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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서평: 역주 눌암기략 · 송담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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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7-21 ㅣ No.1583

[서평] 역주 『눌암기략』 · 『송담유록』*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고전학자이신 정민 교수님께서 『눌암기략』과 『송담유록』 역주본을 내셨습니다. 제가 20년 전 대학원에 다닐 때, 『눌암기략』 초벌 번역을 하면서1) 무척 어려웠던 것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수많은 사람들과 조선 후기 남인 내부의 정치사를 꿰뚫는 역사적 지식이 부족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눌암기략』에 관심을 가졌던 교회사 연구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 역주본이 나오기를 손꼽아 기다려왔었는데, 오늘 탁월한 번역과 풍부한 각주를 단 두 권의 역주본이 출간되어 이루 말할 수 없이 기쁩니다.

 

『칠극』 번역으로 지난 해 11월 4일 제25회 한국가톨릭학술상 번역상을 받으신 정민 교수님은 수상 소감에서 “지난 30여 년 동안 연암 박지원에서 출발해 다산 정약용으로 이어지는 실학의 흐름을 공부해왔습니다. 「칠극」과의 만남 또한 이 과정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사유의 저층에 뿌리내린 서학의 역할과 영향에 대해 국학 연구자로서 좀 더 심층적으로 검토해 보고 싶습니다.”라고2) 하셨습니다. 오늘 두 권 역주본의 출간은 오랫동안 이 분야를 연구해 오면서 이루어진 훌륭한 결과물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두 권의 책은 학계에서 제대로 주목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재기(李在璣, 1759~1818)의 『눌암기략』은 1965년경 하성래 교수에 의해 절두산 순교 기념관에서 발견된 이래 복사본을 입수한 몇몇 연구자들에 의해서 일부 내용만 인용되었습니다. 3) 강세정(姜世靖, 17443~1818)의 『송담유록』도 1954년 홍이섭 교수에 의해서 그 존재가 알려졌지만4) 거의 잊혀진 채로 있다가, 70여 년 만에 지난 해 연세대 도서관에서 정민 교수님이 찾아 내어 역주하게 되었습니다. 이 두 권의 역주본은 초기 한국 천주교회사와 당대 정치사의 흐름을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입니다.

 

 

내용

 

1. 『눌암기략』은 저자가 신서파(信西派)와 공서파(攻西派)로 갈려 싸우던 남인 내부의 정쟁을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양비론적(兩非論的) 시각에서 직접 견문한 사실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일정한 기준 아래 내용을 전개한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의 사건들을 전후 순서대로, 그리고 나열식으로 기록하였습니다. 필사본 1책 23장 분량에 크기는 17.5×28cm, 행서에 가까운 해서체로 한 면에 14행, 매 행 40~46자로, 글자 수는 28,000자 안팎이며, 의미 단락 58개, 214개의 소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역주본은 본문을 번역하여 원문과 함께 실었고, 부록으로 영인본을, 끝으로 해제 「서학을 둘러싼 남인들의 전쟁 기록」 1. 교회사 자료 발굴과 연구의 시좌(視座), 2. 《눌암기략》에 대하여. 1) 저자 이재기의 생애와 인간. 2) 《눌암기략》의 서지와 내용 개요. 3) 《눌암기략》의 주요 내용, 3. 《눌암기략》의 자료 가치 등을 실었습니다.

 

