는 천주교회가 다산을 천주교인으로 기술하려는 입장을 반박하여 다산은 천주교 신앙으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37) 임형택, 「특집(特輯)-호남(湖南)의 학문전통과 한문학(漢文學): 정약용(丁若鏞)의 강진(康津) 유배시 (流配時)의 교육활동과 그 성과」, 『한국한문학연구』 21, 한국한문학회, 1998. 143쪽. ‘현’으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로 정약용의 다산계 계원이자 정약전의 저술을 필사하기도 한 『유암총서』의 저자 이강회가 흑산도를 ‘현주’라고 표현한 것도 자주 언급된다.

 

38) 이태원, 『현산어보를 찾아서』 1·2·3·4·5, 청어람미디어, 2002. 

39) 김언종, 「『자산어보』 名稱攷」, 『한문교육연구』 21, 한국한문교육학회, 2003.

 

40) 김언종, 앞의 글, 430~431쪽. 특히 김언종은 다산이 자주 인용한 『설문해자』 주석본, 다산이 참조했던 『강희자전』, 다산이 35세 때 나온 『규장전운』까지도 근거로 활용하였다. 이 외에도 김언종의 주장에 동의하는 신동원은 「다산은 『현산어보』가 아니라 『자산어보』라고 불렀다」(『역사비평』 81, 역사문제연구소, 2007, 381~390쪽)에서 정약용의 『목민심서』 ‘자산필담’, 정약용이 『아언각비』에서 음을 다르게 읽는 수많은 사례를 통한 음운학자로서의 면모, 정약용의 『경세유표』에서 ‘환상(還上)’을 ‘還玆’로 읽으라고 한 것, 정약용이 자신의 시에서 ‘玆山’을 ‘자산’으로 불렀음, 『대동수경』에서 ‘玆山’을 ‘자산’으로 읽은 사실을 추가 근거로 제시하고 ‘자산어보’의 독음을 재주장했다. 자세한 논의는 김언종, 신동원의 글을 참고할 것.

 

41) 본 논문의 심사과정에서 심사를 맡아주신 선생님은 ‘현산어보’로 읽음이 맞다는 견해를 주셨다. 선생님께서는 “해방 직후에 나온 진단학회의 국사독본에서 이병도가 ‘자산어보’로 잘못 읽은 이후 오늘날까지 그 독음에 문제가 있게 되었다. 식민지 시대 이 책은 실학을 연구하던 대부분의 학자들에 의해 ‘현산어보’로 읽혔다. 검을 '현'이란 글자 두 개를 합쳐놓아도 검을 '현'의 음과 훈은 변하지 않는다. 김언종의 문자학에 대한 견해에는 무리가 있는 부분이 있다. 1960년대 김춘동의 저서에서도 이를 ‘현산어보’로 읽어야 한다고 지적된 바 있다.”라는 견해를 주셨다. 고견을 주신 심사 선생님께 감사드리며, 독음에 대한 논의는 본고에서는 김언종의 논문으로 돌린다. 김언종은 독음 ‘현’과 ‘자’에 대한 그간의 학계 논의과정을 정리하고 자신의 결론에 이른 바 있다. 특히 일본의 한학자들이 이 글자의 음가를 ‘현’으로 규정하고 있음을 고려할 때(김언종, 421쪽) 일제강점기 주로 ‘현’으로 읽었다는 것은 당시 일본 학자들의 영향이 아니었는지에 대한 검토도 필요하다. 한국뿐 아니라 일본, 대만 학자들 사이에서도 ‘玆山魚譜’ 독음에 대해서는 양분되어 있다. 본고는 김언종의 견해에 동의하면서도 차후 학계의 논의를 거쳐 확정될 때까지 『玆山魚譜』 독음에 대한 최종 결론을 미룬다. 그 이상의 논의를 하지 못하는 것은 본고의 한계이다. 

 

42) 현재 천주교 광주교구와 전라도 지역이 함께 복원하여 개발한 정약전 유배지로 알려진 흑산도의 사리마을은 정약전이 『자산어보』를 쓴 곳이긴 하지만, 그곳만이 정약전의 유배지는 아

니었다. 

 

43) 이 과정과 우이도로 들어오는 예상경로에 대한 내용은 최성환의 논문 「정약전의 흑산도 유배생활과 저술활동」 212~214쪽 참조. 최성환은 정약전보다 75년 후에 우이도로 귀양 온 최익현의 경로를 통해 정약전의 우이도 경로를 추정한다. 

 

44) 김문기, 「『자산어보』와 『해족도설』: 근세 동아시아 어류박물학의 갈림길」, 『역사와 경계』 101, 2016, 74~75쪽. 

