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7일 (토)
(백)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알브랑의 생애와 성교리증(聖敎理證)』의 지향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3-20 ㅣ No.1510

알브랑의 생애와 『성교리증(聖敎理證)』의 지향*

 

 

국문 초록

 

『성교리증』은 1852년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알브랑(Etienne-Raymond Albrand, 1805~1853), 즉 임 스테파노[任斯德范] 주교가 초간한 포교서이다. 이 책은 해금(解禁) 이후 선교 과정에서 널리 사용된 교리서이며, 중국은 물론 한국과 일본의 선교현장에서도 활용되었던 책이다. 하지만 아직 연구가 초기 단계라, 이 논문에서는 알브랑의 생애를 자세히 소개하고, 알브랑이 이 책을 펴낼 때 의도한 방향을 밝히고 그것을 책 내용으로 증명하였다.

 

알브랑은 1832년부터 최초 파견지인 싱가포르 등에서 빈민들과 함께 살면서 전교활동을 하였으며, 이때 중국어를 익혀 해당 지역의 중국인을 주로 살폈다. 선교지 재배치 명령에 따라 1846년부터 귀주로 옮겨 전교 활동을 하였는데, 여기에서도 빈민을 직접 만나 전교하는 등의 활동을 활발히 하다가 여기에서 사망하였다.

 

논자는, 알브랑이 1852년에 초간한 『성교리증』의 지향을 크게 셋으로 나누었다. 첫째, 천주교가 바르고 참된 종교라는 것을 강조하는 데에 주력했다. 소위 의례논쟁의 결과로 100여 년간 금령이 내려졌다가 막 풀린 시기이기 때문에, 그는 적극적으로 천주교의 바름을 해명하고자 여러 항목을 배치하고 천주교가 ‘바르고 거룩한 종교’임을 직접 설명하는 데 힘썼다.

 

둘째, 알브랑은 일반 민중 중심의 선교 전략을 세우고 그것을 수행하는 도구가 될 수 있도록 이 책을 구성하였다. 일상에서 봉교인이 외교인의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있도록 문답을 구성하고, 최대한 쉬운 표현으로 설명하였다.

 

셋째, 이단을 논박하는 데에 역점을 두었다. 전체 항목의 절반 가까이를 이단 논박에 사용하였으며, 이때도 일상의 쉬운 예로 쉽게 설명하며, 많은 사람이 그 그릇됨을 깨닫고 정교로 돌아오도록 구성했다. 또 해당 지역 이단을 망라하여 논박하는 이런 특징 덕에 중국뿐 아니라 한국과 일본에서도 이 책이 포교용 교리서로 쓰일 수 있었다.

 

 

1. 서론

 

그리스도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동양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포교를 위하여 한문으로 쓴 책 및 선교사들이 쓴 과학기술에 관한 책 등을 통틀어 한문서학서(漢文西學書)라 한다. 신앙 문제를 담은 한문서학서는, 시기적으로 보면 미켈레 루지에리(Michele Ruggieri, 羅明堅)나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 등이 활동하던 명말청초의 한문서학서와, 소위 의례논쟁으로 내려졌던 천주교 금령이 남경조약 체결로 100여 년 만에 해제된 이후 나온 한문서학서로 나눌 수 있다. 저작 주체로 보면 마테오 리치 등 외국인 선교사들이 쓴 책, 서광계(徐光啓, 바오로) 등 중국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대부가 쓴 책, 중국인 신부들이 쓴 책이 있다. 이외에 이들 한문서학서를 논박하기 위해 천주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 즉 외교인(外敎人)이 쓴 서학 관련 자료들이 있는데, 이것도 한문서학서의 범주에서 다루어질 부분이다.

 

이 논문에서 주목하는 『성교리증』은, 시기적으로는 천주교 해금 이후의 것이며, 주체로는 외국인 선교사가 쓴 한문서학서이다. 이 책은 1852년 초간된 후 중국 각 지역에서 개정·중간(重刊)되었다. 중국 국립도서관 소장본들로 볼 때, 초판과 개정판들이 각기 1940년대까지 중판을 거듭하였다. 그러니 이 책은 최소 100여 년 정도 중국 전역에서 활용된 중요한 책이다.