주요 내용은 첫째, [1]~[20](1a~5a:6행): 대채(大蔡; 蔡濟恭, 1720~1799)와 소채(蔡弘履, 1737~1806)의 분화와 채제공의 성정 및 남인 내부의 동향, 채당(蔡黨: 蔡濟恭)과 홍당(洪黨: 홍수보(洪秀輔(1723~?)·홍인호(洪仁浩, 1753~1799)의 갈등과 정리 과정 등입니다. 여기서 1a에서 3b6행까지는 1782년 채제공의 실각 이후 채홍리가 등을 돌리면서 남인 내부가 대채와 소채로 분화되는 정황을 기술했는데, 이를 부정적으로 보면서 ‘두 과부의 싸움’에 비유하였습니다. 3b7행부터 5a6행까지는 채제공의 정계 복귀 이후 홍수보·홍인호 부자의 홍당과 채제공의 채당과 빚는 갈등의 장면들을 보면서, 한때 소채와 손을 잡았던 홍당이 채당의 견제를 받아 힘을 잃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1793년에 이르러 홍낙안과 이기경이 홍인호 형제에게 영합한 사실도 기록하였습니다. 이처럼 저자는 채제공의 정치적 몰락에서 재기까지의 과정을 따라가는 과정에서 남인 내부의 구성원들이 대채와 소채, 채당과 홍당으로 갈리며 권력의 향배에 따라 줄서기하는 모습과 상황을 이렇게 악화시킨 채제공의 편협한 성격 등을 객관자 시선으로 비판했습니다. 저자는 양비론의 입장에서 객관화 된 시각으로 남인들 사이의 상쟁을 우려하면서, 이 상쟁이 결국 남인들의 정치적 입지를 약화시키게 된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둘째, [21]~[50](5a:7행~17a:10행): 이 책의 가장 핵심 대목으로 남인 내부의 정파적 투쟁과 맞물려 신서파(이가환, 이승훈, 정약용 등)와 공서파(이기경, 홍낙안 등)의 투쟁을 기록하였습니다. 이는 이 두 문제를 연결선 상에서 이해하고 있음을 드러낸 것입니다. 1791년 진산사건을 일으킨 남인들의 사전 밀통 사실, 이후 서인들과의 결탁, 채제공이 신서파의 영유로 지목되었던 이유를 파악하고 있습니다. 신서파가 채당의 전위로 나서면서 채제공과 신서파의 밀월 상태가 이루어졌고, 1793년에 이루어진 홍낙안과 이기경의 결탁이 신서파와 공서파의 괴리를 더욱 부추긴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러나 공서파의 서학 공격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국면으로 되돌아와 이기경과 홍낙안이 정치적으로 몰락했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이 정조와 채제공의 사후 신유박해의 부메랑으로 되어 돌아왔고, 채제공의 관작 추탈로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채제공에 대한 자신의 존경심과 남인 계열이 표방하고 있던 정치적 의리를 계속 지켜나간 사실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저자는 채홍리와 가까웠던 목만중이 채제공을 옹호하던 이익운과 가까워지고, 홍낙안과 이기경 사이가 어떻게 변모하는 가를 기록하였습니다. 결국 서학을 둘러싼 격렬한 투쟁이 단순히 종교적 시념에 대한 탄압만이 아닌 정쟁적 차원의 배경이 같이 깔려있는 복합적 원인에 의한 것이었음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리고 서학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견지한 저자는 이승훈 형제와 정약용·권철신 형제, 홍낙민 등에 대해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냈고, 홍낙민, 이존창, 권일신 부자, 최필공, 이윤하 등의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행적에 대해서도 기록하였습니다.

 

셋째, [51]~[58](17a:11행~23b): 신유박해 이후 1802년부터 1814년 봄까지 척사파인 이기경과 홍낙안의 균열, 채제공 관작 추탈 사건의 경과, 주로 남인 안에서 상소 사건들을 평가하는데 중점을 두었고, 특히 1806년 6월 양천(陽川) 발통 사건에서의 남인 시류 문제, 1814년에 저자가 제기한 조정에서의 상소 문제를 기록하였습니다. 여기서 1801년 남인 상소에 큰 문제가 있었을 지적하고, 이후 일부 남인 사류들의 변절과 정치적 입지의 쇠퇴가 있었음을 한탄하고 있는데, 이 점에서 저자의 입장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저자는 채제공의 관작추탈 논의를 철저히 비판하는 태도를 보였고 추탈 상소에 가담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공서파의 표적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남인이 표방해 온 임오의리(壬午義理)를 자신이 다시 주장하게 된 것임을 설명한 것입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이재기는 정조 초에서 순조 초까지 기호 남인이 어떻게 변모하였는가에 초점을 두었고, 중도적 입장에서 남인 세력의 분열을 한탄하면서도 준론(峻論)을 옹호하고, 채제공과는 생전에 사이가 멀어졌으면서도 끝내는 그를 따랐던 것입니다. 여러 곳에서 표현되고 있는 자신의 견해를 바탕으로, 남인 세력의 동향을 나름대로 파악하고 남인의 정치적 입지가 약화되어 간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가를 밝히는데 그 저술의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2. 『송담유록』은 공서파의 3인 중의 한 사람인 강준흠(姜浚欽, 1768~1833)의 부친인 강세정이 1808년 초 철저한 공서(攻西)의 입장에서 가문의 희망이었던 아들 강준흠의 정치적 입장을 변호하기 위해서 기록하였습니다. 1책 53장 분량의 필사본(30.1cm×22.4cm)으로 1면 12행, 1행에는 22~28자 안팎의 분량에 글자수는 대략 29,000자 내외입니다.

