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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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죽음의 이해와 종말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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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06 ㅣ No.281

죽음의 이해와 종말신앙*

 

 

고도로 발달된 현대 과학문명 세계를 사는 우리에게도 죽음과 그 이후의 세계는 여전히 불가사의하게 다가온다. 죽음과 그 이후 세계에 관한 교리의 내용은 무엇이며, 우리 현대인들에게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죽음과 그 이후의 각 개인과 인류, 그리고 세계의 처지는 종말에 관한 교리(Doctrina de Novissimis)에서 취급된다. 여기서 그리스도교 종말교리의 내용을 간략히 일별 하기로 한다. 우선 전통적이고 현대적인 종말신앙의 특성과 성격을 먼저 일별하고, 죽음을 위시한 종말 사건에 대해 오늘날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밝히고자 한다.

 

 

I. 종말신앙의 동향

 

1960년대를 기점으로 종말신앙의 내용은 그 이전 시기에 비해 현격한 성격 변화를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먼저 소위 전통적이고 현대적인 종말신앙의 일반적 특성을 대략 파악하고자 한다.

 

1. 전통적 종말교리는 개별 인간과 전 인류 및 세상의 종말의 처지를 나누어 취급한다. 개인의 종말과 관련하여 죽음, 사심판(私審判), 천당(天堂), 지옥(地獄)과 연옥(煉獄)의 실재가 구명되고, 이어 그리스도의 재림(再臨), 육신 부활, 공심판(公審判)과 세상종말의 의미가 밝혀진다.

 

전통적 종말교리는 대략 15세기 경부터 각 개인의 생활과 세계 역사의 종말에 관하여 하느님으로부터 계시된 일종의 사전 정보(事前情報)로 이해되어 왔다. 여기서는 성서와 교회 전통 속에 담긴 종말에 관한 내용들이 개인과 세계 전체에 다가올 실제적인 최종 상태에 대한 사전 예고라는 인상을 주었다. 이를테면 전통 종말교리는 종말사건의 경위와 상태의 본질을 고대의 신화론적 세계관과 중세의 우주론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사변적 또는 성서 진술의 자의적(字義的) 해석으로 밝히고자 시도한 것이다.

 

종말신앙은 이미 초기 교회 안에서 개인화(個人化)의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예수가 지상 생활을 마친 후에 그의 재림(再臨)이 늦추어지게 되면서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은 일차적으로 개인의 미래에로 쏠리게 되었다. 이러한 개인의 구원에 역점을 두는 문제 제기의 지평 속에서 인류 전체와 세계의 궁극 처지에 대한 관심은 자연히 뒤편으로 밀려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관점 하에서 현실 세계 역사는 자체적으로 종말론적 중요성을 거의 지니지 못하였다. 여기서 세계 역사의 의미는 인간 구원을 위한 시험 기간, 즉 윤리-종교적 행위를 통하여 피안세계를 준비하기 위한 기능을 행사하는 데에서만 드러날 뿐이었다. 그래서 현실의 차안세계는 천상으로부터 피안세계가 닥쳐올 종말시기까지만 존속하는 잠정적 공간으로 이해되었다. 천상의 보수(報酬)가 차안의 삶의 결과에 따라 내려진다는 점이 강조되었으나, 현 차안세계는 피안세계와 분리되어 존재하는 자체로 무상한 실재로서 간주되었으며, 차안에서 발생하는 역사 내적인 다양한 사건들도 천상의 피안세계에로 목표 지향성을 직접 지니지 않는 부정적 실재로 이해되었다.

 

또한 전통 종말론은 종말론적 실재를 ‘장소로서의 피안세계’와 연결시켜 파악하고 있다. 종말상태들은 차안세계로부터 장소적으로 분리된 천상세계와 지하세계로서의 피안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처지로 파악되고 있다. 물론 이 장소들의 정확한 위치가 지리적으로 진술되어 있지 않으나 천당(天堂)은 지상세계인 차안세계의 상부 천상세계로, 지옥(地獄)과 연옥(煉獄)은 하부 지하세계로 표상되어 있어서 종말상태가 장소 개념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전통적 종말론 표상에 따른 각 개인과 세계 전체의 종말적 상태는 대략 다음과 같이 묘사될 수 있겠다. 각 인간은 원죄의 형벌인 죽음을 맞는다. 죽음 속에서 불멸하는 영혼이 사멸하는 육신으로부터 분리되어 즉시 심판자이신 하느님 대전에 나아가 심판을 받는다. 하느님은 각 인간이 살아서 차안세계에서 이룩한 행업에 따라 천당 영복이나 지옥 영벌 또는 연옥 단련을 받도록 심판을 내리신다. 지상에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았던 의인들의 영혼은 구원되어 즉시 하느님을 지복직관(至福直觀)하는 복을 중단없이 영원히 누리게 된다. 반면에 대죄 속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영혼은 즉시 지옥에 던져지는 심판을 받아서 지옥 형벌로서 지복직관의 결핍을 뜻하는 고통, 즉 하느님을 뵙지 못하는 실고(失苦)와 함께 물리적으로 가해 오는 고통으로서의 각고(覺苦)를 영원히 당하게 된다. 동방교회와 개신교회와는 달리 가톨릭 교회는 소죄 중에 사망한 사람들의 영혼은 즉시 연옥 단련을 받게 되어서 완전히 정화(淨化)되어 천당에 입장할 수 있을 때까지 실고와 각고를 겪으며, 이 연옥 영혼들은 지상에서 살아있는 신자들의 미사나 기도, 또는 선행 등을 통하여 도움을 받는다.

 

또한 세계와 역사의 종말 시에 우주적 이변이 발생하는 가운데 그리스도가 피안의 천상세계로부터 차안의 현실세계 안으로 들어와 재림하면서 죽었던 사람들이 부활하여 분리되었던 영혼과 육신이 재결합된 처지에서 만인이 재림한 심판자 그리스도로부터 공적(公的)으로 심판을 받게 된다. 이 심판을 통해서 의인들은 영복을 누리고 악인들은 영벌을 당하게 되면서 세계는 목표에 도달하게 되어 완성된다.

 

2. 1960년대 이래 종말사건에 관한 성서 진술들은 미래에 발생할 사건에 대한 사전지식(事前知識)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적 희망(希望)의 비유(比喩)라는 통찰이 널리 확산되고 있으며, 이 희망의 성서적 비유들을 종말사건에 관한 객관적 정보로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이 지배적이다. 

 

그리스도 신앙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인격적 하느님께 대한 희망으로부터 생겨났다. 그래서 오늘날의 종말론은 종말실재를 객관적으로 사물화하여 장소적으로 규정하지 않고 인격적 하느님 자체로 파악하려는 일반적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 즉, 하느님 자신이 인간과 세계가 종말에 이르게 되는 ‘종말사건’으로 파악된 것이다.

