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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1933년 천주교신학생 김필현의 유럽행 여행기 속 아시아 경유지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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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7-21 ㅣ No.1581

1933년 천주교신학생 김필현의 유럽행 여행기 속 아시아 경유지 기록

 

 

국문 초록

 

김필현은 평양지목구장의 성직자 양성정책에 따라 로마 울바노대학에 유학하였다. 1933년 9월 6일 사리원역을 출발하여 그해 10월 29일 울바노대학에 도착한 김필현은 그의 여정을 1935년 평양지목구에서 발행하는 잡지에 게재하였다. 김필현은 평양지목구장이 결정한 항로를 따라 가며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일기체 형식으로 기록하였다. 김필현의 여행기는 종교 관련 장소들, 방문 지역의 사람들, 1930년대 서구제국주의세력의 아시아 지배에 대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김필현은 배가 기항하는 곳마다 천주교 관련 장소들을 찾았고 천주교 신자들과 대화를 하였다. 그는 그가 방문한 장소들에 대한 사전 지식도, 방문한 곳에서의 자료 수집도 거의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콜롬보에서는 이슬람교 교당과 성공회 회당을 언급하였고, 지나쳤지만 말라카는 일본천주교회와, 페낭은 한국천주교회와 관련하여 설명하였다. 홍해도 성서의 내용으로 서술하였는데, 다른 여행기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내용들이다. 이것이 김필현의 여행기가 갖는 첫 번째의 특징이다. 

 

김필현은 여행 중 만난 사람들에게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가 만난 사람들은 여러 인종이었고, 한국인들보다 어둡고 검은 피부색을 가졌다. 그런데 남아시아 원주민들의 검은 피부색에 대한 김필현의 두려움은 문명과 야만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져 원주민들의 용모와 차림차림을 야만 종족의 본색을 벗지 못한 것이라 서술하는 한계를 보였다. 콜롬보 아이들의 구걸 행위를 미개한 주민의 풍습, 남아시아 원주민 장사꾼과 탑승객들의 매매행위를 문명인과 야만인 사이의 물물교환으로 생각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1920년대의 여행기들에서도, 1930년대 이순탁의 여행기에서도 이런 인식은 보이지 않는다. 처음으로 보기 때문에, 피부색 등 용모의 다름을 공포, 이상함, 야만 종족의 본색으로 생각한 것은 김필현의 여행기에 그려진 두 번째의 특징이자 아쉬움이다.

 

김필현은 사람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정치와 경제에도 깊은 관심을 두었다. 탑승한 일본우선의 규모와 설비에 감탄하였고, 상하이에서는 상해사변을 언급하고 조계지를 언급하였다. 홍콩 ‧ 싱가포르 ‧ 콜롬보에서는 경제발전에 놀라워하며 영국의 통치정책에 감탄하였다. 김필현이 아시아의 경제 상황에 관심을 둔 것은, 경제 관련 과목들을 공부하였고, 세계대공황으로 인해 더욱 힘들어지고 있던 한국의 경제 현실을 직‧간접으로 겪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부족한 음료수를 해결하기 위해 만든 홍콩과 아덴의 저수기관을 수탈의 상징인 한국의 수리조합 저수지와 같다고 한 것은 겉모습만의 서술이었다. 제국주의 수탈을 위한 개발이라는 것을 간파하지 못한, 김필현의 여행기에 보이는 세 번째의 특징이자 한계이다.

 

 

1. 머리말

 

1933년 9월 6일 사리원역1)을 출발한 김필현(金必現)은 그해 10월 29일 이탈리아 로마의 울바노대학(Collegium Urbanum)2)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약 1년 후인 1934년 10월부터 1935년 5월까지 평양지목구에서 간행한 『가톨릭연구』에 「로마 永城으로」라는 제목으로 7회에 걸쳐 그의 여행기를 게재하였다. 김필현의 여정은 박용옥(朴瓏玉, 디모테오: 1912~1949), 휴가차 미국으로 귀국하는 메리놀외방전교회 선교사 크레이그(Craig, Hugh, 한국명 奇厚根)3) 신부와 함께였다.

 

김필현은 평양지목구 신학생으로 용산신학교에서 철학과 1학기를 공부하였고,4) 1930년 4월 1일 제2대 평양지목구장으로 선임된 모리스(Morris, John Edward, 한국명 睦怡世) 몬시뇰의 평양지목구 성직자 양성정책에 따라 울바노대학에 유학하였다. 김필현과 박용옥의 울바노대학 유학은 한국인 신학생으로서는 1919년 대구대목구 신학생들에 이어 두 번째였다. 대구대목구 성유스티노신학교의 송경정(宋庚正, 안토니오, 1900~1923) · 전아오(全俄奧, 아우구스티노, 1894~1922) 신학생은 1919년 11월 24일 대구대목구장 드망즈(Demange, Florian, 한국명 安世華) 주교와 함께 대구를 출발하여5) 1920년 1월 20일 로마에 도착하였다.6) 송경정·전아오의 입학 이후 드망즈 주교는 더 많은 신학생들을 울바노대학에 유학 보내고자 하였으나7)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1922년에 송경정은 결핵에 걸려 귀국하였고,8) 전아오는 협심증으로 울바노 콜레지오(기숙 신학원)에서 사망하였다.9)10) 그로부터 10여 년 후인 1933년 평양지목구의 신학생11) 김필현 · 박용옥이 울바노대학에 유학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외의 다른 나라를 여행한 한국인들이 몇 명이었는지 대한 통계는 발견할 수 없지만,12) 조선총독부의 여권 증명을 받고 도항(渡航)한 한국인의 숫자는 『조선총독부통계연보』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총독부가 발급한 한국인의 여권은 1911∼1923년에 수천 개를 헤아렸다가 이후 수백 개로 줄어들었고, 김필현·박용옥이 여권을 발급받은 1933년에는 74개를 기록하였다.13) 1933년 해외 도항 한국인은 49명이었는데 도항 목적은 상업 19명, 학문연구 10명, 가사 8, 포교 5, 시찰 4명, 기타 3명이었다.14) 도항 목적이 학문연구인 10명의 유학 장소는 구주제국(歐洲諸國) 4명, 북미합중국 5명, 버마 1명이었는데,15) 구주제국 유학생 4명 중에 김필현 · 박용옥이 있었다.

 

김필현의 울바노대학 유학은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였고, 여행기 작성은 “고국동포의 부탁을 받은”16) 때문이었다. 평양지목구의 전교회장 대상 ‘종교연구 강습회’가 김필현의 출발 후인 1933년 9월 28일부터 시작되었지만, 김필현은 평양지목구 신학생이었으므로 이 강습회를 알았을 것이다. 이 강습회의 강의안을 인쇄한『가톨릭연구강좌』가 1934년 1월에 간행되었고, 제1권 제7호부터『가톨릭연구』로 제호를 변경하였는데17) 김필현의 여행기 「로마 永城으로」는 제1권 제10호부터 게재되었다.

 

김필현이 유학할 장소, 출발부터 도착까지의 행로는 평양지목구장이 결정하였다. 김필현은 정해진 항로를 따라가며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일기체 형식으로 기록하였다. 3·1운동 이후 일제가 한국인의 요구를 일정 부분 반영한 언론정책으로 많은 신문·잡지들이 발간되었고, 그 신문 · 잡지들에 수많은 여행기들이 수록되었다. 종교계에서 발행한 신문·잡지들에도 여행기들이 실렸는데, 한국천주교회의 기관지 『경향잡지』에도 한기근(韓基根, 바오로: 1867/1868~1939) 신부의 여행기가 「로마여행일기」18)라는 제목으로 1925년부터 2년여 동안 게재되었다. 20세기 전반기 한국인들의 외국유학은 매우 적었고, 천주교신학생의 외국유학도 마찬가지였다. 본고는 김필현의 여행기에 수록·표현된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1920년대의 유럽유학생들인 김준연(金俊淵),19) 박승철(朴勝喆),20) 김현준(金賢凖),21) 계정식(桂貞植)22) 등의 여행기들, 한기근 신부의 1925년 여행기, 김필현보다 4달여 전에 서구로 여행한 이순탁(李順鐸)23) 교수의 여행기와도 비교·참조하여 천주교신학생 김필현의 여행기가 갖는 특징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2. 종교시설 방문과 관찰

 

김필현의 여정은 다음과 같았다. 

 

9월 6일 사리원역 출발 / 9월 8일 10:30 부산 부두 출발 (昌慶丸), 18:30 일본 시모노세키[下關] 도착, 19:00 시모노세키 출발 (長水丸), 19:15 모지[門司]항 도착, 21:30 모지항 출발 (棒名丸) / 9월 11일 8:30 중국 상하이[上海] 도착, 9월 12일 13:00 상하이 출발 / 9월 15일 7:00 홍콩 도착, 9월 30일 11:00 홍콩 출발 (香取丸) / 10월 4일 16:30 싱가포르 도착, 10월 5일 싱가포르 출발 / 10월 6일 22:50 페낭 도착, 10월 7일 새벽 페낭 출발 / 10월 11일 8:30 콜롬보 도착, 밤 콜롬보 출발 / 10월 18일 새벽 아덴항 도착, 14:15 아덴 출발 / 10월 23일 10:30 포트사이드 항 도착, 포트사이드 항 출발 / 10월 27일 이탈리아 나폴리 항 도착 / 10월 28일 8:40 폼페이 / 11:40 아말피 / 16:30 나폴리 숙소 / 10월 29일 10:15 나폴리역 출발, 4시간 후 로마 도착, 15:20 울바노대학 도착.

 

김필현은 천주교 신학생으로서 탑승한 배가 기항하는 곳마다 그곳의 천주교 성당 등을 찾았다. 첫 번째 기항지인 일본에서는 모지[門司]에만 약 2시간 동안 머물렀는데, 성요셉 성당을 참배하고 주임신부·전도사와 짧게 한국과 일본의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24) 구체적으로 한·일 교회의 무엇을 이야기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일본의 천주교 성당 방문 내용을 언급한 20세기 전반기 한국인의 여행기는 한기근 신부의 「로마여행일기」뿐이다. 한국인 신부대표로 한국 순교자들의 시복식 참여가 여행 목적이었고, 경향잡지사 사장으로서였기 때문이었는지 한기근 신부의 여행기는 대부분 종교적인 내용이다. 한기근 신부는 일주일간 일본에 머물렀는데, 그가 방문한 고베[神戶]·교토[京都]·오사카[大阪]의 모든 성당들이 화려하고 깨끗하다며 한국 신자들도 일본처럼 성당을 깨끗하게 꾸미기를 희망하였다.25)

 

모지에서 출발한 배가 중국 상하이[上海]에 도착하였다. 김필현은 프랑스 조계26)에 있는 서가회(徐家滙) 성 이냐시오 대성당을 참배하였는데 본당신부가 성당 건축, 상하이의 천주교 신자수 등을 설명하였다. 대·소 신학교, 예수회가 설립 관리하는 천문대, 고아원, 박물관, 공예소, 자모당, 성요셉 성당, 서회 사범학교, 루이쓰 소학교, 주교관 등도 구경하였는데27) 김필현은 이들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표현하지 않았다. 하루라는 짧은 시간에 많은 종교시설들을 방문하였으니 자세히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그 시설들에 대한 자료를 미리 입수하여 공부하지 않았다면 설명도, 자신의 느낌이나 의견 표명도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1925년 한기근 신부는 상하이에서 2일간 머물렀는데 당가(當家)에만 머물러 서가회 대성당, 천문대도 구경하지 못했다.28)

 