 

역주본은 본문을 번역하여 원문을 함께 실었고, 영인본과 「황사영 백서」, 신후담의 「돈와기문편」, 「안정복 서간」, 그리고 부록으로 원본에 없는 강세정이 쓴 「아들 강준흠을 향한 비방에 대해 해명하는 글」(『송담유고』 제3책, 장8b에서 장17a)과 아들 강준흠이 자신의 사돈 공서파 이기경을 위해 지은 「홍문과 교리 이공 묘지명」(『삼명집』(3책 잔권)을 번역해 실었습니다. 강세정과 강준흠의 글이 이 책의 내용과 맞물려 있고, 초기 교회사의 배경 이해에 도움을 주는 중요한 글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끝으로 해제 「초기 교회사 자료의 숨은 보석」 1. 기록의 중간지대와 《송담유록》 발견 경위, 2. 저자 강세정과 집필 동기, 3. 《송담유록》의 구성과 내용, 4. 《송담유록》의 자료 가치 등을 실었습니다.

 

주요 내용은 첫째, 1a에서 22a까지는 초기 신서파 주요 인물들의 서학 신앙과 관련한 동향을 보고 들은 내용을 적은 것이고,5) 뒷부분은 주요 사학죄인의 결안(結案) 등을 소개하였습니다.

 

둘째, 22a 중반 이후 27a까지는 공서파와 신서파의 투쟁 과정에서 공서파의 시각에서 전후 상황 이해가 필요한 상소문 등 각종 자료를 모았습니다. 즉 1801년 3월부터 1807년까지 공서파 여러 인물(목인수, 한재유, 최중규, 박명섭, 이익운, 옥당, 목만중)의 통문과 상소문을 수록하여 전후 맥락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로 제시하였습니다. 28a에서 42b까지는 「황사영 백서」 전문을 수록했는데, 백서의 원본을 상당히 축약한 것으로 이기경의 「벽위편」에 수록된 것과 내용이 같습니다. 특히 최필공부터 홍교만, 홍낙민, 이승훈, 이가환, 최필제 등의 신앙 생활에 대한 증언을 담은 원본 백서의 40행 중간부터 53행 하단까지 무려 13행 1,481자를 생략하였습니다. 특히 저자는 백서 영인본에 세례명에다가 방점을 찍었고, 30개의 두주(頭註)를 달았는데, 홍이섭 교수는 “황사영 「백서」의 이록(移錄, 제28장~42장 후면)으로 벽위편에서 볼 수 있었으나 여기서는 일찍이 백서를 예쁜 자체(字體)로 등서한 것은 필자로는 처음 보는 것으로, 백서 전문에 걸쳐 영세명에 방점을 쳐놓은 것은 본문을 차근히 읽었음을 보여줍니다. 교우 아닌 공서파의 유가(儒家)로 부지(不知)의 영세명에 방점을 친 것은 의문의 표시이었고, 한 곳의 두주(頭註)에서는 「若望終不露名」(38장 전면 끝으로 제 2행)이란 것은 원초자(原鈔者)가 백서를 얼마나 차근히 읽었는지를 알리는 의미있는 표시이다.”라고6) 평가하였습니다. 43a에서 47a까지 신후담이 1724년 봄부터 1729년 겨울까지 네차례 스승 이익을 찾아가 서학에 대해 토론한 문답 내용, 1728년 봄 이식, 1729년 가을 이만부 등과 서학을 두고 문답한 내용을 적은 「돈와기문편」을 옮겨 적었는데, 원본의 일부 내용을 축약하거나 간추렸습니다. 처음 성호 생존 당시 남인 계보에서 학을 바라보던 태도의 분기점이 된 논의여서 전후 맥락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옮겨 적은 것 같습니다. 47b에서 53b(끝)까지 순암 안정복이 1757년에 스승 이익에게 보낸 서한을 시작으로 1784~1786, 1789년에 쓴 서학 관련 편지를 한자리에 모아 수록했는데, 10통의 편지 중 중요 대목만 간추려 소개하고, 중간에 안정복의 시 3수와 이기양이 찾아와 강력하게 항의하고 떠난 뒤 자신의 심경을 토로한 일기 한 대목을 옮겨 놓았습니다. 해당 편지는 전문이 아니라 핵심 내용만 간추렸는데, 서학이 젊은 남인들에게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가는 상황에 대한 안정복의 우려와 이 흐름을 되돌리기 위한 노력이 여러 장벽에 부딪쳐 좌절되는 과정을 담았습니다.

