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9일 (목)
(백)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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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시복 대상자 약전: 노안락 에우세비오 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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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4-13 ㅣ No.1544

[시복 대상자 약전] 노안락 에우세비오 수사

 

 

덕원수도원

1897년 2월 12일생, 독일 아욱스부르크 교구 출신

세례명 : 막스

첫서원 : 1920년 4월 5일

한국파견 : 1924년 9월 3일

소임 : 덕원수도원건축담당

체포 일자 및 장소 : 1949년 5월 11일, 덕원수도원

순교 일자 및 장소 : 1951년 9월 1일, 옥사덕수용소

 

 

노안락 에우세비오(Eusebius Lohmeier, 盧安樂, 1897-1949) 수사는 1897년 2월 12일 독일 아욱스부르크(Augsburg) 교구 메링(Mering)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막스(Max)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본당 세례대장에는 어머니 크레스첸시아(Creszentia)가 ‘금세공인의 과부’라고 기록되어 있어 그가 유복자로 태어났음을 알려준다. 수도원에 들어가기 전까지 그의 삶을 말해주는 유일한 기록은 1904년에 발급된 초등학교 1학년 성적증명서다. 성적증명서에는 과목 평점이 모두 수와 우로 기록되어 있고 ‘공명심이 있는 소년’이라고 씌여있다.

 

상트 오틸리엔(St. Ottilien) 수도원에서 목공 도제 수습을 시작한 에우세비오 수사는 1914년 5월 정식 지원자가 되었다. 1916년 4월 군대에 징집되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1916년부터 1918년까지 프랑스 전선에서 치열한 전투에 참가했다. 1919년 3월 21일 에우세비오라는 수도명으로 수련을 시작했고 1920년 4월 5일 첫서원을 하고 1923년 4월 5일 종신서원을 했다. 1924년 3월 30일 필리핀 디날루피한(Dinalupihan)에 있는 산 베니토(San Benito) 수도원으로 선교 파견되었다가 몇 달만에 한국으로 소임지가 바뀌었다. 1920년에 설정된 원산 대목구를 위임받은 베네딕도회 서울 백동 수도원은 함경도와 북간도 지방에 대규모 건축 공사를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숙련된 목수가 절실했다. 원산 연대기에는 “매우 기쁘게도, 에우세비오 수사가 필리핀에서 우리 수도원으로 파견되었다.”며 당시 분위기를 전한다.

 

1924년 9월 3일 서울에 도착한 에우세비오 수사는 원산으로 가서 새 학교와 임시 성당 신축공사에 합류했다. 이듬해 한국에 진출한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 수녀원 건축공사에도 참여했다. 1926년 덕원 수도원 본관 신축공사가 시작되자 그는 더욱 바빠졌다. 서울 백동 수도원이 덕원으로 이사를 완료한 1927년 11월 17일까지 그를 비롯한 건축공사를 맡은 수사들은 과중한 압박감에 시달렸다. 건축공사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1928년에는 신학교 건물을 올리고 수도원을 증축해야 했다. 신학교와 수도원 건축공사를 마무리한 그는 급히 북간도에 있는 삼원봉 본당으로 가서 무너져가는 종탑을 수리했다. 1929년 5월 그는 다시 한번 북간도 지방을 방문하여 집을 한 채 지었는데, 나중에 이 건물은 연길 수도원 본관으로 사용되었다. 1930년 봄부터 덕원 수도원 성당 건축공사가 착공되었다. 악전고투 끝에 공사는 진행되었고 1931년 12월 25일 보니파시오 사우어(Bonifaz Sauer, 辛上院, 1877-1950) 주교 아빠스가 새로 지어진 수도원 성당에서 예수 성탄 대축일 미사를 집전했다.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의 원산방문(1925년, 원산, 뒷줄 가운데가 에우세비오 수사)

 

 

수도원 본관과 성당과 작업장들 그리고 신학교 건축 공사가 일단락되자 본당에서 에우세비오 수사를 청하기 시작했다. 1932년 늦여름 그는 영흥 본당에 가서 성당 지붕 골격을 얹었고, 1936년 10월 중순부터 첫눈이 올 때까지 베드로 게르네르트(Petrus Gernert, 1882-1949) 수사와 함께 고원 본당의 학교 건물 골조 공사를 마쳤다. 다음 공사 현장은 원산이었다. 1937년 9월 27일부터 일년동안 그는 원산 본당 성당 신축공사를 맡았다. 1938년 9월 23일에 발생한 화재로 전소된 덕원 신학교 복구 공사도 그의 몫이었다. 신학교 복구 공사 감독을 맡은 그는 높은 박공을 얹은 건물 중앙 날개 부분을 통해 자신의 완벽한 목공기술을 다시 한 번 보여 주었다. 1943년 그는 함흥으로 가서 탈장수술을 받았다. 오랜 세월 고된 노동의 결과였다.

