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8일 (토)
(백)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성미술ㅣ교회건축

세계 교회 건축의 영성: 성당은 돌로 만든 기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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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1-24 ㅣ No.236

[세계 교회 건축의 영성] 성당은 돌로 만든 기도서

 

 

성당이 어떤 집인지를 말해주는 짧은 표현이 많다. “하느님의 집이다.”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장소.” “만민이 기도하는 집.” “하느님을 경배하고자 지정된 거룩한 건물.” “신자들이 미사나 전례에 참여하려고 모이는 곳.”

 

이에 앞서 성당이라는 건축물이 그리스도인인 ‘나’에게 어떻게 거룩함을 말해주고 있는지 스스로 물어보자. 그러면 이 짧은 표현이 살아 움직임을 느끼게 된다. “하느님의 집”이요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께서 거처하는 장소”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집을 마련하셔야 했는지를 묵상하게 된다.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기도의 집은 성찬례가 거행되고, 성체가 보존되어 있으며, 신자들이 모이고, 우리를 위하여 희생의 제단에서 봉헌되신 우리 구세주이신 하느님 아들의 현존을 공경하며 신자들의 도움과 위로를 받는 곳이므로, 아름다워야 하고 기도와 장엄한 성사에 알맞아야 한다”(1181항). 요약하면 성당은 그분의 영광을 위한 장소요 기도의 집이다. 이것이 성당을 다른 어떤 건물과 구분한다.

 

성당은 건물이지만 ‘성사적 건물’이다. 성사가 보이지 않는 은총을 감각으로 알아볼 수 있는 표징이듯이, 돌이나 벽돌 그리고 성화 등을 통하여 구원의 신비로 이끌어주는 성당은 대단한 ‘성사적 건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기도서를 펴고 자신을 이끌어주는 기도를 찾고 성인의 말씀도 읽으며 하늘로 마음을 향하고 하느님께 청한다. 이렇듯이 성당에 들어가면 기도할 수 있게 마음을 움직이는 공간과 빛, 조각물이 나타나고,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뵐 수 있다. 그래서 성당은 돌로 만든 기도서다.

 

 

우리를 가까이 초대하는 거룩한 땅

 

하느님의 집의 원상은 야곱이 머리에 베고 그곳에 누워 자다가 하늘까지 닿는 층계를 꿈꾼 체험에 있다. 야곱은 그 자리에 머리에 베었던 돌을 가져다 기념 기둥으로 세우고 그 꼭대기에 기름을 부어 ‘그곳’을 거룩한 장소로 주위와 격리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제가 기념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은 하느님의 집이 될 것입니다”(창세 28,22). 하느님의 집은 거룩한 힘이 고정되는 특별한 자리이고, 그 힘이 집중되는 특별한 방향을 가진다. 야곱이 꿈꾼 층계는 ‘땅에서 하늘에 닿는 층계’였다.

 

그는 ‘그곳’인 특정한 자리를 건축하는 행위로 분명하게 구별하였다. 야곱이 돌을 세운 것은 나머지 다른 주변과 구분되는 경계를 만든 건축 작업이었다. 그리고 거룩한 세계를 만들었다. 건축에서 공간이란 본디 사람을 품으려고 지어졌다. 사람의 몸을 지키려고 지어졌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이으려고 지어졌다. 그러나 야곱이 지은 돌기둥은 사람과 초월적인 존재를 이으려고 지어진 원초적인 건축 공간이었다.

 

모세는 장인 이트로의 양떼를 치다가 주님의 천사가 떨기나무에서 솟아오르는 불꽃 속에서 나타나자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리 가까이 오지 마라. 네가 서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탈출 3,5). 모세는 거룩한 땅에 자신이 서있음을 알게 되었다. 거룩한 땅이 지금 어디인가? 그곳은 성당이라는 건물이다. 성당은 건물의 형식을 빌린 ‘거룩한 땅’이요,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말씀하시던 하느님께서 나타나시는 곳이다. 그래서 이 말씀대로라면 우리는 성당에서 신을 벗어야 한다.

 

그런데 가톨릭의 성당은 주님의 식탁에 모두 모여 둘러싸는 것, 오직 이 한 가지를 위해 있다. 그래서 성당은 “이리 가까이 오지 마라. 네가 서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하시는 거룩한 땅이 아니다. 오히려 “이리 가까이 오라. 네가 서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나 내가 너를 부른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하였으나 내가 나의 식탁에 초대한다.”고 말씀하시는 거룩한 땅이다.