 

인격적 하느님 자신이 종말사건으로 이해되면서 현실 차안세계와 미래 피안세계와의 관계가 새롭게 드러난다. 하느님과 그의 나라[天國]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차안세계에 충만하게 나타났다는 것이 그리스도 신앙의 기본 확신이다. 예수 자신이 이 차안세계에 하느님의 현존을 가져왔으며 그 자신이 바로 인격으로서의 하느님의 현존이자 하느님 나라의 구현이었다.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현 차안세계가 종말론적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는 통찰이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러한 통찰은 종말사건을 순전히 미래적인 사건으로만 보지 않고 현재적인 실재로 간주하고 평가하도록 만든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궁극적인 종말사건이 발생하였고, 이 사건은 이 차안세계의 최종 자산으로서 지속적으로 현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에게서 발생한 종말사건이 우리 인간들한테서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나 시작의 형태로 이미 현존한다는 통찰이 지배적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역사적 실재가 하느님의 종말론적 구원행업이 발생하는 ‘장소’로 인지되고 있다. ‘여기서 그리고 지금’ 발생하는 인간의 역사가 바로 종말론적 구원을 결정하는 소인(素因)으로 규정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와 함께 현대 종말론은 개인주의적 협소성으로부터 탈피하여 개인의 운명에 관한 물음도 전체 세계 역사의 구원 전망 속에서 보려고 한다. 즉, 전통 종말론의 물음 이면에는 개인적인 구원, 확실성의 보장, 노력이 자리잡고 있는데 비해 오늘날의 종말론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종말론적으로 규정된 전 세계 역사의 지평에서 개인과 전체 조물의 구원을 보편적으로 정립하려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희망하는 피안적 하느님의 나라는 죽음 뒤에야 비로소 입장하게 되는 사후세계가 아니라, 이미 현세 안에서 현존하는 나라이다. 그런데 이 하느님 나라는 인간에 의해 온전히 건설되지 않는 한 인간에게 피안적 실재로 머문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인간과 세계 전체를 완성시키는 하느님 나라가 선물로 다가오리라고 희망하면서 ‘종말론적 유보’(終末論的留保)의 자세를 견지한다. 그러나 이러한 그리스도교적 희망이 피안적 하느님 나라를 수수방관하면서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헌신적 투신을 통하여 준비하는 완성의 약동적 시작의 성격을 지닌다. 이 희망은 아직 온전히 실현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온 인류가 갈망하는 역사 세계 안에서 자유와 평등, 그리고 평화의 구현을 위한 투신으로서 행동화되어야 한다. 이처럼 피안적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은 차안적 세계 건설과 차안의 희망들을 포함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미래는 희망하는 사람의 행동적 투신 속에서 이미 작용하고 있으며, 역사를 완성된 하느님 나라로 이끈다.

 

 

II. 죽음의 이해

 

죽음의 시간과 장소, 그리고 경위만은 미리 확정되지 않는다 해도 죽음은 인간 누구에게나 닥치는 사건이다.

 

1. 죽음은 단순히 삶의 끝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한가운데 존재하면서 일상생활 속에서 인간 존재에 깊이 파고든다.

 

죽음은 인간의 삶을 에워싸고 있으면서 다양한 형태로 삶 속으로 끊임없이 파고들어 삶을 의문에 처하게 한다. 질병, 고독, 실패, 방치, 이별, 은퇴나 노화, 실직(失職)과 기아, 이 모든 것은 모두 죽음의 표징이나 예고일뿐 아니라, 삶 자체에 실존하는 죽음의 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삶은 생물학적으로나 의학적으로 규정되는 일회적인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발생하는 죽음의 징표들을 조각조각 죽음에로 건네줌으로써 끝난다. 이렇게 인간은 여러 형태의 부분적이고 간접적인 죽음을 통하여 마침내 궁극적인 죽음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죽음이 인식의 직접적 대상은 아니다. 죽음은 직관할 수 없고, 정체를 확인할 수 없는 무(無)의 한 국면이라고 할 수 있다. 체험될 수 있는 것은 삶의 끝으로서의 죽음, 삶의 과정 속에 함께 정립되어 있으면서 삶을 에워싸고 있는 구체적 형체로서의 죽음인 것이다. 

 

“자연적 죽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의 주장은 영혼의 불사불멸성을 믿는 종교적 형이상학적 죽음관을 하나의 환상이라고 비판하며 등장한 죽음 이해이다. 

 

“자연적 죽음”의 주창자들은 죽음 이후의 “내세”를 믿지 않고, 죽음을 현세 삶의 종말이자 단절로 이해하면서 현세의 삶에만 의미를 부여한다. 이들은 조기 사망을 재앙으로 또 비자연적인 것으로 간주하면서 천수(天壽)를 누린 사람의 경우에 죽음을 거부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본다. 이들은 노년기에 맞게 되는 죽음을 “자연적 죽음”이라고 부르면서, 이러한 죽음은 인간을 부자연스럽게 만드는 자연적이고 역사적인 모든 소외로부터의 해방을 통해 쟁취될 수 있다고 본다. 이들에게 있어서의 삶의 충족이란 현실과 차안(此岸) 세계에 한정되며, 이 세계에서 요청되는 것의 충족만을 의미한다. 개별 인간이 인류의 자유 신장에 기여함으로써 인류 역사 속에 계속 살아 있을 수 있기에 인류의 연대 의식 안에서 “불멸한 것”으로 남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죽음은 한꺼번에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미리부터 조금씩 나타나 사람들로 하여금 서서히 쇠퇴하게 하고, 정신적인 황폐기와 망령기를 일으키는 등의 모습으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다. 그리고 실적 위주의 현대 산업 사회는 한 인간이 생물학적인 활력을 유지하여 그의 모든 가능성을 다 발휘할 수 있을 때에만 인간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한 것으로 인정한다. 여기서 노쇠한 사람들과 병자들은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자연히 삭감되며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어 버린다.

 

2. 죽음은 성서 그리스도교 전통 속에서 아담이 범한 죄의 형벌로서 이해되어 왔다. 성서에서 죽음은 아담의 범죄로부터 연유하고(창세 2,17;3,19), 하느님은 애초에 죽음을 만드시지 않은 것으로 증언된다(지혜 1,13). 그러나 원조의 죄로 죽음이 이 세상에 들어왔으며, 이 세상에서 죄악을 범한 인간은 죽음이라는 벌을 받게 된 것으로 나타난다(잠언 11,19; 시편 37.20.36; 73,27; 에제 18,20; 욥 18,5-21). 신약성서에서도 원조 한 사람의 과오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왔다는 상념은 그대로 발견된다(로마 5,12.17; 1고린 15,21; 로마 15.14.22). 여기서 죽음은 현세 삶의 파괴적 실제로 나타난다.