 

명말청초에 나온 한문서학서는 상대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고 연구도 많지만, 해금 후 교세 확장을 위하여 다시 맹렬히 노력하던 때에 출간된 한문서학서에 관해서는 연구가 미진하다. 『성교리증』만 해도, 조선 성공회에서 이 책을 개정 출판할 때의 현지화 전략을 밝힌 서신혜의 연구가 최초였고, 바로 이어서 방상근의 서지 연구가 나왔을 뿐, 다음 연구는 진행되지 못하였다.1) 중국도 다를 바 없다. 『성교리증』의 개정·중간본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황백록본에 대한 연구만 최근에 나왔을 뿐이요2) 그밖에 한문서학서 일반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간단히 이 책이 언급되거나 목록에 소개되었을 뿐이다.

 

『성교리증』은 중국에서 활동한 선교사가 중국에서 펴낸 한문서학서이지만, 우리나라 선교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1891년 해학(海鶴) 이기(李沂, 1848~1909)가 대구에 갔다가 그곳에 있던 프랑스인 신부 로베르(A.P. Robert, 金保祿)로부터 『성교리증』이라는 책을 빌려 읽고는 둘 사이에 편지를 주고받으며 논쟁한 일이 있었다.3) 이것이 유학자와 외국인 선교사 사이의 최초 논쟁으로 기록된다. 또, 조선 성공회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하던 초기에 『성교리증』을 가져다가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수정하여 한문본 및 한글본 『성교리증』을 출간하여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니 이 책은 저자와 책 내용 자체에 대한 연구, 중국에서 발간된 여러 개정본에 대한 연구뿐 아니라 이 책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활용된 것에 관해서도 더 연구할 필요가 있다.

 

진행해야 할 연구가 많지만 지면 제약상 모두 말할 수는 없으므로, 이 글에서는 알브랑의 생애를 먼저 자세히 밝히고, 『성교리증』의 지향을 이 책의 내용 분석을 통해 제시하는 것으로 제한하고자 한다. 특히 내용 분석의 경우, 65항목 전체를 하나하나 다 분석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대표적인 내용 특성을 고려하여 크게 셋으로 나누었다. 사교(邪敎)와 구분 지어 정교(正敎)임을 강조하려는 특성, 일반 민중 중심의 선교 전략을 실행한 특성, 민간 미신 타파에 집중한 특성이 바로 그것이다.

 

 

2. 알브랑[任斯德范]의 생애와 『성교리증』의 연관성

 

『성교리증』은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귀주 대목을 역임한 알브랑, 즉 임 스테파노[任斯德范] 주교가 편찬한 책이고, 1852년에 자모당(慈母堂)에서 초간한 한문 교리서이다. 표지에 책 제목과 자모당장판(慈母堂藏板)이라는 표시 외에 ‘천주강생 1852년 감목 임사덕범 정교(天主降生 一千八百五十二年 監牧 任斯德范 訂較)’라 표시되어 있다. 사덕범(斯德范)은 세례명 스테파노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므로, 『성교리증』은 1852년에 알브랑이 ‘정교(訂較)’한 책이라는 표시이다.

 

먼저 짚어야 할 것은 알브랑이 ‘정교(訂較)’했다는 표현이다. 정교는 ‘교정한 사람’이라는 말이므로 엄밀하게 말하면 알브랑을 저자라 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정교’라는 단어를 협의의 의미로 볼 것인가, 광의의 의미로 볼 것인가, 혹은 겸양의 표현으로 볼 것인가 사실적 표현으로 볼 것인가에 따라 의미는 달라질 수 있다.

 

중국 천주교회 등에서 나온 여러 자료나 연구들, 이 책에 대한 여러 개정 · 중간본 등에서 그를 저자로 인정하고 있다. 바티칸 교황청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1859년본(PACCOLTA GENERALE-ORIENTE-V.446)4)에도 그렇다. 또 근래 중국에서 나온 연구에서, ‘『성교리증』은 임씨(任氏)가 구술한 것을 전교선생(傳敎先生)이 필기해서 출간한 것’5)이라는 내용이 보고되었다. 방상근6)도 이 책 저자를 알브랑으로 소개하는 여러 예를 들어 그를 저자로 제시하였다.

