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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일곱 번째 한국인 성직자의 민족과 교회에 대한 고뇌를 들려줌: 한기근 바오로 신부 서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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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7-21 ㅣ No.1584

[서평] 일곱 번째 한국인 성직자의 민족과 교회에 대한 고뇌를 들려줌


- 『한기근 바오로 신부 서한집』(한국교회사연구소, 2022) -

 

 

1. 한국인 성직자에 대한 자료집을 다시 만남

 

평자에게는 잊을 수 없는 경험이 있다. 대전에 자리를 잡으면서 두 가지 바람이 있었다. 평신도 교리교사를 하는 것과 대전교구사를 체계적으로 공부해 보는 것이었다. 두 번째 목적은 우연히 만난 책들과 관련된 것이었다. 모두 3권의 대전교구사 자료집으로 나온 프랑스 선교사와 한국인 성직자의 서한집이 바로 그것이다. 이때 한국천주교회사 연구에 서한집이 얼마나 중요한 사료인가를, 그리고 천주교회사가 사료의 보고인가를 알게 되었다. 그들의 서한을 통해서 그 어떠한 사료들보다도 서술하는 사람의 목소리와 현장감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선교사들의 서한집이 번역되어 나올 때마다 얼른 구해서 읽어보고, 무언가 느낀 점을 말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이 평자의 한국천주교회사 연구에는 선교사들의 서한집이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당시 아쉬운 점이 한 가지 있었다. 한국인 성직자들의 서한집과 관련된 것이었다. 이전에 읽었던 김대건 신부나 최양업 신부의 서한집과 달리 대전교구사 자료집에서 한국인 성직자들이 서술하고 있는 내용이란 너무 간단하고 빈약했기 때문이다. 초기 한국 천주교회사나, 일제강점기 프랑스 선교사의 그것과도 크게 달랐다. 지금도 한국인 성직자의 서한들이 왜 그럴까를 곰곰이 생각해보고 있다. 일제의 지배를 받는 한국인이었기에, 한국인 성직자라고 하더라도 편지 서술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던 것이 아닐까 하고 막연하게 헤아려 보았다.

 

그러나 그러한 한계 속에서라도 또 다른 서술 방법을 통해서 한국인 성직자로서 하고 싶은 말들을 더 많이 남겨줄 수는 없었을까 싶었다. 한편으로 다른 한국인 성직자들의 경우는 어떠할까 궁금해하면서 한국인 성직자들의 서한집이 독립된 자료집의 형태로 계속해서 나오기를 기대해 보기도 하였다. 아무리 그것이 커다란 의미를 갖더라도 서양인 선교사의 서한집에만 관심을 가지는 현상은 결코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차 작업을 통해서 서양인 선교사의 서한집과 한국인 성직자의 그것에서 무엇이 공통적이며, 무엇에서 차이가 나고, 그것이 어디에서 기인하는가를 보다 구체적으로 밝혀내어야 한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그러한 생각을 하던 차에 최근 들어와서 한국교회사연구소가 한국인 성직자의 서한집을 연이어서 펴내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반가운 일로 받아들여진다. 이제 한국천주교회사에서 한국인 성직자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고민하며, 어떻게 살아왔고, 어떠한 사목을 전개했는가를 조금은 더 자세히 살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강도영 마르코 신부 서한집』(2016), 그리고 『정규하 아우구스티노 신부 서한집』(2019)이 나왔다. 그리고 이번에 『한기근 바오로 신부 서한집』(2022)이 새롭게 나온 것이다. 이렇게 지속적으로 발간되고 있는 한국인 성직자의 서한집은 앞으로 서양인 선교사만이 아니라, 한국인 성직자들이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어떠한 역사적 위치를 차지하며 활동했는가를 구체적으로 밝힐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아주 고무적인 현상으로 생각한다. 이는 그동안 단편적으로 한국인 성직자의 서한 자료를 발굴하고 소개해준 한국교회사연구소가 한국인 성직자들에 대해서도 체계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까닭에 한국교회사연구소가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더욱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주기를 당부하고 싶다.

 

이번에 나온 『한기근 바오로 신부 서한집』에는 서한만을 담고 있지 않다. 여행기와 관련된 내용이 함께 실려 있기 때문이다. 서한들이 책의 절반에 가까운 분량을 차지하고 있지만, 『경향잡지』에 실렸던 한기근 신부(1868~1939)의 「로마 여행일기」가 따로 그에 못지않은 분량으로 실려 있다. 여행기는 서한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서한에서도 그 중요 내용을 압축된 형태로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한에서도 여행의 과정을 기록했지만, 그것을 분리해서 확대시킨 것이다. 이에 책의 제목을 서한집으로 규정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한기근 바오로 신부 서한집』은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펴낸 이전의 한국인 성직자의 서한집과도 일정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매우 간략하기는 하지만, 한기근 신부가 구한말 이래 일제강점기를 살면서 나라를 잃어가고, 나라를 잃은 한국인에 대해서, 그리고 그러한 상황 속에서 신앙생활을 해야만 했던 한국인 신자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과 관련해서이다. 서한집이나 「로마 여행일기』에서 이러한 사실을 쉽게 확인해볼 수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7번째 한국인 성직자인 한기근 신부의 서한과 여행기를 통해서 민족과 교회의 현실에 대해서 그가 어떻게 고민했는가를 우리에게 맛보고 느낄 수가 있게 해주고 있다. 1903년 1월 28일 자 서한에서 “관속들이 자주 편지를 열어 검열하기 때문에 외국어로 편지를 쓰고 있다.”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듯이, 한기근 신부는 구한말이나, 일제강점기라는 매우 어려운 상황 속에서 편지나 여행기를 통해서 자신의 의도를 드러내고자 애를 썼던 것이다.

