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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성서의 기도: 신약성경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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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6-12 ㅣ No.1823

[성서의 기도] 신약성경의 기도 (1)

 

 

우리는 지난 시간까지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기도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친밀한 대화이고 대부분의 경우 왕이나 예언자 등의 중재자를 통해 보다 통일되고 일치된 형태로 하느님께 드렸으며 이러한 특징은 유배라는 커다란 위기를 겪으면서 더욱 부각되어, 엄격하게 통일된 전례 안에서 기도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기도의 전반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번 호부터는 신약성경에서는 기도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신약의 기도는 말 그대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행적으로 보여주신 가르침에 온전히 집중되어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기도를 다루는 첫 번째 부분에서 기도를 하느님과의 대화와 친교라고 정의했는데, 만약 그렇다면 아버지 하느님과 영적인 대화로써 누구보다도 깊은 친교를 이루셨던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 안에서 기도의 모범을 찾는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기도와 차이점이 있다면, 구약의 백성들은 오직 아버지 하느님께만 기도를 집중하여 드린 반면, 신약의 백성들은 예수님께도 아버지와 똑같은 기도를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사도 7,59-60 참조). 구약의 백성들에게 하느님께서는 ‘선택받은 이들을 위한’ 신이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몸소 한 백성을 선택하셨고 자신들이 바로 그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은 자신들에게 우선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상 유대인과 헬라인의 차별은 없습니다. 그분은 모든 이에게 똑같이 주님이시고 주님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부한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로마 10,12; 1코린 1,2; 2코린 12,8; 1티모 1,12 참조)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이제 하느님께 모든 이가 기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몸소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셔서 그렇게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와 가지신 관계를 바탕으로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할 수 있도록 초대하셨습니다(마르 14,36; 루카 11,2; 갈라 4,6; 로마 8,15). 또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며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기도하라 명하셨고, 그렇게 모든 이는 하느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가장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요한 14,13; 15,16; 16,23-26 참조).

 

우리에게는 때때로 무엇인가 하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지만 적절한 방법을 몰라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그 간절한 마음에 어울리지 않는 잘못된 방법으로 일을 그르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기도의 또 하나의 독특한 특징은 바로 성령의 움직이심입니다. 성령께서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기도해 주시고(로마 8,26-27 참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 안에서 바르게 기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로마 8,14-16; 에페 6,18; 유다 1,20 참조).

 

지금까지 알아본 바를 바탕으로 신약성경 전반에 등장하는 기도에 대해서 한마디로 정의해 보자면 ‘하느님께서 가르쳐 주시고, 하느님께서 함께 해주심’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나의 기도가 충분치 않다고 느껴지셔서 ‘이런 기도를 해서 뭐 하나’라는 생각이 드신다면, 아무 염려 마시고 계속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부족한 기도를 항상 하느님(성령)께서 함께 해주고 계시니까요. [2022년 6월 12일(다해)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전주주보 숲정이 8면, 이상욱 안드레아 신부(용안성당)]

 

 

