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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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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7-02-12 ㅣ No.26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상)



창설과 시대적 배경

 

17세기말 프랑스는 거듭된 전쟁으로 인해 혼란과 가난으로 비참했다. 특히 전 국민의 90%를 넘는 농민들의 처지는 더욱 불행했다.

 

삶을 유지하고 인간의 품위를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물질적 요건도 미흡했을 뿐더러 더욱 심각한 것은 정신적인 황폐함이었다. 교회와 신자들은 유리돼 있었고 사람들은 신앙과 신앙에 바탕을 둔 삶을 잃었다.

 

그리하여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좀더 가까이 가야할 시대적인 요청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존재했던 전통적인 수도회들은 수도자적인 엄격한 교육으로 인해 새롭게 요구되는 봉사활동의 범위가 제한될 수 밖에 없었다.

 

「방문회」가 창설되어 병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방문하기도 했지만 이들도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교회법이 여자 수도자들의 방문 활동을 금지함에 따라 봉쇄 생활로 돌아가야 했다.

 

1625년 「애덕의 딸 수녀회」를 시작으로 가난한 이들을 위한 봉사, 병자 간호, 어린이들의 교육이라는 민중적 필요에 적극적으로 응할 수 있는 새로운 양식의 수도회들이 시작됐다. 여기서 「애덕」은 봉쇄수도원의 관상과 고행에 대비되는 자선활동으로서의 개념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활동 수도회의 시작이었다. 봉쇄 수도회의 벽을 넘어 여성들이 아이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방문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대단히 새로운 「길」이었으며 흡사 사도 바오로가 유다인의 벽을 넘어 이방인에게로 구원의 소식을 전한 것과 비견될 수 있는 놀라운 변화였다. 새로운 수도생활의 형태는 프랑스 전체에 비상한 영향을 주었고 17세기 프랑스 전역에 교육과 병자 간호에 봉사하는 자매들의 공동체들이 급속하게 확산됐다.

 

 

프랑스 영성학파

 

나아가 이들의 활동은 17세기 들어 새롭게 일어난 영성적 쇄신의 자양분을 한껏 흡수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17세기 들어 프랑스에는 훌륭한 영적 지도자들이 대거 배출됐고 이들은 소위 「프랑스 영성학파」라 불리우는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자, 사목자, 선교사들이었다.

 

이 학파는 피정과 재교육을 위한 세미나 등을 통해 사제들을 복음화하고 신자들을 교육했으며 신학교를 열었다. 신자들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다시 일깨워주었다.

 

복음과 함께 바오로 서간에 깊이 심취한 프랑스 영성학파는 영성적 쇄신을 이끌어냈으며 16세기 전멸된 「가톨릭 생활」이 새로운 전성기를 구가하도록 지도했다. 당시의 영적 토양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즉 교회 생활의 모든 국면, 곧 전례, 신학, 철학, 전교사업 및 영성 등에서 이 프랑스 신학자들과 성직자들에 의해 강한 추진력과 방향을 제시받았던 것이다.

 

 

수녀회의 창설과 루이 쇼베 신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창설자인 루이 쇼베 신부는 프랑스 교회가 「복음화」의 꽃을 활짝 피우는 바로 이러한 영성적, 사목적 흐름 속에서 양성된 사제였다.

 

쇼베 신부는 지극히 평범한 본당 사제였으나 경건하고 학식과 사목적인 면에서 훌륭하게 균형잡힌 인물이었다. 그는 본당 신자들을 돌보면서 다른 대부분의 프랑스 국민들과 마찬가지로 버려진 환자들, 교육받지 못한 어린이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게 됐고 이들의 인간적, 영적 품위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우리의 사도직 첫 터전은 주위에 산재하고 있는 마을들이었다. 우리의 첫 사명은 여아들을 가르치고 가난한 이와 병든 이들을 방문함으로써 마을 사람들의 인간적, 영적 품위를 높이기 위해 일하는 것이었다... 다른 공동체들 뒤에서 이삭을 줍는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회칙 초안 제1장)

 

1696년 작은 마을 르베빌라 슈나르의 본당 신부였던 그는 처음으로 마을 처녀 4명으로 이 일을 시작했다. 그 중 마리안 드 티는 2대 원장이자 수녀회의 공동 창립자로 간주된다. 귀족 출신으로 높은 교육 수준과 열정으로 수녀회를 위해 헌신한 마리안 드 티는 아무런 문서도 남겨두지 않은 루이 쇼베 신부를 대신해 자신들의 정신을 이렇게 요약했다.

 

『교회의 유익과 이웃의 필요를 위하여 하느님께 나 자신을 바친다.』

 

이렇게 창립된 작은 공동체가 점점 자라나 확산되기 시작했고 쇼베 신부는 이를 샬트르 교구에 위탁했다.