 

그런데 현대인은 죽음이 인간의 진화적 세계 구조에 필연적으로 속해 있음을 알고 있다. 진화적으로 성취해 나가는 세계 속에서 죽음 없는 삶이란 생각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진화적 세계는 상승(上昇)과 자기 초월(自己超越), 이와 상반되는 하강(下降)과 작용장해(作用障害), 두 개의 상반된 과정과 상반된 운동으로 특징지워진다. 이 두가지 운동은 에너지의 상승적 내면화와 이와 불가분적으로 유대되는 외적 에너지의 하강적 소모로 지칭할 수 있다. 

 

인간은 세계와 교류를 맺음으로써 성숙하고 구체적인 면모를 지니게 되며, 다른 한편으로 세계는 인간 안으로 들어와 인간 속에서 내면화하게 된다. 그러나 세계가 인간 속에서 내면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이와 대치되는 역전운동(逆轉運動), 즉 작용장애 운동이 발생하기도 한다. 인간이 성숙할 뿐 아니라 노쇠하며 죽는 것이 그것이다. 인간은 죽음으로써 외적 에너지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죽음으로써 세계의 한 부분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든다고 볼 수 있다. 세계의 한 부분이 우리 인간 안에 승화된 형태로 계속 존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진화 세계 속에서 생성되었다가 소멸하는 유한한 사물의 무상함이 바로 새로운 삶과 새로운 삶의 형태에 전제 조건이 된다. 여기서는 모든 죽음이 “다른 생명을 위해 생물학적으로 자리를 마련해 주는” 사회학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파악된다. 이를테면 한 인간이 점거하고 있었기에 차단되었던 역사의 한 공간을 다른 사람들의 미래를 위해 자연스럽게 비워주는 일이 죽음을 통해서 성취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죽음이 지상에서의 삶을 시간적으로 한정시킨다는 사실 자체를 죄악의 결과로 볼 수 없다. 여기서 죽음은 한정된 인간 생명의 자연적 종말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죽음은 무(無)에로 생명의 해소를 뜻한다기보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현존재의 지양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인간이 현실적으로 죽음을 체험하는 유형 양식은 죄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본래 진화적 세계 안에서 살아가도록 조성된 인간은 “자신의 삶의 행위” 속에서 자신의 자유 역사를 완성 단계까지 지양하였을 것이며 자신의 삶을 완성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실제로 암울한 죽음을 겪는다. 죽음이 공포를 불어넣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인류의 배척과 연관되어 있다. 인간은 삶을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이고 하느님 앞에서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과 책임 있는 삶을 영위하는 대신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2고린 5,15) 위한 것으로 여기며 생활한다. 인간은 자기의 삶을 자기가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은 죽음에 처해지면서 자신이 얼마나 무력하고 오만 불손했으며, 또 얼마나 과신하며 살았는지를 분명히 깨닫게 될 것이다. 그는 세상의 쾌락이나 부, 성공, 권력 등을 소유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소유한다고 생각했지만, 이러한 것이 그를 죽음의 심연으로부터 구원해 주지는 못한다. 이러한 인간에게서 죽음은 의미를 거스르는 삶의 단절로 체험된다. 죽음 속에서 생명의 손실은 무조건 소유하고자 하는 원의로 구성되어 있었던 자기 정체(正體)의 상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자기만을 위하던 자아가 죽음에 대해 공포를 지니게 된다. 죽음은 더 이상 “중립적”이 아니라 지상 생애의 시간적 결말이며, 위험과 공포를 안겨주는 그 무엇으로 체험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죽음은 죄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3. 인간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하느님을 지향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을 하느님께로 양도할 때에만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그렇게 될 때에만 자유롭게 되고, 모든 것을 수락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된다. 어떤 사람이 자신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도상에 있고, 궁극적으로 자신을 완성시키시는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하느님을 지향해서 살고 있는 속에서도 현세 삶을 “체념적으로”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 힘겹게 느껴진다. 이 자아 포기의 체험은 죽음 속에서 절정에 이르는 것이다.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탁하고 있는 사람에게조차 죽음 속에서는 모든 것, 즉 자신마저도 탈취된다. 죽음 속에서 인간은 자유 주체로서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일탈(逸脫)되기에 이른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을 자신이 무력하게 되는 절정으로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한 사람이 자신의 이러한 무력감을 절망하지 않고 최후까지 희망하면서 수락할 수 있는 것은, 그에게 선물로 다가온 하느님의 은총 때문이다.

 

이러한 죽음을 맞는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보다는 자신에게서 이탈하는 자세를, 자신을 내세우고 높이기보다는 자신을 감추고 낮추는 자세를 보여준다. 한 인간이 자기의 생명을 하느님으로부터의 선물과 과제로 받아들이고 하느님 안에서 이웃 인간들에게 봉사하며 살아가면, 죽음을 희망의 장으로, 하느님의 영광 안으로 이전하는 복된 것으로 느낄 수 있다. 즉, 이러한 사람은 이미 “죽음을 벗어나 생명의 나라에”(2요한 3,14) 들어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죽음의 체험은 신앙과 희망과 사랑의 결실이며, 특히 절대적 어둠이요, 절망이며, 삶의 단절로 체험되는 죽음이 최종적인 것이 아니라, 희망의 결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죽음의 참된 극복은 우리 삶으로부터 죽음을 제거함으로써 생기지 않고,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III. 죽음 이후의 종말사건 이해

 

죽음 이후에 발생하는 종말사건의 실상을 여섯 개의 소주제, 즉 사심판, 연옥, 천당과 지옥, 최후의 심판, 예수의 부활, 그리스도인의 부활 등으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1. 사심판

 

인간이 죽음을 맞게 되면 영혼이 육신으로부터 분리되어 즉시 심판자이신 하느님 대전에 나아가 살아서 행한 행실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DS 857-858). 이 사심판(私審判) 교리는 4세기 이래 형성되었지만 구체적 내용이 반드시 믿어야 하는 신앙의 진리, 곧 교의(敎義)로서 교회 당국에 의해 공식적으로 선포된 바는 없다.

