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9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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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발칸: 세르비아를 위한 변명 - 세르비아의 빛나는 한때를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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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3-18 ㅣ No.1447

[발칸의 빛과 그림자 속으로] 세르비아를 위한 변명


세르비아의 ‘빛나는 한때’를 생각하며



- 세르비아 제3의 도시인 니시는 313년 밀라노칙령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락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고향이다. 한적한 강가에, 밀비우스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고 전해지는 라바룸(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그리스 문자 ΧΡΙΣΤΟΣ의 첫 두 글자인 Χ와 Ρ를 겹쳐놓은 문양)과 “이 표시로 이기리라(In hoc signo vinces).”라는 문장이 그를 기념하고 있다.


갓 떠오른 태양이 멀리 안개를 드리우고 있는 옛 동방의 평원을 지나고 있었다. 누군가는 가슴 깊이 사랑했을 땅. 또 누군가에게는 슬픔이고 고통이었을 땅. 그 낯선 곳을 지날 때 더는 ‘조국’의 상황이 개인을 어떤 운명으로 끌고가거나 족쇄가 되지는 않기를 바랐다.

세르비아인들이 수백 년의 오스만제국 통치를 겪으면서도 민족적 정체성을 잃지 않았던 것은 전통과 문화의 수호자 역할을 한 정교회와 1389년 6월 28일 코소보 전투에서 이어진 전설 덕분이었다고 전해진다. 결전 전날, 오스만제국의 술탄 무라드 1세에 맞설 선봉장이었던 라자르에게 구약의 예언자 엘리야가 나타나 물었다.

- ‘왕의 도시’ 크랄레보에는 가톨릭교회가 단 한 곳 있다. 미카엘 천사에게 봉헌된 이 성당은 부서지고 낡고 망가진 상태였다.


“땅 위의 왕국을 원한다면 내일은 승리하겠지만 언젠가는 멸망할 것이고, 천상의 왕국을 원한다면 패배하고 모두 죽더라도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다. 무엇을 원하는가?” 라자르는 천상의 왕국을 택했고, 결국 모두 장렬히 전사했다. 이로써 세르비아인들은 천상의 민족이라는 자의식을 갖게 되었고, 코소보는 민족의 성지가 되었다.

1878년 오스만제국이 발칸을 떠났을 때, 그들의 소망은 가장 찬란했던 네마냐 왕조(1166-1371년)를 잇는 세르비아인의 국가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들의 바람과는 달리 1908년 합스부르크제국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합병하자, 그들은 세르비아주의로 무장한 지하조직을 키우기 시작했고, 결국 1914년 사라예보 라틴다리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총성을 울렸다.

1945년 요시프 티토(1892-1980년)는 남슬라브 민족의 ‘형제애와 일치’를 지향하며 ‘유고슬라비아연방’을 출범시켰다. 하지만 티토가 죽은 후 세르비아의 지도자가 된 밀로셰비치는 그 꿈을 산산조각냈다. ‘오직 세르비아만’을 외치던 그는 1989년 코소보 전투 600주년을 맞아 찾은 코소보 벌판에서 ‘세르비아 민족주의 혁명의 정점’이라고 평가되는 선동적인 연설로 세르비아인들을 자극했다.


- 베드로 성당이 있는 스타리 라스 지역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소포차니 수도원 등 오래된 건축물들이 모여있다.



결국 1991년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독립을 선언하자, 유고전쟁이 시작되었다. 세르비아는 유고연방의 이름으로 이들과 전쟁을 치렀다. 1995년까지 계속된 유고전쟁의 다른 이름은 인종청소, 대량학살, 절멸 등이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세르비아에 대해 좋지 않은 선입견이 있었다. 하지만 알아갈수록 발칸 유럽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 가해자였던 과거를 안은 채 살아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불시에 불어닥친 쓰나미에 속수무책으로 휩쓸렸다. 누구랄 것도 없이 ‘악의 평범성’이 적나라하게 발현되고만 불행이었다. 그때 과연 세르비아만이 악의 축이었던가?