상하이에 이은 기항지 홍콩[香港]에서 김필현은 미국 메리놀외방전교회 신부의 안내로 화남대수도원(대신학교)을 방문하였다. 수도원 설립 과정을 들었고, 그곳 신학생들과 처음 만났지만, 라틴어로29) 두 나라의 교회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김필현은 그것을 “민족감과 국경을 초월한 가톨릭 신민적 교제”30)라 하였다. 한국과 홍콩의 교회에 대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했는지는 알 수 없다. “미국 메리놀외방전교회”라고 수도회의 본부가 위치하는 국가 명을 제시하였는데, 당시 한국에 들어와 활동하고 있는 선교회들을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독일 베네딕도회, 미국 메리놀외방전교회, 아일랜드 골롬반외방전교회라고 수도회 명칭에 국가 명을 넣어 불렀던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나자렛 출판소와 베타니아 병원31)도 방문하였는데 나자렛 출판소는 엄청난 규모로 동양 천주교회의 중심이고, 베타니아 병원은 “간호하는 수녀들의 정성과 사랑의 사업”이라며 찬탄하였다.32)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가 운영하는 시약소들이 있었을 뿐, 병원은 없었던 한국천주교회의 상황과 비교할 때 베타니아 병원은 한국천주교회의 신학생 김필현에게 놀라움이었다. 한기근 신부는 홍콩에서도 당가만 방문하였기에33)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싱가포르에서 김필현은 성요셉 성당을 참배하였는데,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신부가 관할하는 성당이라며 홍콩에서와 마찬가지로 성당 관할 수도회, 그 수도회의 본부가 위치하는 국가 명을 제시하였다. 대·소 신학교와, 성모 성당, 성녀 소화 데레사 성당도 방문하였다. 성모 성당은 중국인이 모든 비용을 맡아 운영하였고, 성녀 소화 데레사 성당에는 인부들의 부주의로 천정에서 떨어진 돌기둥에 성직자가 사망한 성당 건립 애화(哀話)를 조각한 화강석 비문이 있었다.34)

 

김필현은 이슬람교 교당이 “엄청나고 굉장”하다고 하였다.35) 이슬람교는 1890년대부터 한국의 신문들에 소개되었지만 1930년대까지 한국에는 이슬람교 신자도 종교건물도 없었다. 천주교 신학생이지만 타종교인 이슬람교에 부정적이지 않았다. 한편 천주교 성당으로 오해할 수 있는 영국 성공회 회당이 7∼8개소인 것은 싱가포르가 “영국의 영지라는 것을 첫눈에 짐작”하게 한다고 하였다. 종교건물에서 영국의 싱가포르 지배, 영국 제국주의의 싱가포르 침략을 생각한 것은, 한국의 곳곳에 건립된 일본 신사(神社 · 神祠)와 같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36) 성공회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싱가포르를 지배하는 영국 제국주의를 지적하였다. 한기근 신부는 싱가포르에서도 당가에만 들렀었다.37)

 

김필현은 이어지는 항로에서 도착한 콜롬보에서 성녀 루시아 성당과 대주교관을 방문하고 가톨릭대학을 구경하였다.38) 그러나 방문한 곳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은 표현하지 않았다. 한기근 신부는 콜롬보의 대주교관과 성 프란치스코 수녀회를 방문하였다.39) 한편 계정식과 이순탁은 콜롬보에서 불타(佛陀)의 치아를 보존한 불아사(佛牙寺)를 방문하였다.40) 천주교 신학생 김필현과 천주교 성직자 한기근 신부는 천주교 성당과 수녀회 등을, 유학생 계정식과 이순탁 교수는 불교 사적지를 찾았다. 콜롬보에 기항한 것은 같지만, 각자의 관심이 무엇인가에 따라 방문 대상이 달라졌음을 보여준다.

 

아덴에서 김필현은 아덴 성당과 성프란치스코 성당을 방문하였다. 성 프란치스코 성당의 신부는 이슬람교 신도가 4천여 명인 아덴에서 천주교 선교는 매우 어렵다고 하였다.41) 두 성당을 방문하였지만 김필현은 이곳에서도 그의 느낌을 서술하지 않았다. 

 

말라카42)와 페낭에는 상륙하지 않았지만43) 말라카를 지나면서는 일본천주교회를, 페낭을 지나면서는 한국천주교회를 김필현은 생각하였다. 살인죄로 추방당한 무사 야지로[彌次郞]가 말라카 섬에서 전교하던 성 프란치스코 하베리오(Franciscus Xivier)에게 세례를 받고, 사베리오 성인과 함께 1549년 8월 15일 가고시마[鹿兒島]에 도착하여44) 일본천주교회의 문을 열었다고 설명하였다. 또한 페낭신학교(Collège Général de Pensng)에서 공부한 한국 신학생들이 성직자가 되어45) 한국천주교회를 위해 많은 일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46) 이순탁은 페낭에 상륙하였는데 이슬람교 사원을 구경하였다.47) 페낭신학교, 한국천주교회와 페낭의 관계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그가 그러한 내용을 알았을 가능성이 적고, 관심도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최종 기항지인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김필현은 그동안 지나온 지역들과는 다른 광경을 보았다. 광장에는 큰 십자가가 있었고, 여기저기에 성상(聖像)들이 있었으며, 화려한 성모상에 촛불을 켜놓은 곳이 많았다. 길에서는 많은 주교, 신부, 신학생들을 보았다.48) 천주교회의 중심 이탈리아임을 실감했다. 나폴리 대성당을 방문하였는데 웅장했고, 내부장치는 아름다웠으며, 제대에 모신 금강석 성모상은 눈부셨다.49) 이순탁은 나폴리 대성당에서 젠나로(Gennaro) 성인의 기적을 듣고 송도 선죽교(善竹橋)를 생각하였으며,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기적이라 하여 과학자도 과학 밖에 두려는 것 같다며 상당히 길게 설명하였다.50) 김필현의 여행기에는 젠나로 성인의 기적에 대한 언급이 없는데, 이유는 알 수 없다. 

 

김필현은 홍해와 시나이산을 성서와 함께 설명하였다. 홍해는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 군병의 추격을 받아 홍해 앞에 이르렀는데 모세가 지팡이로 갈라놓았다”51)고 하였다. 한기근 신부도 김필현과 같은 내용으로 홍해를 설명하고, 홍해가 성서 역사로도 세계역사로도 유명한 기념의 바다라고 하였다.52) 이순탁은 홍해의 지리적 위치, 명칭의 유래, 날씨 등만을 언급하였고,53) 김준연은 홍해가 덥다고만 계속 강조하였다.54) 김필현은 시나이산을 “모세가 10계 판을 받은 산, 천주의 자취가 남은 산”55)이라 하였다. 한기근 신부도 천주가 십계를 반포한 시나이산이라 하였다.56) 이순탁도 하나님께로부터 모세가 십계를 받은 산이라며, 구약을 뒤적이며 시나이산을 감격스럽게 바라보았다.57) 김준연도 “모세가 하느님께 십계판을 받았다는 시나이산”이라 하였다.58) 모두가 시나이산을 성서의 내용으로 설명하였다.

 

천주교신학생이지만 성당 등 천주교 관련 장소, 홍해와 시나이산에 대한 김필현의 설명은 상당히 간략하다. 김필현의 여행기를 보면, 그의 설명은 그가 방문한 곳의 성직자들의 설명, 그가 탑승한 배의 갑판장의 설명, 그리고 그 자신의 지식에 토대한다. 그런데 김필현은 방문한 장소들에 대한 사전 자료 수집도, 방문한 곳에서의 자료 수집도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사전 지식이라면 『경향잡지』에 수록된 한기근 신부의 여행기인데, 한기근 신부는 상하이 · 홍콩 · 싱가포르에서 당가에만 들렀기에 이들 지역에 대한 설명이 없다. 갑판장의 설명은 특정 종교 신자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갑판장으로부터 기항하는 모든 곳의 천주교 사정을 들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천주교신학생이지만 방문한 지역들의 천주교 관련 장소들에 대한 설명이 간략했다고 여겨진다. 홍해와 시나이산에 대한 언급이 상당히 짧은 것은 그의 여행기가 게재될 『가톨릭연구』의 독자층이 대부분 천주교신자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된다.

 

 

3. 피부색과 문명 · 야만

 

태어난 곳, 생활했던 곳을 떠난 여행에서 만나는 것은 사람들, 사람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놓은 것들(문화)이다. 김필현은 그가 만난 사람들의 인종과 피부색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상하이는 각국 인종 전람회관과 같고,59) 검둥이60) 인도인 순사들은 기운 세고 직무에 충실한 상하이의 명물이라 하였다.61) “……(라)고 한다”라는 표현을 하였는데, 그 내용을 누군가에게서 들었거나 어떤 책에서 보았다는 뜻이다. 인도인은 “수염이 사납게 난 험살스러운 꼴”이고, 중국인은 “본색을 감추지 못하는 엄울하고 수상한 행동”을 하였는데, 둘 다 동료인 박용옥의 물건을 훔쳐 갔다고 김필현은 기술하였다.62) 박용옥의 물건을 훔쳐 갔기 때문에 인도인과 중국인을 그렇게 표현하였겠지만, 오해와 편견에 의한 서술이라 여겨진다. 

 

‘검은’ 피부색에 대한 김필현의 서술은 싱가포르에서도 계속된다. “세계 각국 인종의 잡거지”이지만 싱가포르인 대부분이 중국인이라 하였다.63) 그러면서도 싱가포르 부두의 순사, 세관리, 송영객 모두가 “까마둥이”였고, 검은 얼굴들을 처음 보기 때문에 “일종의 공포심”을 느꼈는데, “오동빛같은 얼굴에 흰 이빨이 더욱 무서웠다”고 하였다. 또한 싱가포르 시가에는 “보기에 무서운 깜둥이뿐”이고, “깜둥 양반들이 구석구석이 모여 서서” 그들에게 손가락질하며 중얼거리기에 무서웠다고64) 하였다. 김필현에게 싱가포르는 “검은 나라, 낯선 풍속”이었다.65)

 

이순탁은 싱가포르인의 약 7할이 중국인이고 마래인, 인도인 등 생김생김과 의복이 형형색색이라 싱가포르는 “세계 인종의 박람회”라 하였다.66) 중국인, 마래인, 인도인 등 국가 명으로 사람들을 표현하였지만 피부색은 거론하지 않았다. 계정식은 혼혈아가 많은 싱가포르를 세계인종전람회장이라 할 수 있는데 대부분 아세아 인종이라 하였다.67) 박승철은 싱가포르 마래인의 얼굴이 검고, 싱가포르 원주민은 눈과 하얀 이[齒] 외에는 숯처럼 검다고 하였다.68) 한기근 신부는 싱가포르 사람들을 마래인(馬來人: 말레이인) 혹은 흑인이라 하였고,69) 사이공 대성당에 들어갔을 때도 가장 눈에 띄는 이들이 인도인, 아프리카인, 마래인인데 얼굴이 검기 때문이라 하였다.70)

 

김필현은 상하이에서 본 인도인 순사, 싱가포르의 마래인들을 “검둥이,71) 까마둥이, 깜둥이,72) 깜둥양반”이라 하였다. 인도 · 스리랑카 등 남아시아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한국인의 피부색과 비교할 때 그들의 피부색이 더 검고 어두운 때문이었다.

