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9일 (목)
(백)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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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12-23 ㅣ No.1419

[124위 시복 특집]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1821-1861년) ①

 

“인자하신 하느님 아버지, 당신 종들의 피가 호소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최양업 토마스는 1821년 3월, 충남 청양의 다락골 인근 새터 교우촌에서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과 복자 이성례 마리아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1835년 말, 조선 잠입에 성공한 모방 신부는 즉시 전국의 신앙 공동체를 순회하기 시작했는데, 이듬해 초, 수리산 마을의 최경환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모방 신부는 거기서 장래가 촉망되는 최양업을 한국의 첫 신학생으로 선발했는데, 당시 최양업의 나이 15세였습니다. 신학생으로 선발된 최양업은 1836년 2월, 서울의 모방 신부 댁에 도착하여 라틴어 수업을 받았습니다. 이어서 모방 신부가 신학생으로 간택한 최방제 프란치스코가 3월 14일에, 김대건 안드레아가 7월 11일에 각각 도착하여 함께 생활했습니다.

최양업은 1836년 12월 3일, 동료 신학생들과 함께 성경에 손을 얹고 순명을 서약한 후 마카오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중국대륙을 남하하여 다음 해 6월7일, 마카오에 있던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에 도착한 그들은 이때부터 그곳에 임시로 설립된 신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마카오 유학은 1842년까지 계속되었는데, 1837년 11월에는 동료 최방제가 열병으로 사망하는 아픔을 겪었고, 1839년에는 마카오의 소요 때문에 필리핀의 마닐라로 잠시 이동하여 수업을 받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 최양업은 만주의 소팔가자로 거처를 옮겨 조선대목구의 부주교인 페레올 주교에게 수업을 받았고, 1843년에는 리브와 신부를 통해 프랑스 파리의 무염성모성심회에 가입했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조국에서 일어난 박해와 순교자들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때 최양업이 프랑스로 돌아간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는 다음과 같은 그의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우리 부모님과 형제들을 따라 공을 세우지 못했으니 제 신세가 참으로 딱합니다. 그리스도 용사들의 그처럼, 장렬한 전쟁에 참여하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정말 부끄럽습니다! 이렇듯 훌륭한 내 동포들이며, 이렇듯 용감한 내 겨레인데, 저는 아직도 너무나 연약하고 미숙함 속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인자하신 하느님 아버지, 당신 종들의 피가 호소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어 당신의 넘치는 자비와 당신 팔의 전능을 보이소서. 언제쯤이나 저도, 신부님들의 그다지도 엄청난 노고와 제 형제들의 고난에 참여하기에 합당한 자 되어 구원 사업을 완성할 수 있을까요?”

최양업은 1844년 12월 10일경, 김대건과 함께 부제품을 받았습니다. 이후 김대건 부제가 사제품을 받고서 페레올 주교, 성인 다블뤼 신부와 함께 조선에 입국한 뒤에도 최양업은 소팔가자에 남아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귀국로를 찾고자 지속적으로 노력했습니다.

서울대교구 홍보국 엮음 | 그림 박지훈, 124위 약전 ⓒ CBCK /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순교영성연구소

[2014년 12월 21일 대림 제4주일 서울주보 6면]

 

 

[124위 시복 특집]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1821-1861년) ②

 

“이것이 저의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될 듯합니다. 계속 추적하는 포위망을 빠져나갈 수 있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 불쌍하고 가련한 우리 포교지를 여러 신부님들의 끈질긴 염려와 지칠 줄 모르는 애덕에 거듭거듭 맡깁니다.”(스승 르그레즈 신부에게 보낸 서한 중에서)

 

 

1846년의 박해와 김대건 신부의 순교 소식을 접한 최양업은 조선교회 밀사들의 만류로 귀국을 포기하고, 극동대표부가 있던 홍콩에서 「한국 순교자들의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했습니다. 이후 상해로 거처를 옮긴 그는 1849년 4월 15일, 마침내 서가회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사제 최양업은 그해 5월, 요동 지방으로 옮겨 성인 베르뇌 신부 아래서 사목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최양업은 12월 3일, 조선교회의 밀사들을 만나 귀국에 성공했습니다. 최양업은 즉시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만난 뒤, 각처에 숨어 있는 신자들을 순방하기 시작했는데, 1850년 초부터 6개월 동안 5개 도(道)와 5천여 리를 걸어다니며 3,815명의 신자를 방문했습니다. 최양업의 이러한 사목 활동은 이후 11년 6개월여 동안 계속되는데, 물론 전국에 산재해 있는 신자들을 순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서양인으로 오인 받아 마을에서 쫓겨나기도 했고, 포졸들의 습격으로 죽을 위험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1859년에는 순방 도중 발각되어 포졸과 외교인들에게 두들겨 맞고, 주막에서 쫓겨나 반쯤 나체가 된 몸으로 눈 쌓인 밤을 헤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그의 신앙과 조국애, 그리고 신자들을 향한 애정을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최양업은 한문 교리서와 기도서를 한글로 번역했고, 선교사들의 입국을 도왔으며, 신학생들을 말레이반도에 있는 페낭 신학교로 보냈고,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을 수집했습니다. 1860년 경신박해의 고비를 가까스로 모면한 최양업은 베르뇌 주교에게 성무 집행 결과를 보고하고자 길을 나섰다가 그만 과로에 장티푸스가 겹쳐 문경읍 혹은 진천 배티 교우촌에서 선종했습니다. 이때가 1861년 6월 15일로 당시 그의 나이 40세였습니다.

베르뇌 주교는 파리외방전교회의 신학교 교장신부에게 보낸 서한에서 최양업을 이렇게 기렸습니다. “최 토마스 신부는 신심, 영혼의 구원을 위한 불과 같은 열심, 그리고 무한히 귀중한 일에서는 훌륭한 분별력으로 우리에게 귀중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유일한 한국인 신부 최 토마스가 구원의 열매를 풍성히 맺은 성사 집행 뒤에, 내게 자신의 업적을 보고하려고 서울에 오던 중, 지난 6월 세상을 떠났습니다. … 그는 12년간 거룩한 사제의 모든 본분을 지극히 정확하게 지킴으로써 사람들을 감화시키고, 성공적으로 영혼 구원에 힘쓰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최양업의 선종 뒤 5개월이 지난 다음, 베르뇌 주교의 주례로 장례가 성대하게 치러졌고, 그의 시신은 배론 신학교 뒷산에 안장되었습니다.

서울대교구 홍보국 엮음 | 그림 박지훈, 124위 약전 ⓒ CBCK /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순교영성연구소


[2014년 12월 28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가정 성화 주간) 서울주보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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