 

셋째, 주요 내용을 정리하면 1~36은 이 책의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입니다. 1은 성호 이익이 ‘마태오 리치를 성인’이라고 했다는 말이 오해를 일으킨 것이고, 성호가 서학을 배척하고 다만 천문과 역법의 기교 몇 가지만을 취했다고 했습니다. 2는 성호의 종손 이철환의 말에 마태오 리치의 주장이 많았고, 3은 이가환이 벼슬에 오르기 전부터 서학을 믿었는데 이철환에게 전수 받은 것이고, 그의 무리인 이벽, 이기양, 권일신, 이승훈 등이 사학에만 매진하면서 부류를 끌어모아 사학에 물들었다고 하였습니다. 1783년 이승훈이 북경에 가서 사서를 구해왔고 가르치고 공부하는 방법까지 배워 온 후로 서학이 성행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4는 1785년 을사추조적발 당시 작은 주머니 안에서 승천하시는 예수의 상본이 나왔고, 권일신과 권상문, 이윤하, 이총억, 정섭 등이 형조로 들어가 형조판서에게 성상을 돌려달라고 따졌으며, 강세정 자신이 이기양의 아들 이총억을 크게 꾸짖었고, 성균관 유생(심봉석, 정실)의 통문 움직임에 이가환과 권숙신이 여러 번 자신을 찾아와 중재를 요청했다고 하였습니다. 5는 1787년 예산현감 신사원이 서학에 대한 조예가 깊고 독실했던 이존창을 체포하여 천안에 가두었고, 이기양의 동생이자 안정복의 손주사위인 이기성이 천안 감옥까지 찾아와 옥문 밖에서 이존창에게 큰 절을 올린 뒤 함께 죽기를 원한다고 하였으며, 홍낙민이 이존창의 딸을 자신의 외종질 조아무개의 며느리로 삼게 하였습니다. 6은 서울에서 이승훈과 정약용 형제가 주축이 되어 이학규, 황사영, 중인 최필공, 최창현 등이 한글로 사서를 번역해서 배포하였고, 사족 부녀자들과 여염의 여자들의 활동이 두드러졌으며, 7은 양근에 살던 권일신은 남필용, 이기연 형제, 홍교만, 홍익만 등에게 가르쳐 양근과 여주, 이천 지역에 널리 퍼졌고, 김상헌의 봉사손 김건순이 배웠으며, 8은 홍낙민과 이기양, 이존창이 중심이 되어 충청도 야소동(여사울)에서 가르쳐 인근 6~7개 고을을 확장하여 몇 백명으로 증가했고, 오석충이 사서를 한글로 번역하여 이존창에게 보내주었으며, 9는 진산의 윤지충과 권상연, 전주의 유항검 형제의 서학 전파, 10은 포천의 홍교만과 그의 서종제 홍익만이 서울에 와 머물다가 부친 기일이면 포천으로 돌아갔는데, 이에 큰형 홍주만이 통곡한 사실을 전했습니다. 11은 1787년 겨울 이승훈과 정약용의 정미반회사건과 홍낙안과 이기경이 통문을 내려고 했고, 이승훈과 정약용이 제사와 관련된 내용이라 하여 과거시험 답안을 백지로 제출했으며, 12는 1780년 9월 권철신이 부친의 장례 당시 집안 여인들이 상복을 입지 않고 성장(盛裝)을 하고 화려한 복장을 입은 채로 면화솜으로 망자의 코를 막을 때에 영결하였고, 문상을 자신만이 받았으며, 1791년 윤지충이 모친상 때 상복도 입지 않고 조문도 받지 않았으며 신주를 태워 없애버린 사건, 진산군수 신사원이 사실을 탐문하고 이 사건을 채제공에게 보고하여 서울에 크게 퍼진 일을 기록하였습니다. 13~21은 진산사건 이후 서학 신앙을 두고 신서파와 공서파 사이에 벌어진 공방을 공서파의 시선에서 집중적으로 정리하였는데, 저자가 가장 중점을 두어 말하고자 했던 부분입니다. 13은 진산사건 이후 사학을 성토하는 성영우에게 통문의 초고를 자신이 작성하고, 아들 강준흠을 참석시켰으며, 동석자였던 최영이 이승훈에게 상황을 알려주는 바람에 이후 목인규, 성영우, 강준흠이 신서파의 표적이 되었고, 14~20에서는 이치훈과 홍낙민을 가장 교활하고 사악한 자라고 하면서, 목인규, 성영우, 강준흠 등을 무고죄로 날조하려고 하였으며, 15는 강준흠이 이종형 이재적(이가환의 아들)이 사학에 물들지 않았다고 해명하면서 그를 지켜주려고 하였으나 이재적은 이모와의 관계를 끊고 서로 문안조차 하지 않는다고 하였고, 이승훈 형제는 거짓말과 황당한 이야기로 온갖 방법을 써서 참소와 이간질을 하였으며, 이가환은 성품이 명쾌하지 않아서 의심을 풀어 주지 못했으니 미움을 사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16은 강직하고 분명하고 예리했지만 포용력이 부족했던 홍낙안이 채제공에게 올린 두 통의 서한으로 