 

한국인들과 다른 피부색의 사람들이 한반도에 왔을 가능성의 근거로 처용설화73)가 언급되었지만74) “지나치게 도식적이거나 비약적인 논리에 기초한 발상”으로 여겨져 설득력을 잃었다.75) 고려시대에는 대식국인(大食國人) 즉 아라비아인들이 고려에 와서 물품을 바쳤다는데76) 그들의 외모에 대한 설명은 없다. 조선 태조 3년(1394) 섬라곡(暹羅斛)의 사절 장사도(張思道) 등이 칼 · 갑옷 · 구리그릇과 “黑厮 二人”을 바쳤다는데77) ‘흑시’는 검은 하인 · 노예로 번역할 수 있다. 얼굴을 포함하여 피부색이 검었다는 뜻으로 생각된다. 

 

백인은 대개 서양 사람으로 표기되었다. 선조 때 서양 사람 마리이(馬里伊) 등이 조선에 표류하였다는데 그들의 외모에 대한 설명은 없다.78) 효종 4년(1653) 배 한 척이 깨져 제주 해안에 닿았는데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겠으나……38인이……파란 눈에 코가 높고 노란 머리에 수염이 짧았다.”79) 고종 1년(1864) 2월 함경감사의 보고에 의하면, 두만강 건너편에서 “이상한 생김새의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5명 중 3명은 눈이 깊이 들어가고 코가 오뚝하며 눈동자는 푸르고 머리털은 붉고……생김새나 복장으로 보아 서양인인 듯”80)하였다. 고종 8년(1871) 4월 8일 경기감사의 보고에, 제부도(濟扶島)에서 “눈이 움푹하고 콧마루는 높으며 눈썹과 머리털은 누르스름한 서양 사람”을 만났다.81) 서양 사람은 ‘파란 눈, 노란 머리, 높은 코’를 가졌다고 설명하였는데 피부색에 대한 언급은 없다.

 

조선중기 전란(戰亂)과 관련하여 조선에 파병된 이들 중 조선인들보다 검은 피부색을 가진 이들이 있었는데 『조선왕조실록』에는 ‘해귀’(海鬼)라 기록되어 있다. 선조 31년(1598) 명나라의 원군(援軍) 팽유격(彭遊擊=彭信古)이 데려온 “얼굴 모습이 다른 신병(神兵)”은 파랑국(波浪國: 포르투갈) 사람82)이었다. 해귀(海鬼)라고도 하였는데 노란 눈동자에 얼굴과 온몸은 검었고, 턱수염과 머리카락은 곱슬이었다.83)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조경남(趙慶男)이 기술한 『난중잡록』(亂中雜錄)에도 해귀(海鬼)의 모습이 “검고, 눈이 붉고, 머리카락은 솜털 같”84)았다. 1614년경 편찬된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는 명의 원군으로 파견된 유정(劉綎)이 데려온 해귀의 얼굴빛이 검은 칠을 한 듯 매우 검었는데, 그 얼굴 모습이 귀신 같았으므로 해귀(海鬼)라고 이름 붙였다.85) 1693년에 제작된 신경(申炅)의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에는 유정(劉綎)이 거느린 군사 중에 해귀 수십 명이 있었는데 얼굴이 새까매서 귀신같았다고 하였다.86) 조선인들보다 검은 피부색을 가진 이들을 귀신 같았다고 한 것은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부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왜곡된 인식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19세기 후반에는 한국인들보다 검은 피부색의 사람들을 오귀자(烏鬼子)로도 칭하였다. 고종 3년(1866) 7월 11일 평양의 신장포구(新場浦口)에 온 제너럴셔먼호에는 20명이 탑승해 있었는데, 영국인 토마스(Tomas, Robert Jermain)와 덴마크인 이팔행(李八行)87) 등 서양인 5명, 청국인 13명, 오귀자(烏鬼子) 2명이었다.88) 이러한 내용은 1788년에 제작된 『동문휘고』(同文彙考), 순조-고종 연간에 제작된 『용호한록』(龍湖閒錄), 박주대(朴周大: 1836-1912)의 『나암수록』(羅巖隨錄)에도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별건곤』 1936년 1월호에도 언급되었는데, “烏鬼子(馬來土人)”이라 하여89) 마래 원주민의 피부색이 검기 때문에 오귀자라고 한 것임을 알려준다.

 

20세기 전반기에 한반도 거주 외국인은 1910년 12,694명,90) 1933년 42,626명(남 33,731명, 여 8,895명)을 기록하였다.91) 이 숫자가 기록된 『조선총독부통계연보』에 만주국 및 중화민국인, 기타의 외국인으로만 나누어져 있기때문에 ‘기타의 외국인’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들의 피부색이 어떠했는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42,000여 명 외국인들 대부분은 피부색이 한국인들보다 하얗고 밝은 편이었을 것이다. 대부분 구미제국의 선교사들 · 상인들이었기 때문이다. 김필현이 만난 외국인은 천주교 선교사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인데, 그들의 피부색은 대개 하얀색이었다. 따라서 김필현이 남아시아에서 마주한, 한국인들보다 검은 피부색의 사람들은 생경(生硬)하였고, 그래서 공포를 느꼈다. 자신보다 검은 피부색 얼굴의 싱가포르 사람들을 “처음 보기 때문에” 공포심을 느꼈다. 유학을 준비하면서 김필현은 “미지의 현실”에 여러 날 동안 힘들었다고 하였다.92)

 

그런데 남아시아 원주민들의 검은 피부색에 대한 김필현의 공포감은, 문명과 야만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졌다. 원주민들은 볼수록 이상하고, 용모와 차림차림은 “야만 종족의 본색”을 벗지 못한 것으로 생각되었다.93) 용모와 차림차림이 어떠했기에 야만 종족이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한국인 · 일본인 · 중국인들과 다르고, 그동안 그가 한국에서 보았던 외국인들과 달랐던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유럽인들과 미국인들도 한국인들과는 용모가 달랐다. 한국인들과 다른 용모이기에 이상하고 야만 종족이라 한다면, 한국에서 활동 중인, 한국인보다 하얀 피부색의 서양 선교사들도 야만 종족이다. 그러나 김필현을 비롯하여 당시 한국인들은 서양인을 야만 종족이라 생각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문명의 선두주자라 생각하였다. 처음으로 보기 때문에, 피부색 등 용모의 다름을 공포·이상함·야만 종족의 본색으로 생각하고 표현한 것은 김필현의 여행기에 보이는 아쉬움이자 한계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아쉬움은 벳다 족에 대한 설명에서도 보인다. 김필현은 콜롬보 최초의 신민족은 ‘싱하레스’(Singhalese) 종족이고, 남인도에서 이주한 ‘타밀(Tamil)인’, 화란인, ‘벳다’라는 미개 야만 등 콜롬보의 종족은 잡동사니라고 하였다.94) 이순탁은 콜롬보의 인종이 “다양다종”하다면서 “아라비아에서 이주한 무어인, 남양에서 건너온 칼레이인 · 인도인 · 영국인 등” 김필현이 언급하지 않은 인종들도 열거하였는데95) 벳다 족에 대한 언급은 없다. 계정식은 스리랑카의 최초 식민자인 싱할레스가 가장 많고, 그 외에도 많은 혼혈종이 있는데 콜롬보에서 중국인은 볼 수 없다고 하였다.96) 김필현은 ‘벳다’ 족을 “미개 야만” 족이라 하였는데, 다른 이들의 여행기에서는 그러한 표현이 보이지 않는다. 기관장에게서 들었거나, 세계의 여러 인종들을 설명한 책을 읽은 때문일 것이라 생각된다. 

 

피부색을 포함한 용모에 의한 김필현의 야만 종족 인식은 원주민들의 행동과 풍속도 야만으로 인식하게 하였다. 곧 자신의 생각이 잘못이었음을 밝혔지만, 말레이 원주민들이 바나나 나무 잎사귀에 싼 음식을 손가락으로 집어 먹는 모습이 원시시대를 상상케 하고, 미개명의 행동이라고 김필현은 서술하였다. 원주민들이 손가락으로 음식을 집어 먹는 것은 그들의 종교법97)에 따른 것이고, 경제적인 여유가 있을지라도 1등이나 2등 선실에 들어가지 않고 갑판 위에 마련한 천막 속에 있는 것도 그들의 종교법을 지키기 위해서였다.98)

 

김필현은 자신과 박용옥에게 일본사람이라고 소리 지르는 것, 그들이 탄 인력거를 따라오며 돈을 달라고 애걸하는 (콜롬보)아이들의 행동을 “미개한 주민의 풍습”이라 하였다. 또한 장사꾼들이 종선을 타고 배 두루에 돌아다니며 줄을 올려 배 안의 손님이 청하는 물품을 건네고 손님들은 물건값을 내려보내는 모습이 옛날이야기로 듣던 “문명인과 야만인 사이의 물물교환” 같다99)고 하였다. 그리고 1만 명의 영국인이 수백만 명의 콜롬보 원주민을 지배하는 것은 “무형의 무기와 권위” 즉 문명이라고 하였다.100) 그런데 장사꾼과 손님 사이의 매매행위가 문명인과 야만인 간의 물물교환과 같다면, 장사꾼은 야만인이고 손님은 문명인이라는 것이다. 장사꾼은 대개 원주민일 것이고, 유럽행 선박이었으니 손님은 유럽인들이 많았을 것이다. 물건을 팔고 사는 행위는 경제 행위이지 문명적인 것도 야만적인 것도 아니다. 장사꾼들은 배에 탑승할 수 없고, 손님들은 배에서 내릴 수 없으므로 밧줄에 물건과 돈을 넣어 오르내리는 방법으로 매매를 한 것이다. 그리고 영국인이 콜롬보 원주민을 지배하는 것은 무형의 무기와 권위인 문명이 아니라 군함과 대포를 앞세운 제국주의 무력 침략이었고, 그 무력 침략의 결과인 제국주의 지배였다. 한기근 신부는 콜롬보가 인도와 마찬가지로 영국령이라고만 기술하였다.101)

 

김필현은 콜롬보에서 아이들이 돈을 달라고 한 행동을 미개한 주민의 풍습이라 하였다. 그런데 무수히 달려들어 ‘따바키 따바키’ 하는 신사 양복을 입은 이탈리아 나폴리의 ‘연초 걸인’의 모양은 한국의 걸인이 돈을 청하는 것과는 “색다른 구걸”로 이탈리아의 담배값이 비싼 때문이라 하였다.102) 한국에서 전근대 시기에 걸인은 떠돌아다니면서 구걸하는 ‘불쌍한’ 자들로 국가적 시혜 · 연민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걸인들의 행위는 ‘질병화’ · ‘범죄화’되었다.103) 1920년대 한국에서는 식민지 농업정책의 결과 농촌의 궁핍화로 농촌 빈민이 대거 이농하였고, 그 가운데 많은 걸인들이 생겨났다. 1932년 9월 현재 걸인 총수는 163,753명(한국인 163,725명, 일본인 14명, 중국인 14명)이었는데 곡창지대인 전북, 부자가 많이 사는 삼남에 걸인이 많았다.104) 돈을 달라고 했던 콜롬보의 아이들의 구걸 행위는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고, 한국의 걸인들도 생존을 위해 구걸하였다. 그러나 이탈리아인들의 담배 구걸 행위는 기호품을 얻기 위한 것으로,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던 콜롬보의 아이들이나 한국 걸인들의 행동보다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어렵다. 그런데 김필현은 생존을 위한 구걸 행위를 미개한 주민의 풍습으로, 이탈리아인의 담배 구걸 행위는 담배값이 비싼 때문이라고 서술하여 한계를 보였다.

 

 

4. 제국주의 침략과 경제발전

 

김필현은 식민지 한국에서 태어났고 성장하였다. 그가 탑승한 배가 기항하는 곳에서, 지나쳐가는 곳들을 바라보면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 관심은 사람들의 삶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치와 경제였다.