 

어디에나 계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집을 세우신 것은 사람은 어디에나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당신의 집 ‘안’에까지 불러들이신 것도 황공한데, 하느님께서 스스로 제물이 되시고 대사제가 되시어 당신 몸을 내어주시는 거룩한 희생의 장소다. 이게 어디 상상이나 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말인가?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

 

인간이 건축 안에 거룩함을 품고 거룩함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이 종교 건축이었다. 그 최고 건축은 바로 그리스도교 교회 건축을 통하여 이룩되었다. 더군다나 거룩한 분께서 자신의 집안에 인간을 불러들여 함께 모이게 한 건축은 오직 그리스도교의 교회 건축뿐이었다. 우리는 성당에서 미사를 드릴 때마다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중근동 지방의 지구라트 위에 있는 신전은 신자가 갈 수 있는 곳이 전혀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 도시의 아크로폴리스는 도시 안에 있는 어떤 언덕을 신역(神域)으로 삼았다. 그러나 신전에는 신관과 무녀들이 안에 있고 다른 사람들은 신전 ‘밖’에서 예배를 드렸다. 불교에서는 회랑  안쪽의 마당이나 문밖에서 기도하는 것이 통례였다. 이들에게는 내부공간이 없다. 있다 할지라도 들어오기를 거부하는 것이므로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당신의 백성을 집안으로 모아들이셨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집 ‘안’에 백성을 불러 모으셨다. 그리고 이들이 당신에게 찬미와 감사를 올리는 공간을 만들어주셨다. 이것은 다른 모든 종교의 예배 공간과 가톨릭 성당이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다.

 

유다교만은 ‘시나고그’라는 모임장소가 있었는데, 이는 모임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시나고게’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니 앞에서 인용한 「가톨릭교회 교리서」의 “신자들이 모이고”라는 말에 눈을 멈추고 이에 감사드려야 한다.

 

아마도 교회와 성당에 대한 설명으로 이런 설명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교회의 영어 단어 ‘church’는 그리스어 ‘키리아코스(kyriakos)’에서 나온 말인데, ‘주님(kyrios)께 속함’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성경의 저자들이 교회를 말할 때 사용한 그리스어는 ‘키리아코스’가 아니라 ‘에클레시아(ekkl?sia)’였다. 이는 ‘ek(어디에서 나와 어디로)’와 ‘kale?(부르다)’가 합쳐진 말이다. ‘자기 집에서 나와 어떤 공적인 장소에 나오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세상에서 나와 하느님께로 가도록 부름을 받은 백성’이라는 뜻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말이 그대로 건물을 나타내는 말이 되었다.

 

프랑스의 샤르트르 대성당은 인간이 하느님께 지어 바칠 수 있는 참으로 아름다운 최고의 건축물이다. 그러나 제대가 사라진 샤르트르 대성당은 대성당인가? 마찬가지로 샤르트르 대성당에 어느 날부터 신자가 사라졌다고 하자. 그래도 샤르트르 대성당은 대성당인가? 이때에도 이 위대한 건축 작품은 신자이거나 아니거나 모두에게 거룩함의 느낌을 전해줄 수는 있다.

 

그러나 아름다운 샤르트르 대성당도 이렇게 되면 아무리 위대한 건축 작품일지라도 하느님의 집, 하느님 백성의 집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누추한 집이라도 그 안에서 거룩한 전례와 성체성사가 이루어지는 곳이 거룩한 성당이다.

 

 

하느님 백성이 없는 성당은 두꺼운 껍질의 공간일 뿐

 

두 해 전 나는 독일의 현대 성당을 기행하면서 가슴 아픈 세 개의 성당을 목격했다. 성녀 제르투르다 성당은 고트프리트 뵘의 걸작이다. 관리인을 한참 기다려 성당에 들어가 보니 그 안을 검은 칸막이벽을 두른 현대무용 연습장으로 빌려주고 있었다.

 

다음날 도미니쿠스 뵘의 걸작으로 병원 부속 성당인 묑헨글라트바흐에 있는 성 가밀로 성당에서는 아름다운 제대와 투명한 제대 뒷벽에 크게 감동을 하였다. 그러나 안내하던 독일 신부님이 당신들이 아마도 이 성당을 둘러보는 마지막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신자도 없고 미사가 거행되지 않으며 병원 운영도 어려워 내년에 이 성당이 봉안당으로 팔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다음 날에는 보트로프에 있는 거룩한 십자가 성당에 갔다. 독일 최고의 교회 건축가 루돌프 쉬바르츠가 설계하여 1957년에 완성한 이 성당도 10년 전 미사가 끊겼다. 제의실을 보니 제의도 있고 미사경본 등이 여전히 잘 꽂혀있다. 다시 이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는 날이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한 달에 한 번씩 제의를 다리고 있다고 한다.

 

아름답고 역사에 남는 성당도 하느님 백성이 나타나지 않으면 두꺼운 껍질의 텅빈 공간으로 남게 된다는 역설을 본 것이다.

 

사회는 언제나 건축으로 인간 공동의 가치와 자기의 고유성을 확인해 왔다. 인간의 역사에서 인간이 보여주어야 할 최고의 가치를 담은 건축은 언제나 가톨릭의 성당 건축이었다. 그만큼 인간의 건축에서 성당 건축은 그 역할이 크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교회의 성당 건축은 이런 가치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과연 세속 건축에는 없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사적 건물, 돌로 만든 기도서를 짓고 있는가? 대답은 그리 긍정적이지 못하다.

 

* 김광현 안드레아 - 건축가. 서울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로 전주교구 천호성지 내 천호부활성당과 성바오로딸수도회 사도의 모후 집 등을 설계하였다.

 

[경향잡지, 2016년 1월호, 김광현 안드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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