 

『한기근 바오로 신부 서한집』에 대해서는 책에 실려 있는 윤선자의 「해제」와 「한기근 신부의 ‘로마 여행일기’」라는 논문을 통해서 성경 번역과 성지순례라는 말로 상징되는 『한기근 바오로 신부 서한집』의 내용을 대체적으로 파악해볼 수 있다. 때문에 이 서평에서는 그러한 내용을 되풀이하거나, 간략하게 줄여서 소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이들 언급에서 놓쳐진 것으로 여겨지는 또 다른 작은 부분들을 중심으로 『한기근 바오로 신부 서한집』을 새롭게 읽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서 서평자뿐만 아니라, 교회의 구성원 모두가 7번째의 한국인 성직자가 전해주고자 하는 민족과 교회에 대한 그의 관심과 애정을 다시 들을 수 있을 것이다.

 

 

2. 일본의 침략으로 달라질 교회의 상황을 우려함

 

『한기근 바오로 신부 서한집』을 살펴볼 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부분이 있다. 「연보」와 관련된 것이다. 1888년 4월에 한기근 신부가 무너진 담장을 넘어 대궐로 들어갔다가 3개월간 옥고를 겪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이 없어서 그가 왜 그와 같은 행동을 했는가에 대해서 알 수 없다. 당시 그는 1887년 3월 이후 여주 부엉골에서 용산으로 이전한 예수성심신학교에서 공부를 하던 신학생이었다. ‘신학생이 무엇 때문에 이런 움직임을 보였을까’라는 물음이 어쩔 수 없이 던져지게 된다. 아마도 당시 매우 불안하게 전개되던 조선의 사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거기에 대해서 무능하게 대처하는 조선 왕실에 대한 그의 불만이 반영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는 한기근 신부가 급격하게 변화되었던 조선의 현실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한국인 성직자였음을 알려준다.

 

『한기근 바오로 신부 서한집』에 실려 있는 서한집을 통해서도 이를 엿볼 수 있다. 우선 구한말에 일어난 ‘해서 교안’과, 특히 ‘황주 교안’과 관련된 내용이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이때 교안을 지방관이나, 지방 세력(향반 토호와 특권 상인층)들이 중앙과 결탁하거나, 독자적으로 천주교회를 박해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교안을 그와 같이 단순하게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들이 천주교회가 서양세력과 연결되는 것에 대해 반발하여 교안을 일으켰다고는 하지만, 결국 이들에 의하여 고통을 당하거나 피해를 입는 천주교 신자들 역시 모두 한국인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한기근 신부가 서한을 통해서 교안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또 다른 이유를 살펴볼 수가 있지 않을까 싶다. 지방관이나 지방세력들이 조선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현실에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서 교회나 신자들을 괴롭히고 있다는 사실과 관련해서이다. 그가 보기에 교안으로 일어나는 대립과 갈등 역시 조선 사회 내부의 분열상을 나타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그는 교안이 일본에게 조선 침략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는 또 다른 기회를 주는 것으로 생각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교안이 발생했던 시기와 일본의 조선 침략이 더욱 현실화되는 시기가 서로 겹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기근 신부가 일본의 조선에 대한 침략 과정에 대해서 매우 예민하게 관찰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살필 수가 있지 않을까 한다. 기존의 연구에서도 그가 서한에서 한국의 역사에 관해서도 서술하고 있으며, 일본 제국주의의 침투와 대한제국의 멸망을 지켜보고서 그 편린을 적어놓았다고 이해하고 있다. 그는 화덕 시에 일본인들이 항구를 열어 이미 많은 집을 지었다고 하며, 일본인들의 조선 진출을 알려주고 있다. 철도가 놓이기 시작한 사실도 함께 말하고 있다. 이에 신자들이건 아니건 간에 한국인들이 철도와 기타 부역을 피해서 다른 지방으로 이주하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때문에 한기근 신부는 일본의 한국진출과 관련해서 러일전쟁의 결과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러일전쟁이 끝나고서 조선에 평화가 오기를 바랐지만, 한국인들의 상황이 점점 더 나빠지는 것 같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사목하고 있던 황해도에까지 한국 정부에 대한 나쁜 소식을 연일 듣게 된다고 한다. 평양과 황주에서 모든 한국 군인들이 동시에 해산되고, 요새가 파괴되어 백성들 사이에 큰 실망과 소요가 일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그는 ‘하느님께서 가련한 조국을 도와주시옵소서’라고 기도를 드리면서, 일제의 침략에 더욱 무력해지는 조선의 상황을 주시하였다.