인해 신서파가 원한을 품었고 이치훈의 서한과 채제공의 분노를, 17은 홍낙안의 두 번째 서한을 받고 올린 상소, 공서파에 대한 정조의 의심을, 18은 이치훈이 사주한 권이강의 상소, 정조의 홍낙안 문계, 19는 홍낙안의 아룀과 정조의 대답, 20~21은 채제공의 문계와 권일신의 심문, 형조의 보고와 정조의 처분, 권일신의 죽음, 22는 북경 체류 당시 정황을 담은 이승훈의 원정(原情) 내용과 이에 대한 정조의 처분, 23은 1789년 평택현감으로 부임한 이승훈이 향교에 가서 공자의 사당에 배알을 거부한 일로 벌어진 소동, 정조가 현감을 모해하였다고 어사를 보내 추국한 일, 24는 진산사건 이후 신주가 불타지 않고 그대로 있다는 주장이 채제공에게 알려졌고, 채제공과 정조는 확인해 보도록 지시한 사실, 이에 대한 형조의 보고, 25는 진산사건 이후 홍낙민과 이치훈은 가장 교활하고 간악했고 화심(禍心)으로 협잡한다는 명목으로 척사파를 배척하였으며, 정조의 홍낙안에 대한 처분과 이에 대한 홍낙안의 반발, 이를 역이용해 홍낙안과 홍인호 부자를 비방한 이가환과 정약용, 이후 공서파가 근 10년간 위축되어 세상에서 버림받게 된 사정을 성토했습니다. 26은 홍낙민과 이기양, 이존창 등의 노력으로 덕산, 홍주, 예산, 청양, 정산 고을, 충주에서 부친의 기일에 이최연과 이기연 형제의 불참, 당시 사학의 소굴로 일컬어진 고을은 내포의 여러 고을과 충주와 양근, 여주와 이천이라고 하였고, 1795년 이가환을 충주목사에 정약용을 금정찰방에 좌천시켰고, 1798년 정충달을 충청병사로 임명하여 사학을 염찰하고 옥사를 다스리도록 한 일, 이승훈의 예산 정배, 27은 이기경의 정배와 홍낙안의 찰방 임명, 정조의 서학정책과 승하, 28은 정조의 서학정책에도 불구하고 진산사건 이후로도 거리낌없이 사학을 강습한 신서파의 방자한 행동, 정약종의 책롱사건, 29는 삼사(三司)와 사헌부의 보고, 대왕대비의 전교, 30은 사헌부의 보고와 권엄 등의 상소, 31은 이가환, 권철신, 최필공, 이승훈, 정약종, 홍낙민, 최창현, 홍교만의 결안, 정약전과 정약용의 정배, 이격의 유배, 32는 정한의 상소, 33은 강세륜의 상소, 34는 사학에 빠진 사족 부녀들과 여염의 여자, 과부들의 신앙 활동과 그녀들이 소지했던 주머니 속에 천주의 화상과 편경(성인 메달), 이가환이 한글 사서의 번역 보급, 35~36에서는 이익운의 입양한 아들 이명불(이명호)의 신앙 활동과 경기관찰사인 부친 이익운이 아들을 경기감영으로 소환했는데 그날 밤 갑작스러운 죽음, 36은 이윤행이 이익운에 대한 상소와 비변사의 보고, 이때 이익운은 친척 이주석을 시켜 밤낮으로 홍낙안에게 원배(遠配)시키지 말아 달라고 애걸한 결과 포천으로 가서 머무르게 된 일, 1806년에 이익운이 홍낙안을 논척했던 처신을 고발했습니다. 37~43에서는 주요 신자들 주문모의 공초, 이경도, 김건순, 김이백, 유항검, 윤지헌, 이우집, 김유등 결안, 이기양 등 귀양 등을 당시 공문에 의거해 차례로 소개하였고, 44에서는 유항검 형제의 신앙 활동과 서양선박영입방안(大舶請來)에 대한 어리석음을 성토했으며, 45는 황사영, 46은 황심과 김한빈, 47은 이치훈 등의 심문, 48은 대왕대비의 전교, 49는 옥천희와 현계흠 등에 대한 처분, 50~52에서는 채제공 사후 관작추탈 관련 공방에 얽힌 주변 논의를 정리해서 실었습니다. 53~58에서는 1801년 3월부터 1807년 12월 19일에 이르는 각종 척사관련 통문과 목만중의 상소문을 자료로 제시했습니다. 특히 이익운과 관련된 내용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데, 주요 대목을 간추려 소개했습니니다. 또한 초기 교회 자료인 「황사영 백서」와 「돈와기문편」을 수록해 책에 자료집의 성격을 부여했습니다. 백서가 박해 당시의 심층을 보여준다면, 신후담의 글은 그보다 70여 년 전 이익과 신후담의 토론 기록을 남김으로써 조선에서 서학 논의의 출발 지점이 언제였고, 당시의 쟁점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 핵심 인물들과 안정복 사이에 오간 서간과 일기 등은 교회가 세워지던 시기의 분위기를 생동감있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성과와 과제

