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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한국교회와 시노달리타스6-7: 교부 시대의 시노달리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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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6-12 ㅣ No.713

[한국교회와 시노달리타스] (6) 교부 시대의 시노달리타스 (상)


존중과 배려로 교회 일치 일궈낸 교부들의 빛나는 본보기

 

 

바티칸 시스티나성당의 프레스코화 ‘325년의 니케아공의회’. 초기 교부 시대 부활절 거행 날짜 논쟁에서 교부 폴리카르푸스와 아니케투스는 공동합의정신으로 교회 일치 가능성을 보여줬으며, 리옹의 주교 이레네우스도 존중과 배려로 교회의 평화와 일치를 일구어냈다. 결국 이 논쟁은 325년 니케아공의회가 종지부를 찍었다. 출처 위키미디어커먼스

 

 

주교들이 실천한 시노달리타스

 

가톨릭교회는 최근 몇 년 동안 시노달리타스를 화두처럼 붙들고 살아가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끄는 교회 쇄신의 이 여정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남겨 준 혁명적 선물이다. 이 공의회는 교회가 누구인지 인격적으로 묻게 해 주었고, 교회란 교계제도가 아니라 모든 하느님 백성임을 일깨워 주었다. 교회의 중앙집권화를 완화하고 지역교회에 자율적 책임을 강화하려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교회론과 사목 전망 또한 교부 전통과 맞닿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원천에서 길어낸 것이다.

 

한국천주교회에서도 다양한 연구와 실천을 이어가고 있지만, 시노달리타스는 평신도의 능동적 참여를 독려하고 소통을 강화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지난 5월에 한국을 방문한 토마시 할리크 몬시뇰이 공동합의정신(시노달리타스)을 향해 던진 돌직구는 묵직하다. “장상들, 특히 주교들이 자기 역할을 왕정시대로 이해하는 것을 포기하고 교회 안에서 대화의 중재자가 될 준비가 되어 있는가?”(「그리스도교의 오후」 137쪽) 시노달리타스에 가장 앞장서야 하고 스스로 변화해야 할 주체는 바로 주교라는 것이다. 자기 교구에 대한 배타적 권한을 강조하면서 주교회의를 단순 협의체로 평가절하하는 군주적 주교직에서 스스로 벗어날 때 시노달리타스는 진정성을 지닐 수 있다는 말이다.

 

로마의 주교는 지역교회 주교들과 형제적 친교와 보편적 일치를 이루고, 개별 주교들은 교구의 철옹성을 허물고 이웃 주교들과 연대하여 세상과 사회의 시급한 사목 현실에 응답하기를 바랐던, 이른바 주교단의 단체성(collegialitas)과 공동합의정신(synodalitas)을 향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간절한 염원이 지금 하느님 백성 전체의 시노달리타스 여정으로 이어지고 있다.

 

교부 시대의 교회 생활은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목숨이 위태로운 박해 시대에도 주교는 하느님 백성과 생사고락을 함께하다가 앞장서서 순교했다. 이단 논쟁과 교회 분열의 격동기에도 주교는 자신의 공동체를 참된 신앙 안에 지켜내기 위해 추방과 유배의 위협을 무릅썼다. 국가 권력의 횡포에 맞서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지키고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는 일은 주교의 특권이었다. 교부들이 동방과 서방의 서로 다른 문화와 지리적 한계를 뛰어넘어 먼 거리를 직접 오가거나 편지를 주고받으며 교회 문제를 협의하고 사목적 연대를 이루었던 아름다운 전통은 오늘날에도 깊은 영감을 준다.

 

 

흔들리는 시노달리타스

 

초기 교부 시대에 신앙 문제를 제외한 가장 뜨거운 논쟁거리는 부활절 거행 날짜 문제였다. 예컨대 동양의 설 전통과 서양식 양력설을 통합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일이었다. 소아시아는 요한 전통에 따라 평일이라도 상관없이 히브리인의 음력인 니산 달 14일(춘분 다음 만월이 되는 날)에 부활절을 거행했지만, 로마에서는 니산 달 14일이 지난 주일에 부활절을 지냈다. 사도 요한의 제자이며 아시아 전역의 수장이던 스미르나의 주교 폴리카르푸스(재위 155/160년경)는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로마까지 가서 그곳 주교 아니케투스(재위 154~165년)를 만났다. 그들은 의견 일치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서로의 전통을 존중하고 교회의 친교와 평화를 유지했으며 공동으로 성찬례를 집전한 뒤 평화롭게 헤어졌다.