 

김필현은 일본에 약 3시간[9월 8일 18:30∼21:30] 동안 머물렀는데, 모지의 어디를 보아도 일본의 풍족함을 느낀다며 탄복하였다.105) 또한 모지항에서 탑승한 일본우선(郵船) 봉명환(棒名丸)106)이 약 1만 톤이라며 배의 구조와 설비를 찬탄하였다.107) 그러나 일본이 물질 면에서는 발달하였으나,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는 듯 축음기에 맞추어 요란하게 떠드는 일본인들의 행동은 “문명한 백성이라는 체면의 손상’이라 비판하였다.108)

 

이순탁도 당시 일본의 국부(國富)가 세계 4∼5위이고, 외국 무역을 위한 일본 상선(商船)이 척(隻) 수로 세계 3위, 톤 수로 세계 5위라며 부러워하는 자신의 마음을 한탄하였다.109) 김현준도 그가 탑승한 상근환(箱根丸)이 상당히 크고 흡연실 · 목욕실 · 수영장 · 도서실 · 식당 · 침실 · 운동장 등을 서양식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흡연실에는 여러 가지 오락기구 · 유희물 등이 가득하고, 운동장에는 콜캣 · 환투(丸投) 등 여러 종류의 실내운동기구가 구비되어 있다며, 그래서 그 배 안은 “20세기 문명생활의 축도(縮圖)”라고 하였다.110) 박승철도 1만 톤 규모의 일본우선 길야환(吉野丸)이 오락실[遊戱室] · 끽연실[煙房] · 제빙실(製永室) · 식당 · 의국(醫局) · 세탁소[洗濯店] · 목욕탕[沐浴店] · 주점 · 이발소 등을 갖추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승객 · 선원 700여 명이 탑승하였기에 매일 사건이 일어난다고 하였다.111) 1920∼1930년대 유럽행 일본 배에 탑승한 한국인들은 배의 규모와 설비에서 일본의 부강함을 보았고, 부러워하였다. 

 

일본의 국력은 중국 상하이에서도 확인되었다. 김필현은 1932년의 상해사변으로 가옥과 방축 등이 무너진 황포강 어구 오송(吳淞)항의 모습이 전쟁 때를 말하는 듯하다고 하였다.112) 그리고 상하이의 각 조계는 중국 정부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독립적·자치적인 곳인데, 약 2만 명의 일본인 대다수는 공동조계에 거주한다고 하였다.113) 그러나 한국인들이 어디에 거주하는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1920년대에 공동조계보다 프랑스조계에 많이 거주하던 상하이의 한국인들은 상해사변과 만주사변 등으로 인해 1932년 이후 프랑스조계보다 공공조계에 더 많이 거주하였다. 상하이의 한국인들은 1931년 프랑스조계 497명, 공동조계 268명, 중국인 지역 91명(총 856명)이었는데, 1935년에는 프랑스조계 706명, 공동조계 986명이었다.114) 김필현은 보잘것없던 상하이가 중국 제1의 상업지, 홍콩에 이어 중국 제2의 번화지가 된 것은 아편전쟁 이후 외국인에게 개항된 후 각국 사람들이 모여든 때문이라 하였다. 그러나 밤이면 타락한 사람들의 온갖 추태가 연출되는 모양이라며 상하이의 어두운 면도 언급하였다.115) 외적인 발전을 인정하였지만, 그에 부수되는 부정적인 모습도 지적한 것이다. 

 

이순탁도 오송 포대가 중국 국토 보전의 모든 책임을 지고 있는데 일본군 필사의 포격으로 점령되었음을 설명하였다.116) 공동조계는 인구 · 문화시설 · 교통 등 상하이의 중심으로, 외국 관공서 · 은행 · 상점 · 공장 등이 있고, 상하이는 국제관계의 측면에서 중요하다고 하였다.117) 1921년 11월 8일 상하이에 도착한 김준연은 모든 한국인들의 생명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는 동포들이 많기 때문에 상하이를 사랑한다며, 윤현진(尹顯振)의 묘소를 참배하고, 평소 경모하던 안·김·여(安·金·呂) 등을 만났다.118) 박승철은 상하이의 한국인들이 곤궁하게 살고 사상은 좌경하다고 하였다.119) 김현준120)도 한국인들과 연고가 많은 곳이기에 상하이라는 말을 들으면 한국인들은 “무슨 느낌을 품게 된”다고 하였다.121) 계정식은 선배들이 많이 있는 곳이라 하였다.122)

 

1920년대의 여행기들은 상하이를 한국인과 연계하여 설명하였는데, 김필현과 이순탁이 작성한 1930년대의 여행기들은 상해사변을 설명할 뿐 상하이와 한국인들과의 관계는 언급하지 않았다. 윤봉길 의거 이듬해인 1933년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한국에서 발행되는 신문·잡지들에서 상하이를 한국인들과 연계하여 언급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 생각된다.

 

김필현은 상하이의 발전이 외국과의 교역 때문이라 하였는데, 구체적인 외국을 지목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홍콩의 발전은 영국과 연계하여 설명하였다. 홍콩의 거리마다 “영국 주권의 색채가 농후”하여 “옛날 동양에서 영국의 침략 정책이 컸던 것을 알 수 있었”는데 해적의 소굴이었던 홍콩이 백 년도 안 되어 동양 제일의 무역항이 된 것은 영국 정책 때문이라며 놀라워하였다. 그리고 “옹색한 살림살이, 초가집, 흰옷 입은 사람들”의 한국에서 성장하였기에 홍콩의 여러 시설과 문화 발전이 부럽다고 하였다. 또한 홍콩의 “빗물을 받아 모으는” 기관이 한국의 수리조합 저수지와 같다고 하였다.123) 1908년 옥구서부 수리조합(沃溝西部水利組合)을 시작으로124) 한국에는 많은 수리조합들이 설립되었다. 그런데 일제의 수리사업은 대지주를 위주로 하여 중·소 지주와 자작농민, 자소작농민들에게는 많은 농사비와 수세를 부담 지웠다. 그리하여 산미증식계획 기간인 1920-1930년대 초 거의 모든 수리조합 지역에서 끊임없이 수리조합반대운동이 일어났다.125) 즉 한국의 수리조합 저수지는 일본제국주의 수탈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부족한 음료수를 해결하기 위해 설치한 홍콩의 저수기관이 한국의 수리조합과 같다고 한 것은 겉모양만을 설명한 것으로 아쉬움이 남는 서술이다. 아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석회암으로 만든 아덴의 큰 못(=탱크)이 한국의 수리조합 저수지와 같은 것이라 하였는데, 아덴의 탱크도 아덴 시민들에게 음료수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국인의 삶을 황폐화시키는 수탈의 상징인 수리조합 저수지와 같다고 한 것은 외관만을 말한 것이었다.126) 아덴항을 떠나면서는 수없이 날아오는 갈매기와 새매들을 보며 “공중에 흑백색의 선전 삐라를 던진 듯”하다고 김필현을 표현하였다.127) 소신학교 때인 1929년 11월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났고, 김필현은 그 두 달 전인 1929년 9월 용산신학교에서 분리된 백동(현 혜화동)의 소신학교 2학년으로 편입하였다. 1929년 12월 2일 광주학생독립운동 격문이 서울의 각 학교에 배포되었다.128) 소신학생 김필현도 그러한 상황을 보았을 것이고, 그래서 이런 표현을 하였을 것이다.

 

이순탁도 “작은 어촌으로 바위산 불모지대이던” 홍콩이 발전한 것은 “동양 통상의 중추 요지가 되리라고 간파”한 영국인의 “날카로운 안목”과 “개척”이라 하였다. 그러나 발달된 홍콩의 모든 상권이 중국인에게 있다고 하였다.129) 홍콩의 경제 실권자가 누구인가에 관심을 둔 것은 이순탁이 경제학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김준연은 남경조약으로 홍콩이 99년 조차권의 영령(英領)이 되었다고 하였다.130) 박승철도 심산궁곡의 도로가 콘크리트이고, 산 위에서 아래까지 전기가 설비된 홍콩은 대영제국의 위엄을 말한다고 하였다.131) 김현준도 황무지였던 홍콩이 발달한 것은 아편전쟁의 결과 홍콩을 획득한 영국인의 “비상한 노력” 때문임을 소학생도 안다고 하였다. 그리고 서양인이 대부분이리라 생각했는데, 홍콩 주민의 대부분은 중국인이라고 하였다.132) 계정식도 마적 소굴 홍콩을 통상의 요지가 되리라 간파한 영국이 1842년 남경조약에 의해 영령으로 만들었으며, 이후 인근까지 통치지역을 확대하고 99년 조차권을 획득하여 도로를 만들고 수도를 설치하고 나무를 심어 홍콩의 풍토(風土)를 크게 변화시켰다며 감탄하였다.133) 그러면서도 홍콩항에 많은 나라의 선박들이 각자 국기를 날리며 왕래하는 것이 한국인인 자신으로서는 슬펐다고 하였다.134)

 

1920년대에도 1930년대에도 홍콩은 유럽행 한국인 여행자들이 영국의 힘을 실감하는 곳이었다. 여행자들은 홍콩에서 위력적인 영국을 만났다. 그리고 이어지는 항로인 싱가포르와 콜롬보에서도 대영제국의 힘을 실감하였다. 홍콩 · 싱가포르 · 콜롬보에 대한 영국의 제국주의 통치 능력에 감탄하였다.135) 일제의 식민통치를 겪고 있던 한국인들의 여행기에 드러난 한계였다. 

 

김필현은 싱가포르가 영국의 식민지로 되기까지의 과정을 길게 설명하였다. 즉 싱가포르 원주민이 통치하다가 섬라국에 편입되었고, 이후 유불(柔佛)136)의 주단(朱丹)137)이 관리하였는데, 1819년 영국 동인도회사에서 파견한 영국 장교 래플스(Raffles. T.S)가 싱가포르의 발전을 예견하여 연 60만 불138)에 유불의 주단으로부터 영국 통치로 만들었다. 그래서 싱가포르는 말라카, 페낭 등과 함께 해협식민지139)가 되었으며,140) 영국은 “동양 침략의 패왕”이다.141) 그리고 싱가포르의 번창은 연 10억 불의 석광(錫鑛)142)과 고무 무역 때문이다.143) 한편 김필현은 영국이 장악한 싱가포르에서 일본인이 어별원(魚鼈園)을 운영하고 있으며, 싱가포르 거주 일본인들이 마래 방언에 익숙한 것에 놀랐다.144) 영국이 지배하는 싱가포르에서 나름의 이권을 챙기고 있는 일본인의 모습은 한국을 침략하여 식민지배하고 있던 일본인들과 달랐다. 일본어와 일본 역사를 강요하여 한민족의 사상을 말살하고 일본화하는데 매진하는 조선총독부의 통제하에서 생활했던 김필현에게 마래 방언에 익숙한 일본인의 모습은 놀라움을 주기에 충분했다.