 

1. 첫째, 『눌암기략』은 본문에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기술된 사실 자체가 간략해서 앞뒤 맥락이 얹히지 않을 경우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운 내용이 많습니다. 하지만 역주자인 교수님은 당시 시대와 각 인물들을 오랫동안 연구하였기에, 상세한 각주를 풍부하게 달아 학술적인 도움을 주었습니다. 『눌암기략』에 각주 421개를 달았는데, 그 중 251명의 인적 사항을 밝혔습니다. 학문에 대한 열정과 후학을 위한 애정을 갖고 계시는 교수님께서 후학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 노력한 결과인 것입니다. 일반 독자들 뿐 아니라 후학들은 이 책을 통하여 초기 교회사와 정치사를 더욱 깊이 연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송담유록』은 저자가 상소문이나 공초 기록 등 원래의 글을 압축하여 줄인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교수님은 이 책에 실린 상소문이나 공초 기록 등을 일일이 원본과 대조하여 번역하였고, 원본의 출처를 밝혔으며, 당시 관변 측 기록, 족보, 시문집 교회 기록 등을 참고하여 각주 565개(인명 258명)를 달아 학술적인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이 책에 실린 「백서」와 이만채 『벽위편』에 실린 두 필사본의 차이는 원문 중에 약물로 표시해 비교가 가능하게끔 하였습니다. 교수님은 저자의 기록에 대한 신빙성을 제기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12]에서 권철신의 부친 장례에 집안 부녀자들이 상복을 입지 않고 영결식을 하였고 맏아들인 자신만이 조문을 받았다는 일에 대해 각주 71에서 집안 가전 기록, 간찰, 시문집 등을 찾아 부친은 1780년 9월에 선종했음을 밝히면서 그때는 조선 교회가 조상 제사 문제에 대한 지침을 받기 전이었는데, 전문(傳聞)의 과장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둘째, 『눌암기략』은 조선 후기 정치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정치 세력으로서의 남인이 변모해 가는 과정, 그 과정에서 천주교 문제와 어떻게 연결되는 가에 많은 시사를 얻을 수 있습니다. 당시 서학 문제가 단순히 신앙 차원에 국한되지 않고, 채제공을 정점에 둔 남인 내부 집단의 정치적 셈법과 맞물린 복잡한 정치 지형 속에서 증폭된 사건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자는 서학(천주교)이라는 종교의 문제를 전면에서 다루는 대신, 신서파와 공서파들을 정치사적인 맥락에서 조망함으로써, 도입기 서학을 둘러싼 외연과 큰 흐름을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저자는 정조 통치 기간 남인의 분화(채당과 홍당)와 갈등 원인, 그 추이를 남인 내부의 시선에서 정리하였습니다. 이 책의 중심은 서학보다 채제공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책의 앞부분에서는 채제공의 실각과 복귀 과정을, 중간에서는 복귀 이후 신서파와 공서파의 갈등이 빚어내는 지속적인 파열음과 양측의 공작을, 뒷부분에서는 신유박해 이후 정조와 채제공 사후 노론 전제 아래 남인들 간에 채제공의 평가를 둘러싼 다툼을 다룬 것은 이를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송담유록』의 저자 강세정은 척사파의 선봉에 섰던 아들 강준흠이 국가의 정론인 반서학을 외쳤을 뿐 채제공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비판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기경과 홍낙안의 반채(反蔡濟恭) 노선과는 애초에 다른 것이었음을 입증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강세정은 성호 이익에서부터 서학이 남인 내부에 침투하였고, 이후 채제공의 시대에 공서파와 신서파로 나뉘어 싸우게 된 계기, 자기 집안과 채제공, 이가환 등과의 관계에 대해 해명하고, 신서파들의 여러 교활한 행태를 고발함으로써 강준흠이 척사의 최전선에 나설 수 밖에 없었음을 기록하였습니다. 이와 동시에 강준흠이 반채 전선에 결코 나서지 않았음을 해명해 채제공 계열의 남인들에게 변명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는 1805년 정순왕후가 세상을 떠난 뒤 순조가 친정을 시작하면서 노론 벽파가 몰락하고 시파 김조순 등이 집권하게 된 정국의 변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당시 이익운을 필두로 채제공 계열의 남인이 복권되면서 1807년 당시 남인으로부터 집중 공격의 대상이 되었던 아들 강준흠의 정치적 입지를 지키고 가문을 보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셋째, 두 권의 역주본은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의 현양과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의 시복 시성 운동에 좋은 자료입니다. 