 

그리고 1708년 샬트르 교구는 이들을 받아들어 공적으로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란 이름을 주었다.

 

이후 수녀회는 국제적인 수도회로 성장해 28개국에서 복음화의 꽃을 피우고 있으며 한국에는 1888년에 진출한 이후 1966년 서울 관구와 대구 관구로 분리돼 교육, 의료, 본당 및 해외선교, 사회복지, 특수사도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지난 1996년에는 창설 300주년을 경축하고 새로운 복음화를 위한 노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1년 1월 21일, 박영호 기자]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샬트르 성바오로 수도회 (중)

 

 

샬트르 성바오로수녀회의 창설자 루이 쇼베 신부는 자신의 사상과 가르침을 담은 단 한쪽의 문헌도 남기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영성과 가르침은 오직 구두로, 또는 행동과 생활 방식을 통해 파악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영성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이삭을 줍는 자세였다. 당시 수많은 수도 공동체들이 설립되고 운영됐지만 쇼베는 그런 큰 수도회들의 손길이 미처 닿지 못하는 작은 곳에서 자신의 소명을 실천했다.

 

여기에 자신의 공동체가 성장하게 되자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애착심을 버리고 그 공동체를 교구장에게 위임함으로써 드러낸 이탈의 영성은 그의 정신을 도욱 잘 드러낸다.

 

그의 영성에서 보여지는 것은 잘 익은 열매들을 거둔 후 들판에 버려진 이삭을 줍는 마음으로 사목에 임했으며 결코 자신을 우선하지 않는 이탈의 자세였던 것이다.

 

한 권의 문헌도 남겨두지 않은 쇼베신부의 영성은 그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마리안드 티에게서 구체적으로 실현되고 있다. 아리안은 유서에서 『교회의 유익과 이웃의 필요를 위해 세속을 떠나 하느님께 나 자신을 바칩니다.』라고 고백했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와 그 창설자 루이 쇼베 신부, 그리고 후대 회원들에게서 볼 수 있는 영성은 무엇보다 사도 바오로의 정신이다.

 

쇼베 신부 당시 프랑스에서는 전쟁의 황폐함 후에 사람들은 물질적 결핍으로 인한 가난에 시달렸을 뿐만 아니라 가톨릭 신앙 생활 자체를 잃었다. 그에 따라 신자 재교육이 가장 시급한 현안의 하나로 손꼽혔고 그 돌파구의 모색이 사도 바오로의 재발견이었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외적으로는 어린이들을 교육하고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돌보는 활동이었다. 즉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가난한 이와 병든 이들을 방문함으로써 그 마을 사람들의 인간적, 영적 품위를 높이기 위해 일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영혼 구원을 위해 인간 본래의 품위를 끌어올리려는 창설자 쇼베 신부의 사도적 열정과 희생이 기초가 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영성은 근원적으로, 모든 이를 비참에서 구원한 그리스도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영성적, 내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적이고 파스카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바오로 영성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다. 어떤 처지에서도 그리스도로 인해 기쁨과 충만함이 넘쳐나고 그 충만함을 나누는 생활이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물질적인 엄청난 풍요를 누리고 있다. 또 이런 풍요를 더 풍부하게 누리기 위해 무한의 경쟁 속에 살아가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물질과 경쟁의 가치는 절대적이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반면 그 안에서도 여전히 하느님을 열망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느님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

 

어쩌면 이러한 인간 상황은 예수 당시에도 마찬가지 일 수 있었다. 당시 물질적 풍요를 이전의 어느 시대보다 누렸고 수많은 다른 종교와 그 종교의 신들이 숭배됐었다.

 

하지만 결국 인간은 그리스도로 인해 충만함을 느끼게 되고 그리스도가 모든 인간을 똑같이 사랑하심을 체험하면서 어떤 처지에서도 오직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는 하나의 이유만으로 기쁨을 누리며 가진 것이 없어도 부유했다. 더 많이 갖거나 다른 이를 이겨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한 분 때문에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삭 줍기의 영성 역시 작은 것 하나에 최선을 다하는 기쁨이며 영성이라는 것이 결코 멀리 있는 특정한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하느님과 친교를 맺고 살아가는 정신이다.

 

사도 바오로의 영성에서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공동체이다. 인간의 품위와 가치를 강조하면서도 공동체를 존중했다. 현대인들은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이다. 하지만 오히려 홀로서기에 자신이 없고 공동체에 대한 갈구가 더 큰 것이 현대인들이다. 사도 바오로는 항상 공동체를 형성했다. 「친교의 영성」이 그래서 수도회에 매우 중요한 영성이다.

 

무엇보다 그리스도 중심의 파스카 신비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영성의 핵심이며 이는 300여년 동안의 수녀회 역사 안에서 잘 나타나 있다. 하느님을 향한 불타는 사랑은 결국 이웃 사랑으로, 특히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가난하고 미소한 이들을 섬기는 가운데 바오로 사도처럼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려는 삶으로 드러나게 된다.