 

하느님과의 만남은 살아있는 동안에도 거의 모든 인간에게 우선적으로 두려움을 자아내는 사건으로 발생한다. “살아 계신 하느님 심판의 손에 빠져들어가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히브 10,31). 하지만 죽음 이후에 하느님에 의해 내려지는 심판이 현실 세계의 재판법정에서 이루어지는 심판과 같은 양식으로 진행되리라고 이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하느님 앞에서 이루어지는 심판이 재판관 앞으로 피고인이 나아가 자신이 범한 죄에 대한 선고를 받는 양식으로 진행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러한 심판표상은 무한하신 하느님을 유한한 모습을 지닌 하나의 대상으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현세 재판법정에서의 판관처럼 자신의 모습을 인간들 앞에 드러내시고 그들이 자신들이 살아서 행한 크고 작은 선행이나 악행을 낱낱이 셈하여서 천당 상급이나 연옥 단련, 또는 지옥 영벌의 선고를 내리시는 분이 아니다. 이에 대해 프란즈 카프카는 그의 작품 ?심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심판 속에서 그대는 속고 있다.”

 

인간은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순간 순간 타인이나 공동체 앞에서 이러저러한 결단을 내려야 하는 요청을 만난다. 이 때에 올바르지 않게 처신하게 되면 심판이 이루어진다. 인간은 구체적으로 만나게 되는 남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의 관계에서 그릇 처신하여 자신을 스스로 소외시킴으로써 자기 스스로 심판에로 나아간다. 즉, 인간에게는 양심이 있어서 윤리 도덕적으로 선한 일을 하지 않고 악한 일을 행하면 제3자가 이를 알거나 모르거나 상관없이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기 자신과 남, 그리고 공동체에 떳떳하지 못하게 되는 처지가 곧 심판이다. 하지만 양심의 요청에 따라 처신하는 사람은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은’ 입장이 되고 심판을 받을 필요도 없게 된다. 이웃과 공동체에 대한 요청을 사랑으로 성실하게 수행한 사람은 하느님과 일치함으로써 심판을 받지 않게 된다(요한 3,14; 5,24).

 

인간은 죽음 속에서 하느님과 최종적으로 해후하게 된다. 인간은 진리요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을 궁극적으로 만나는 순간에 자신의 나약성, 무능성, 부당성과 죄악성을 정확히 직시하게 된다. 인간은 하느님의 지고한 거룩함과 지순한 사랑 앞에서 자신의 비속함과 사랑의 결핍을 철저하게 의식하게 된다. 이러한 하느님과의 만남이 인간에게는 심판으로 체험된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심판이란 바로 나 자신의 진리(眞理) 자체가 있는 그대로 감추임 없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심판은 ‘삶의 파노라마’와 비슷하게 파악될 수 있다. 죽음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삶의 전모를, 즉 행위, 궐함, 사랑과 증오, 진리와 허위의 실상을 파노라마처럼 대하게 된다. 여기서 인간은 자신이 누구였으며, 또 어떠한 존재가 되었는가를 적나라하게 대면하게 된다. 여기서 인간을 심판하는 판관은 하느님이라기 보다 그분의 진리와 사랑 앞에 선 인간 자신이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진리와 사랑에 비추어 자신의 참 모습을 보게 되면서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알게 되어 스스로 심판하게 된다는 말이다. 죄의 용서를 받고 선행도 하면서 믿고 희망하며 사는 신앙인이라도 하느님의 거룩함과 사랑 앞에서 스스로를 단죄해야 하는 부끄러운 존재로 서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죽음 이후에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받게 되는 심판양식일 것이다.

 

 

2. 연옥(통공. 전대사)

 

연옥(煉獄) 교리는 그리스도교계 안에서 이를 부인하는 개신교회와는 달리 가톨릭 교회의 고유한 신앙이다(리옹 공의회 DS 856-858; 피렌체 공의회 DS 1304-06; 트리엔트 공의회 DS 1820). 이 교리에 따르면 한 사람이 죽을 때에 이미 용서는 받았지만 보속해야 할 벌인 잠벌(暫罰)이 아직 남아있는 경우에 그의 영혼은 천당에 입장할 수 있을 때까지 연옥에서 즉시 지복직관(至福直觀)의 결핍을 뜻하는 고통인 실고(失苦)와 물리적으로 가해지는 고통인 각고(覺苦)를 겪으며, 지상에서 살아있는 신자들의 미사나 기도, 또는 선행 등을 통하여 도움을 받게 된다. 

 

성경에서 명시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으나, 일찌기 교부들에 의해 긍정되어 온 연옥은 전통적으로 하나의 장소와 상관하여 일정한 기간 동안 지속되는 상태로 묘사되었다. 그래서 ‘연옥’이라는 처소에서 미처 보속하지 못한 죄의 잠벌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지고, 마치 병원 대기실에서 머물러 있던 환자처럼 하나씩 천사들에 의해 이끌려 이곳의 벌을 벗어나게 되는 것으로 묘사되어 왔다. 하지만, 연옥은 이러한 의미에서 반지옥(半地獄)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 세상에 전적으로 악하기만한 사람이 없듯이, 완전히 선하기만 한 사람도 없다. 최선의 사람, ‘성자’(聖者)라도 이 세상에서는 완전한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 인간이 살고 있는 동안에 범한 죄악과 그 결과는 회개한 이후에도 간단히 없어지지 않는다. 인간은 누구나 살아있는 동안 결함과 과실의 상태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실현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자신의 탓으로 말미암아 아직 본연의 참 모습에 이르지 못한 인간이 - 사실은 우리 모두가 - 진리와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 앞에 설 때에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나약함, 부당함과 죄악성을 뼈저리게 깨닫게 된다. 

 

인간이 이미 현세에서도 경험하게 되는 두려움 속에서의 하느님 체험이 죽음 속에서 비로소 제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 인간이 죽은 후에 진실과 사랑 자체로서 거룩하신 하느님 앞에 서게 될 때에, 자신의 거룩하지 못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될 것이다. 연옥은 바로 완성되지도 않고 사랑 속에서 아직 성숙되지도 못한 인간이 진리와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룩하기에 부당함을 인지하면서, ‘저는 저주받아 마땅할 죄인’이라고 절규하며 부끄럽고 고통스러운 가운데,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정화(淨化)의 과정이다. 우리는 죽음 속에서의 하느님과의 이 만남을 우리를 태워 삼켜버리고 정화시키는 화염(火焰)과 같으리라고도 예감할 수 있다. 여기서 하느님 자신이 연옥이라는 것, 그분과의 만남이 연옥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죽음 속에서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개방하고,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더욱 강렬하게 전달하시는 가운데 정화가 이루어지면서 하느님과의 온전한 일치가 실현될 것이다. 