 

계정식도 1819년 영국 동인도회사에서 파견한 래플스가 싱가포르의 유망함을 알고 유불의 주단에게 일시금 60불과 연불 2만4천 불에 매수하였다고 설명하였다.145) 한편 김준연은 싱가포르의 경제권을 중국인이 장악하고 있다며, 중국인들의 지식이 구미인보다 유치하고 생활 수준도 저열(低劣)하겠지만, 경제활동은 백절불굴이라며 감탄하였다. 중국인이 상하이의 상권도 잃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홍콩·싱가포르·말레이반도의 페낭을 보니 남양 방면의 상권을 중국인이 모두 쥐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멸망한 민족은 다시 자립할 수 있지만, 경제적으로 멸망한 민족은 다시 자립할 수 없으니, 지금은 중국이 빈약하지만 다시 설 수 있다고 하였다.146) 이순탁도 싱가포르가 영국의 극동 및 남양 무역의 요충지로 번창하는데 상권은 홍콩과 마찬가지로 거의 중국인이 가졌다고 하였다.147) 김필현과 계정식은 영국의 싱가포르 획득에 관심을 두었는데, 김준연과 이순탁은 싱가포르의 상권이 누구에게 있는가에 관심을 두었다. 정치와 경제의 관계를 언급하였고, 경제적인 자립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영국의 아시아 침략과 지배는 정치적인 지배인 것처럼 보이지만 경제적인 이권 획득이고 경제적인 지배였다.

 

김필현은 기항하지 않고 지나쳐간 페낭의 경제에도 관심을 표명하였다. 페낭에 대한 내용은 기관장에게서 들은 것이지만, 어떤 내용을 기록하는가는 김필현의 결정이었다. 김필현은 섬라국의 속국인 ‘재다’국의 영토 페낭이 1786년 영국 동인도회사에 매수되어148) 1837년까지 해협식민지의 정청지(政廳地)로서 유명한 무역항이었고, 정청이 싱가포르로 옮겨간 후에도 연 3억만 프랑의 무역액을 기록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페낭을 포함하여 말레이반도의 고무 산출액이 전세계 산출액의 50% 이상인데, 1870년경 커피 흉년으로 영국의 경제정책이 큰 타격을 입자 1876년 위컴(Wickham, Henry)이 브라질에서 고무종자 7만 개를 몰래 런던으로 가져와 ‘큐’(kew) 식물원, ‘석란도’ 식물원을 거쳐 싱가포르에서 1881년 첫 열매를 수확하였다. 이후 구미 각국의 급속한 과학 발달로 고무가 공업용 · 교통기관용으로 사용되자 고무값이 상승하였고 고무 재배도 증가하여 1928년 29만 7천 톤의 고무를 산출하였는데 당시 전세계 산출 총액이 65만 3천 톤이었다고 하였다.149) 이순탁도 “네델란드령 말라카에 대항하는 말레이반도의 무역지”로 페낭을 영국이 캐다(kedah) 국으로부터 매수하였다며 주석과 고무 재배를 언급하였다. 그리고 주석 · 고무에 버금가는 수출품이 식용유, 대당용유(代糖用油) 등으로 사용되는 야자열매인데 구미 각국에서 고가에 경쟁적으로 수입해 간다고 하였다. 더불어 이러한 것들을 이용할 줄 모르는 원주민이 불쌍하다고 하였다.150)

 

김필현은 콜롬보의 연혁도 페낭과 마찬가지로 기관장에게서 들었다. 작은 마을 콜롬보는 1517년 포르투갈의 침략을 받았고, 1656년 네덜란드, 1796년 영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데, 1869년 영국인들은 커피 유행병이 돌자 커피 대신 홍차를 재배하여 연 2억 근을 산출하였다는 것이었다.151) 계정식도 한촌(寒村) 콜롬보가 1517년 포르투갈령, 1656년 네덜란드령, 1796년 영국령이 되었고, 인도양 무역의 요지라고 하였다.152) 이순탁도 콜롬보의 중요 산업이 “제다업(製茶業) 소위 Ceylon tea”라고 하였다.153) 김준연도 콜롬보에서 연 2억 근의 차가 산출된다고 하였다.154)

 

인도양의 동남아시아 항구들은 거의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로 개발된 항구도시였다.155) 홍콩과 해협식민지(피낭, 말라카, 싱가포르)는 영국령이었고, 베트남 · 캄보디아 · 라오스 등은 프랑스 식민지, 필리핀은 미국의 식민지였다. 김필현이 탑승한 배는 영국이 지배하는 곳들에 정박하였고, 프랑스 식민지와 필리핀을 거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여행기에는 영국의 아시아 지배에 대한 내용만 언급되었다.

 

콜롬보를 출발한 김필현은 아덴을 거쳐 수에즈운하를 지나갔다. 여행자들은 수에즈운하에 들어가면서 유럽의 경지 내로 들어갔다고 생각했다.156) 김필현은 수에즈운하를 지도에서 보았는데,157) 아시아와 유럽의 거리를 4천 리158) 단축하여 경제상 · 군사상 · 사회상 공적이 크고, 영국 · 프랑스의 공동 경영이라 하였다.159)

 

여행기들에서 수에즈운하 설명은 상당히 비슷하다. 이순탁은 카이로 방문을 위해 튜픽(Tewfik)에 상륙하였으므로 수에즈운하를 지나지 못했다. 그러나 1887년 국제협약으로 영구중립지대가 되어 상선이든 군함이든 언제나 자유롭게 통과할 수 있으며, 운하 공사 때 영국이 직·간접으로 방해하였지만 당시 수에즈운하는 영·불의 공동 경영이라고 설명하였다.160)

 

김준연과 계정식도 수에즈운하가 유럽과 아시아 간의 항정(航程)을 3천 리(浬)161) 내지 4천 리를 단축하였고, 세계적으로 경제·군사·사회적 공헌이 크고, 1913년 운하 통과 배는 약 5천 척, 약 2천만 톤이며, 현재 영·불 양국의 공동 경영이며, 배의 톤수에 따라 세금이 부과되고, 1887년의 조약으로 영구중립지대가 되었으므로 상선이든 군함이든 통과할 수 있다고 자세히 기록하였다.162) 박승철도 수에즈운하가 경제적으로뿐 아니라 각 방면에서 유럽인에게 유익을 주었다고 하였다.163)

 

수에즈운하의 지중해 쪽 출입구인 포트사이드는 여행자들에게 ‘유럽에 도착’이라는 생각을 하게 하였다.164) 포트사이드 항의 원주민 행상들이 김필현에게 그곳의 명물이라고 한 물건들의 상표를 보니 일본 것이었고, 상점과 백화점에 진열된 상품들도 거의 일본 것이었다.165) 1920년대 내내 만성적인 불황에 시달렸던 일본경제는 1931년 12월 금본위제를 포기하면서 엔화 가치가 하락하고 그로 인해 수출가격이 하락하면서 1932년 하반기부터 회복세로 바뀌었다.166) 일본은 면직물과 잡화를 중심으로 세계시장에 활발히 진출하였는데 1930-1932년 수출총액의 약 8%, 1933년 이후에는 9-10%가 잡화였다. 1930년대 잡화 수출 품목은 메리야스생지, 메리야스제품(샤쓰, 장갑, 양말), 면수건, 깔개류, 법랑철기, 자전거, 알루미늄제품, 전구, 보온병, 성냥, 죽제품, 칠기, 도자기, 솔, 단추, 인조진주, 완구, 양산, 매듭류, 화문석, 합판, 셀룰로이드제품, 고무신 등이었다.167) 김필현이 행상, 상점, 백화점에서 본 일본 물건은 이런 잡화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1920년대에 이 곳을 지나간 한기근 신부는 포트사이드 항과 수에즈운하가 영국 영지라 하였고,168) 계정식은 물품을 고가로 강매하고 걸인이 많은 포트사이드가 구주 항로 중 가장 불량한 곳이라 하였다.169)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차이를 읽을 수 있다. 한편 김필현은 포트사이드가 세계적인 석탄 산지로 영국이 연 150만 톤을 캐어간다고도 언급하였다.170)

 

김필현은 그의 항로의 마지막인 이탈리아의 나폴리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무솔리니의 유명한 검둥저고리 파시스트 군대의 위기늠름한 행진”을 보았다.171) ‘검둥저고리 파시스트군대’는 1919년 3월에 결성된 무솔리니의 ‘검은 셔츠단’(Comicia Nera, Black shirts)을 말하는데 검은 셔츠를 제복으로 입고 다녔기에 붙여진 이름이다.172) 이탈리아 및 독일의 파시스트화는 언론을 통해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었다.173) 김필현이 파시스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군대의 위기늠름한 행진이라는 표현은, 당시 김필현이 파시스트에 부정적이지는 않았음을 말해준다. 

 

 

5. 맺음말

 

김필현의 여행기는 종교 관련 장소들, 방문한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 1930년대 서구제국주의세력의 아시아 지배에 대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김필현은 탑승한 배가 기항하는 곳마다 천주교 관련 장소들을 찾았고 천주교 인사들과 대화도 하였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방문한 장소들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대부분 하지 않았다. 김필현이 방문한 지역들의 천주교 관련 장소들을 1925년 한기근 신부는 찾지 않았고 언급하지도 않았다. 1920년대 20대였던 한국인 유학생들의 여행기, 1930년대 이순탁 교수의 여행기에는 콜롬보에서의 불교 사적지에 대한 설명이 있을 뿐 김필현이 방문한 천주교 관련 장소들에 대한 내용은 없다. 김필현은 이슬람교 교당과 성공회 회당을 언급하였고, 지나쳤지만 말라카는 일본천주교회와, 페낭은 한국천주교회와 관련하여 설명하였다. 홍해도 성서의 내용으로 서술하였는데, 다른 여행기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이다. 방문한 장소들에 대한 사전 지식도, 방문한 곳에서의 자료 수집도 거의 하지 못한 천주교신학생 김필현의 여행기가 갖는 첫 번째 특징이다. 

 

김필현은 여행 중 만난 사람들에게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가 만난 사람들은 여러 인종이었고, 한국인들보다 어둡고 검은 피부색을 가졌다. 그들을 처음 보았기에 공포감을 느꼈는데, 김필현은 로마 유학을 준비하면서 미지의 여행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런데 남아시아 원주민들의 검은 피부색에 대한 김필현의 두려움은 문명과 야만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져 원주민들의 용모와 차림차림을 야만 종족의 본색을 벗지 못한 것이라 서술하는 한계를 보였다. 콜롬보 아이들의 구걸 행위를 미개한 주민의 풍습, 남아시아 원주민 장사꾼과 탑승객들의 매매행위를 문명인과 야만인 사이의 물물교환으로 생각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한기근 신부의 여행기를 포함하여 1920년대의 여행기들에서도, 1930년대 이순탁의 여행기에서도 이런 인식은 보이지 않는다. 처음으로 보기 때문에, 피부색 등 용모의 다름을 공포, 이상함, 야만 종족의 본색으로 생각한 것은 김필현의 여행기에 그려진 두 번째의 특징이자 아쉬움이다.

 

김필현은 탑승한 배가 기항하는 곳, 지나쳐간 곳들에 사는 사람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정치와 경제에도 깊은 관심을 두었다. 탑승한 일본우선의 규모와 설비에 감탄하였는데, 이는 유럽행 일본우선에 탑승한 한국인들의 공통된 인식이었다. 상하이에서는 상해사변을 언급하고 조계지를 언급하였는데, 이순탁의 여행기도 마찬가지였다. 1920년대의 여행기들은 상하이와 한국과의 관계에 관심을 두었다. 당시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상하이에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홍콩 · 싱가포르 · 콜롬보에서는 경제발전에 놀라워하며 영국의 통치정책에 감탄하였다. 이들 지역에서 한국인 여행객들은 김필현과 마찬가지로 대영제국의 힘을 실감하였다. 그런데 부족한 음료수를 해결하기 위해 만든 홍콩과 아덴의 저수 기관을 수탈의 상징인 한국의 수립조합 저수지와 같다고 한 것은 겉모습만의 서술로 한계이다. 기항하지 않은 페낭의 경제에도 관심을 기울여 영국의 해협식민지가 되기까지의 과정, 말레이반도의 주석 · 고무 재배, 콜롬보의 차 산출 등을 언급하였다. 그런데 인도양의 동남아시아 항구들은 거의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로 개발된 항구였고, 김필현이 탑승한 배는 영국이 지배하는 곳들에 정박하였고 지나갔기에 영국 제국주의의 아시아 지배에 대한 내용만을 서술하였다. 