 

그러나 베드로를 이어 열세 번째 로마 주교가 된 성 빅토르 1세(재위 189~199년경)는 달랐다. 부활절 거행 날짜를 두고 서방의 주일 관행을 일방적으로 강요함으로써 보편교회의 친교와 일치를 심각한 위기에 빠뜨렸다. 지역별로 주교회의를 열어 고유한 의견을 보편 교회와 공유했지만, 빅토르는 소아시아 모든 교구와 인근 교회들을 제명했으며 단죄 서간을 발송하여 그 지역 신자들을 파문했다. 소아시아는 반발하며 요한 전통을 지켰다. 소아시아 출신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에서 더 이상 환대받지 못했고 성찬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교부 시대 가장 빛나는 시노달리타스 전통

 

초기교회를 강타한 극단적 대립과 갈등 상황에서 선배 주교들인 폴리카르푸스와 아니케투스의 공동합의정신(시노달리타스)을 상기시키면서 교회 일치와 평화를 당부하며 중재한 대표적 인물은 리옹의 주교 이레네우스(재위 200년경)였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라 불린 이레네우스는 로마의 주교 빅토르 1세에게 개인 편지를 보내 주교단의 일치를 깨지 말라고 권고한다. 그리고 갈리아 지방 주교들의 뜻을 모아 중재 서간도 보낸다. 서방교회(프랑스 리옹!)의 주교였지만 로마를 편들어 서방 관행을 밀어붙이지 않고 오히려 아시아교회의 고유한 삶과 현실을 깊이 헤아리고 배려한 이레네우스의 이 편지 단편이 에우세비우스의 「교회사」(5,24,16-17)에 보존되어 있다.

 

“아니케투스가 로마 주교로 다스릴 때, 복되신 폴리카르푸스께서 로마에 머무른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 문제에 사소한 의견 차이가 있었지만 곧바로 평화를 찾았으며, 이 주제로 서로 논쟁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니케투스는 폴리카르푸스에게 그 부활절 관행을 지키지 말라고 설득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폴리카르푸스는 우리 주님의 제자 요한, 그리고 당신이 함께 살았던 다른 사도들과 더불어 늘 그 관행을 지켜왔기 때문입니다. 폴리카르푸스도 아니케투스에게 자기 관습을 지키라고 설득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아니케투스는 전임 주교들의 관습을 보존해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이러했으므로 그들은 서로 친교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아니케투스는 폴리카르푸스를 매우 존경했기 때문에 교회에서 성찬례를 주례하도록 양보했습니다. 그들은 서로 평화롭게 헤어졌고, 니산 달 14일을 지키는 사람이든 지키지 않는 사람이든 모든 교회가 평화를 누렸습니다.”

 

빅토로 1세의 단죄와 파문이 어떻게 거두어졌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정신으로 교회의 평화를 위해 동분서주한 이레네우스의 헌신적 노력 덕분에 극단적 분열을 피할 수 있었다. 서로의 차이와 고유한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교회 일치는 가능하다는 사실을 실천적 본보기로 보여준 폴리카르푸스와 아니케투스의 공동합의정신뿐 아니라, 존중과 배려로 교회의 평화와 일치를 일구어낸 이레네우스의 본보기는 교부 시대의 가장 빛나는 시노달리타스 전통이다. 지난 2022년 1월 21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동방과 서방의 그리스도인들을 영적·신학적으로 이어주는 다리가 된” 이레네우스에게 ‘일치의 박사’(doctor unitatis)라는 공적 칭호를 헌정한 것은 오늘날 시노달리타스 여정에서 매우 시의적절한 일이었다. 이 시대의 주교들도 분단되고 양극화된 이 세상에서 부디 이레네우스 교부처럼 평화와 일치의 중재자가 되어달라는 연로한 교황의 애틋한 호소처럼 들린다. [가톨릭신문, 2023년 6월 11일, 최원오(빈첸시오,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한국교회와 시노달리타스] (7) 교부 시대의 시노달리타스 (하)


형제적 친교와 보편적 연대 중심에 둔 오래된 합의 전통 이어받아

 

 

- 칼 반루 ‘도나투스파와 논쟁하는 성 아우구스티노’.