 

연옥의 정화 과정이 얼마동안 계속될 것인가 하는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이 과정은 현세의 시간 밖에서 진행된다. 우리로서는 이 과정이 일어나는 시간이나 공간을 파악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사망한 사람을 ‘고인’(故人)으로 애도하는 장례와 조상(弔喪) 기간이 있다. 이 기간 중에 우리는 죽은 이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한다. 은총 중에 사망한 경우라 하더라도 살아있는 동안 범했을지 모르는 많은 악행의 과실이 남아있으리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죽은 이를 위한 기도는 ‘통공’(通功) 신앙의 표현이다. 이른바 ‘성인들의 통공’ 교리는 거룩한 사람들 간의 친교를 뜻하는데, 한 사람이 행한 공로가 그와 연대를 맺고 있는 모든 이에게 죽음을 넘어서까지 유익이 될 수 있음을 가르친다. 죽은 이를 위한 기도는 죽은 사람도 교회의 같은 지체들로서 살아있는 신자들과의 연대성으로부터 떨어져나가지 않는다는 희망을 드러낸다. “그리스도의 평화 속에 고이 잠들어 있는 형제들과 여정에 있는 형제들 사이의 결합이 죽음으로써 중단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영신적 보화의 교류로 말미암아 더욱 강해진다는 것이 교회의 신앙이다.”(교회헌장, 49항)

 

죽은 이를 위한 기도와 같은 또 다른 사랑의 형태가 있을 수 있으니, 바로 죽은 이를 위한 지향으로 행해지는 희생이나 선행들이다. 스스로는 아무 것도 이룩할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죽은 이를 위해 대신 아직 살아있는 다른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 선행을 하거나, 성지를 순례하면서 희생적으로 신심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대속행위(代贖行爲)가 그것이다. 여기서 바로 ‘대사’(大赦)에 관해 말할 수 있다. 가톨릭 교회 안에서 오해받을 만하고 중세기에 자주 남용되기도 한 전대사(全大赦) 교리에 따르면 교회가 명시적으로 정한 특정 신심행위나 선행을 어느 신자가 행할 경우에 연옥 영혼들의 잠벌이 모두 사해져서 그 영혼들이 연옥을 벗어나게 된다. 이러한 대사 신앙이 교회가 하느님 대신에 죽은 사람들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한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이 교리는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어버이다운 가없는 사랑을 체험하면서 죽은 이들에 대한 사랑과 연대성의 공표로서 행해진 교회와 신자들의 기도와 희생, 그리고 선행을 통해서 죽은 이들이 구원될 것이라고 어린이처럼 지니는 확고한 희망의 표현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대사 신앙은 어린이가 자신에 대한 부모님의 깊고 큰 사랑을 늘 체험하면서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불쌍한 처지에서 고통 당하는 친구를 위해서 희생이나 선행을 한 뒤에 그를 대신하여 청원하는 바를 부모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시리라고 철썩같이 믿고 희망하는 자세에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조상 기간이 끝난 뒤에도 살아있는 신자들이 죽은 이들을 위해서 계속 기도하고 나름대로 선행이나 희생을 하는 통공행위는 죽은 이들의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아름답게 드러내준다.

 

 

3. 천당과 지옥

 

교리에 따르면 은총의 처지에서 사망한 의인의 영혼은 구원되어 즉시 천당(天堂)에서 어떤 피조물을 거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하느님을 직관하는 지복을 영원히 누리게 되는데(베네딕도 12세 DS 1000-1001; 요한 22세 DS 990) 이에 비해서 대죄(大罪) 속에서 사망한 사람의 영혼은 즉시 지옥(地獄) 형벌을 받아 실고와 함께 각고를 영원히 당하게 된다(베네딕도 12세 DS 1002; 76; 409-411; 801; 858; 1351; 1575).

 

천당은 이 세상 바깥에 위치하여 하느님을 지복직관하게 되는 피안적 장소로 오랜 세월동안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천당이 하느님께서 착하게 살아가는 영혼들을 위해 미리 마련해 놓으신 특정 장소와 연관되어 파악되지는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무한하신 분이어서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제약을 받지 않으신다. 천당은 이 세상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감추어 계신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 그분의 무한한 사랑의 영역을 뜻한다. 천당은 인간 삶의 완성된 충만으로서 다름 아닌 사랑과 친교의 완성이 실현된 처지이다. 1950년 11월 1일에 성모몽소승천과 관련하여 “마리아께서 지상의 생애를 마치신 뒤 영혼과 육신이 함께 천상의 영광에로 들어올림을 받았다”고 믿을 교리로서의 선포가 이루어진 바 있다. 여기서도 특정 장소로서의 천당은 거론되지 않고 ‘천상 영광’의 처지로만 표현되어 있다.

 

인간은 이기적 자애심으로부터 벗어나 남을 순수하게 사랑하고 공동체의 선익을 위해서 기여할 때에 자기 충만에 이른다. 천당은 바로 몰아적인 사랑의 완성으로 모든 다른 존재들과 완전히 일치된 친교의 처지를 뜻한다. 인간이 자신을 전적으로 하느님께 의탁하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할 때에, 하느님은 그에게 당신 자신을 그대로 선사함으로써 천당의 지극한 행복이 형성된다. 그래서 천당지복은 한 개인이 이웃 형제 자매들과 세상사들을 온전히 무시하고 하느님만을 직접 바라보며 그분과 맺게 되는 은밀한 ‘사적 친교’ 안에서가 아니라, 하느님과 모든 이웃, 그리고 세상사들과 사랑의 친교 속에서 일치하는 개방된 ‘공동체’ 안에서 성립된다. ‘장미의 비가 쏟아지게 되는 세상이 나의 천국이다’라고 말한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도 같은 취지의 생각을 드러낸다.

 

예수 친히 천국을 여러 사람들이 함께 즐기는 잔치로 비유하거나(마태 22,1-10; 루가 14,12-24), 겨자씨로 비유하셨다(루가 18,18-19). 누군가가 사랑을 향한 겨자씨 같은 작은 선택을 내리는 가운데 천당은 이미 현세에서 시작된다. 한 사람이 생명을 선물이나 과제로서 받아들이고 모든 이웃을 사랑하면서 살아가고 죽음을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벗어남’으로서 수락할 때에, 죽음마저 사랑 속에서 극복된다(I요한 3,14). 현실 속에서 이러한 사랑의 친교를 통해 체험되는 용서와 평화, 그리고 행복 등은 천당의 징표들이다. 현실적으로도 체험 가능한 만물의 유대 내지 공동체성은 천당의 본질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천당은 인간이 자신 안에서 꿈틀거리는 이기심과 외부에서 널름거리는 유혹을 이겨내고 남을 위하고 세상의 평화를 위해 결단하는 가운데 현세에서 이미 모습을 드러내면서 완성을 향하여 성장해 나아간다.