 

수도회 창립 192년만인 1888년 4명의 선교 수녀들이 한국 땅에 처음으로 발을 디디게 된다. 아직 순교자들의 선혈이 마르기도 전인 한국 땅에 최초의 수도회로 자리잡은지 100년이 훌쩍 넘은 오늘날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새천년기 새로운 복음화의 요청에 따라 또 새로운 면모로 일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1년 1월 28일, 박영호 기자]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샬트르 성바오로 수도회 (하)

 

 

한국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708년 샬트르시의 생모리스가로 이전하면서 이곳의 지명과 사도 바오로의 선교열을 본받고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라고 부르기 시작했으며 이 이름은 1861년 교황 비오9세를 통해 교회 안에서 공인된 이름으로 정착됐다.

 

이후 여러 곳에 분원을 두고 해외선교에 나선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존폐의 위기에 직면했었고 프랑스 국내에서는 속화법으로 인해 또 한차례 중대한 위기를 겪으면서도 꾸준하게 성장해왔다.

 

동아시아 지역에서 새로운 선교의 보고를 발견한 수녀회는 홍콩, 베트남, 일본에 수녀들을 파견한데 이어 고요한 아침의 나라 한국에도 1888년 수녀를 파견하게 된다.

 

수녀들이 제물포에 첫발을 디딘 그 해는 조선왕조가 오랜 쇄국을 포기하고 개항을 단행한지 불과 12년이 지난 때였다. 처음으로 조선 땅에 수녀라는 존재를 알려준 4명의 수녀는 7월 22일 제물포항에 상륙해 정동에서 파스카의 여정을 시작했다.

 

수녀들은 1894년 제물포에 첫 분원을 설립한 후 평양, 제주도까지 분원을 설립하고 학교 교육, 본당 사목, 의료 사업 등 사도직 활동을 시작했고 대구대교구가 설정된 후 더욱 성장해나갔다.

 

1948년 한국 관구가 설립된 후 의욕적으로 발전을 도모해온 수녀회는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또다시 혼란과 시련의 시기를 맞는다. 하지만 1960년 첫 한국인 관구장 수녀의 탄생으로 비약적인 발전의 계기를 맞는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거치며 쇄신을 도모하던 수녀회는 1967년 서울관구와 대구관구로 분리됐다.

 

1995년 수도회 창설 300주년을 지내고 새로운 천년기를 맞은 수녀회는 이제 새로운 복음화의 요청에 부응해 어떻게 카리스마를 실현해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를 깊이 고민하고 차근차근 그 도전을 타개해 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1995년 창설 300주년

 

교회와 수도자들은 오늘날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는 역사적인 시점에 서 있다. 수녀회는 창설 300주년을 맞아 96년「새로운 복음화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카리스마의 실현」을 주제로 가진 심포지엄에서 현대 사회안에서 카리스마의 실현을 위한 도전과 과제들을 점검했다.

 

여기에서 수녀회는 우선적 과제들을 신앙교육,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복음적 사랑, 영성의 심화, 토착화의 사명, 외방선교 등 5가지 측면에서 검토하고 이같은 과제들을 실현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했다.

 

심포지엄은 이 과제들을 실현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사도적 수도자로서의 신원을 확고희 해아하며 이 사도적 영성을 심화하기 위해 초기 양성과 개인적, 공동체적 차원의 계속적인 양성이 절실하다고 보았다.

 

오늘날 수도자는 전문인으로서 양성돼야 한다고 본다. 즉 수도자는 기도와 복음, 친교와 관계의 전문가로 불리우며 이는 수도자 사도직의 존재적 차원을 잘 드러내는 표현들이다. 뿐만 아니라 기능적 전문인으로서의 양성 또한 중요한 부분이다. 아울러 이러한 전문가로서의 양성이 이뤄지는 장은 바로 공동체이다.

 

사도적 수도자는 세상 안에 살면서 세속화의 도전을 받게 마련이다. 급속하게 변화하는 현대 세상에 맞게 봉사하려면 현대의 도구에 능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대응 가운데 복음적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하며 따라서 전보다 더욱 영성을 강화해야 한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300년 역사와 100년이 넘는 한국 수녀회의 역사는 수도회 카리스마의 실현이었다. 새로운 세기, 새로운 세계를 맞아 수녀회는 새로운 복음화의 요청에 부응하고 무엇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에 따른 내적 쇄신, 사도적 수도자로서의 확고한 수도신학을 바탕으로 한 의식 전환을 모색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교회의 유익과 세상의 필요를 위해」투신하기 위해 노력하며 활동을 통해서만 아니라 존재 자체를 통해 하느님의 존재를 증거하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수녀회가 되기 위해 현대 사회의 도전에 나서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1년 2월 4일, 박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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