 

김필현이 아시아 지역의 경제 상황에 관심을 두고 서술한 것은, 천주교신학생이지만 세계대공황으로 더욱 힘들어지고 있던 한국의 경제 현실을 한국 교회와 그의 주변 사람들의 삶에서 직·간접으로 겪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소신학교가 남대문상업학교 을조로 편제되어 경제 관련 과목들도 공부한 것이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참고 문헌

 

울바노대학 金必現, 「로마 永城으로 (1회)」, 『가톨릭연구』 제1권 제10호, 

1934년 10월; 「로마 永城으로 (2회)」, 『가톨릭연구』 제1권 제11호, 

1934년 11월; 「로마 永城으로 (3회)」, 『가톨릭연구』 제2권 제1호, 

1935년 1월; 「로마 永城으로 (4회)」, 『가톨릭연구』 제2권 제2호, 

1935년 2월; 「로마 永城으로 (5회)」, 『가톨릭연구』 제2권 제3호, 

1935년 3월; 「로마 永城으로 (6회)」, 『가톨릭연구』 제2권 제4호, 

1935년 4월; 「로마 永城으로 (7회)」, 『가톨릭연구』 제2권 제5호, 

1935년 5월.

 

1. 자료 

 

『가톨릭연구』, 『개벽』, 『경향잡지』, 『大阪朝日新聞』, 『동아일보』, 『드망즈주교일기』, 『별건곤』, 『釜山日報』, 『서우』, 『신생활』, 『조선총독부통계연보』

『고려사』, 『고종시대사』, 『고종실록』, 『사료 고종시대사』, 『삼국사기』, 『조선왕조실록』, 『한국가톨릭대사전』

「이순탁 교수 연보」, 『한국경제학보』4-2, 연세대학교 경제연구소, 1997.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일제문서해제 – 수리조합 편-』, 2009.

 

2. 단행본

 

김성민, 『(1929년) 광주학생운동』, 역사공간, 2013.

김용달, 『농민운동』,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기념관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김원극‧노정일‧박승철‧현상윤 지음, 서경석‧김진량 엮음, 『식민지 지식인의 개화세상 유학기』, 태학사, 2005.

민족문화추진회 편, 『국역 대동야승』6, 민족문화추진회, 1973.

손과지, 『상해한인사회사: 1910~1945』, 한울아카데미, 2001.

李順鐸 著, 『(最近)世界一周記』, 京城 - 漢城圖書, 昭和 9: 이순탁, 『최근 세계일주기 - 일제하 한 경제학자의 제국주의 현장 답사』, 학민사, 1997.

이원순, 『(사제성소의 작은 못자리) 소신학교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7.

정근식, 『한국의 노숙인, 그 삶을 이해한다는 것』,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2.

조성운, 『식민지 근대관광과 일본시찰』, 경인문화사, 2011.

 

3. 연구논문

 

김영규, 「일제강점기 철원군 수리조합 연구」, 『강원문화사연구』 16, 강원향토문화연구회, 2016.

박상현, 「식민주의와 동아시아 식민국가의 정치경제-통합비교를 위한 시론」, 『사회와 역사』 111, 한국사회사학회, 2016.

서정익, 「세계대공황기(1929~1936년) 일본의 무역구조와 무역정책」, 『응용경제』 5-1, 한국응용경제학회, 2003.

소병국, 「법제사적 관점에서 본 이슬람과 말레이시아 문화적 정체성」, 『외법논집』 33-4, 2009.11.

송란희, 「첫 로마 유학 신학생 연구-대구대목구 송경정과 전아오의 사료를 중심으로-」, 『교회사연구』 56, 한국교회사연구소, 2020.

신동규, 「풍신수길의 조선침략과 포르투칼 관계에 대한 고찰」, 『사총』 78,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2013.

우미영, 「근대지식청년과 渡歐 40여 일의 문화지정학-1920~30년 독일 유학생의 渡歐記를 중심으로-」, 『어문연구』 41-4, 한국어문교육연구회, 2013.

윤선자, 「일제의 신사(神社) 설립과 조선인의 신사(神社) 인식」, 『역사학연구』 42, 2011.

윤선자, 「한말‧일제강점기 파리외방전교회 홍콩 대표부와 한국천주교회」, 『한중인문학연구』 44, 2014.

윤선자, 「한기근 신부의 ‘로마여행일기’」, 『교회사연구』 53, 2018.

이용범, 「처용설화의 일고찰- 唐代 이슬람상인과 신라」, 『진단학보』 32, 진단학회, 1969.

임영애, 「‘서역인’인가 ‘서역인 이미지’인가: 통일신라미술 속의 서역 인식」, 『미술사학연구』 236, 한국미술사학회, 2022.

차혜영, 「3post시기 식민지조선인의 유럽항로 여행기와 피식민지 아시아연대」, 『서강인문논총』 47,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6.

차혜영, 「1930년대 자본주의 세계체제 전환과 동아시아 지역 패권의 지정학 - 이순탁의 ‘최근세계일주기’를 중심으로」, 『비교한국학』 24-3, 국제비교한국학회, 2016.

황인규, 「임진왜란 의승군의 봉기와 전란의 충격」, 『한국불교사연구』 2, 한국불교사학회 한국불교사연구소, 2013.

 

………………………………………………………………………………………………

 

1) 사리원역은 경의선 구간에 있고, 경의선은 1905년 12월 1일 전체 노선이 개통되었다(『서우』 11, 1907년 10월 1일, 「京義鐵道의 沿路槪況」).

 

2) 교황 울바노 8세(Urbanus VIII: 재위 1623-1644)가 선교사업을 위해 1627년에 설립.

 

3) 1899∼1980, 메리놀회 소속 한국선교사, 미국 출생, 1925년 5월 서품, 그해 10월 입국에 입국, 1926년 5월부터 평남 순천군 은산(殷山)본당 초대 주임. 1933년 휴가차 본국 귀국(한국교회사연구소, 『한국가톨릭대사전』 11, 2006, 8548쪽).

 

4) 1933년 3월 6일 소신학교를 제1회(동성상업학교 제8회)로 졸업하고(『경향잡지』 753호, 1933년 3월 15일,「회보: 동성상업학교 졸업식」, 107쪽), 곧이어 용산 대신학교에서 철학과를 시작하여 그해 6월 23일 하기방학을 맞았다(『경향잡지』 760, 1933년 6월 30일, 「회보 - 용산대신학원에 하기방학」, 278쪽). 

 

5) 『드망즈주교일기』, 1919년 11월 24일.

6) 『드망즈주교일기』, 1920년 1월 20일.

7) 『드망즈주교일기』, 1920년 1월 21일, 1922년 3월 22일, 5월 13일.

8) 『드망즈주교일기』, 1922년 3월 22일.

9) 『드망즈주교일기』, 1922년 5월 13일.

 

10) 송란희, 「첫 로마 유학 신학생 연구-대구대목구 송경정과 전아오의 사료를 중심으로-」, 『교회사연구』 56, 한국교회사연구소, 2020.

 

11) 1933년 평양교구 소속의 신학생은 대신학생 3명, 소신학생 25명(『경향잡지』 767, 1933년 10월 15일, 「전조선 성교회 사업 현상」(1932.5.1.∼1933.5.1.), 444-447쪽).

 

12) 조성운, 『식민지 근대관광과 일본시찰』, 경인문화사, 2011, 111쪽.

 

13) 1911년 2,635개, 1912년 4,266, 1913년 3,454, 1914년 4,519, 1915년 5,063, 1917년 6,835, 1918년 4,736, 1919년 6,279, 1920년 4,282, 1921년 3,771, 1922년 2,580, 1923년 2,841개, 1924년 210, 1925년 150, 1926년 515, 1927년 426, 1928년 513, 1929년 223, 1930년 127, 1931년 124, 1932년 85, 1933년 74개(『조선총독부통계연보』, 1911∼1933, 「외국여권 下付數」)

 

14) 『조선총독부통계연보』, 1933, 「해외 도항자 종류별」, 65-66쪽.

 

15) 1911년부터 1933년까지 학문연구를 목적으로 도항한 한국인은 1911년 2명, 1912년 1명, 1913년 4명, 1914년 13명, 1915년 4명, 1916년 13명, 1917년 6명, 1918년 1명, 1919년 7명, 1920년 17명, 192131명, 1922년 54명, 1923년 43명, 1924년 40명, 1925년 43명, 1926년 60명, 1927년 65명, 1928년 46명, 1929년 37명, 1930년 39명, 1931년 31명, 1932년 18명, 1933년 10명(『조선총독부통계연보』, 1911∼1933, 「외국여권 下付數」).

 

16) 울바노대학 金必現, 「로마 永城으로 (7회)」,『가톨릭연구』 2-5, 1935년 5월, 72쪽.

 

17) 『가톨릭연구』 1-7, 1934년 7월, 「社告 - 본지는 제호 가톨릭연구강좌를 금후로는 강좌 2자를 빼고 가톨릭연구라 개제하였으니 下諒하시압」. 왜 변경하는지 설명 없음.

 

18) 경성 출발→고베→상하이→홍콩→사이공→싱가포르→콜롬보→지부티→수에즈운하→포트사이드→마르세유 도착까지 40일(윤선자, 「한기근 신부의 ‘로마여행일기’」, 『교회사연구』 53, 2018 참조).

 

19) 1895∼1971. 1920년 도쿄[東京]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동아일보』 1920년 8월 16일, 「김준연 군 환영회」), 독일 유학을 위해 1921년 10월 4일 고베[神戶]를 출발, 11월 14일 이탈리아 나폴리에 도착. 「독일 가는 길에」라는 제목으로 『동아일보』 1921년 12월 15·16·17·18일에 4회에 걸쳐, 같은 제목으로 1922년 1월 30·31일, 2월 1·2·3·4·5일에 7회에 걸쳐 연재.

 

20) 1897-?. 와세다[早稻田]대학 졸업(김원극·노정일·박승철·현상윤 지음, 서경석·김진량 엮음, 『식민지 지식인의 개화세상 유학기』, 태학사, 2005, 166쪽), 1922년 1월 8일 일본 고베[神戶]를 출발, 2월 17일 프랑스 마르세유에 도착. 「독일 가는 길에」라는 제목으로『개벽』 21호(1922년 3월 1일), 22호(1922년 4월 1일), 23호(1922년 5월 1일)에 여행기 수록.

 

21) 1898∼1950. 1922년 4월 9일 나주에서 출발하여 5월 9일 일본 모지[門司], 상하이, 홍콩을 거쳐 5월 22일 싱가포르에 도착(김현준, 「독일 가는 길에」, 『신생활』 9, 1922년 9월).

 

22) 1904∼1974. 1923년 11월 11일 도쿄를 출발하여 12월 22일 프랑스 마르세유 도착. 「인도양과 지중해, 渡歐手記」라는 제목으로『동아일보』 1926년 7월 17·20·26·27·31일, 8월 2·3·7·9일 자에 9회에 걸쳐 연재. 