 

이때 그는 일본의 이러한 움직임에 대한 한국인의 저항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화폐개혁에 대해서 한국 상인들이 단합하여 일본 화폐를 쓰지 않는다든지, 한국인들끼리는 일본 지폐로 거래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전해주고 있다. 이는 한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소극적인 것으로 보고 있는 듯하다. 그가 의병에 대해서 계속 언급하고 있지만,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에서는 의병의 활동을 찾아볼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데에서도 살필 수가 있다.

 

무엇보다 한기근 신부는 이제 일본의 조선 강점에 의해서 달라질 한국 천주교회의 모습에 우려를 드러내고 있어 주목된다. 1908년에 이르러서 그는 사리원의 신자들이 돈을 잃어버린 후 아직도 일본인들로부터 괴롭힘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손성재 신부로부터 들었다고 전해준다. 일본인들이 드러나지 않게 간접적으로 그렇게 한다고 말한다. 이리저리로 자주 신자들을 호출해서 여러 가지 심문을 해대면서 이미 잃어버린 돈을 요구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일본 순사들이 사리원공소 강당을 불법으로 점유하면서 일어난 일을 말한다. 뮈텔 주교가 프랑스 공사인 플랑시를 통해 강당을 반환받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일본 순사들이 이를 원통하게 여겨서 강당에 들인 비용을 신자들에게 물어내도록 강제로 돈을 뜯어 내었던 것이다.

 

이와 함께 한기근 신부는 보두네 신부가 일본인들로부터 심하게 폭행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그는 서양인 신부에 대한 일본인의 폭행 사건에 대해서 정말 마음이 아팠다고 하면서 일이 잘 해결되었는지를 궁금해하였다. 전라도의 보두네 신부가 신자들에게 일진회원으로 구성된 자위단에 가입하지 말라고 하자, 자위단이 일본 군인들을 동원해서 신자들을 체포하여 감옥에 가둔 일이었다. 이에 보두네 신부가 진안의 일본군 부대에 찾아갔다가 일본 군인들과 일진회 회원들로부터 폭행을 당한 것이다. 이러한 사례를 통해서 한기근 신부는 일본이나, 일본과 결탁한 친일단체인 일진회의 한국천주교회에 대한 탄압이 새롭게 나타나고 있음을 주목하였다. 특히 일진회의 활동에 대해서 계속적으로 언급하였다. 아직까지 일진회원으로 조직된 자위단들이 황해도에서는 소란을 일으키지 않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그는 제발 항상 그러했으면 좋겠다고 바란다.

 

한기근 신부가 우려한 것처럼 일제의 조선 강점이 이루어지자, 그는 1910년 9월의 편지에서는 “요즈음 나라를 잃은 슬픔이 너무 큽니다.”라는 소회를 밝히고 있다. 매우 짧고 간단한 내용이지만, 그가 매우 염려했던 조선의 현실에 대한 고뇌를 읽을 수가 있게 해준다. 이는 일제의 조선 지배가 한국천주교회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지를 그에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기 때문이다. 앞으로 다가올 교회의 현실을 고민했던 그는 더이상 서한에서 일본의 조선 지배에 대한 다른 내용을 언급하지 않는다.

 

 

3. 한국인 성직자로서 사목 방향을 깊이 모색함

 

구한말에 있었던 교안을 비롯해서 일제 강점에 이르기까지의 상황 전개는 천주교 신자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한때 증가하였던 신자들의 숫자가 줄어들었으며, 이들의 신앙심 또한 약해졌다. 이들이 급격한 사회변동으로 매우 불안해하고 근심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는 한기근 신부에게 한국인 성직자로서 한국인 신자들을 위해서 어떻게 사목을 해야 할지를 깊이 고민하게 만들었다. 이에 그는 한국인 성직자로서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이때 한기근 신부는 여러 차례의 서한을 통해서 한국인 성직자와 신자들의 관계에 대하여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어 주목된다. 황해도의 검수 신자들이 뮈텔 주교에게 손성재 신부의 부적절한 행동을 문제 삼아서 본당에서 내보내 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다. 한기근 신부는 신자들의 손성재 신부에 대한 미움, 분노, 특히 그동안 쌓여온 질투심을 그 원인으로 파악하였다. 신자들이 비신자들에게도 영향을 주는 성직자의 행동으로 교회가 불명예스럽게 될까를 우려했다는 사실까지 언급하였다. 이에 한기근 신부는 손성재 신부에게 형제적 충고를 하였으며, 그가 말하는 데나 처신하는 데 조금은 지혜가 부족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가 앞으로는 매우 조심할 것 같다고 하면서, 손성재 신부와 본당의 신자들이 다시 화해하기를 바랐다. 그의 이러한 관심은 한국인 성직자와 한국인 신자들이 더 이상 불필요하게 대립하고 갈등을 일으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한기근 신부가 시복식에 참여한 이후 순례한 프랑스의 성 비안네 신부의 성당을 방문한 내용에서도 잘 알 수가 있다. 성 비안네 신부의 본당 사목을 상세하게 언급하면서 본당에서 사목하는 성직자의 모습을 자세히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마음을 제일 감동케 하는 바는 그 성인이 쓰시던 물건이라. 헤어지고 검소한 수단, 쓰시던 갓, 다른 의복, 숟갈, 그릇 그런 모든 것은 다 신빈지덕과 고신극기의 덕을 드러내더라. 성인이 잡수시던 음식은 매일 감자 삶은 것 몇 개와 냉수뿐이었다 하니, 성인들은 이와 같이 가난과 극기로 사셨거늘 우리는 어떻게 호의호식을 탐하는고. 할 수 없이 당하는 가난과 주림을 감수할지로다. 지금 본당 신부가 모든 참배자들에게 성인의 행적을 대략 진술할 때에 내가 제일 마음에 감동되는 바는 성 비안네 신부가 고해성사를 주시던 사정이라.” 이때 그는 본당 신부로서 성 비안네 신부가 고해성사를 통해서 신자들의 마음을 어떻게 들어주고 움직였는가를 알려주면서, 그것이 지극히 어렵고 놀라운 일이라고 말하였다.

