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일)
(백) 부활 제5주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세계교회ㅣ기타

엉클 죠의 바티칸 산책41: 무릎 기도로 닳은 대리석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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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10-13 ㅣ No.613

[엉클 죠의 바티칸 산책] (41) 무릎 기도로 닳은 대리석 계단


예수님이 오르신 계단 스칼라 산타, 296년 만에 베일 벗다

 

 

스칼라 산타 28계단의 실물. 예수님이 빌라도의 신문을 받기 위해 무릎으로 올라가야 했던 계단의 원형이 지난해 순례자들에게 개방되었다.

 

 

돌 위에서의 무릎 기도! 뼈와 돌이 부딪힙니다. 무릎으로 28개 돌계단을 오릅니다. 무릎 종지뼈와 정강이뼈가 곧 빠개질 것만 같습니다. 계단 위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립니다.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 사도신경….

 

무릎 기도로 닳은 대리석이 갓난아이의 피부처럼 뽀얗고 촉감이 부드럽습니다. 세상에 이런 돌이 있을까 싶습니다. 채찍질을 당한 예수님은 피를 많이 흘렸습니다. 철망으로 씌워진 네 곳의 핏자국, 바로 옆 대리석이 주발처럼 움푹 패어 있더군요. 특별한 기도의 흔적 같습니다.

 

 

성스러운 계단

 

‘스칼라 산타’(Scala Santa), 예수님이 빌라도 총독의 신문을 받기 위해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야 했던 ‘성스러운 계단’입니다. 교황청은 지난해 부활절에 순례자들에게 스칼라 산타 실물을 60일간 특별 개방했습니다. 스칼라 산타는 예수님 수난 후 약 300년 동안 예루살렘 땅속에 묻혀 있었습니다. 헬레나 성녀가 발굴하여 326년 로마로 가져왔습니다. 헬레나는 밀라노 칙령(313년)을 반포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입니다. 밀라노 칙령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종교의 자유를 얻었습니다.

 

1000년이 넘는 오랜 세월 얼마나 많은 순례자가 스칼라 산타에서 무릎 기도를 드렸을까? 대리석 계단이 닳고 닳아 원형을 상실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인노첸시오 13세 교황이 1723년 특별 보호 조치를 취했습니다. 돌처럼 견고한 호두나무로 덮개를 만들어 스칼라 산타의 계단을 씌운 것입니다. 호두나무 덮개인들 닳지 않겠습니까.

 

교황청이 지난해 낡은 호두나무 덮개를 교체했습니다. 스칼라 산타가 296년 만에 베일을 벗은 것입니다. 전 세계에서 순례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로마 한인성당의 신자들도 지난해 봄 사순 시기에 스칼라 산타 순례에 나섰습니다. 한인신학원 원장과 한인성당 주임을 맡고 있는 정의철 신부님이 인솔하고, 손현숙 선생님이 안내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교 성지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한글로 쓰면 구별이 안 되지만, 한자로 쓰면 전혀 다른 의미가 됩니다. 하나는 聖地이고 다른 하나는 聖址입니다. 聖地는 예수님이 활동하셨던 땅, 발자취와 숨결이 남아 있는 땅입니다. 聖址는 성모님 발현지나 성인 순교자 등과 관련된 유적지입니다. 한국에서는 聖地와 聖址가 구분 없이 사용되고 있습니다만, 원칙적으로는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이탈리아어로 聖地는 테라 산타(Terra Santa, 영어 Holy Land)이고, 聖址는 상투아리오(Santuario, 영어 Shrine 또는 Sanctuary)입니다. 테라 산타는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톨릭의 나라 이탈리아의 성지도 모두 상투아리오입니다. 예외적으로 로마에 테라 산타가 한곳 있습니다. 바로 스칼라 산타입니다. 예수님의 피와 땀이 배어 있는 곳이기 때문에 사실상 Terra Santa라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로마에서 예수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은 스칼라 산타뿐입니다.

 

헬레나는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오로지 사랑으로 아들을 키웠고, 아들은 어머니를 한시도 잊지 않은 효자였습니다. 아들은 306년 황제(서방 정제)에 즉위하자마자 어머니를 독일 트리어의 궁전으로 모셨습니다. 어머니는 자연스럽게 아들의 종교 정책에 조언을 많이 했습니다. 밀라노 칙령, 성전 건설, 그리스도교 신자 지원…. 헬레나는 아들이 황제에 즉위하기 전부터 강한 신앙심을 갖고 있던 신자였습니다. 많은 박해를 했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재위 284~305년) 시절 이미 황실에 적지 않은 수의 신자가 있었을 정도였으니까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측근 근위병이었던 세바스티아누스 성인의 순교가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헬레나의 신앙 덕분에

 

헬레나는 325년 예루살렘 순례를 떠났고 아들의 도움을 받아 그리스도교 선교를 위해 많은 일을 했습니다. 팔레스티나에 ‘주님 탄생 기념 성당’, ‘주님 무덤 성당’ 등 여러 성당을 세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 몸에 박혔던 못, 가시관의 가시, 죄목을 적었던 죄명패, 우도의 십자가 횡목 등 예수님 관련 유품을 발굴하여 로마로 가져왔습니다. 로마에 있는 ‘예루살렘의 성 십자가 성당’에 이 유품들이 모셔져 있습니다. 스칼라 산타도 이때 함께 가져왔습니다.

 

어머니가 가져온 스칼라 산타가 로마에 있기에, 아들이 베드로 사도의 무덤이 있다고 믿은 바티칸 언덕에 지은 베드로 대성당이 더 거룩해 보입니다. 초세기의 유명한 역사가 에우세비우스의 기록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은 열두 사도처럼 헬레나의 신앙은 견고하고 열의가 뛰어났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10월 11일, 이백만(요셉, 주교황청 한국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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