 

23) 1897∼?. 1922년 3월 교토[京都]제국대학 경제학부 졸업, 1923년 4월 연희전문학교 상과 교수가 되었고(「이순탁 교수 연보」, 『한국경제학보』 4-2, 연세대학교 경제연구소, 1997, 113∼114쪽) 안식년을 맞아 1933년 4월 24일 부산을 출발하여 1934년 1월 20일 부산에 도착하기까지 세계여행(李順鐸 著, 『(最近)世界一周記』, 京城: 漢城圖書, 昭和 9; 이순탁, 『최근 세계일주기 - 일제하 한 경제학자의 제국주의 현장 답사』, 학민사, 1997).

 

24) 울바노대학 金必現, 「로마 永城으로 (1회)」, 『가톨릭연구』 1-10, 1934년 10월, 73쪽.

25) 한기근, 「로마여행일기 (4)」, 『경향잡지』 569, 1925년 7월 15일, 303쪽. 

26) 프랑스조계는 상하이의 수위구[徐匯區]와 루완구[蘆灣區].

27) 울바노대학 金必現, 「로마 永城으로 (2회)」, 『가톨릭연구』 1-11, 1934년 11월, 53쪽.

28) 한기근, 「로마여행일기 (6)」, 『경향잡지』 571, 1925년 8월 15일, 347쪽.

 

29) 소신학교 “5년 동안 매일 2시간씩, 그리고 18개월 동안 오로지 라틴어만 공부하며, 중등교육과정에 따라 프랑스어, 영어까지 공부하게 됨.(이원순, 『(사제성소의 작은 못자리) 소신학교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7, 100쪽)

 

30) 울바노대학 金必現, 「로마 永城으로 (2회)」, 『가톨릭연구』 1-11, 1934년 11월, 54쪽.

 

31) 파리외방전교회가 운영하던 홍콩의 나자렛 인쇄소와 베타니 요양소에 대해서는 윤선자, 「한말·일제강점기 파리외방전교회 홍콩 대표부와 한국천주교회」, 『한중인문학연구』 44, 2014 참조.

 

32) 울바노대학 金必現, 「로마 永城으로 (2회)」, 『가톨릭연구』 1-11, 1934년 11월, 55쪽.

33) 한기근, 「로마여행일기 (6)」, 『경향잡지』 571, 1925년 8월 15일, 349-350쪽.

34) 울바노대학 金必現, 「로마 永城으로 (3회)」, 『가톨릭연구』 2-1, 1935년 1월, 80-81쪽.

35) 울바노대학 金必現, 「로마 永城으로 (3회)」, 『가톨릭연구』 2-1, 1935년 1월, 80쪽.

 

36) 1933년 전국에 51개의 신사(神社: 神道의 神殿)와 215개의 신사(神祠: 神社로 공인받지 못한 소규모 小社)가 있었다.(윤선자, 「일제의 신사(神社) 설립과 조선인의 신사(神社) 인식」, 『역사학연구』 42, 2011, 121쪽) 

 

37) 한기근, 「로마여행일기 (8)」, 『경향잡지』 573, 1925년 9월 15일, 387쪽.

38) 울바노대학 金必現, 「로마 永城으로 (5회)」, 『가톨릭연구』 2-3, 1935년 3월, 69쪽.

39) 한기근, 「로마여행일기 (8)」, 『경향잡지』 573, 1925년 9월 15일, 390-391쪽.

40) 계정식, 「인도양과 지중해, 渡歐手記 (6)」, 『동아일보』 1926년 8월 2일; 이순탁, 앞의 책,  72-75쪽.

41) 울바노대학 金必現, 「로마 永城으로 (6회)」, 『가톨릭연구』 2-4, 1935년 4월, 87-88쪽.

42) Malaca. 말레이반도 남부 서안에 위치.

 

43) 김필현이 탑승한 배가 말라카를 옆으로 지나쳐 항해하였고, 페낭에는 밤늦게 도착하여 이튿날 새벽에 떠났기 때문이다(울바노대학 金必現, 「로마 永城으로 (4회)」, 『가톨릭연구』 2-2, 1935년 2월, 51-52쪽). 이순탁도 배가 기항하지 않아 말라카에 상륙하지 못했다(이순탁, 같은 책, 56쪽).

 

44) 울바노대학 金必現, 「로마 永城으로 (4회)」, 『가톨릭연구』2-2, 1935년 2월, 51쪽.

 

45) 1881∼1884년 페낭신학교에 21명이 유학하여 7명 병사, 4명 자퇴, 10명은 귀국하여 용산신학교에 편입, 사제로 서품되었다. 1896년 서품 강성삼(姜聖參, 라우렌시오)·강도영(姜道永, 마르코)·정규하(鄭圭夏, 아우구스티노) 신부, 1897년 서품 이내수(李迺秀, 아우구스티노)·김성학(金聖學, 알렉스)·한기근 신부, 1899년 서품 김원영(金元永, 아우구스티노)·홍병철(洪秉喆, 루가) 신부, 1900년 서품 김문옥(金紋玉, 요셉)·김승연(金承淵, 아우구스티노) 신부이다.

 

46) 울바노대학 金必現, 「로마 永城으로 (4회)」, 『가톨릭연구』 2-2, 1935년 2월, 52쪽.

47) 이순탁, 같은 책, 57쪽.

48) 울바노대학 金必現, 「로마 永城으로 (7회)」, 『가톨릭연구』 2-5, 1935년 5월, 70쪽.

49) 울바노대학 金必現, 「로마 永城으로 (7회)」, 『가톨릭연구』 2-5, 1935년 5월, 71쪽.

50) 이순탁, 같은 책, 107-109쪽.

51) 울바노대학 金必現, 「로마 永城으로 (6회)」, 『가톨릭연구』 2-4, 1935년 4월, 88쪽.

52) 한기근, 「로마여행일기 (8)」, 『경향잡지』 573, 1925년 9월 15일, 394-395쪽.

53) 이순탁, 같은 책, 78∼79쪽.

54) 김준연, 「독일 가는 길에 (1)」, 『동아일보』 1922년 1월 30일.

55) 울바노대학 金必現, 「로마 永城으로 (6회)」, 『가톨릭연구』 2-4, 1935년 4월, 89쪽.

56) 한기근, 「로마여행일기 (8)」, 『경향잡지』 573, 1925년 9월 15일, 395쪽.

57) 이순탁, 같은 책, 79쪽.

58) 김준연, 「독일 가는 길에 (2)」, 『동아일보』 1922년 1월 31일.

59) 울바노대학 金必現, 「로마 永城으로 (2회)」, 『가톨릭연구』 1-11, 1934년 11월, 52쪽.

60) ‘둥이’는 “그러한 성질이 있거나 그와 긴밀한 관련이 있는 사람”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61) 울바노대학 金必現, 「로마 永城으로 (2회)」, 『가톨릭연구』 1-11, 1934년 11월, 53쪽.

62) 울바노대학 金必現, 「로마 永城으로 (3회)」, 『가톨릭연구』 2-1, 1935년 1월, 78쪽.

63) 울바노대학 金必現, 「로마 永城으로 (4회)」, 『가톨릭연구』 2-2, 1935년 2월, 50쪽.

64) 울바노대학 金必現, 「로마 永城으로 (3회)」, 『가톨릭연구』 2-1, 1935년 1월, 79쪽.

65) 울바노대학 金必現, 「로마 永城으로 (4회)」, 『가톨릭연구』 2-2, 1935년 2월, 49쪽.

66) 이순탁, 같은 책, 53쪽.

67) 계정식, 「인도양과 지중해, 渡歐手記 (5)」, 『동아일보』 1926년 7월 31일.

68) 박승철, 「독일 가는 길에 (1)」, 『개벽』 21, 1922년 3월 1일.

69) 한기근, 「로마여행일기 (8)」, 『경향잡지』 573, 1925년 9월 15일, 387쪽.

70) 한기근, 「로마여행일기 (7)」, 『경향잡지』 572, 1925년 8월 31일, 375-376쪽.

 

71) 『동아일보』에서도 이 단어를 찾을 수 있다.(『동아일보』 1929년 11월 30일, 「백인의 子가 검둥이, 흑인의 子가 백인, 쿠바서 생기는 일」)

 

72) 『별건곤』에서도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별건곤』 6, 1927년 4월, 「平信徒의 手記」; 『별건곤』 11, 1928년 2월, 「隨感隨想, 요새 요때에 새로히 생각키워지는 일들 - 鄭秀日-퉁방울이의 엇던 넉두리」; 『별건곤』 34, 1930년 11월, 「모던-福德房(舊모던)」)

 

73) 『삼국사기』 권 제11 신라본기 제11, 헌강왕 5년 3월.

 

74) 처용이 서역인으로 실존 인물일 가능성을 제시(이용범, 「처용설화의 일고찰 - 唐代 이슬람상인과 신라」, 『진단학보』32, 진단학회, 1969). 

 

75) 임영애, 「‘서역인’인가 ‘서역인 이미지’인가 - 통일신라미술 속의 서역 인식」, 『미술사학연구』 236, 한국미술사학회, 2022, 52쪽.

 

76) 『고려사』 권5 세가 권 제5, 현종 15년 9월; 현종 16년 9월; 세가 권 제6 정종 6년 11월.

77) 『조선왕조실록』 태조 3년 7월 5일.

78) 『조선왕조실록』(선조수정실록) 선조 15년 1월 1일.

79) “碧眼高鼻, 黃髮短鬚”.(『조선왕조실록』 효종 4년 8월 6일)

 

80) “豆滿江越邊, 有異樣人現形是如爲去乙……深目高準, 晴碧毛紅……似是西洋之人是乎旀”(『사료 고종시대사』 고종 1년 2월 날짜 미상)

 

81) “目深準高 眉髮焦黃 衣服俱黑 的是洋人”(『고종실록』 고종 8년 4월 8일) 

 

82) 포르투칼의 식민지·지배지역에 있던 아프리카인·인도인·이슬람교도 계통의 민족이나 노예라 주장.(신동규, 「풍신수길의 조선침략과 포르투칼 관계에 대한 고찰」, 『사총』 78,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2013, 158쪽)

 

83) 『조선왕조실록』 선조 31년 5월 26일. 

 

84) 趙慶男, 『亂中雜錄』 권 3, 무술년(1598) 8월 27일(민족문화추진회 편, 『국역 대동야승』 6, 민족문화추진회, 1973); 신동규, 「풍신수길의 조선침략과 포르투칼 관계에 대한 고찰」, 156쪽; 황인규, 「임진왜란 의승군의 봉기와 전란의 충격」, 『한국불교사연구』 2, 한국불교사학회 한국불교사연구소, 2013, 309쪽).

 

85) 이수광, 『지봉유설』 권1, 災異部, 人異南晩星(『지봉유설(상)』, 을유문화사, 1994); 신동규, 같은 책, 155쪽.

 

86) 申炅, 『再造藩邦志』 권 2, 1593년 2월조(민족문화추진회 편, 『국역 대동야승』 9, 민족문화추진회, 1977); 신동규, 같은 책, 155쪽; 황인규, 앞의 책, 309쪽.

 

87) 『고종실록』 고종 3년 11월 5일.

88) 『고종시대사』 고종 3년 7월 13·18일, 8월 22일.

89) 翠雲生, 「辛未洋擾」, 『별건곤』 36, 1931년 1월 1일. 

 

90) 1924년 36,981명, 1925년 47,460명, 1926년 46,541명, 1927년 51,323명, 1928년 53,322명, 1929년 58,146명, 1930년 69,109명, 1931년 38,124명, 1932년 39,151명(조선총독부, 『조선총독부통계연보』 각 년도).