 

 

교부들이 물려준 시노달리타스 전통

 

교회 안에서 열리는 공의회나 교회회의의 원형은 사도행전이 전하는 이른바 예루살렘 사도 공의회다. 우리 교회는 그 탄생 때부터 공동합의정신(시노달리타스)으로 살았다. 초기 교회 때 로마제국은 그리스도인의 집회를 금했지만, 박해가 잦아들 때면 위험을 무릅쓰고 교회회의를 이어갔다.

 

2세기부터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한 교부 시대의 교회회의는 근본적으로 주교회의였다. 관구별로 주교들이 함께 모여 논의하거나, 여러 관구에서 온 주교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방식이었다. 이미 3세기에 아프리카에서는 이러한 교회회의가 자리 잡았고, 지역 교회 시노드나 관구 교회회의 이외에도 아프리카의 모든 주교 또는 그 대리인이 참석하는 교회회의가 거의 해마다 열렸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아프리카 전체 교회회의’(concilium plenarium Africae)라고 부르는 북아프리카 주교들의 총회는 카르타고의 주교가 주재했고, 아프리카를 넘어 라틴 서방 전역에서 커다란 권위를 누렸다. 지역 교회에서 벌어지는 고유하고 특수한 문제들을 관구와 지역에서 논의하고 보편 교회와 공유했다는 점에서 오늘날 국가별 주교회의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주교 시노드의 틀을 세운 키프리아누스

 

서방의 교회회의에 관한 가장 이른 정보는 대부분 키프리아누스(치프리아노 †258)가 제공한다. 북아프리카 수도인 카르타고의 주교 키프리아누스는 10년의 재임 기간(248-258)에 일곱 번이나 교회회의를 소집했다. 데키우스 황제의 지독한 박해가 끝난 뒤 열린 첫 네 차례 교회회의(251-254)에서는 참회한 배교자들을 교회에 다시 받아들이기로 결의했으며, 로마의 주교 코르넬리우스(고르넬리오 †253)와 연대하여 교회 일치를 지켜냈다.

 

나머지 세 차례 교회회의(255-256)에서는 이른바 재세례 논쟁을 다루었다. 북아프리카 주교들은 이단과 열교 세례의 무효성을 재확인하고, 그들이 교회로 돌아올 경우 다시 세례를 베풀기로 거듭 결의했다. 재세례에 반대하는 로마의 주교 스테파누스(†257)와 극심한 갈등을 겪기도 했지만, 거듭되는 박해 상황에도 고대 교회회의의 훌륭한 전통을 세웠고, 258년 순교로 삶을 마감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실천한 시노달리타스

 

395년 북아프리카 히포의 주교가 된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지역을 초월하여 오라고 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기꺼이 가서 큰 정성과 열정과 권위로 부지런히 구원의 말씀을 선포했고, 이단과 열교를 바로잡기 위해 집필에도 열성을 쏟았으며, 자신이 깨달은 신앙 진리를 동료 주교들과 나누고 전체 교회와 공유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 9,1-3).

 

아우구스티누스가 남긴 수많은 서간집과 설교집, 저술과 토론집 등은 그가 꿈꾸고 실천한 시노달리타스의 아름다운 증거다. 411년 카르타고 교회회의에서 도나투스 논쟁에 마침표를 찍기까지 분열은 교회에 쓰라린 상처를 남겼지만, 밀과 가라지, 선인과 악인이 ‘뒤섞인 교회’(ecclesia permixta)의 본성과 오직 ‘하느님의 것’(res Dei)인 성사의 본질을 더 깊이 깨닫게 해 주었다. 연이은 펠라기우스 논쟁은 은총과 자유의지에 관한 치열한 논의를 통해 인간의 허약함과 하느님의 자비를 겸허하게 성찰하는 기회가 되었다.