 

지옥은 죄인들을 벌하기 위해 하느님에 의해 마련된 무시무시한 형벌 처소로서 파악되어 왔다. 이곳에서 처참한 모습의 지옥 영혼들이 흉악한 몰골을 한 악신들에게 둘러싸여 가혹하게 고문당하고 뜨거운 불가마 속에서 처절하게 고통 당한다는 식으로 지옥형벌이 대체적으로 설명되어 왔다. 하지만 이미 3,4세기 때부터 교부시대 이래 지옥의 ‘영원한 형벌’이 유한한 인간에 의해 범해지는 죄에 대한 형벌로서 하느님의 사랑과 모순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과 함께 특정 처소로서의 지옥에서 가혹한 형벌에 시달리는 영혼들을 보면서 역시 특정 처소로서의 천당에서 의인들이 하느님과 함께 누리는 행복이 과연 사랑의 정신과는 어떻게 부합되는지 하는 의문도 근세 이래 제기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인간들이 구원되기를 바라시는 분이어서 죄인들을 상대로 화풀이하기 위해 가공할 형벌 처소를 미리 마련하시지 않았다. 지옥은 당신의 뜻을 거슬러 죄악을 범하는 자들에게 보복하기 위해 그분에 의하여 미리 준비된 특정 장소가 아니라, 인간들이 세계 안에서 현실적으로 자행하는 범죄행위 안에 내재하는 결과가 죽음과 함께 궁극적으로 굳어진 처지를 의미한다. 지옥은 하느님과 이웃, 그리고 공동체를 거슬러 자유로운 인격적 결단을 통하여 범하는 악행에 포함되는 결과로서 현세에서 이미 발생하여 죽음과 함께 영원히 고착되는 가공할 실재로 이해될 것이다. 인간이 하느님과 이웃, 그리고 공동체로부터 스스로 이탈함으로써 결국은 자신의 삶을 철저히 망가뜨리고 마는 처지가 지옥인 것이다. 

 

지옥의 실상을 현실적 체험을 빌려 비유적으로 묘사할 수 있다. 세계 안에서 한없는 증오와 질투, 가공할 살인과 폭력, 그리고 잔혹한 수탈과 억압이 인간들 사이에서 이루어질 때에, 한 인간이 이웃을 물리치고 사랑의 공동체를 배척할 때에, 예컨대 아우슈비치나 소말리아, 르완다와 같은 상황 속에서 지옥은 ‘생지옥’으로서 현실 세계 안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프랑스 철학자이자 작가인 사르트르(Jean-Paul Sartre)의 희곡 ?닫힌 문?(Huis clos)에서 실감나게 묘사되고 있는 바와 같이, 각기 과실을 지닌 채, 함께 얽매여 있고, 그래서 서로 예속되어 있는 악순환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지옥, 그것은 바로 남들이다”. 문과 창문없이 빛없는 공간 속에서 서로 부대끼면서 남에게 고통을 가하고 동시에 남으로부터 고통을 당하게 되는 수인(囚人)들의 처지에서 죽음 이후의 궁극적 형태의 지옥이 어떠할지가 어렴풋하게나마 드러난다.

 

지옥 영벌이란 인간이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과의 사랑 안에서 유대를 맺지 못하고 스스로 자신 안에 유폐되어 ‘제2의 죽음’(묵시 20,14)에 처해 있게 됨을 뜻한다. 그리고 어둠과 절치통곡, 뜨거운 화염 등 무시무시한 말들로 표현되는 지옥형벌과 관련된 성서 내용들은 지옥에 대한 객관적 사실보도로서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거부하고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이기주의의 노예가 된 생활자세에 대한 하느님의 분노를 뜻하는 경고이면서 회개를 촉구하는 호소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자기 형제더러 미친놈이라고 하는 사람은 불붙는 지옥에 던져질 것이다”(마태 5,22). 이러한 지옥 형벌에 대한 예수의 경고는 인간들이 생명에로 인도하는 길을 마다하고 악을 택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파멸시킬 수 있음을 깨닫고 회개함으로 구원에 이르기를 바라는 절박한 호소의 성격을 지닌다. 영원한 파멸 가능성에 대한 엄숙한 경고는 한 사람이라도 비참한 처지로부터 구해내려는 결연한 그리스도의 구원의지로도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다음의 비유는 천당과 지옥의 실상을 어느 정도 근사하게 표현한다. 갖가지 맛있는 음식이 준비된 연회에 많은 사람들이 초청된다. 그런데 참석자들은 식사용으로 모두 길이가 일 미터나 되는 젓가락과 숟가락을 제공받는다. 한 그룹의 참석자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젓가락과 숟가락으로 음식을 담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가지 않고 다른 이웃 참석자들의 입에 서로 넣어 준다. 그래서 각자 다른 참석자들로부터 음식을 선사 받으며 서로 감사하면서 기쁘게 식사를 즐긴다. 그런데 다른 그룹의 참석자들은 음식을 담아 제 각기 자기 입으로 넣으려 하나 젓가락과 숟가락이 너무 길어서 음식을 제대로 먹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손을 크게 벌리면서 이웃의 몸과 서로 부딪히게 되어 시비가 오가고 비난하며 다투는 아비규환의 혼란이 벌어진다. 이 비유는 똑같은 처지에서 남을 생각하면서 배려하는 사랑이 활성화되는 처지가 천당이고, 이웃의 존재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행복만을 추구하는 자애심에 사로잡혀 모든 이웃과의 관계가 단절된 가운데 삶이 실패하게 되는 처지가 지옥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4. 영육의 분리 문제

 

교리에 따르면 “죽음이라는 ‘떠남’(필립 1,23)에서 영혼은 육신과 분리된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380면). 그리고 제5차 라테란 공의회(1512-1517)는 각 인간이 지니는 영혼이 불사불멸하다고 공식적으로 가르친 바 있다.

 

하지만 교회의 초기 단계에서는 영혼만이 아니라 전인적 존재(全人的 存在)가 즉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로 나아가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여 지복을 누리리라는 확신이 자리하고 있었다(필립 1,21 이하; 2고린 5,1 이하). 처음에 임박했다고 믿었던 그리스도의 재림(再臨)과 ‘세상 최후의 날’의 도래가 지연되면서 단순 소박한 부활신앙이 현실적으로 제기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죽음이 닥치면서 육신이 부패하고 파멸되는 양상에 당면하여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현실성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된 것이다. 이제 사람이 죽고 나서 세상 마지막 날까지 기다리지 않고 즉시 그리스도를 통하여 지복(至福)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적절하게 제시할 수 있는 근거가 요청된 것이다.