 

또 서문인 「성교리증소인(聖敎理證小引)」(이하 「소인」)에서 알브랑이 책을 쓰게 된 계기와 사용한 서적 수준, 책의 활용법까지 자세히 안내한 것으로 보아, 알브랑이 한 ‘정교’라는 역할은 단순하고 지엽적인 작업 이상의 광의의 의미로 볼 수 있다. 외국인 선교사에게는 아무래도 언어적인 한계가 있으므로 현지인의 도움을 받아 한문서학서를 작성하는 것이 당대 일반적이었고, 이 경우에도 대부분 선교사의 저작임을 인정하고 있다. 또 본문에서 지적하겠지만, 『성교리증』에는 『천주실의』 등 기존 한문서학서류의 여러 서적의 내용을 참고하여 요약 제시하면서 논리에 대한 근거로 삼은 부분도 있다.

 

이를 종합할 때, 알브랑의 역할은 단순한 교정으로 볼 수 없고, 또 감수하여 인준한 정도에도 그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논자는, 알브랑이 자신의 생각과 경험 등을 이용하여 적극적으로 이 책을 편저했다고 본다. 이제 『성교리증』의 편저자 알브랑의 생애와 저작의 관계를 살피도록 하겠다.

 

알브랑, 즉 임스테파노 주교에 대해서는, 1865년에 발간된 그의 전기(傳記)7)가 있어서 이것을 통해 자세한 사항을 알 수 있다. 또 그의 소속 수도회인 파리외방전교회 및 첫 파견지인 싱가포르와 태국 천주교회 자료, 두 번째이자 최종 선교 파견지인 중국 천주교회 귀주교구의 역사자료 등에서도 그의 생애와 활동 자료를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이를 종합하여 그의 생애에서 주요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알브랑은 1805년 5월 4일 프랑스 남동부 가프(Gap) 교구에 속한 생 크레팽(Saint-Crépin)에서 태어나 1826년 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829년 6월 19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1831년 12월 파리외방전교회(La Société des Missions Etrangères de Paris)에 입회하여 1832년 3월 13일 파리를 떠나 태국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그는 당시 신생 도시인 싱가포르에서 선교활동을 하였다. 파리외방전교회는 싱가포르에 거주하며 종교 활동을 한 최초의 수도회이며, 그중에 알브랑은 싱가포르에 거주하며 선교활동을 한 최초의 선교사로 기록되어 있다.8) 이때 쿠르베지(J-P-H. Courvezy) 주교가 시작한 성당(지금의 봉 파스퇴르[Bon-Pasteur] 교구의 중앙에 있는 성당) 건축을 이어 완성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이 무렵 중국인 요리사에게 중국어를 배워 그곳에 있는 중국인들을 중심으로 선교했고, 1839년에 싱가포르를 떠나9) 방콕 등 태국 여러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도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선교에 집중하였다.

 

1846년 8월에 알브랑은 중국 선교사로 자리를 옮기라는 명을 받아 마카오를 거쳐 1847년 6월 중국 귀주(貴州)에 도착했다. 당시 알브랑이 중국 귀주로 자리로 옮기는 것은 천주교와 유럽의 정치 상황이 작용한 결과였다. 포르투갈 국왕이 가진 보호권(保護權, Padroado)10)을 견제할 목적으로 교황청에서는 정식으로 교계제도가 설정되지 않은 교구에, 교황청에서 직접 관할하는 교구를 만드는 이른바 대목구제(代牧區制)를 실시하였는데, 이 제도에 따라 대목구의 하나로 확정된 곳 중 하나가 귀주이다. 대목구로 확정된 것은 1695년이지만 100여 년의 천주교 금교 시기 등으로 인하여 교계(敎界)의 변동이 본격으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가 해금 이후에야 수도회 별로 선교지 분할 문제가 논의되었다. 그 과정에서 기존에 라자로회 관할 선교지에 있었던 귀주가 1846년에서야 비로소 독립 교구로 분리되었다.11) 알브랑 주교가 1846년에 중국 선교사로 재배치받아 귀주에 간 것이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알브랑 주교의 이력을 말하면서 ‘주교’였다고 하지 않고 귀주 ‘대목구장’을 역임했다고 기록되는 이유는 바로 위와 같이 대목구 제도와 연관해서이다.