 

이는 한기근 신부가 같은 한국인 성직자들이 본당에서 신자들과 어떠한 관계를 맺으면서, 어떻게 사목해야 하는가를 말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가 한국인 성직자들의 동향이나, 유대에 대해서도 각별한 정성을 보여주었던 사실에서도 엿볼 수가 있을 것이다. 자신들이 한국인 성직자로서 올바르게 잘 살아가야 혹독한 시절을 경험하고 있는 한국인 신자들도 교회 안에서 신앙을 통해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그를 포함한 한국인 성직자들이 신자들에게 조금의 오해나 비판을 받지 않도록 제대로 사목을 하자는 다짐과 당부로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점과 관련해서 한기근 신부의 한국 천주교회사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는 79위 순교자 시복 과정에 깊이 참여하였던 것이다. 황주 본당에 있을 때에도 계속되었다. 마침내 1925년 7월에 이르러 로마에서 첫 시복식이 거행되었을 때 그는 한국인 신자와 한국인 성직자를 대표해서 유일하게 한국에서 참석한 사람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한국인 순교자들, 그 가운데에서도 첫 번째 한국인 성직자인 김대건 신부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언급하였다. 이를 통해서 김대건 신부의 삶과 신앙을 계속적으로 새기면서 한국인 성직자로서 자신들이 지금과 같이 어려운 시절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고민하였을 것이다. 때문에 그는 시복식이 열린 로마에서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가 소개될 때마다, 비록 지금은 조선이 멸망되어 일제의 지배를 받고 있지만, 세계 천주교회 안에서라도 한국과, 한국의 천주교회가 잊혀지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만큼 신앙의 선조들이 훌륭한 모범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한기근 바오로 신부 서한집』에서 구체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또 다른 사목활동과 관련해서도 그러하다. 너무나 유명한, 그리고 잊을 수 없는 그의 성경 번역이 바로 그것이다. 1971년에 『공동번역 신약성서』가 새롭게 나올 때까지 그가 번역한 신약성경이 유일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성경 번역에 대해서도 「해제」에서 자세한 설명을 찾아볼 수가 있다. 그보다 그가 왜 이토록 신약성경의 번역에 열심히 온 정성을 다해서 매달렸는가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누구를 위해서 왜’라는 질문과 관련된 것이다.

 

이를 한국천주교회를 위해서라고 간단하게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개신교를 의식한 측면도 찾아볼 수 있다고 지적할 수 있다. 그가 신약성경의 번역과정에서 개신교의 성경 번역을 참조했다고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한국인 신자들이 성경을 쉽게 만날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한 그의 사목 방향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 한국인 신자들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하고, 한국인 성직자인 자신이 신자들을 위해서 무엇을 우선으로 해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고민한 데에서 나온 결실로 생각된다. 사실 당시까지 천주교회에서 제대로 된 성경 번역이나 간행이 이루어지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인 신자들이 성경을 만남으로써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라는 참혹한 현실 속에서 큰 위로와 힘을 얻어서 새로운 삶의 방향을 모색해볼 수 있도록 이끌어주기 위한 데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싶다. 한기근 신부가 바랐듯이 한국인 신자들이 튼튼한 신앙공동체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사용하는 언어로써 번역된 성경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그가 나라를 잃어버린 상태에서 성경 번역을 통해서 한국어를 보존하는 데 기여한 바는 실로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한기근 신부의 성경 번역이 한국인 신자들을 위한 그의 사목 방향에서 나온 것임은 서한집을 통해서 쉽게 파악할 수가 있다.