 

이러한 문제가 제기되는 상황 속에서 교회는 영혼불멸을 주장하는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그리스적 입장, 사람이 죽은 뒤에 불멸하는 영혼이 즉시 신의 세계로 귀환한다는 희망표상을 수용하였다. 그리하여 동방교회나 서방교회를 막론하고 교회 안에서 육신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이원론적 인간관이 지배하게 되면서 초대교회의 하느님 나라 기대사상이 후퇴하고 육신부활을 통한 전인(全人)의 구원보다는 육신으로부터 분리되는 영혼만이 구원된다는 상념이 자리잡게 된 것이다. 물론, 교회가 말하는 영혼의 불사불멸이란, 영혼이라는 ‘본성’(本性) 자체가 플라톤을 위시한 고대 그리스인들이 주장하듯이 불멸의 능력을 소유하는 실체임을 말한 것이 아니라 불사불멸의 하느님으로부터 선사받은 처지임을 뜻하고 있다. 

 

그런데 고중세 시기의 토마스 아퀴나스 이래 교회는 인간의 영혼이 본질적으로 육신과 관계를 맺는 속에서 실존한다는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 비엔나 공의회(1311-1312)는 정신적 영혼이 자신과 분리된 하나의 다른 원리를 중재로 해서 육신과 결합되는 것이 아니라, 영혼 자신이 직접 육신에게로 향하는 육신의 형상(形相)임을 강조하면서 인간존재의 단일성을 옹호하였다. 여기서는 하나의 독자적 실체로서의 영혼의 ‘자연적 불멸성’이 거론될 수 없다. 영혼이 질료적 원리인 육신으로부터 분리된다는 것은 영혼의 ‘본성’(本性)에 상반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육신과 온전히 일치되어 있지 않는 영혼은 일종의 ‘불구존재’이고 인간의 일부이고, 전인적 인간일 수 없다는 통찰이 생겨나게 된다.

 

육신과 영혼은 분리된 두 개의 존재자(存在者)가 아니고 하나의 인간존재를 구성하는 두 개의 구별되는 존재원리이기 때문에 죽음은 육신만이 아니라 영혼마저 관통한다. 죽음에 의해 육신뿐만 아니라 영혼 역시 깊은 영향을 받는다. 즉 영혼은 이 죽음을 함께 겪게 된다. 하느님은 당신이 창조한 모든 것을 아무것도 파멸시키지 않는다는 신앙의 진술을 고수할 때, 죽음 속에서 육신이 전적으로 없어진다는 생각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육신의 소멸이란 말은 그가 존속하는 질료적인 부분이 완전히 파멸됨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영혼이 죽음을 함께 겪는다는 말은 영혼이 무(無)에로 가라앉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신과 영혼이라는 두 개의 ‘부분적 실체’가 본질적으로 일치한다는 상념에 입각해서 전체 인간은 죽음 속에서 육신과 영혼이 함께 죽는다고 말할 수 있다. 육신부활이 이루어지기 전까지의 상태는 누구에게나 무엇인가가 결핍되어 있는 상태일 것이다. 영혼이 육신과 분리되어서는 ‘본성을 거스르는 상태’에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전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부터의 무엇인가’로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현세적 인간과 부활한 인간의 동일성 내지 지속성을 보존하려는 취지에서 인간들이 현세적 육신 안에서 부활하리라고까지 가르쳤다(톨레도 공의회(675)와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51)). 지난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 역시 육신과 영혼을 서로 구별되면서도 분리될 수 없는 인간의 생명원리로 규정하고 영혼과 함께 육신 역시 구원되고 완성된다는 사실을 재확인하였다. “육체와 영혼으로 단일체를 이루고 있는 인간은 그 육체적 성격으로도 이미 물질세계의 요소들을 한 몸에 집약하고 있으므로 물질세계는 인간을 통해서 그 정점에 도달하며 인간을 통해서 그 자유로운 찬미를 창조주께 읊어드리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그 육체적 생명을 천시(賤視)해서는 안될 뿐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께 창조된 그 육체가 마지막 날에 부활할 것이므로 좋고 영예로운 것으로 알아야 하겠다”(사목헌장, 14항).

 

 

5. 최후의 심판

 

최후의 심판과 함께 인류와 세계는 궁극적 목표에 도달하고 완성에 이르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 최후의 날에 재림하여 산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을 심판하리라는 공심판(公審判) 교리는 사도 신경과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비롯한 초기 교회의 신경들 안에서 한결같이 고백되어 왔다.

 

공심판 교리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으로 재림하시고 모든 인류가 다시 부활하는 가운데 최후 심판이 이루어진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독생성자로서 심판권한을 행사하고 인간과 인간적 행동의 최후 심판에 척도가 된다고 규정된다. 만인의 심판자인 분이 굶주리고 목마르며, 낯설고 헐벗은 사람들과 아픈 사람들, 그리고 수인들과 자신을 동일시한 것이다(마태 25, 31-46; 요한 3,18-19; 5,22-27; 1요한 3,14).

 

그런데 심판으로서의 죽음을 통한 하느님과의 만남은 일회적이면서도 영원히 지속된다. 그래서 최후의 심판으로서의 공심판은 개인의 죽음과 함께 즉시 이루어지는 사심판과 분리되어 별도로 발생하는 이회적 심판으로서가 아니라 사심판의 실상이 만천하에 공공연히 드러나는 사건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공심판이란 사심판을 통하여 확정된 각 사람의 궁극적 처지가 만천하에 그대로 확연하게 공개되는 사건을 말한다. 이러한 관점 속에서 사심판과 최후 심판이 시공간적으로 분리된 별개의 두 사건들이 아니라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는 사건임을 알 수 있다.

 

최후의 심판은 예수의 부활과 함께 발생하여 진행되는 종말역사의 과정이 궁극적으로 완성된다는 것을 시사하는 표상으로 이해될 것이다. 이는 그분의 부활과 함께 ‘이미’ 시작된 세계종말의 완성이 ‘아직’ 실현되지 않고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실현될 수 없으나 하느님으로부터 선물로 다가오는 목표임을 나타내는 표상이다. 그런데 우리는 개인의 죽음 속에서 발생하는 사심판과 최후의 날에 발생하는 공심판 사이의 시간 간격을 가늠할 수 없다. 그리고 세계 최후 순간에 무엇이 발생할지도 우리로서는 모르는 일이다.