 

91) 한국인은 20,205,591명, 일본인은 543,104명(조선총독부, 『조선총독부통계연보』 1933년).

92) 울바노대학 金必現, 「로마 永城으로(1회)」, 『가톨릭연구』 1-10, 1934년 10월, 72쪽.

93) 울바노대학 金必現, 「로마 永城으로 (4회)」,『가톨릭연구』 2-2, 1935년 2월, 52쪽.

94) 울바노대학 金必現, 「로마 永城으로 (5회)」,『가톨릭연구』 2-3, 1935년 3월, 69-70쪽.

95) 이순탁, 앞의 책, 70쪽.

96) 계정식, 「인도양과 지중해, 渡歐手記 (7)」, 『동아일보』 1926년 8월 3일. 

 

97) 말레이에는 15세기경 이슬람이 유입되었고, 이슬람법 또는 샤리아가 일반법으로 확고한 위치를 점하였다. 1874년의 빵꼬르조약(Treaty of Pangkor)과 함께 말레이반도에 대한 영국의 식민지배가 본격화되었는데, 이슬람 자체에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소병국, 「법제사적 관점에서 본 이슬람과 말레이시아 문화적 정체성」, 『외법논집』 33-4, 2009.11, 80·84·87쪽)

 

98) 울바노대학 金必現, 「로마 永城으로 (4회)」, 『가톨릭연구』 2-2, 1935년 2월, 52쪽.

99) 울바노대학 金必現, 「로마 永城으로 (5회)」,『가톨릭연구』 2-3, 1935년 3월, 69쪽.

100) 울바노대학 金必現, 「로마 永城으로 (5회)」,『가톨릭연구』 2-3, 1935년 3월, 70쪽.

101) 한기근, 「로마여행일기 (8)」, 『경향잡지』 573, 1925년 9월 15일, 390쪽.

102) 울바노대학 金必現, 「로마 永城으로 (7회)」, 『가톨릭연구』 2-5, 1935년 5월, 71쪽.

103) 정근식, 『한국의 노숙인, 그 삶을 이해한다는 것』,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2, 379쪽.

104) 『동아일보』 1933년 1월 28일, 「全朝鮮의 걸인총수 16만 3천여인 조선의 곡창으로 빈부 현격한 전라, 경상에 최다」.

105) 울바노대학 金必現, 「로마 永城으로 (1회)」, 『가톨릭연구』 1-10, 1934년 10월, 74쪽.

 

106) 봉명환이 모지에서 출발하는 유럽행 일본우선이었음은 『부산일보』기사에서도 확인된다.(,『釜山日報』1933년 5월 3일, 「今岡勞動代表 船中で長逝, 棒名丸で 渡歐の途 香港出發後に發病」)

 

107) 울바노대학 金必現, 「로마 永城으로 (1회)」, 『가톨릭연구』 1-10, 1934년 10월, 73쪽.

108) 울바노대학 金必現, 「로마 永城으로 (3회)」,『가톨릭연구』 2-1, 1935년 1월, 78쪽.

109) 이순탁, 앞의 책, 34-35쪽.

110) 김현준, 「독일 가는 길에」, 『신생활』 9, 1922년 9월, 112쪽.

111) 박승철, 「독일 가는 길에 (1)」, 『개벽』 21, 1922년 3월, 73쪽.

112) 울바노대학 金必現, 「로마 永城으로 (1회)」, 『가톨릭연구』 1-10, 1934년 10월, 74쪽.

113) 울바노대학 金必現, 「로마 永城으로 (2회)」, 『가톨릭연구』 1-11, 1934년 11월, 52쪽.

114) 손과지, 『상해한인사회사: 1910-1945』, 한울아카데미, 2001, 63쪽.

115) 울바노대학 金必現, 「로마 永城으로 (2회)」, 『가톨릭연구』 1-11, 1934년 11월, 52쪽.

116) 이순탁, 같은 책, 39-42쪽.

117) 이순탁, 같은 책, 38쪽.

118) 김준연, 「독일 가는 길에 (2)」, 『동아일보』 1921년 12월 16일.

119) 박승철, 「독일 가는 길에 (1)」, 『개벽』 21, 1922년 3월.

 

120) 1922년 4월 9일 나주를 출발하여 경성, 부산을 거쳐 4월 14일 도쿄 도착, 5월 6일 도쿄 출발, 5월 9일 모지, 5월 10일 상하이, 5월 15일 홍콩, 5월 22일 싱가포르에 도착(김현준, 「독일 가는 길에」, 『신생활』 9, 1922년 9월).

 

121) 김현준, 「독일 가는 길에」, 『신생활』 9, 1922년 9월, 113쪽.

122) 계정식, 「인도양과 지중해, 渡歐手記」, 『동아일보』 1926년 7월 20일. 

123) 울바노대학 金必現, 「로마 永城으로 (2회)」, 『가톨릭연구』 1-11, 1934년 11월, 54-56쪽.

124)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일제문서해제 - 수리조합 편』, 2009, 106-109쪽.

 

125) 김용달, 『농민운동』,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기념관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130-131쪽; 김영규, 「일제강점기 철원군 수리조합 연구」, 『강원문화사연구』16, 강원향토문화연구회, 2016, 142쪽.

 

126) 울바노대학 金必現, 「로마 永城으로 (6회)」, 『가톨릭연구』 2-4, 1935년 4월, 88쪽. 

127) 울바노대학 金必現, 「로마 永城으로 (6회)」, 『가톨릭연구』 2-4, 1935년 4월, 88쪽.

128) 김성민, 『(1929년) 광주학생운동』, 역사공간, 2013, 243쪽.

129) 이순탁, 같은 책, 45-47쪽.

130) 김준연, 「독일 가는 길에 (3)」, 『동아일보』 1921년 12월 17일.

131) 박승철, 「독일 가는 길에 (1)」, 『개벽』 21, 1922년 3월 1일, 74-75쪽.

132) 김현준, 「독일 가는 길에」, 『신생활』 9, 1922년 9월, 113-114쪽.

133) 계정식, 「인도양과 지중해, 渡歐手記 (4)」, 『동아일보』 1926년 7월 27일.

134) 계정식, 「인도양과 지중해, 渡歐手記 (3)」,『동아일보』 1926년 7월 26일.

 

135) 우미영, 「근대지식청년과 渡歐 40여 일의 문화지정학-1920∼30년 독일 유학생의 渡歐記를 중심으로-」, 『어문연구』 41-4, 한국어문교육연구회, 2013, 262-263쪽.

 

136) Johor. 말레이시아 남부.

137) 술탄. 이순탁은 “말레이어로는 왕을 살턴[sultan]이라 한다”고 함(이순탁, 같은 책, 53쪽). 

138) 이순탁은 6만 불이라 하였다(이순탁, 같은 책, 53쪽).

 

139) 영국은 1918년 싱가포르, 1825년 말라카에 영국의 거점을 확보한 이후 ‘해협식민지’(Straits Settlements)를 구축(박상현, 「식민주의와 동아시아 식민국가의 정치경제-통합비교를 위한 시론」, 『사회와 역사』 111, 한국사회사학회, 2016, 19쪽).

 

140) 울바노대학 金必現, 「로마 永城으로 (4회)」, 『가톨릭연구』 2-2, 1935년 2월, 50쪽.

141) 울바노대학 金必現, 「로마 永城으로 (3회)」,『가톨릭연구』 2-1, 1935년 1월, 81쪽.

142) 주석.

143) 울바노대학 金必現, 「로마 永城으로 (4회)」, 『가톨릭연구』 2-2, 1935년 2월, 50쪽.

144) 울바노대학 金必現, 「로마 永城으로 (3회)」,『가톨릭연구』 2-1, 1935년 1월, 80쪽.

145) 계정식, 「인도양과 지중해, 渡歐手記 (5)」, 『동아일보』 1926년 7월 31일.

146) 김준연, 「독일 가는 길에 (4)」, 『동아일보』 1921년 12월 18일.

147) 이순탁, 같은 책, 53쪽.

148) 울바노대학 金必現, 「로마 永城으로 (4회)」, 『가톨릭연구』 2-2, 1935년 2월, 52쪽.

149) 울바노대학 金必現, 「로마 永城으로 (5회)」, 『가톨릭연구』 2-3, 1935년 3월, 67-68쪽.

150) 이순탁, 같은 책, 56·58-59쪽.

151) 울바노대학 金必現, 「로마 永城으로 (5회)」, 『가톨릭연구』 2-3, 1935년 3월, 69쪽.

152) 계정식, 「인도양과 지중해, 渡歐手記 (7)」, 『동아일보』 1926년 8월 3일. 

153) 이순탁, 같은 책, 71쪽.

154) 김준연, 「독일 가는 길에 (4)」, 『동아일보』 1921년 12월 18일.

 

155) 차혜영, 「3post시기 식민지조선인의 유럽항로 여행기와 피식민지 아시아연대」, 『서강인문논총』 47,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6, 28쪽.

 

156) 우미영, 앞의 논문, 265쪽.

157) 울바노대학 金必現, 「로마 永城으로 (6회)」, 『가톨릭연구』 2-4, 1935년 4월, 89쪽.

 

158) 이순탁은 3,000∼4,000마일을 단축하였다고 함(이순탁, 같은 책, 81쪽), 따라서 한자를 병기하지 않았지만 이 때의 리는 哩. 1마일은 약 1.6km.

 

159) 울바노대학 金必現, 「로마 永城으로 (6회)」, 『가톨릭연구』 2-4, 1935년 4월, 90쪽.

160) 이순탁, 앞의 책, 79-81쪽.

161) 1해리는 1.852m. 

 

162) 김준연, 「독일 가는 길에 (5)」 『동아일보』 1922년 2월 3일; 계정식, 「인도양과 지중해, 渡歐手記 (8)」, 『동아일보』1926년 8월 7일.

 

163) 박승철, 「독일 가는 길에 (3)」, 『개벽』 23, 1922년 5월.

164) 우미영, 앞의 논문, 266쪽.

165) 울바노대학 金必現, 「로마 永城으로 (6회)」, 『가톨릭연구』 2-4, 1935년 4월, 90쪽.

 

166) 상품의 해외수출액이 1931년 1억 4천 6백 만원이었는데, 1932년 14억 9백 만원, 1933년 1∼5월은 6억 6천 5백 만원을 기록(『大阪朝日新聞』 1933년 6월 7일, 「社說: 國際會議と日本の立場, 各國の日本商品仇敵視」).

 

167) 서정익, 「세계대공황기(1929∼1936년) 일본의 무역구조와 무역정책」, 『응용경제』 5-1, 한국응용경제학회, 2003, 62-63쪽.

 

168) 한기근, 「로마여행일기 (8)」, 『경향잡지』 573, 1925년 9월 15일, 340쪽.

169) 계정식, 「인도양과 지중해, 渡歐手記 (8)」, 『동아일보』 1926년 8월 7일.

170) 울바노대학 金必現, 「로마 永城으로 (6회)」,『가톨릭연구』 2-4, 1935년 4월, 90쪽.

171) 울바노대학 金必現, 「로마 永城으로 (7회)」,『가톨릭연구』 2-5, 1935년 5월, 72쪽.

172) 로버트 O. 팩스턴, 손명희·최희영 옮김, 『파시즘』, 교양인, 2005, 141·151쪽 

 

173) 차혜영, 「1930년대 자본주의 세계체제 전환과 동아시아 지역 패권의 지정학 - 이순탁의 ‘최근세계일주기’를 중심으로」, 『비교한국학』 24-3, 국제비교한국학회, 2016, 339쪽.

 

[교회사 연구 제61집, 2022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윤선자(전남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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