관변 측 자료에서 볼 수 없는 천주교에 관한 중요한 기록들을 담고 있습니다. 『눌암기략』에 복자 홍낙민(루카)은 노비였던 ‘하느님의 종’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을 속량해 주었고, 이존창의 딸을 자신의 외종질 조아무개의 며느리로 삼게 하였습니다. 저자는 “그들의 학문은 배움의 깊고 얕음을 가지고 높고 낮음의 서열을 삼을 뿐, 문벌의 높고 낮음은 따지지 않고 혼인하여 교류하는 지경에까지 다다랐으니, 사학이 세상의 도리를 그르치는 정도가 이에 이르러 극에 달하였다.”라고[5] 하였습니다. 이윤하, 이벽, 권일신 형제, 권상문, 정약용, 이가환, 홍낙민, 이존창, 이기성, 최필공, 이학규, 신여권, 정약전, 정약종, 오석충, 유항검, 주문모, 황사영, 김건순 모자, 이명불(이명호) 등의 잘 알려지지 않은 일화, 1792년 신자들이 옥폭동에 모여 신앙 발원문을 작성해 공표한 일 등이 담겨 있습니다. 권일신이 안정복의 사위인데도 안정복이 죽은 뒤 조문하지 않은 것, 1795년 윤유일 등이 처형된 뒤 신서파의 기세가 한풀 꺾인 것, 1797년~1798년 사이에 사학 서적이 세상에 크게 유행하였는데, 책을 빌려주는 이들이 큰 이득을 보았다는 것, 1801년 박해에 죽거나 유배된 수가 100명 이하는 아닐 것 등이 있습니다. 또한 이기경, 강준흠, 홍낙안 등 공서파의 책략과 이면 행동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것도 당시 여러 움직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이로써 서학에 대한 당대 인식을 심층적으로 살펴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눌암기략』에 초기 교회사의 주축이었던 ‘하느님의 종’ 이승훈과 정약용 등을 정치적 책략의 화신으로 등장하는 대목은 낯설기도 하지만, 인간적인 차원에서 볼 때 위기 상황을 돌파해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지켜나가려는 적극적인 몸짓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복자들과 ‘하느님의 종’들, 그리고 신앙의 선조들을 통해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송담유록』에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 당시 체포된 이들의 소지품마다 예수 승천 후 모습을 그린 화상이 나왔고[4], 여성들이 차고 다니는 주머니에는 천주의 화상과 편경(片鏡, 성인 메달)이 들어 있었습니다[34]. 홍교만과 홍익만, 충주의 이기연이 부친의 제삿날만 되면 제사를 지내지 않으려고 가출하였습니다[10]. 이존창은 홍낙민이 속량시켜 준 종의 아들이었고, 그가 살았던 여사울은 야소동(耶蘇洞) 즉 ‘예수골’이란 의미였고, 당시에는 ‘여수골’로 읽었습니다[8]. 이존창이 1787년 예산현감 신사원에게 체포되어 천안으로 압송되어 그곳 감옥에 갇혔을 때, 이기양의 아우이자 안정복의 손주사위인 이기성이 천안의 감옥까지 찾아와 이존창에게 큰절을 올렸습니다[5]. 홍낙민이 집안 노비의 자식인 이존창의 딸을 자신의 외종질 조아무개의 아들과 혼인시켰습니다[5]. 또한 제사와 관련된 문제가 출제된 감제(柑製)에서 이승훈과 정약용이 나란히 백지 답안을 제출했습니다[11]. ‘하느님의 종’ 이명호(이명불)가 천주교를 편하게 강습하려고 별도로 집을 사서 가수헌(嘉樹軒)이라 짓고 황사영과 홍백영 등과 교류하는 등, 소문이 들끓자 경기관찰사인 부친 이익운이 아들을 경기감영으로 소환했는데 그날 갑작스럽게 죽었습니다[35]. 또한 초기 교회의 조직과 운영에 대한 한층 구체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어서 초기 교회사의 내용을 풍부하게 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이 책은 관련 자료의 편집과 정리를 통해 초기 교회사의 큰 흐름을 통시적으로 살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과제가 있다면 첫째, 하성래 교수님이 「《눌암기략》의 저자 및 내용 소고」에7) 이재기의 족보에 『눌암기략』을 지칭하기가 곤란한 『訥菴遺稿』라는 기록이 있다고 하였고, 정민 교수님도 해제에서 시문(詩文)을 모은 문집인 『訥菴遺稿』가 발굴되어 저자에 대해 더 자세히 알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날이 빨리 오기를 기대해 봅니다.