 

예언서나 복음서와 묵시록 등의 성경은 세상 최후의 날에 즈음하여 민족들 간에 전쟁이 벌어지고 기근과 지진이 일어난 뒤에 해가 어두워지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가운데 세상은 뇌성벽력과 화염에 휩싸여 파멸되는 가공할 재난이 밀어닥칠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마태 24,3-25,46; 마르 13,3-37; 루가 17,26-36; 21,7-33; 1데살 4,16-17; 2데살 1,7-8; 묵시 14,14-15; 19,11-12; 이사 13,10; 34,4; 다니 7,13). 예언서와 복음서, 그리고 묵시록에 묘사되어 있는 무시무시한 재앙 장면들은 세상 종말의 과정을 객관적으로 정확히 서술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 과정 안에서 어떠한 일들이 발생하든지 간에 최후에 발생하는 사건은 인간과 세상을 사랑하신 나머지 자신을 희생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한 하느님의 다가오심이다. 최후의 심판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종말단계에 접어든 하느님의 구원행업이 완성되면서 목적에 도달하게 됨을 극적 양식으로 증언하고 있다. 죽음 속에서 도달하게 되는 개인의 완성도 우주적 역사과정의 완성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구원행업에 함께 속한다는 점만은 신앙적으로 확실하다. 요컨대, 최후의 심판에 관한 교리는 전체적으로 하느님께서 아직 ‘구원의 날에’(2고린 6,2)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시는 호소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6. 예수의 부활, 그리스도인의 부활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히 삶을 믿나이다.” 사도신경(使徒信經)이 고백하는 부활신앙은 그리스도 신앙 전체의 핵심에 속한다. 그렇다고 교회의 부활신앙 고백의 진술양식이 모두 일치하지는 않는다. 사도신경이 ‘육신부활’을 말하고 있는데 비해서, 대축일의 미사에서 고백되는 대신경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죽은 이들의 부활을 기다리나이다”라고 정식화하고 있다.

 

죽은 사람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도 부활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 신앙 자체가 헛된 것이 된다(1고린 15,13 참조). 그런데 그리스도 신앙의 기초로서의 예수부활은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단정할 수 있는 역사 내적 사실(史實)로서가 아니라, 현세적 삶에서부터 형언할 수 없는 새로운 삶으로 나아간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심으로써 제자들이 체험한 바는 전적으로 ‘새로운 사건’이었다. 실상 ‘부활’이라는 단어 자체가 하나의 비유이다. 이 단어는 잠자던 사람이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기상’(起床)이라는 말에서 취해진 것으로, 여기서 부활이란 현실적 삶으로의 복귀가 아니라, 새로운 차원에서의 삶의 시작, 새 기원(Aon)의 여명(黎明)을 뜻한다. 이 새로운 삶의 실재는 현실 세계의 통상 체험에서 벗어나 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라자로처럼 죽기 전의 상태로 소생했다가 얼마 후에 다시 죽어야 하는 유한한 삶으로 되살아난 것이 아니라, 현세의 인간조건을 벗어나 인간의 말로써는 적절히 표현할 수 없는 새로운 삶의 형태로 살아나신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그에게는 이미 실현된 종말론적 완성이 다른 모든 인간들에게서는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을 통해서 실현되기에 이른다. 육신부활 또는 죽은 이들의 부활 교리는 인간이 단순히 정신적 존재만이 아니라, 영혼-육신으로 이루어진 전인간이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삶에로 불림을 받고 있음을 일깨워준다. 그런데 부활하게 되는 육신은 땅에 묻혀 아주 부패하여 소멸할 분자들로서 다시 재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육신부활을 인간의 잔해인 뼈와 근육 등이 세상 마지막 날에 하느님으로부터 새롭게 활력을 받아 다시 소생하여 천국 또는 지옥에서 존재하고 있는 영혼과 재결합하는 것으로 파악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현대인들은 자신의 지상생애에서도, 몇 년 후에는 현재 자신이 지닌 육신의 단 하나의 원자도 그대로 남지 않고 다른 원자로 대치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육신부활이란 인간을 구성하는 부분으로서의 신체나 시체가 무덤을 열고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뜻하지 않고, 육신-영혼적 단일 존재인 인간이 죽음 속에서 하느님으로부터 구원되어 전인으로서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리게 됨을 뜻한다.

 

성경은 비유적 표현으로 부활하는 사람들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이 때에 발생하는 것은 영적 육신의 탄생이다. 바울로 사도가 고린토 전서 15장에서 상세히 언급하는 바가 이 실상을 뜻하고 있다. “썩을 몸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약한 자로 묻히지만 강한 자로 다시 살아납니다. 육체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1고린 15,42-43; 35-58 참조). 새로운 육신이 전과 같으면서도 다른 점이 있음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전과 같은 분이면서도 아주 다른 차원의 존재인 것과 같다. 사도들은 처음에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나중에야 스승이심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완성될 세상 종말시에 정확히 무엇이 발생할지 모르고 있다. 다만 구원실재인 은총이 부활 속에서의 죽음의 극복을 이미 씨앗과 같이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은총 속에서 사망하는 의인에게는 죽음 속에서 이미 육신의 부활이 일어난다고 볼 수 있다. 죽음 속에서 인간이 은총의 힘으로 궁극적 처지로 현양되면, 인간의 육신도 현양되어 육신부활이 발생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죽음 속에서의 육신부활이 이루어졌듯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의인도 같은 운명의 가능성을 희망할 수 있는 것이다(필립 1,23; 2고린 5,1-5). 그래서 오늘날에는 죽음 속에서 영혼이 육신으로부터 분리되어 하느님께로 나아가고 세상 마지막 날에 육신이 영혼을 뒤따라 영생에 참여한다는 표상 대신에 죽음 속에서 이미 육신의 부활, 전체 인간의 부활이 발생한다는 견해가 많은 신학자들과 ?화란 교리서? 처럼 공식적이라 할 만한 교회문헌에서 피력되기까지 한다.

 

부활신앙은 정신-육신적 차원을 지닌 하나요 전체인 인간이 자신의 완성 목표에 이르며, 전인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전체 세계도 완성에 이른다는 것을 아울러 포함한다. 이처럼 부활신앙은 개인주의적 구원희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만인과 온 세계의 구원을 희망하는 연대적 신앙의 성격을 지닌다. 한 인간이 죽고 난 후, 하느님에 의하여 부활하게 되는 것은 그가 현세에서 맺은 모든 관계이다. 부활을 통해서 그가 세계 안에서 맺었던 모든 관계가 소멸되지 않고 궁극적이 된다. 하느님에 의하여 부활하게 된 인간의 육신 자체가 바로 세계 자체이기도 하기 때문에 부활을 통해서 죽음 속에서의 인격체와 세계 자체가 부분적으로 완성상태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최후 심판날에 발생하는 부활은 하느님의 사랑 속에서 개인과 공동체, 그리고 세계가 상호 일치의 유대를 맺는 가운데 충만에 이르는 과정으로 이해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부활을 통한 인류와 세상의 완성이란 ‘차안세계로부터 피안세계에로의 귀환’이 아니라 ‘인류와 세상이 질적으로 새로운 충만에로 도착함’을 의미할 것이다.

 

* 이 글은 “죽음이 마지막 말은 아니다”라는 제명으로 「생활성서」 135(1994.11), 75-85면에 발표된 글을 기초로 하여 같은 제명으로 서강대 개설 “목요강좌”에서 행한 강연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심상태 신부 / 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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