 

“해설은 신자인 독자들을 위해 충분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지만, 마태오 복음으로 되돌아가 다시 보도록 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른 책을 참조하라는 것은 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신자들은 눈앞에 있는 책에만 애써 다른 책까지 참조하라고 하면 애써 찾아보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입니다. 우리말 어법에 좀 새로운 것을 도입하였는데, 예를 들면 단어 사이에 띄어쓰기, 음운의 구별, 구두점입니다. 잘 읽고 이해하기 위하여 이들 세 가지는 필수적입니다. 이러한 규칙 없이는 유식한 한국 독자들도 때때로 더듬거리게 되고, 의미와 내용을 곡해하게 됩니다. 이 때문에 성경은 모든 정규문법을 따라서 쓰여야 할 것입니다.”“요즈음 『진교사패』를 읽고 있는데, 많은 곳에서 국어 문법과 어법에 어긋나 독자들에게 짜증을 일으킵니다. 어떤 부분은 의미가 다른 것도 있습니다.” “신자들은 이제 모두 『사사 성경』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쉽게 사서 읽을 수 있게 되어 대단히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는 분명하게 성경 번역이 천주교 신자를 대상으로 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번역을 하더라도 한국어로 어떻게 발음이 되는지까지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한국말로 발음이 좋지 않게 들리거나 우습게 들리지 않도록 하였던 것이다. 한국어의 문체까지도 고려하였던 점도 들 수 있다. 번역된 성경을 잘 이용할 수 있도록 협지나, 별지 등을 통해서도 신자들이 성경에 대한 개념을 얻을 수 있도록 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때문에 그가 한국인 신자들 모두가 『사사 성경』을 쉽게 구해서 읽을 수 있게 되어서 대단히 만족하고 있다고 보았다.

 

한편 『한기근 바오로 신부 서한집』에서는 자세히 살필 수는 없지만, 그와 『경향잡지』의 관계를 통해서도 엿볼 수가 있다. 그는 1913년 5월에 경향잡지사 제3대 발행인 겸 성서활판소를 담당한 이후 1937년에 물러날 때까지 경향잡지사를 경영하였다. 이러한 그가 직접 기자로서 작성한 「로마 여행일기」를 『경향잡지』에 연재한 이유는 바로 한국인 신자들에게 세계의 성지와 교회에 대한 정보를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기근 신부와 『경향잡지』의 관계 역시 한국인 신자들을 위한 그의 사목 방향과도 밀접히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인 신자들에게 무언가 읽을거리를 만들어주고 생각하도록 함으로써 신앙생활에 도움을 주고자 애썼던 것이다.

 

사실 그는 본당에서 사목할 때도 신문에 대해서 주목한 바가 있다. 그는 1906년 『경향신문』이 발간된다는 소식을 듣자, “최근 드망즈 신부님으로부터 천주교 신문을 간행한다는 공문을 받아서 신자들에게 그 신문에 대해서 여러 번 말했습니다. 무식한 농부들이라 별 반응이 없어 몇 부나 팔릴지 모르겠습니다.”라는 입장을 보여주었다. 이와 같이 그가 신문이나 잡지나, 출판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는 점에 대해서는 앞으로 보다 더 자세한 분석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한다.

 

 

4. 세계에서 한국과 인연이 있는 사람들과 그 발자취를 찾음

 

한기근 신부의 사목활동 가운데에서 성경 번역 다음으로 들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로마 여행일기」라는 여행기를 남긴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제목에서는 로마만이 언급되고 있지만, 그렇지는 않다. 그는 1925년 5월 11일에 서울을 출발해서 일본, 중국, 베트남, 싱가포르, 스리랑카, 프랑스를 거쳐서 로마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한국의 순교자들에 대한 첫 시복식이 끝난 다음 이탈리아와, 프랑스, 그리고 이스라엘의 성지를 순례하고서 같은 해 12월 10일에 서울로 돌아왔다. 그의 이러한 여행기에 대해서는 “비그리스도교 문화권인 한국의 천주교회 성직자가 기록한 첫 그리스도교 성지순례기”라고 높이 평가되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한기근 신부가 여행기를 쓰고, 『경향잡지』에 연재한 것은 다름 아니라 한국인 신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자신도 그러하였지만, 한국인 신자들이 해외로 성지순례를 갈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첫 시복식에 참여할 사람을 모았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도 응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한국인 신자들이 얼마큼 형편이 어려운가를 들려주고 있다. 너무나 가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조선 복자와 복녀의 경사를 참예하기 위하여 가는 자는 어디 있으며, 언제 떠나는고. 소식이 캄캄하도다. 로마는 조선에서 어찌 멀리 있는 고, 수로 육로 수만 리가 격하였도다. 조선 교우는 어찌 그리 가난하여 천여 원의 노비를 판비하지 못하므로 거룩한 체면도 차리지 못하는고. 로마의 상거가 수천 리만 되어도 참예하러 가는 교우가 몇 명 있을 것이요. 시베리아 철도의 형편이 대전쟁과 같아도 참예하러 갈 교우가 혹시 있으련마는 백합과 같이 날아갈 수도 없고 붕새의 날개도 얻을 수도 없도다.”

 

그는 여행기 연재라는 작업을 통해서라도 한국인 신자들에게 한국만이 아니라, 동양과 서양의 교회에 대한 이해를 높여주고자 했다. 이후 그 언제인가 한국인 신자들도 자신처럼 동양과 서양의 교회와 성지로 자유롭게 여행을 떠나서 견문을 넓히면서 신앙생활에 커다란 도움을 얻기를 바랐다. 그는 한국인 신자들이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나라의 사람과 신자들과 함께 삶과 신앙을 이야기하고 나누기를 꿈꾸었던 것이다.