 

해방이 된 후 에우세비오 수사는 생애에 가장 멋진 임무를 맡았다. 평양 대목구 주교좌 대성당 건축공사였다. 1948년 루치오 로트(Lucius Roth, 洪泰華, 1890-1950) 원장 신부는 크리소스토모 슈미트(Chrysostomus Schmid, 1883-1962, 金時練) 총아빠스에게 이런 보고를 한다. “에우세비오 수사는 평양에 있습니다. 아마 일 년 넘게 그곳에 머물 것입니다. 평양에서는 1946년에 성당 건축이 시작되었습니다. 현재 성당 하부가 부분적으로 완성되었고 벽도 반 이상 세워졌습니다. 올해 안으로 공사가 끝나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내년에는 완공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에우세비오 수사가 일꾼들을 감독하고 있습니다. 그곳은 우리 원산 성당보다 좀 더 클 것입니다.” 평양 주교좌 대성당 건축공사는 1948년 9월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창설과 함께 중단되었다. 에우세비오 수사가 언제 덕원 수도원으로 복귀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가 건축하던 대성당은 6?25전쟁 때 미군의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고 훗날 그 터에는 평양 학생 소년 궁전이 들어섰다.

 

복구 공사를 마친 덕원 신학교(1938년, 덕원)

 

 

1948년 5월 11일 덕원 수도원이 폐쇄되고 에우세비오 수사는 수도형제들과 함께 체포되어 평양 인민 교화소에서 심한 고초를 겪었다. 1949년 6월 24일 그는 기능공 수사들과 함께 자강도 전천군에 위치한 옥사덕이란 산골짜기로 이송되었다. 거기서 그들은 머지않아 도착할 동료 선교사들이 지낼 수용소 건물을 지었다. 수용소 생활 첫해 그는 화농성 피부 궤양으로 고생했다. 1950년 겨울 만포 피난길에 동상에 걸려 발가락 피부가 전부 벗겨졌고 발가락 두개는 뼈까지 곪았다. 만포에서 돌아온 후에도 그는 수용소 숙소와 외양간을 지어야 했다. 1951년 8월 중순부터 에우세비오 수사는 급성 장염으로 고생했는데 이미 식이요법과 약 없이 버틸 수 없을 만큼 쇠약해졌다. 9월 1일 오전 9시경 그는 집에서 약간 떨어진 화장실로 가는 도중에 쓰러졌다. 동료 수사들이 그를 중환자용 방으로 데려다놓고 의사인 디오메데스 메페르트(DiomedesMefert, 1909-1998) 수녀를 불렀으나 소용이 없었다. 두 시간 후 그는 사망했다. 『북한에서의 시련』이라는 책에는 당시 비참했던 상황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작업은 갈수록 혹독해졌고 처우는 갈수록 잔인해졌으며 굶주림은 갈수록 고통스러워졌다. 우리는 침묵하고 참고 기도하고 하늘에 부르짖었다. 용기가 꺾였다. 정신력도 붕괴되어 들판의 돌무더기 위에 아무데나 앉아 어린애처럼 울었다. 공산주의자들에게 총살을 당한다면 오히려 복일 것이었다. 1951년에 에우세비오 수사가 영양실조로 선종했다. 우리는 감시병들이 그를 마지막까지 들볶고 게으름뱅이라고 욕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에우세비오 수사의 죽음까지 비웃었다.”

 

* 자료 출처 : Todesanzeige(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덕원의 순교자들(분도출판사, 2012년), 북한에서의 시련(분도출판사, 1997년), 芬道通史(분도출판사, 2010년), Necrologium(왜관 수도원)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15년 겨울호(Vol.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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