45) 이강회, 김정섭·김형만 역, 『유암총서(柳菴叢書)』, 신안문화원, 2005.

46) 최성환, 「정약전의 흑산도 유배생활과 저술활동」, 『지역과 역사』 36, 부경역사연구소, 2015, 214쪽.

47) 김경옥, 「19세기 초 문순득의 표류담을 통해 본 선박건조술」, 『역사민속학』 24, 한국역사민속학회, 2007. 231~262쪽.

48) 박현규, 「문순득 행적과 기록에 관한 차기(箚記)」, 『동방한문학』 50, 동방한문학회, 2012,  371~395쪽. 

 

49) 최성환, 「조선후기 문순득의 표류노정과 송환체제」, 『한국민족문화』 43,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12, 189~233쪽. 

 

50) 최성환, 『문순득 표류 연구-조선후기 문순득의 표류와 세계인식』, 민속원, 2012. 

 

51) 최성환의 『문순득 표류 연구』에 실린 『표해시말』 국역문은 2005년 신안문화원에서 발간한 『유암총서(柳菴叢書)』(국역: 김정섭·김형만, 편집교열 최성환)에 수록된 내용을 수록한 것으로, 당시 일부 오역된 부분과 각주를 보완하였다. 

 

52) 최성환, 「정약전의 흑산도 유배생활과 저술활동」, 『지역과 역사』 36, 부광역사연구소, 2015.

 

53) 조숙정, 「정약전의 흑산도 유배기와 『자산어보』에 대한 재검토」, 『도서문화』 9, 목포대학교도서문화연구소, 2017, 47쪽. 조숙정은 정약전의 유배기를 우이도 1기, 대흑산도기, 우이도 2기로 나누는데, 우이도 1기는 1801년부터 1806년, 대흑산도기는 1806년부터 1815년, 우이도 2기는 1815년부터 1816년이다. 특히 대흑산도를 떠나 우이도로 정착한 시기를 정명현, 최성환, 김문기 등이 정약종의 「선중씨묘지명」의 내용을 근거로 주장한 1814년이 아니라 1815년으로 보고 있다. 조숙정, 앞의 글, 51쪽 참조. 

 

54) 정민, 「새자료 정학유의 흑산도 기행문 「부해기(浮海記)와 기행시」, 『韓國漢文學硏究』 79, 한국한문학회, 2020, 224쪽. 「부해기」 원문과 번역문이 251~282쪽에 소개되어 있다. 본고에서는 김영호 선생이 소장한 『遺稿』를 직접 보지 못하고, 정민이 번역 소개한 「부해기」를 토대로 논의를 전개하였다. 

 

55) 정민 역, 「새자료 정학유의 흑산도 기행문 「부해기(浮海記)와 기행시」, 266쪽. 

56) 이강회, 『유암총서』, 김형만·김정섭 역, 「운곡선설」, 신안문화원, 2005, 108쪽.

 

57) 경제적 이유에 대해 최성환은 정약전이 정약용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 일부를 인용하여, 특히 아들 학초의 결혼을 초라하게 치루고 싶지 않아 집안 형편보다 과용하게 된 것이 집안 사정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고 분석하였는데, 이는 확인이 더 필요하다. 정약전이 여기서 인용한 혼인은 아들 학초의 혼사가 아닐 수 있다. 시기로 봤을 때 이 편지는 1807년 정약전이 50살에 쓴 편지이고, 정약전이 1805년에 흑산도로 이주했다면, 아들 학초 혼사 이전이다. 1807년 7월 19일에 정약전은 혼사를 치룬지 얼마 되지 않은 아들 정학초(1791~1807)의 부고를 듣는다. 

 

58) 정민 역, 「새 자료 정학유의 흑산도 기행문 「부해기(浮海記)와 기행시」, 279쪽.

 

59) 정약용의 『여유당전서』에 남아 있는 「사촌서실기」는 1807년(정묘년, 순조7년) 여름에 지었다. 현재 흑산도 사리마을에는 사촌서실을 복원해 놓았는데, 현판을 정약용의 서체로 ‘沙村書堂’이라고 썼다. 

 

60) 정확한 서실의 명칭이 현전하는데도 왜 ‘사촌서당’으로 현판을 적었는지는 의문이다. 서당이라는 말이 대중적으로 더 가까운 용어라 여겼기 때문인 듯하다. ‘서실’이 글을 읽거나 쓰는 방이라는 의미를 살린 용어라면, ‘서당’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곳이라는 의미가 강하니, 복원하면서 이곳에서 정약전이 아이들을 가르쳤음을 강조한 듯하다. 그러나 『자산어보』 집필의 의미나 작은 규모를 살린다면 원래의 명칭인 ‘서실’이 더 적격이다. 