 

한기근 신부의 여행기에서 크게 주목해야 할 사실은 해외에서 살아가고 있는 한국인 신자들에 대한 깊은 관심이다. 그는 일본의 고베와 교토에서 한국인 신자들을 만난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고베에서는 김천에서 온 한 여성 신자를 만났는데, 예수 성심회 수녀들로부터 교육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교토에서는 대략 50명 가량의 신자들을 만났다고 한다. 대부분 전주에서 온 사람들이었는데, 황해도 사람도 있었다. 그들 가운데에는 한국인 성직자의 남자 조카도 있었다. 이들이 교토에서 못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면서 허름한 가옥에서 생활하는 형편을 들려주고 있다. 특히 그는 그들이 바랐던 대로 교토 성당에서 33명에게는 고해성사를 주고, 한국어로 함께 미사를 드렸다고 한다. 이에 그는 마치 교토에 조선 공소를 만든 것 같았다는 감격스러운 소회를 전해주고 있다. 그래서 그는 일본의 다른 곳에도 한국인 신자들이 있을 것이라고 덧붙인다. 이때 그는 일본에 머무는 다른 외국인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깊은 감동을 받은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그것은 그가 한국천주교회로 하여금 한국을 떠나서 다른 곳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들에 대한 이주 사목이 필요함을 강조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와 같이 그는 여행 내내 한국인 신자나 한국인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가 보르네오섬에 들렀을 때 이 섬에서 혹시 한국인을 만나보았느냐고 물어보았던 사실에서도 엿볼 수가 있다. 몇 해 전에 영어를 잘하는 조선인 3명이 인삼 장사하러 다니는 것을 보았다는 내용을 들었다. 그는 파리에서 한국인 신자 한 사람을 만난 사실도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그가 평안도 안주 사람이며, 프랑스에 거주한 기간이 7년이나 되고, 정치학을 공부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그가 거주했던 집의 프랑스 부인의 도움으로 세례를 받은 과정도 들려주고 있다. 또한 그를 통해서 파리에 한국인이 30명가량 있으며, 그중에서 20명이 고학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와 함께 한기근 신부는 한국인 신자들이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남긴 발자취까지도 직접 찾아보고자 하였다. 그는 서해를 거쳐서 상하이에 도착하였을 때 김대건 신부가 항해하면서 겪었을 어려움을 떠올려보거나, 사제로 서품을 받은 김가항 성당까지 직접 방문하고 싶어 하였던 것이다. 이에 홍콩과 마카오와 페낭을 지나갈 때에는 자신과 한국인 신학생들이 그곳에서 공부한 사실을 기억해보기도 하였다. 콜롬보에서는 대구의 신학생 2명이 로마를 왕래할 때 이곳의 성당에 거쳐 간 까닭을 상기하면서 그들의 소식에 대해서 물어보기도 하였다. 한 사람은 로마에서, 한 사람은 귀국하자마자 죽었다는 안타까운 내용도 알려주고 있다.

 

한기근 신부는 가는 곳곳마다 한국과 관련된 내용이 어디에서 어떻게 나오는가를 찾아서 전해주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바티칸 도서관에서 한국어가 나오는 필적 하나를 찾아내기도 하였다. 40년 전에 로마의 어느 성전을 중수할 때 한국인 신자들이 기부하였던 물건이라고 한다. 흰색의 명주를 윤택이 나도록 하여, 거기에 기부자인 한국인 남녀 신자의 본명과 수결이 새겨진 문서가 전시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파리외방전교회를 방문하여 조선에 와서 순교한 주교나 신부들이 떠나기 전에 머물렀던 방마다 표시된 사실을 알고서 감동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순교자들의 유물도 함께 언급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조선에서 순교한 주교와 신부의 유물을 보았다고 하면서, 그것이 충청도 공주의 마곡사에 찾은 성물과 안성 미리내 산에서 얻은 성작과 같은 유물이라고 설명해주고 있다. 또한 서울 대목구의 역사 자료와 우리 순교복자의 노래를 얻은 사실도 기쁘게 소개하고 있다.

 