 

또한 홍이섭 교수님이 소개한 대로 “『松潭遺稿』제3책……(「아들 강준흠을 향한 비방에 대해 해명하는 글」(家兒浚欽卞謗錄, 8장 후면에서 17장 전면)……이와 함께 강세정의 「남천록」(南遷錄, 유고 제2책)과 「서사록」(筮仕錄 제3책)의 기록은 반 가톨릭측의 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움직이고 있었던 가를 짐작케 하는 것으로 『(송담)유록』 「변방록」을 보는데 대조 이용할 귀중한 기록이 될 것이다.”라고8) 하였습니다. 이 두 책의 기록도 밝혀 주신다면 당시 교회사가 풍부해 지리라 기대해 봅니다.

 

둘째, 『눌암기략』·『송담유록』도 당시 개인 저술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저자가 인식하고 있는 시각에서 여러 사실들을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다른 자료들, 즉 당시 여러 상소문과 남인이 아닌 노론계나 소론계의 기록을 통하여 그 내용을 보완하거나 비교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입니다. 

 

오늘 이 두 권의 역주본은 교회사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과 초기 한국교회사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료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할 것입니다. 이러한 중요한 책을 역주하신 정민 교수님과 이 책을 펴내신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에 다시 한번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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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진천, 「눌암기략」, 『부산교회사연구』 38~42, 부산교회사연구소, 2003~2004.

 

2) 『가톨릭신문』, 2021년 11월 14일자, 9면.

 

3) 차기진, 「눌암기략」, 『교회와 역사』 194,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하성래, 「《눌암기략》의 저자 및 내용 소고」, 『교회와 역사』 280, 한국교회사연구소, 1998.

 

4) 홍이섭, 「벽위편 찬집자 이기경의 전기 자료」, 『최현배 선생 환갑 기념 논문집』, 1954(『홍이섭전집』3, 연세대학교출판부, 1994); 홍이섭, 「한국 기독교 소사」, 『백낙준 박사 환갑 기념 논문집』, 1955(『홍이섭전집』 3, 연세대학교출판부, 1994); 홍이섭, 「한국 가톨릭사의 조기적 자료에 대하여」, 『가톨릭 청년』, 1962년 11월호(『홍이섭전집』 3, 연세대학교출판부, 1994).

 

5) [3] 이승훈에 대해서 “조선관에 머물 적에 자주 천주당을 왕래하여 날마다 머물러 자고 돌아왔다고 한다. 그 당시 다른 사신을 수행했던 막료의 비장이 해준 말이다. 사서 중에 이전에”라고 기록하였다. 이승훈과 정약용이 “감제(柑製)에서 임금이 내린 제목에 제사에 대한 주장이 있자, 백지를 내고 시험을 보지 않았는데, 제사는 마귀가 먹는다는 이유로 제사가 무익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강이원이 전해준 이야기다.”[11] “충청도의 사적은……자복하지 않고 장을 맞다가 죽는 자가 있고, 다짐장을 바치고 풀려나는 자도 있었다. 내가 회덕 관아에 있을 때 들었던 내용이다.”[26]

 

6) 홍이섭, 「한국 가톨릭사의 조기적(早期的) 자료에 대해서」, 『가톨릭청년』, 1962년 11월호, 75쪽.

 

7) 하성래, 「《눌암기략》의 저자 및 내용 소고」, 『교회와 역사』 280, 한국교회사연구소, 1998년 9월호, 10쪽.

 

8) 홍이섭, 「한국 가톨릭사의 조기적(早期的) 자료에 대해서」, 『홍이섭전집』 3, 연세대학교출판부, 1994, 76쪽.

 

*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가 주최한 ‘역주 『눌암기략』, 『송담유록』 출판 기념회’가 2022년 11월 4일 서소문 성지 역사 박물관에서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서평을 발표하였다.

 

[교회사 연구 제61집, 2022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여진천(수원 가톨릭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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