 

61) 최성환, 『유배인의 섬 생활』(세창미디어, 2020, 82~83쪽)과 같은 저자의 「정약전의 흑산도 유배생활과 저술활동」(『지역과 역사』 36, 2015, 220쪽)을 참고할 것.

 

62) 물론 흑산도로 이주한 것의 이유가 경제적 문제만은 아닐 수 있다. 경제적 이유는 무엇보다 정약전이 정약용에게 남긴 편지의 내용 때문인데, 편지 내용에는 밝히지 않은 다른 이유도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우이도에는 수군진(水軍陣)이 설치되었고, 유배인들은 수군진에 인계되고 관리된다. 처음에는 수군진이 있는 우이도에서 유배를 시작하지만, 흑산도로 이주하면 우이도보다 수군진의 간섭에서 더 자유로울 수 있다.

 

63) 최성환, 「정약전의 흑산도 유배생활과 저술활동」, 216쪽. 

64) 앞서 본고에서 인용했기에 여기서는 따로 인용하지 않는다. 뮈텔문서 1902.6.6 보고서. 주32) 참고.

65) 최성환, 「정약전의 흑산도 유배생활과 저술활동」, 216쪽. 

66) 최성환, 앞의 글, 216~217쪽. 

67) 이준곤, 「흑산도전승설화로 본 면암 최익현과 손암 정약전의 유배생활」, 『논문집』 11, 목포해양대학교, 2003. 

68) 이준곤, 앞의 글, 172쪽. 

69) 조숙정, 「정약전의 흑산도 유배기와 『자산어보』에 대한 재검토」, 51쪽. 

 

70) 정약전이 죽고 3년 후에 정약용이 해배되었고, 정약용 해배 이후 정약전의 유해는 충주 선산으로 옮겨졌다. 현재 그의 묘는 천진암 천주교 묘지에 있다.

 

71) 이 책의 저본은 1979년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시인사)이며, 이를 개정 증보하여 창비교양문고로 출판된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1991)이다. 

 

72) 윤석호, 「유배기 정약용과 정약전의 왕복 편지」, 242쪽. 정약전이 정약용의 ‘지기’였음은 「선중씨묘지명」에서도 정약용이 언급한 바 있다. 

 

73) 허경진은 정약전의 시를 ‘32제 40수’로 기록하였는데(『손암 정약전 시문집』, 14쪽) 오타이다. 실제 작품 수는 31제 41수다. 

 

74) 내용 및 각 저술에 대한 좀더 심층적인 논의는 다음 연구로 이어갈 예정이다. 

75) 이영주, 「朝鮮時代 松政 硏究』, 강원대학교 대학원 석사, 2006, 1쪽. 

 

76) 정약용 정약전 저, 정해렴 편역주, 『다산서간정선』, 현대실학사, 2015, 140쪽. 이글의 안대회 번역문은 다음과 같다. (10′) 일찍부터 송정이 잘못되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남쪽으로 귀양살이 온 후 더욱 문제가 시급함을 느낀다네. 잘못된 것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따르기만 한다면 반드시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아 『송정사의』 한 편을 지었지만 분수에 맞지 않은 이야기에 누가 귀를 기울이겠는가? 이 사정을 미리 알았다면 경신년(1800년)에 죽음을 무릅쓰고 한 마디 말을 왜 하지 않았겠는가? 후회한들 소용없네. 다만 아이들에게 경계하여 조심스럽게 감추어 두었다가 뒷날 임금님으로 하여금 누워서 담소하는 중에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어떠한가? 원문은 생략한다. (정약전, 안대회·이현일 역해, 『안대회·이종묵·정민의 매일 읽는 우리 옛글 33: 소나무 정책론 외』, 민음사, 2014, 36쪽.) 