한편 그는 루르드의 성전에서 한국에서 선교한 주교와 신부의 흔적을 확인하기도 하였다. 루르드 성전의 제대 칸에 붙어 있는 옥석 판에 라틴어, 한자, 한국어로 섞여서 적힌 커다란 표석을 바로 알아보았다고 한다. 리델 주교, 블랑 주교, 리샤르 신부가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의 보호를 받아 조선에 무사히 도착한 사실에 대해서 감사를 드린 것이었다. 그가 이스라엘 성지를 순례하는 가운데 한국어로 된 성경 글씨를 본 것도 함께 전하고 있다. ‘예루살렘의 면양 못’ 성지에서는 성지와 관련된 요한복음의 내용이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인쇄된 것이 붙어져 있는데, 한국어로 인쇄된 것은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다행히 샤르즈뵈프 신부가 이곳을 방문하였을 때 한국어로 번역한 말씀을 철필로 써놓은 것이 붙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그는 성지를 순례하면서 자신이 방문한 사실을 그곳에 기록하여 남겨두고자 하였다. 그는 소화 데레사 성녀가 공부한 베네딕토 수녀원에서 국한문으로 된 방문 기록을 남겨두었는데, 자기 이후에 이곳을 찾아온 다른 신자들이 이 글을 보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복자 예마르 신부가 생장한 곳을 방문하여 그곳 신부의 요청에 한국어로 방명록을 남겨두었다. 그의 방문 이후에 찾아오는 한국인 신자나 다른 사람들이 극동에 사는 동양인 신부도 여기에 와서 참배한 사실을 알 수 있도록 남겨두기를 바랐다고 한다. 이는 역시 이곳을 방문한 브레 신부의 동생 신부를 프랑스의 라 살레트 성모 성전에서 만나는 인연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곳의 방명록에서 한기근 신부의 이름을 본 동생 신부가 그를 바로 알아보고서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한기근 신부는 서양의 성지나 성당에서 한국을 비롯한 동양사람들을 위해서 그 나라 말로 소개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다. 파리의 성모성당을 방문하여서는 각국 말로 된 고해소가 있는데, 한국어를 포함하여 동양말 고해소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서양에 동양인 교우가 많지 않은 증거라고 하면서, 앞으로 한국인 신자가 서양을 찾고 머무는 일이 많아지면 한국어 고해소도 생길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이스라엘의 ‘하늘에 계신 문원’ 성지에서 여러 나라 언어로 만들어진 된 천주경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고서 중국말로 된 것은 있지만, 한국어나 일본어로 된 것이 없었다고 말한다. 이에 그는 자신이 만일 이곳에 오래 머물게 되면 얼마나 많은 돈이 들더라도 한국어로 된 천주경을 반드시 새겨 붙이고 싶다고 하였다.

 

한편 한기근 신부는 일본을 방문했을 때부터 한국에서 선교한 서양인 성직자나, 이들과 인연이 있는 사람들을 언급하거나, 한국에서 활동한 서양인에 대해서도 주목하였다. 인도양 위의 선박 안에서 죽은 프랑스 사람이 한국에서 금광업을 하던 사람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그는 고베에서 병인박해 때 순교한 선교사들의 동창 신부도 만났다. 사이공에서는 한국에서 선교하고 있던 보댕 신부를 만났다. 로마에 있을 때는 드브레드 주교를 가르친 교수 신부를 만난 사실도 알려주고 있다. 파리에서는 브레 신부의 동생인 브레 신부를 만나기도 하였다. 이스라엘 성지순례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시온 성모수녀회를 방문하였을 때, 서산의 멜리장 신부의 이종 매제인 수녀가 한기근 신부가 한국인 줄 알고 멜리장 신부의 안부를 물었던 것이다.

 

한기근 신부가 그의 여행기에서 중점을 둔 이러한 내용들은 한국과 세계가 얼마나 서로 연결되고 있는지를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다. 그는 한국의 순교자들에 대한 첫 시복식이 마무리된 이후 세계 천주교회에서 한국천주교회의 위치가 비로소 확립되었다고 하면서, 한국인 신자들에게도 세계에 대한 관심을 더욱 많이 가져줄 것을 바랐다. 또한 앞으로 한국인이나 한국인 신자들이 세계로 뻗어나가면서 온 세상 사람들과 만나고 나누기를 바랐던 것이다.

 

 

5. 한기근 신부의 삶과 신앙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

 

한기근 신부의 서한집과 여행기를 읽어보면 한국과 한국인 신자들에 대한 그의 깊은 애정을 금방 느끼게 한다. 그의 사목활동 모두가 바로 한국인 신자들을 위한 것임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본당 사목이나, 성경 번역이나, 성지순례이든 간에 그것이 성직자로서 자신의 소명임을 깨닫고서 실천하고자 했던 것이다. 자신의 성경 번역이 마무리되었음에도 다른 성직자나 신자들에게 의견을 물으면서 계속적으로 수정해서 더 좋은 번역으로 만들려고 한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이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라는 매우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한국인 성직자로서 자신이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을 고민하고 선택하며 실천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오늘날과는 너무나 커다란 차이가 있다. 지금 우리는 너무나 쉽게 구약성경까지 한국어로 번역된 성경을 읽고 만나고 있다. 성경을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다양한 주석서나 참고서적들이 나와 있는 실정이다. 성지순례 역시 그러하다. 수많은 사람이 한기근 신부처럼 홀로, 그리고 단체로 함께 유럽이나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전 세계 곳곳의 성지나 성당으로 여행을 자유롭게 떠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많은 여행기나 안내 책자도 바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한기근 신부가 그의 여행기 마지막 부분에서 언급했던 일도 이제 많이 이루어졌다.

