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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신 김대건 · 최양업 전62: 최양업 신부의 사목지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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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9-19 ㅣ No.2130

[신 김대건 · 최양업 전] (62) 최양업 신부의 사목지 (상)


전라 · 경상 · 강원 · 충청 · 황해 5개 도와 100여 개 교우촌 사목

 

 

최양업 신부가 1854년 11월 4일 리브와 신부에게 편지를 쓴 곳으로 추정되고 있는 충북 진천 문봉리 동골 교우촌 터. 현재 이곳에는 한국순교복자수녀회 무아의 집이 있다.

 

 

최양업 신부는 1850년 1월부터 1861년 6월 15일 선종할 때까지 만 11년 6개월을 조선에서 사목했다. 최 신부의 주요 사목지와 편지를 쓴 교우촌을 3회에 걸쳐 정리하려 한다.

 

 

5개도 돌며 성사 집전

 

최양업 신부는 1849년 4월 15일 사제품을 받은 후 만주 요동 차구에서 약 7개월 동안 베르뇌 신부의 보좌로 사목했다. 1849년 12월 말 귀국 후 최 신부는 페레올 주교의 지시에 따라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와 경기도 일부, 강원도 지역을 사목했다. 최 신부는 1850년 말 전국 185개 교우촌 중 127개 교우촌을 담당했다. 전국 교우촌의 약 69%를 최 신부가 맡은 것이다.

 

1852년 8월 29일 메스트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함에 따라 최양업 신부는 조금이나마 손을 덜 수 있었다. 메스트르 신부가 최 신부의 사목지 가운데에서 충청도 내포와 북동부 지역, 경상도 북서부 지역을 맡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 신부는 프랑스 선교사들이 갈 수 없는 가장 멀고 위험한 지역의 교우촌 대부분을 그대로 담당했기에 사목지가 줄었다 해도 여전히 5개 도를 돌며 성사를 집전해야 했다. 그리고 최 신부는 1853년 여름부터 배티에 있는 신학생들을 가르쳐야 했다.

 

1856년 3월 26일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와 푸르티에ㆍ프티니콜라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면서 최양업 신부의 사목지에도 변화가 생긴다. 베르뇌 주교는 서울과 경기도 지역 교우촌을, 푸르티에 신부는 배론 성 요셉 신학교와 충청도 북부 지역을, 프티니콜라 신부는 홍산 내대 교우촌과 충청도 남부 일대를 사목했다. 이때부터 최양업 신부는 경기도 지역 사목지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최 신부가 황해도 지역 새 교우촌으로 가면서 경기도 지역의 다른 교우촌을 방문하지 않은 것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최양업 신부는 1856년부터 선종 때까지 전라도와 경상도 남부 및 북부 일부, 강원도, 충청도 일부, 황해도 지역을 사목했다. 이 시기 최양업 신부가 담당한 교우촌은 여전히 100개가 넘었고, 사목 방문 거리도 약 8000리(3142㎞)나 됐다. 최양업 신부는 조선 교회를 위해 11년 6개월 동안 초인적인 사목을 했다.

 

 

편지에 드러난 신자들 모습

 

최양업 신부가 사목한 교우촌들은 그의 편지에서 소개된다. 현재까지 확인된 최양업 신부의 편지는 모두 22편이다. 그중 해외에서 쓴 편지가 6편, 조선에서 쓴 편지가 16편이다. 조선에서 편지를 쓴 장소는 도앙골, 절골, 동골, 배론, 소리웃, 불무골, 오두재, 안곡, 죽림 교우촌이다.

 

충청도 홍산 지방에 자리한 도앙골 교우촌(오늘날 충남 부여군 내사면 금지로 302)은 최양업 신부가 조선에 귀국해 1850년 1월부터 6월까지 사목 방문을 한 후 7월 한 달간 머문 곳이다. 최 신부는 이곳에서 그해 10월 1일 귀국 후 처음으로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긴 편지를 썼다. 이러한 사실로 미뤄봐 도앙골 교우촌은 1850년 최양업 신부의 첫 사목 중심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봄이면 복사꽃이 월명산 골짜기 양편으로 만발해 ‘도화골’이라고도 불렀던 도앙골은 삽티, 내대, 서짓골, 거칠 등 여러 교우촌과 인접해 있고, 전라도로 넘어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최 신부는 이러한 지리적 환경과 이곳 신자들의 열심한 삶의 모습에 감화돼 도앙골을 사목 거점으로 삼지 않았나 추정한다. 최 신부는 도앙골에서 쓴 편지에서 이곳 신자임을 직접 밝히지 않았지만 “산속에 사는 신자들은 거의 다 교리에도 밝고 천주교 법규도 잘 지키고 사는 열심한 신자”라고 했다. 이들 가운데 오요한, 김사범, 김루카, 김바오로, 오시몬 등 5명이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했다. 또 1866년 갈매못에서 순교한 다블뤼 주교와 오메트르ㆍ위앵 신부, 황석두, 장주기 성인의 시신을 남포 서짓골로 옮겨 안장한 신자들 가운데 김순장(요한)이 도앙골 출신이다.