[성서의 기도] 신약성경의 기도 (2) 공관복음서의 기도 ①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라고 가르치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친히 우리와 똑같은 모습을 취하시고 당신이 직접 기도하심으로써 우리도 예수님처럼 기도할 수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인간의 모습을 취하시고 세상에 계셨기 때문에 그분께서도 역시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여러 가지 요소들에 직면하셨습니다. 광야의 유혹(마르 1,12-13; 마태 4,1-11; 루카 4,1-13) 이야기에서 우리가 본 것처럼, 그분도 광야에서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만나게 되는 결핍(배고픔으로 대표되는)과 인간적인 욕구들 사이에서 유혹과 고통을 받으셨지만 결코 하느님과의 연결고리인 기도를 놓지 않으셨습니다. 때로는 광야처럼 척박하게 느껴지는 현실 안에서 자칫 하느님을 놓칠 수 있는 유혹 중에도 예수님의 모습을 보며 우리도 그분처럼 유혹과 고통 중에서도 하느님을 붙잡을 수 있다는 희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머리 누일 곳조차 없이 분주하게 사명을 수행하셨던 공생활 중에도 그분께서는 따로 한적한 장소를 찾으신다던가(마르 6,32; 마태 14,13; 루카 4,42 참조), 혹은 산 위에서 기도하기도 하셨습니다(마르 6,46; 마태 14,23; 루카 6,12 참조). 또 새벽이나(마르 1,35), 때로는 날이 저물어가는 시간까지(마태 14,23) 혹은 밤을 새우며(루카 6,12) 기도하기도 하셨는데 이는 세상에서 주어진 시간 가운데 일정 부분은 반드시 하느님과 단둘이 보내며 다시 사명을 수행할 수 있는 힘과 위로를 얻으려는 예수님의 의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상의 사명을 완수하시면서 기도가 이어주는 아버지와 아드님 간의 친교는 더욱더 깊어져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자신있게 부르셨고(마르 14,36),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은 우리도 예수님과 똑같이 ‘아빠’ 하느님과 기도로써 친밀하게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이렇듯이 예수님의 삶 전체가 곧 기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분의 지상 생활의 모습은 기도가 그 출발점이고 자신을 재정비하고 힘을 얻는 에너지원이었으며, 분주한 공생활 중에 주어지는 아버지로부터 위로를 얻는 휴식의 시간이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바쁘신 와중에도 반드시 하느님과 따로 시간을 내어 기도하셨습니다. 그 시간에 예수님께서 어떤 기도를 하셨는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바로 기도는 ‘따로 시간을 내는 것’부터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그 시간에 다른 것을 할 수 있음에도 오로지 하느님과 나를 위해 따로 시간을 내는 것이 기도의 시작이며 그 자체가 훌륭한 기도라는 것입니다. 그 시간에 아름다운 성가나 좋은 말마디 하나 없이 오직 침묵만 있어도 좋습니다. 때로 너무 피곤하신 중에 기도를 하신다면 주무셔도 좋습니다. 잠자리에서 편하게 잘 수 있는데도 따로 시간을 내어 당신과 함께 하다가 잠든 자녀를 하느님께서는 사랑과 연민의 눈으로 봐주실 것입니다. 바로 지금, 따로 시간을 내세요. 하느님께서는 여러분과의 만남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2022년 7월 10일(다해) 연중 제15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8면, 이상욱 안드레아 신부(용안성당)]

 

 

[성서의 기도] 신약성경의 기도 (3) 공관복음서의 기도 ②

 

 

기도는 예수님의 삶 안에서 특히 중요한 순간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루카복음에서 상세히 밝히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탄생 예고(루카 1,13.31 참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심(루카 2,22-38 참조), 공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세례(루카 3,21-22 참조), 메시아로서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루카 9,18-21 참조), 수난과 죽음의 순간(루카 23,26-49 참조) 등, 이 모든 사건들이 기도와 연결되어 나타납니다. 이 밖에도 열두 제자를 뽑으시기 전(루카 6,12-16 참조), 기적을 행하실 때(루카 9, 16 참조), 주님의 기도를 가르치시기 전(루카 11,1 참조)에도 기도와 함께 하셨습니다. 이렇듯이 예수님께서는 항상 기도 안에서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셨고, 무엇보다 가장 고통스러운 수난과 죽음을 앞두고서 본인의 인간적인 괴로움과 고통을 기도로써 누르며 아버지의 뜻을 따르셨습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바치신 기도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본받아야 할 기도의 모습입니다.

 

또한 기도는 때로 믿음과 연결되거나(마르 9,29; 11,24 참조), 용서와 연결되어(마르 11,25 참조) 마르코복음에 등장하기도 합니다. 성전을 정화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위한 장소에서 기도와 거리가 멀거나 때로는 현세적 이익을 위한 속임수 같은 기도와 정반대 되는 행위가 만연하다는 것을 강하게 질책하시면서 성전이 ‘모든 민족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고 강조하십니다.

 

공관복음서에서 기도는 곧 믿음의 행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마음에 의심을 품지 않고 자기가 말한 대로 되리라고 믿기만 하면 이 산더러 ‘번쩍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더라도 그대로 될 것이다.”(마르 11,23 공동번역 성서)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무엇보다 믿음이 먼저이며,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과 가까워질 수 없고, 그분의 은총을 체험할 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믿음이 없이는 기도할 수 없지만 기도로써 믿음이 더 깊어지기도 한다고(마태 9,22; 마르 5,36; 루카 8,48 참조) 알려주셨습니다.