 

77) 정약전, 『송정사의』, 허경진 편, 『손암 정약전 시문집』, 민속원, 2015, 107쪽. 원문은 생략. 『송정사의』 번역문과 원문은 이강회의 『운곡잡저』에 실려있다. 이강회의 『운곡잡저』에 실린 『송정사의』는 허경진의 번역문 외에도 신안문화원 향토사료지 『운곡잡저』(신안문화원, 2004)에서도 실려있다. 본고에서는 허경진의 번역을 따른다. 신안문화원 번역문은 다음과 같다. “오늘날의 극에 달한 폐단에는 환곡과 송정 이 두 가지가 있다. 만에 하나 이 글로 인하여 과부가 하는 걱정이 해소가 되고 백성과 국가의 숨이 끊어질 지경의 다급한 상황이 해결될 수만 있다면, 비천한 신하는 궁벽한 바닷가에서 죽어 사라진다고 해도 절대로 한스럽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안타깝구나! 서시가 깨끗하지 못한 오물을 뒤집어써도 사람들이 모두 코를 싸쥐고 피하거늘, 나는 너무도 깨끗하지 못한 사람이라 아무리 천하가 결백하다고 한들 그 누가 돌아다 보리요? 슬프고도 슬프도다! 갑자년 중동(中冬)에 손관에서 쓴다.”(『운곡잡저』, 신안문화원, 2004, 123~124쪽.)

 

78) 정약전이 정약용에게 보낸 편지, 「寄茶山」 6. 정약용의 『열수전서 속집』에 정약전이 정약용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 있다. 

 

79) 이 부분의 번역문은 원문을 오독 할 소지가 있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余之不潔甚矣雖有天下之白誰其顧之悲矣悲矣” 천하가 결백해도 나의 깨끗하지 못함 즉 임금에게 죄를 짓고 온 유배인, 죄인이기 때문에 내 글을 보아주는 이가 없을 것이라는 회한을 표현한 뜻으로 읽어야 한다. 

 

80) 이강회, 김형만·김정섭 역, 『유암총서』, 신안문화원, 2005.

81) 신안문화원에서 펴낸 번역문에서 ‘현산’으로 독음하여 그대로 옮겼다. 

82) 이강회, 앞의 글, 107~108쪽. 

 

83) 최성환, 「정약전의 흑산도 유배생활과 저술활동」, 235쪽.

최성환은 위의 논문 외에도 『문순득 표류 연구』라는 단행본으로 출간하였는데, 이 연구서를 통해 『표해시말』을 중심으로 문순득의 표류 관련 사료 현황 및 특징, 표류노정과 송환체제, 표류견문과 체험, 표류를 통한 문순득의 세계인식을 고찰하였다. 부록으로 『표해시말』 국역 및 원전을 실었다. 『표해시말』에 대한 본격 연구라고 할 수 있는데, 정약전보다는 문순득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서, 정약전에 대한 논의가 중심이 되지는 않았다. 『표해시말』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은 이 책을 비롯하여, 김경옥의 「19세기 초 문순득의 표류담을 통해 본 선박건조술」, 박현규의 「문순득 행적과 기록에 관한 차기」, 최성환의 「조선후기 문순득 표류노정과 송환체제」를 참고할 것. 주로 이들 연구는 문순득과 표류 및 송환체제, 선박 제조술에 대한 논점이 강조되었다. 본고는 그보다는 정약전의 저술 과정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하였고 각론은 이후의 연구로 이어갈 것이다. 

 

84) 정약전, 『표해시말』(국역 및 원전), 최성환, 『문순득 표류 연구』, 민속원, 2012, 300쪽. 

 

85) 최성환은 신묘를 통해 문순득이 여송에서 살았던 지역을 추적했다. 그는 현지답사를 통해 필리핀 비간시의 시청 주변에 자리하고 있는 성 바오로 성당이 『표해시말』에서 문순득이 목격

한 신묘이며, 따라서 성 바오로 성당 근처가 여송에서 문순득이 체류했던 지역임을 밝혔다. (최성환, 『문순득 표류 연구』, 민속원, 2012, 143쪽 참조.) 

 

86) 정약전, 『표해시말』(국역 및 원전), 최성환, 『문순득 표류 연구』, 민속원, 2012, 302쪽. 

 

87) 문순득이 표류 여정을 날짜별로 정확하게 기억하고, 유구와 여송의 언어를 기억하는 점으로 보아 문순득도 표류 기간에 쓴 간단한 메모가 있었을 것이다. 이 메모가 『표해시말』을 저술하는 과정에서 저본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에 대한 근거로 문순득이 자신의 표류 과정을 쓴 『路程記』를 가지고 있었다는 내용이 원재명의 연행일기인 『芝汀燕記』 중 1804년(순조 4) 11월 26일조에 남아 있다. (박현규, 「문순득 행적과 기록에 관한 箚記」, 『동방한문학』 50, 동방한문학회, 2012, 375쪽 참조.)

 

88) 정약전·이청, 정명현 역, 『자산어보』, 서해문집, 2016, 18쪽. 

89) 앞의 책, 30쪽. 

 

[교회사 연구 제61집, 2022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김윤선(고려대학교 문화창의학부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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