주유소 하나, 카페 하나, 교회 하나가 보이는 마을들을 지나 ‘왕의 도시’ 크랄레보에 닿았다. 사바(Sabas, 1174-1237년) 성인의 이콘이 벽에 걸린 호텔에서 화장실에 들른 후, 도시의 유일한 가톨릭성당으로 향했다. 베오그라드 교구에 속한 성 미카엘 성당은 모두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성당은 부서지고 낡고 망가진 상태였다. 2012년에도 크랄레보에는 진도 5.5의 지진이 발생했다.


- 베드로 성당 안에는 훼손되고 모진 풍파에 닳고 박해받은 성인들과 천사들과 우리의 어머니가 계셨다. 너무도 닳아서 텅 빈 듯한 돔은 만물의 지배자 판토크라토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다.

 

 

하지만 가톨릭 신자가 극히 소수이다 보니 돌보는 손길도 적을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성전의 아름다움이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부식된 벽과 붕괴를 막으려고 설치한 철 구조물들과 거기 매달린 철 지난 꼬마전구들이었다. 조악한 조화가 놓인 성상과 언제적 초인지도 알기 어려울 만큼 오래된 부활초가 거기 있었다. 여기저기서 한숨이 새나왔다.

그러나 그곳엔 프란치스코 성인이 다미아노 성당에서 만났던 주님의 목소리가 있었다. 그가 포르티운쿨라에서 느꼈던 안온한 평화가 도리어 거기 있었다. 순결하고 뜨거운 첫 마음이 있었다. 가장 비천한 곳에 아기로 태어났던 예수님을 생각했다. 박해와 죽음의 위험 속에서 고백한 초기 순교자들의 믿음도 생각했다. 부서지고 손봐야 할 것 투성이지만 부족할 게 무엇이랴 싶어졌다. 도리어 넘치는 재물로 지어내는 호화로운 성전에 과연 주님이 계시는 지를 물어야 하는 세상에서, 말도 안 되게 열악한 그곳 신자들이 그 가난과 불편함으로부터 더 풍요로운 은총의 나날을 체험하기를 기도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무너져 가는 주님의 집을 고쳐야 할 의무가 있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를 생각했다.

 

떠나기 전에, 묘비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스타리 라스의 베드로 성당 대신 다른 곳을 가지 않겠느냐고 세르비아 관광청 직원이 조언했다는 얘길 들었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찾아본 그 ‘아무것도 없는’ 풍경에 이미 매혹되어 있었다. 볼 것은 많지 않지만 볼 수 없는 많은 것들이 가득할 거라고 생각했다. 들리지 않는 음악들이 넘쳐흐를 것이고, 겹겹이 쌓인 시간이 분명히 한마디쯤은 아는 척도 해줄 거라고 믿었다. 바로 그 아무것도 없다는 베드로 성당에 닿았다.

‘코소보 전투’를 생각하며 끝없는 평원을 연상했는데, 뜻밖에 완만한 돌계단을 한참 올라간 언덕 꼭대기에 성당이 있었다. 세르비아 사람들이 9세기경부터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를 기념하던 곳이었다. 거기에 상처 입고 훼손되고 모진 풍파에 닳고 박해받은 성인과 천사들과 만물의 지배자, 우리의 판토크라토르와 우리의 어머니가 계셨다.

언덕 저편으로 붉은 지붕 집들이 들어앉은 산 자들의 마을을 내려다보며 코소보 전투를 생각했다. 이제 황폐해진 들판은 기억하고 있을까? 그날, 죽을 것 같았을 그들의 격정을. 그들이 타오르는 불길 속에 자신을 등신불로 봉헌하려면, 삶을 걸만한 대의가 있어야 했다. 그것은 애국이었고, 신앙을 수호하기 위한 순교 행위였다. 그날은 세르비아 사람들에게 유다인들의 마사다 응전과도 같았다.

세르비아 사람들의 민족성에는 코소보 평원을 내달리던 말갈기가 여전히 각인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때, 화양연화(花樣年華), 그들 공동체의 눈부신 한때가, 도리어 그들을 가두는 슬프고 고독한 오늘을 만들지 않기를 바랐다. 스타리라스의 언덕에 서서.

* 이선미 로사 - 가톨릭교리신학원 성서영성학과를 수료했다. 여러 차례 해외성지를 순례하다보니 가까운 성지와 우리 전통에도 눈이 뜨여 조금씩 관심을 기울이는 중이다.

[경향잡지, 2015년 3월호, 글 · 사진 이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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