 

기도하는 이는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기 때문에(마태 6,6 참조), 필요한 것은 그분께서 반드시 주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마태 7,7; 마르 11,23; 루카 8,50 참조). 따라서 하느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처럼 기도할 때에 빈말을 되풀이한다거나(마태 6,7 참조), 오직 하느님과 함께 하는 기도를 남들에게 보이려고 오래 끄는 것은 옳지 못한 것입니다(마르 12,40 참조). 예수님께서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셨듯이(루카 6,12 참조) 오로지 기도를 하는 나와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느님만을 생각하며 그 외의 다른 것들을 배제하라는 의미로 예수님께서는 “골방에서”(마태 6,6) 기도할 것을 권고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바리사이와 함께 기도할 때 그저 죄 많은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간청한 어느 세리의 기도(루카 18,10-14 참조)처럼 기도는 끈기를 가지고 성실하게 바쳐야 하는데, 끈기와 성실함은 나를 낮추는 겸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오직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에 자신을 맡기고 문이 열릴 때까지 두드리는 마음의 자세를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2022년 8월 14일(다해) 연중 제20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8면, 이상욱 안드레아 신부(용안성당)]

 

 

[성서의 기도] 신약성경의 기도 (4) 공관복음서의 기도 ③

 

 

공관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바치셨다고 여겨지는 세 편의 기도가 실려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직접 가르치신 주님의 기도(마태 6,9-13; 루카 11,1-4 참조), 수난하시고 돌아가시기 직전에 겟세마니 동산에서 바치신 청원기도(마르 14,36; 마태 26,39.42; 루카 22,42 참조), 그리고 마음을 다해 아버지께 바치신 감사기도(마태 11,25-27; 루카 10,21-22 참조)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마태 11,25-27). 공관복음서 안에서 예수님께서 바치신 유일한 찬양이며 감사인 이 기도는 세상의 지혜만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하느님마저 판단하려고 하며, 스스로를 ‘지혜롭고 슬기롭다고’(마태 11,25) 말하는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이 아닌, 세상의 지혜에는 철부지처럼 어둡지만 예수님을 알아보고 믿고 있는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보여주신데 대한 감사입니다.

 

다가올 비극을 앞두고 바치신 겟세마니의 기도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아버지의 뜻을 먼저 생각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모든 청원기도의 모범이 됩니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 14,36). 이 기도는 먼저 아버지의 전능함을 의심 없이 믿으시는 모습을 통해 아버지와 아드님 간의 깊은 친교를 보여주며 이어서 죽음의 잔을 거두어 달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부분에서는 예수님께서도 고난 앞에 두려워하시는 참 인간이심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적인 두려움보다 아버지의 뜻을 더 앞에 두시면서 기도를 마무리하시는 모습에서 인간적인 약함을 뛰어넘는 믿음과 순명을 볼 수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기도로서, 신앙생활 안에서 명심해야 할 핵심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복음서의 요약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하느님의 나라의 도래’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 하느님의 나라는 세상의 나라처럼 특정하고 제한된 공간적 개념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 행위가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번째 부분에서, ‘우리 아버지’라는 친밀한 호칭으로 하느님을 부르면서 시작하고, 두 번째 부분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이 땅에서 거룩한 이름이 되기를 원하는 청원이 이어지고, 하느님의 나라의 도래와 하느님의 뜻이 하늘과 땅 모두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기도가 따릅니다. 세 번째 부분에서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의지하여 일용할 양식으로 표현된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여러 가지 필요함, 죄의 용서, 그리고 악의 세력으로부터의 보호를 청원하는 기도가 뒤따릅니다. [2022년 9월 18일(다해)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전주주보 숲정이 8면, 이상욱 안드레아 신부(용안성당)]

 

 

[성서의 기도] 신약성경의 기도 (5) 요한복음서의 기도

 

 