 

“7개월간 여행 중에 보고 들은 것 중에 무엇이 제일 좋고 부럽더냐 하면 이탈리아와 프랑스에 성당이 많은 것이 제일 좋고 부럽다 하노라. 대저 성상께 폐현함과 예루살렘 각 성지에 참배함도 마음에 감동되나, 이탈리아와 프랑스 땅에서 기차를 타고 다닐 때에 향촌과 심산궁곡에도 항상 성당이 연면하여 몇십 리씩 지나서는 항상 성당이 보이고, 대처를 지날 때에는 대소 성당 여럿이 보이니, 이는 그 나라에 교우가 많고 또 열심한 소이로다. 우리 조선에도 교우가 많고 열심하여 각처에 성당이 연면하기를 기구하고 바라나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유럽까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성당과 성지를 곳곳에서 만나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오히려 한국인 신자들의 신앙심이 그때 유럽의 그것과 비교할 때 거꾸로 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까지 들게 하고 있다.

 

이 모든 일은 신약성경에 대한 번역이 시작된 1906년부터, 성지순례가 이루어진 1925년에서 헤아려보면 불과 100년이 넘거나, 못 되는 시기에 일어난 실로 엄청난 변화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 이러한 변화가 어떻게 해서 일어났는가, 어떻게 가능했을까 하고 자꾸 물어지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기적일까, 신비일까, 진정 하느님의 섭리일까 하고도 묻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오늘을 있게 해준 한기근 신부와 같은 한국인 성직자들이나, 수도자들이나, 평신자들의 노력을 결코 잊을 수 없게 만든다. 한기근 신부의 지적처럼 유럽이 그러했던 것은 교회 구성원들의 열심이, 정성이,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 덕분에 오늘 평신자들이나, 성직자나 수도자들은 쉽게 성경을 만나고, 공부하고, 여러 성당을 오고 가고, 전 세계의 온갖 성지와 성당을 순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우리가 가끔 오늘을 가능하게 해준 어제까지의 과정을 너무 쉽게 잊어버리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어디를 다니든지 언짢은 것은 다 물리쳐버리고 관람하던 모든 것 중에서 좋은 것만 취함이 관람의 좋은 목적이다. 내가 일본 각처에서 구경한 것 중에서 제일 좋은 것은 첫째는 각처 성당이 다 화려하고 찬란하게 꾸몄음과 아주 깨끗함이라. 우리 조선 교우들도 할 만한 대로 성당을 아름답고 정하게 꾸며 누구든지 한 번 보면 천주 공경하는 생각이 자연 발하게 할 것이오, 둘째는 이런 성당을 배관할 때에 보니 교우들이 성체 조배를 하는데 외모에까지 정성이 크게 드러나 고요하고 열심스러운 모양은 천신들이 천주 대전에 모심과 같고, 미사 때나 무슨 예절 시에 아이들의 울고 요란한 거동이 조금도 보이지 아니하니 나는 이 모든 좋은 것을 보고 기뻐하며 감동하여 우리 조선에도 이와 같이 아름답게 되기를 바라고 바라노라.”

 

다름이 아니라, 우리의 교회가 그 외양에만, 외적인 성장에만 치중해온 것이 아닌가 하고 물어지기 때문이다. 성경을 쉽게 만나고, 성지순례를 자유롭게 다닌다고 하지만, 우리의 신앙이 진정 교회가 추구해야 할 진리의 실천에 얼마큼 다가가고 있는가 하는 점과 관련해서이다. 다시 말해서 과연 오늘 한국천주교회의 구성원들이 우리 사회 안에서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를 한 번쯤은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한국천주교회가 세계 천주교회에서 진정 올바른 위치를 차지하는 가난하고 열린 교회인가를 새겨보아야 한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이러한 점에서 『한기근 바오로 신부 서한집』은 성직자와 수도자와 평신도 모두의 교회쇄신을 위한 새로운 노력이 필요함을 느끼게 만든다고 하겠다.

 

평신도들은 김대건 신부를 비롯해서 앞서 살아갔던 한국인 성직자들의 노력에 대해서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가를 물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토록 목자의 간절한 관심과 사랑을 받은 평신도들이 오늘 교회를 위해서 이 세상을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아가고 있는가를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인 성직자들이 한기근 신부의 삶과 신앙을 통해서 자신들이 얼마큼 민족과 교회의 현실을 제대로 진단하며, 올바른 방향을 추구하는 예언자적 소명을 다하면서, 자신의 삶과 신앙을 제대로 증거하고 있는가를 더욱 크게 물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안동교구의 한 신학자가 『가톨릭 신문』에 연재되는 글에서 밝히고 있듯이, 성직자들이 튀고 뜨려고 하지 않는지, 쓸데없이 바쁘지 않은지, 하늘이 아니라, 자신만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지, 무엇보다 이 시대와 이 사회 속에서 목자로서 자신의 양들인 한국인 신자들을 위해서 얼마큼 정성스럽게 생각하고, 얼마큼 진지하게 고민하고, 열심히 실천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다시금 물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교회의 참된 쇄신이란 언제나 성직자에게 먼저 이루어질 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할 때 우리의 교회는 온 세상에 새로운 희망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한기근 바오로 신부 서한집』의 발간이 가지는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교회사 연구 제61집, 2022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김수태(충남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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