 

알브랑은 귀주성(貴州省)의 성도(省都)인 귀양(貴陽)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하였다. 특히 그는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여관에 묵고 노상 전교를 하는 등 일반 민중을 대상으로 한 직접 선교 방식을 취하였다. 또 그는 약국을 설치하여 빈민들에게 무료로 약을 주고 고아들을 구제하기도 하였다. 이 약국의 이름이 부생당(復生堂)이며, 알브랑 사후에도 이 약국은 계속 발전하여 1855~1856년에 따로 건물을 세워 운영하기도 했는데, 이 약국을 그린 그림12)도 남아 당시 빈민들이 줄을 서서 이 약국을 찾는 모습이 담겨 있다. 또 알브랑은 귀양에 교회를 세웠고, 소규모의 천주교 수도 공동체를 세우기도 하였다. 1849년부터 1853년 사망할 때까지 귀주 대목구장으로 활발히 일하던 그는, 장티푸스에 걸려 1853년 4월 22일에 사망하였다. 이 시기 교회 자료에 따르면 1847년 1,200명이던 천주교 신자의 숫자가 1853년 2,200명으로 증가한 것으로 나온다.13) 그의 활동의 결과를 이로써 짐작해 볼 수 있다.

 

알브랑은 중국에 처음 왔을 때 백(白)씨 성을 사용하였으나 1849년에 교안(敎案)을 겪은 후에는 임(任)씨로 바꾸었다. 그래서 현재 천주교 귀주교구 홈페이지에는 초대 주교 이름이 백 스테파노(白斯德范)로 되어 있고,14) 『성교리증』은 성을 바꾼 후인 1852년에 편찬한 것이라 ‘임 스테파노’로 표시된 것이다.

 

 

3. 『성교리증』의 지향과 내용 특성

 

『성교리증』은 외교인(外敎人)의 질문에 봉교인(奉敎人)이 답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질문 내용을 항목 제목으로 삼았다. 다음과 같이 총 65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1. 論天主二字之解 / 2. 論謂天主全能全知全善 / 3. 論天主爲何生人有惡 / 4. 論爲何天主生猛獸害人 / 5. 論一主難以管天地萬物 / 6. 論天主從誰而生 / 7. 論何謂天主無終 / 8. 論何人看見天主 / 9. 論四書五經内未有天主之名 / 10. 論爲何從儒敎不足, 必該從天主之敎 / 11. 論爲何不敬孔子 / 12. 論孔子言天不言主 / 13. 論爲何不敬祖宗 / 14. 論燒錢紙之妄 / 15. 論不拜死屍 / 16. 論天堂地獄 / 17. 論魂有三等 / 18. 論神人鬼三樣 / 19. 論爲何天主准魔鬼出世害人 / 20. 論魔鬼害人之故 / 21. 論爲何天主許魔陷人于永苦 / 22. 論天主公義何在 / 23. 論天主爲何不罰惡人, 爲報善人之仇 / 24. 論爲何天主不均分財帛于人 / 25. 論爲何稱天主敎爲聖敎 / 26. 論奉敎人守何誡 / 27. 論守誡之人少 / 28. 論爲何帝王不遵聖敎 / 29. 論不可言外國之敎不當從 / 30. 論異端 / 31. 論貼神字或五字牌 / 32. 論風水 / 33. 論擇日 / 34. 論算命 / 35. 論相面 / 36. 論占卦求籤測字 / 37. 論神祇菩薩 / 38. 論帝王無封神之權 / 39. 論佛 / 40. 論輪廻托生 / 41. 論老君或老聃 / 42. 論玉皇 / 43. 論觀音 / 44. 論梓潼 / 45. 論眞武 / 46. 論天妃或天后 / 47. 論城隍 / 48. 論蕭公 / 49. 論晏公 / 50. 論關羽 / 51. 論許眞君 / 52. 論財神 / 53. 論社稷 / 54. 論閻王 / 55. 論張天師 / 56. 論神仙 / 57. 論長齋或密密敎 / 58. 論齋肉不齋蛋, 又不禁水族等物 / 59. 論何故聖敎不許娶妾 / 60. 論爲何敎内多女守貞不嫁 / 61. 論爲何傳道之人離家不事父母 / 62. 論傳敎士不婚的好處 / 63. 論不可言奉敎爲難 / 64. 論外敎人雖行善功難得天堂眞福 / 65. 論奉敎不可遲緩

(앞의 숫자는 편의를 위해 논자가 붙인 것임.)