요한복음서 안에서 기도는 특히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 간의 일치 안에서 명확하게 나타납니다. 하느님을 ‘아빠’라는 친근한 호칭으로 부르며 시작하는 예수님의 기도는 예수님만이 가지실 수 있는 아버지와의 개인적인 친교에 그 뿌리를 두는 것입니다. 이 친교가 예수님의 입을 통해 표현되는 것이 바로 기도인데, 17장에 나오는 이른바 ‘대사제의 기도’라고 불리는 대목이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긴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이 기도는 앞서 말했던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 간의 개인적인 친교를 나타낼 뿐 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로서 또한 벗으로서 사랑하시는 이들의 현재와 미래를 부탁하는 중재의 기도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중재를 위한 기도의 핵심은 결국,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밀접하게 일치되어 있는 것처럼, 제자들도 서로서로 그리고 아버지와 밀접하게 일치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일치에 대한 간절한 기도는 17장의 장대한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전체 기도의 대미를 장식하는 핵심 내용이기도 합니다. 요한의 첫째 편지 5장 13-15절에 나오는 기도는 ‘깊이 믿고(신앙), 바로 알고(지식), 확신하고(굳은 믿음)’라는 세 단계로 요약되며, 이러한 바탕 안에서 예수님의 뜻에 맞게 구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하느님께서 들어주신다는 굳은 보증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서에 나오는 기도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감사기도의 빈번한 등장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봐도 하느님의 도움이 필요한, 그래서 청원기도가 등장해야 할 상황에서도 청원보다는 감사를 드리셨습니다. 죽은 라자로를 되살리시기에 앞서서(요한 11,41-42 참조), 많은 군중을 턱없이 적은 양의 빵과 물고기로 먹이셔야 할 때도(요한 6,11 참조) 그러하셨습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요한은 ‘기도하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동사 ‘프로슈코마이(προσεύχομαι)’나 명사 ‘프로슈케(προσευχή)’ 대신에 ‘영광스럽게 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독사조(δοξάζω)’를 빈번하게 사용합니다. 또한 요한복음서에서는 공관복음서에 등장하는 수난받으시기 전 겟세마니 동산에서 드렸던 청원기도가 실려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세 가지 요소들로 미루어 볼 때, 요한복음서 안에서, 예수님의 기도의 가장 첫 번째 목적은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 이미 알고 계시는 분께 바람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기도를 통하여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시고, 그다음에 아버지의 영광 안에서 사랑받는 아들의 바람도 이루어지기를 원하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병자를 치유해주시거나 다른 기적을 베풀어 주셨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예수님께 기적 행위의 최종적인 목적은 그 행위가 이루어지는 데 있지 않고, 그 기적을 통해 은총을 입은 이가 아버지를 믿게 되고, 그로 인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기적은 결국 아버지를 믿고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최종 목적으로 가기 위한 ‘표징’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비단 기도나 기적 행위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삶 전체를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봉헌하셨으며, 그분의 지상생애 전체가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대영광송’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2022년 10월 9일(다해) 연중 제28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8면, 이상욱 안드레아 신부(소룡동성당)]

 

 

[성서의 기도] 신약성경의 기도 (6) 바오로 사도와 기도

 

 

성경 전체를 걸쳐서 예수님만큼 이상적인 기도의 모범은 없지만, 그분에 버금간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이 있으니, 바로 바오로 사도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박해하기 위해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눈부신 주님 체험을 한 후, 사도는 기도 안에서 자주 예수님을 만나며, 그분께 인도를 받게 됩니다(사도 22,17-21 참조). 바오로라는 인물에게 있어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정신 그 자체이며(1코린 14,14-19 참조), 신앙을 지탱하는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로마 12,12 참조).

 

바오로 사도의 기도를 간단히 표현하자면 ‘꾸준히’, 그리고 ‘열정적으로’입니다. ‘언제나’, ‘끊임없이’(필레 1,4; 로마 1,10; 에페 6,18; 2테살 1,3.11 참조) 또는 ‘밤낮으로’(1티모 5,5)라는 표현과 함께 항상 열정적으로 기도해야 함을 강조하였습니다. 바오로 서간을 보면, 사도의 육체적 질환을 암시하는 몇 군데의 대목에서(갈라 4,13-14; 2코린 12,7 참조), 어떤 질환을 앓았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자신의 평생 사명인 복음화를 행하는 데 많은 지장을 주는 이 병을 치유해 달라고 기도를 드리기도 하는데(2코린 12,7), 꾸준하고 열정적인 기도의 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단 자신만 이렇게 열정적으로 기도하지 않고 하느님께 받은 자신의 평생 사명이 완수될 수 있도록, 신자들도 자신과 같이 기도하기를 요구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모금한 구제금이 기쁜 선물이 될 수 있도록(로마 15,30-31 참조), 죽을 고비에서 구해주시도록(2코린 1,11 참조), 또는 자신의 조속한 석방을 위해서(필레 1,22 참조) 기도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또 하나의 특징은 바로 기도의 두 가지 전통적인 요소인 청원과 찬양이 잘 조화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갈라티아서와 코린토 후서를 제외하고, 항상 편지를 감사기도로 시작하고 있는데, 먼저 편지를 받을 사람들이 영적인 성장을 이룬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리고, 뒤를 이어서 하느님께서 신자들의 사랑을 완성시켜 주시도록 본인이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필리 1,9 참조). 항상 충만한 주님의 은총이 본인에게 내렸다고 생각한 바오로 사도에게 감사는 기도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필수적인 요소이며 따라서 모든 기도를 감사로 시작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2코린 9,11-15 참조).

