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일 (수)
(백) 부활 제5주간 수요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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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순교자들의 이야기3: 순교자 남 요셉과 딸 마리아, 사위 이 안드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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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9-26 ㅣ No.2131

[순교자들의 이야기] (3) 순교자 남 요셉과 딸 마리아, 사위 이 안드레아

 

 

제천시 송학면 장곡리의 중심이 되는 번자리에 살던 남 요셉(61세)은 아내 정 프락세덱스와 함께 체포되어 끌려갔고, 아들 남영록은 그 처가(妻家)가 있는 경기도(파주시) 교하(交河) 강정언(正言) 집으로 피신하였다가 체포되었다. 남 요셉의 딸 마리아는 이 프란치스코의 조카인 이 안드레아와 결혼하였다. 안드레아(24세)는 어려서부터 어진 부모의 훈계를 받아 그 뜻이 천주교의 도에 정(定)함으로 공부를 힘쓰매 밤으로 낮을 이었다. 총명이 비상하여 한 번 본 것은 모두 기억하고 평상시에 말과 외모와 행동이 평화스러웠으며 인애와 겸양이 비범하였다. 만일 의리에 어긋나는 것을 보면 반드시 정색하고 엄하게 책망하였다.

 

체포되어 충청감영의 옥에 갇혔을 때, 어린 동생에게 편지를 보내 “나는 이에 너의 형 노릇을 할 날이 없으니, 어린 조카를 [아들이라] 데리고 안심지본(安心之本)하여 살라”고 하였고, 서울로 압송되었다. 남 마리아(29세)는 높은 행실과 깊은 절개와 지조를 배웠고, 온순하고 온화함이 외양에 나타났다. 시부모에게 효도를 다하면서도 삼가고 조심함이 어른의 뜻에 미흡함이 있을까 두려워하였다. 노복의 수고를 대신함이 많았으므로 그들이 그 충성을 감동하여 분발케 하였다. 포졸에게 잡힐 때 어린 딸을 업고 옥에 갇혔는데, 찾아온 종에게 “아기를 네게 맡기니, 그 살고 죽음을 네가 알아서 하라. 나는 생각하지 않겠노라”고 부탁하였다. 종이 눈물을 흘리며 아이를 받아간 후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때 이 프란치스코의 조카 며느리 권 마리아도 같이 서울로 갔다.

 

이 안드레아의 모친 유 마리아는 성품이 강직하고 총명하였다. 역대 왕들과 재상, 훌륭한 장수를 의논함이 박학한 선비라도 그녀보다 뛰어날 이가 드물었다. 매사에 민첩하여 존엄하고 고상하므로 능히 그 의리를 억제치 못하고 위엄이 가히 그 굳셈을 굽히지 못하였으며, 언변 또한 당해 낼 자가 없었다. 잘못한 이를 꾸짖고 선한 길로 깨우쳐 타이름에 진심으로 기뻐하고 따르지 않는 이가 없었다. 밥을 빌어먹는 굶주린 이가 있으면 병중이라도 억지로 일어나서 대접했고, 헐벗은 이의 누추한 옷을 벗겨 종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빨아 입혔다. 한 번은 맏아들이 깊은 물에 빠졌다는 소식을 아이들로부터 전해 들었는데도, 마침 하던 기도를 태연하게 다 마친 후에 성모께 기도하였다. 아들이 두 손으로 두 다리를 껴 마주잡고 물 위에 떴는데, 마치 평지에 앉은 모양이었다. 그의 삼촌이 건져내니 숨쉬는 기운이 없었기에 엎어 놓았는데, 조금 긴 시간이 지난 후 다시 살아났다. 또 한 번은 집에 화재가 크게 일어나자, 다른 물건은 돌아보지 아니하고 우선적으로 성물을 구해냈다. 남편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날마다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쳤다. 그런데 남편이 3달 만에 집으로 돌아왔는데, 남편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십자가의 길을 다 마친 후에야 “내 들은 말이 있기에 세상에서 다시 상면을 못할 줄로 알았더니 어떻게 하여 돌아왔느뇨?”라고 물었다. 이에 “염려 말라. 울산부사 조연승과 친하므로 가만히 밤중에 풀어주었다.”라고 하였다. 남편이 병으로 선종한 후, 그녀(46세)는 아들 이 안드레아와 며느리 남 마리아와 함께 체포하러 온 포교를 따라 충주에서 문초를 받고 서울로 압송되어 올라갔다.

 

[2022년 9월 25일(다해) 연중 제26주일(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원주주보 들빛 3면, 여진천 폰시아노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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