 

최양업 신부는 도앙골에서 존경하는 스승에게 편지를 쓴 다음 1850년 후반기부터 1851년 전반기까지 사목 방문 길에 올랐다. 최 신부는 약 8개월에 걸친 긴 여정 동안 한 차례 체포될 고비를 넘겼다. 최 신부는 이 기간 3620명에게 고해성사를, 2753명에게 성체성사를 거행했다. 또 어른 197명과 유아 54명에게 세례성사를, 죽을 위험에 처한 비신자 아기 255명에게 대세를 줬다. 최 신부는 장마가 시작되는 7월에서야 사목 방문을 마무리하고 절골 교우촌에서 고단한 짐을 겨우 내려놓았다.

 

절골은 최양업 신부가 1851년 10월 15일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편지를 쓴 곳이다. 절골의 정확한 위치는 아직 규명되지 않았다. 다만 충북 진천 백곡면 배티의 한 교우촌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백곡면 일대 절골이라 불리는 장소는 배티뿐 아니라 여러 곳이 있다. 명암리 양담 마을, 용덕리 용진 마을, 백곡면 사송리와 양백리에도 절골이 있다. 양업교회사연구소 명예소장 차기진 박사는 용덕리 용진 마을 절골을 최 신부가 편지를 썼던 곳으로 본다. 용덕리 절골에서 서쪽으로 직선거리 1.3㎞ 지점에 느릅실 동골이 위치하기 때문이다. 용덕리 절골에는 절터와 우물터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스승들에게 보낸 편지

 

파리외방전교회 고문서에 분류 보관돼 있던 최양업 신부의 편지는 1851년 10월 15일 절골 교우촌에서 쓴 편지 이후로 1854년 11월 4일 동골 교우촌에서 쓴 편지까지 약 2년간 공백이 있다. 1853년 10월 23일 스승 신부에게 보낸 편지가 있지만, 이 편지는 바우링(1792~1872) 주중 영국 공사 겸 홍콩 총독이 외무장관 클라렌든에게 보낸 1854년 8월 25일 편지에 들어있는 발췌본이다. 이 편지는 1989년 10월 명지대 박태근 교수가 영국 외교문서에서 발견했다. 최양업 신부는 귀국 후부터 1860년 선종 때까지 해마다 사목 보고 형태의 편지를 파리외방전교회 스승 신부들에게 보냈다. 따라서 1852년과 1853년 편지는 유실된 듯하다. 최 신부가 1854년 11월 4일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1854년 3월 조선에 입국했다가 3개월 만에 뇌염에 걸려 선종한 장수 신부와 그 밖의 소식에 대해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자신의 편지를 읽으십시오”라는 내용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1854년 11월 4일 리브와 신부에게 쓴 편지는 동골 교우촌에서 작성됐다. 1852년부터 1854년까지 조선 교회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메스트르 신부가 1852년 8월 입국했다. 건강을 회복한 다블뤼 신부도 1853년 후반부터 교우촌을 사목했다.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가 1853년 2월 숙환으로, 1854년 입국한 장수 신부도 얼마 안 돼 뇌염으로 선종했다. 그해 8월에는 베르뇌 주교가 제4대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됐다.

 

동골 역시 오늘날 충북 진천군 백곡면에 있다는 것은 일찍부터 알려졌지만, 정확히 어디인지는 학자들 간의 의견이 나뉜다. 현재까지 가장 유력지로 인정받고 있는 곳은 ‘문봉리 동골’이다. 하지만 최양업 신부의 셋째 동생 최우정이 살았던 백곡면 양백리 동골, 산골 깊숙한 곳에 자리한 연백리 동골을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소리웃은 최양업 신부가 1856년 9월 13일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편지를 쓴 교우촌이다. 소리웃 교우촌의 정확한 위치 역시 학자들 간에 이견을 보인다. 정양모 신부와 서종태 박사는 “최양업 신부의 둘째 동생 최신정ㆍ송 아가타 부부가 최양업 신부와 함께 광주 소리울이라는 지방에서 몇 해를 지냈다”라는 「송 아가타의 이력서」 내용을 근거로 소리웃을 ‘용인 손골’이라고 주장한다. ‘소리웃=손골=소리울’로 이해한 것이다. 반면, 차기진 박사는 최양업 신부가 소리웃에서 쓴 편지 내용 중 “저는 며칠 후 여기서 700리 떨어진 새 교우촌으로 출발할 예정입니다”라는 내용을 근거로 1857년 9월과 1858년 10월의 편지를 작성한 곳인 ‘불무골’(충청도 남부)이나 ‘오두재’(전라도 북부) 인근의 교우촌이라고 추정한다. 차 박사는 “새로 발견된 ‘최양업 신부가 소리웃에서 베롤 주교에게 보낸 1857년 10월 20일 편지’ 곧 불무골에서 편지를 작성한 지 한 달 뒤의 편지가 소리웃에서 썼다는 점도 그곳이 불무골과 멀지 않은 곳이었을 가능성을 설명해 준다”고 강조했다. (「김대건 최양업 신부 연구」 130쪽 참조)

 

[가톨릭평화신문, 2022년 9월 18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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