 

마지막으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 안에서 기도를 바치라고 권고하면서 동시에 기도에 있어 성령께서 수행하시는 역할에 대해서도 잘 설명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전례 중에 바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와 같이, 바오로 사도도 자신의 기도를 성자를 통해 성부께 바쳤습니다. 그런데 성자를 통하여 기도할 수 있게 해 주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시고 이분이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로마 8,15 참조).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셔서, 그 영이 ‘아빠, 아버지!’하고 외침으로서”(갈라 4,6; 마르 14,36 참조) 우리는 그분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는 결국 ‘성령의 선물’(1코린 14,14-16 참조)이며, 우리는 그분의 도움을 받아(에페 6,18; 유다 1,20 참조) 기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2022년 11월 13일(다해) 연중 제33주일(세계 가난한 이의 날) 전주주보 숲정이 8면, 이상욱 안드레아 신부(소룡동성당)]

 

 

[성서의 기도] 신약성경의 기도 (7) 사도행전의 기도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출발하여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바오로 사도의 기도까지 살펴보았습니다. 이 시간에는 사도행전을 중심으로 성경 안에서의 기도를 알아보는 마지막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이제 막 태동하기 시작한 초대 교회를 만날 수가 있는데, 초대 교회의 초석이 된 사도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사도 2,46; 3,1; 22,17 참조) 혹은 다락방을 거처로 하여(사도 1,12-14; 4,31) 기도에 전념하였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초대 교회에서 드리는 기도 안에는 유대인들의 예배 형식이 고스란히 들어가 있었으며, 베드로와 요한을 필두로 하여 복음화에 매진하였던 사도단은 성전의 기도 시간을 준수하고 성전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사도 3,1; 10,3; 22,17 참조). 이 뿐만 아니라, 바오로와 동료들도 각 지방의 유대인 회당을 복음화의 중심으로 활용하였습니다(사도 9,20; 13,5; 14,1; 18,4; 19,8 참조).

 

기도는 초대 교회 공동체의 중심이었습니다.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뽑을 때 하느님의 뜻을 묻기 전에도 기도를 드렸고(사도 1,21-26 참조), 베드로와 요한이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체포되었을 때에도(사도 4,23-30 참조), 헤로데가 백성을 마음을 얻기 위해 야고보를 참수하고 베드로를 투옥하였을 때에도, “교회는 하느님께 줄곧 기도”(사도 12,5 참조) 하였습니다. 이러한 기도 덕분에 베드로는 천사의 인도로 무사히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사도 12,6-19 참조). 초대 교회가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도들의 활동은 모두 기도에서 그 힘과 원천을 얻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사도 3, 1-10; 5,12-16; 9,36-40 참조). 신자들은 사도들이 복음을 올바로 전하고, 치유와 표징을 나타낼 수 있도록 기도하였으며(사도 4,29-30 참조), 사도들은 기도와 안수로써 자신들을 도울 봉사자들을 선발하고(사도 6,2-4 참조), 직책에 걸맞은 능력을 청하며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사도 6,5-7 참조).

 

사도행전 안에서 기도는 첫 번째로, 안수와 함께 행해지는 경우가 많은데, 공적인 직무를 맡길 때(사도 6,6; 13,3; 1티모 4,14; 2티모 1,6 참조), 질병의 치유를 청할 때가(사도 28,8; 19,11 참조) 대표적입니다.

 

두 번째로, 기도는 환시와 자주 연결되어 등장합니다. 바오로가 대표적으로 그러했고(사도 9,3-8; 16,9; 22,17; 23,11; 27,23 참조), 바오로를 찾아왔던 하나니아스가 그러했으며(사도 9,10-16 참조), 이방인이었던 코르넬리우스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사도 10,2-6 참조).

 

이 밖에 기도는 단식과 병행하여(사도 13,1-3; 14,23 참조) 등장하기도 합니다. 초대 교회는 기도의 힘으로 탄생했고 생명력을 얻어 성장했습니다. 베드로를 중심으로 하는 사도단은 예루살렘과 유다에 거주하는 유다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말씀에 대한 헌신과 봉사, 그리고 기도를 가장 기본적이며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으로 가르쳤으며, 사도들이 일으키는 치유와 표징들은 반드시 기도를 바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교회가 이스라엘 내에만 머물지 않고 사마리아와 인근 지방에까지 진출했을 때에도, 코르넬리우스가 하느님을 믿을 때에도 일상의 기도 안에서 하느님의 특별한 메시지를 전달받았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이스라엘 밖에서의 복음화, 이른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도 기도가 반드시 동반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022년 12월 11일(가해) 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8면, 이상욱 안드레아 신부(소룡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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