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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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순교자들의 이야기1: 순교자 남 엘리사벳과 이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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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9-11 ㅣ No.2126

[순교자들의 이야기] (1) 순교자 남 엘리사벳과 이 프란치스코

 

 

순교자 남상교(아우구스티노)의 딸 엘리사벳은 어려서부터 길쌈과 바느질하였으며 온화한 태도가 출중하였다. 그녀는 제천시 송학면 도화리 광암(廣岩)에 살던 이 프란치스코와 결혼하였다. 시부모에게 효성스럽고 가난함을 잘 참으며 모든 일에 온순하고 기쁨과 성냄을 바깥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서 집안과 이웃 사람들, 특히 노복(奴僕)까지도 그 부덕(婦德)의 극진함을 본받고자 하였다. 세례를 받은 후에는 대세주는 법을 알아 집안과 이웃의 죽을 위험에 있는 아이들에게 성심껏 대세를 주었다.

 

병인박해에 친정 식구들과 남편 프란치스코가 체포되자, 오히려 먼저 자신이 체포되지 않음을 뼈에 사무치도록 슬퍼하면서, 집안 가족들에게 “착실히 예비하라”고 타일렀다. 온 가족이 서울 포졸들에게 체포될 때, “이왕 기다리던 일이로다.”라고 하였다. 충주에서 문초를 당하던 중 질부(姪婦) 권 마리아가 배교하고 나오려는 기색을 보자, “여자의 일은 삼종지도(三從之道)를 피하고도 남에게 모욕을 당함을 하거든, 하물며 이때를 당하여 목숨만 도모하고 영혼의 영원한 상벌을 생각지 아니하고, 우리를 구속하신 대은주(大恩主)를 배반하고자 하니, 전장의 군사가 적국의 위엄을 두려워 국명(國命)을 어기면 장차 어디로 향할꼬? 깊이 생각하라.”고 권면하였다. 이에 질부는 말씀이 끝나기 전에 잘못함을 뉘우치고 의연하게 함께 순교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때 엘리사벳의 나이는 60세였다.

 

이 프란치스코는 성품이 순수하고 정숙하여 위엄과 권세와 세물(物物)이 능히 그 마음을 요동치게 하지 못하였다. 페레올 주교에게 세례를 받은 그는 세속의 영예와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다만 주님을 섬기고 영혼을 구할 뜻으로 말씀과 행실이 정직하였으며 형제들과 따뜻한 우애를 나누었다. 순박한 덕과 안빈낙도(安貧樂道)하며 정제(整齊)한 풍도(風度)와 안연(晏然)한 기색이 가히 우러를 만하였고, 친척과 친구들 중에 칭찬하지 않는 이들이 없었다. 1866년 정월 장인 남상교(아우구스티노)가 체포되자, 제천시 송학면 도화리 광암에서 충주로 이주하였다. 그런데 1867년 8월 14일(양 9월 11일) 제천 포졸에게 체포되어 5개월을 제천 옥에 갇혔다가 공주로 이송될 때, 혹형을 받았다. 이때 비신자 일가 한 사람이 감영에 탄원서를 올려 12일 만에 감영으로 이송되었는데, 마침 그의 동서인 공주 판관은 충청감사에게 사직하겠다고 청하였다. 판관은 “감영 옥에 동서(이 프란치스코)가 죄수가 되었은 즉, 체면에 미안하다.”고 하였다. 감사는 깜짝 놀라 이 프란치스코를 청주로 이송시키면서, 청주 병사(兵使)에게 밀통하여 1868년 1월 석방시켰다. 집에 와서 “이단을 끊고 영리(榮利)를 생각하지 아니하며 십계를 지키기는 위주구령함이러니, 좋은 기회를 만났다가 실시(失時)하기는 원통한 일이로다.”라고 길게 탄식하였다. 그해 윤 4월 24일 집안 식구 7명이 서울 포교에게 체포되어 충주에서 문초를 받았는데, 7명의 대답이 한 입에서 나옴 같은즉 다시 조목대로 심문함도 없이 5명이 서울로 이송되었다. 그때 나이는 59세였다.

 

[2022년 9월 11일(다해) 연중 제24주일 원주주보 들빛 3면, 여진천 폰시아노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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