 

이처럼 교회론과 성사론, 은총론과 구원론의 핵심 원리는 교황청 신학 담당 부서의 책상머리에서 하달된 것이 아니라, 지역 교회들의 사목적 논의와 신학적 성찰에서 샘솟은 것이다. 사도 전승 안에서 숙의하며 깨우친 소중한 신앙 진리를 온 세상 보편 교회와 지혜롭게 공유하는 과정에 마침내 ‘거룩한 전통’[聖傳]이라 불리는 교부들의 신학이 탄생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세상을 떠나던 430년, 반달족은 아프리카에서 방화와 약탈을 일삼으며 히포를 포위해 오고 있었다. 그는 전쟁과 박해 중에 사목자가 지켜야 할 자리에 관하여 유언과 같은 긴 편지를 동료 주교들에게 썼다. 참된 목자는 언제나 하느님 백성과 생사고락을 함께해야 한다는 마지막 당부였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선종한 직후 북아프리카의 위대한 문화유산은 파괴되고 빛나는 교회회의 전통도 형편없이 허물어졌지만, 교부들이 실천한 시노달리타스 전통은 아직도 소중한 원체험으로 남아 있다.

 

 

이 시대의 교부 프란치스코 교황의 꿈

 

프란치스코 교황은 “세계 주교 시노드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가장 소중한 유산 가운데 하나”라고 평가한다. 세계 주교 시노드는 성 바오로 6세 교황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마무리하면서 제도로 만들긴 했지만, 그 “정신은 매우 오랫동안 면면히 이어져 온 것”이며, “교회의 매우 풍요롭고 오래된 합의 전통의 이상을 이어받은” 것임을 강조한다.(「주교들의 친교」 1항) 한마디로, 주교 시노드는 교부들의 교회회의 전통을 잇고 있다는 말이다.

 

교부들이 물려준 시노달리타스의 핵심 가치는 무엇일까? 주교들의 형제적 친교와 보편적 연대라고 평가하고 싶다. 최초의 교부 문헌인 로마의 주교 클레멘스가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을 비롯한 다양한 교부 문헌에는 교구를 초월한 교회 일치와 친교에 대한 책임 의식이 가득하다. 가난한 교회를 위해 자선기금을 모아 보내고, 교구 울타리와 지역 장벽을 허물어 사회적 약자를 환대하고 돌보던 교부 시대의 아름다운 실천도 주교들의 깊은 동지 의식에서 꽃핀 것이다. 주교들 사이에 갈등도 있었고 심지어 로마의 주교와 긴장 관계도 없지 않았으나, 주교들의 단체성과 공동합의정신에 바탕을 둔 끈기 있는 대화와 협력은 언제나 교회 일치와 보편성을 굳건하게 지켜내는 원동력이었고, 바로 그것이 시노드와 공의회의 거룩한 전통이 되었다.

 

이미 교부들은 세계적으로 생각하면서 지역적으로 실천했다. 지역 교회에서 벌어지는 긴급하고 절박한 사목적 문제들에 대한 최종 결정이나 승인을 로마의 교도권에만 기약 없이 맡겨둔 채 개별 교구 행정에만 몰입한 교부들은 상상할 수 없다. 오히려 425년 카르타고에서 열린 아프리카 교회회의에서는 지역 교회 문제를 로마 교회에 시시콜콜 상소하는 것을 금지하기까지 했다. 더군다나 교부 전통에 굳건히 서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도 “교황이 지역 주교들을 대신하여 그들의 지역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식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복음의 기쁨」 16항)는 신념을 재임 초기부터 분명히 제시했고 지금도 끊임없이 독려하고 있다면,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차원에서 어떻게 하느님 백성의 목소리를 아래로부터 경청하고 민중과 중생의 울부짖음에 응답하며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갈 것인지를 담대하게 논의하고 실천하는 일은 시노달리타스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며 도전이라 믿는다. [가톨릭신문, 2023년 6월 18일, 최원오(빈첸시오,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 본 기획은 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와 가톨릭신문이 공동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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