 

이 항목들을 내용별로 구분하면 대체로 이렇게 나눌 수 있다. 제1~8항은 천주에 대한 설명, 제9~29항은 중국의 생활·문화와 연관한 천주교 교리 설명, 제30~57항은 중국 이단에 대한 논변, 제59~62항은 천주교 규율에 대한 일반인의 오해 해명, 제63~65항은 믿음으로의 초대이다. 9~29항 중 일부는 천주에 대한 설명으로, 또 일부는 이단 설명으로도 분류할 수 있으나 전반적인 배치 순서를 존중하며 내용을 구분할 때 이와 같다.

 

이 책은 1852년 초간 된 이래 여러 사람이 여러 번 개정 · 중간(重刊)하였다. 1858년 라자로회 소속 북직예 대목구 물리(J.M. Mouly, 孟振生, 1807~1868) 주교 중간본, 1863년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귀주 대목구 포리(L.S. Faurie, 胡類斯, 1824~1871) 주교 중간본도 있다. 예수회 소속 중국인 신부 황 베드로(Pierre Hoang, 黃伯祿, 1830~1909)는 1878년과 1884년에 각각 중간본을 펴냈다. 이밖에 이 책의 요약본도 있고, 이 책과 다른 책을 모아서 새로운 책으로 출간한 것들까지 있다. 항목으로만 볼 때, 이들 중간본은 대체로 초간본인 알브랑본 65항목 중에서 극소수의 항목만 합치거나 빼거나 더하여 출간하였다.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도 이 책이 개정 · 출간되었는데, 이단 항목 부분에서만 항목 출입이 있을 뿐 전반적인 항목 구성과 내용은 초간본과 거의 같다.

 

이 책에 있는 65항목 하나하나를 다 분석할 수는 없다. 다만 이 책의 지향과 특성을 구분하며 중간중간 내용을 인용하는 것으로도 이 책을 이해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1) 사교(邪敎)와 구분 지어 정교(正敎)임을 전하다

 

이 책의 제목은 “성교리증”이다. 성교(聖敎)는 문자 그대로는 ‘거룩한 가르침’이라는 뜻이므로 어느 철학, 어느 종교에서건 사용할 수 있는 단어이지만 명·청 시대에 ‘성교’라고 하면 주로 천주교를 가리켰다.

 

이증(理證)은 종교를 전파하는 방식 중 하나이다. 종교를 전파하는 방식에는 이론적 근거, 즉 교리로 전하는 ‘이증’이 있고, 또 문서 즉 경전의 내용을 근거로 전하는 문증(文證)이 있으며, 가르침의 실천 결과가 실제로 사회에서 드러난 것 혹은 그런 실천을 한 인물의 행적을 근거로 전하는 현증(現證)이 있다. 현증은 신증(信證)이라 하기도 한다. 예컨대 1647년 한림(韓霖)과 장갱(張賡)이 펴낸 『성교신증(聖敎信證)』이라는 한문서학서가 있다. 당시까지 중국에서 활동한 예수회 선교사 91명의 이름과 생몰년, 그들의 간략한 이력, 저술 등을 기록해 둔 책이다. 믿음의 행적을 증거로 성교회를 전한 책이라서 ‘신증’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이다. 전기 한문서학서에 ‘신증’ 방식의 한문서학서가 있었던 것처럼, 후기 한문서학서에 ‘이증’의 방식으로 천주교를 전하려 한 예가 바로 『성교리증』인 것이다. 요컨대 이 책 제목은 ‘거룩한 교회를 이론적으로, 교리로 증거하는 책’이라는 의미로 붙인 것이다.

 

“성교리증”이라는 제목이야말로 이 책의 내용과 지향을 한마디로 드러낸 것이요, 전체적인 표현이나 구성도 이런 제목에 맞도록 집중되어 있다.

 

첫째, 이 책은 천주교가 다른 사교(邪敎)나 미신과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명칭에 신경을 썼다. 다른 이단 종교들과의 변별성을 높이고 오랜 시간 이어온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천주교 스스로 ‘성교’라고 지칭한 것은 다른 한문서학서들에서도 여럿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은 이것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인 것이 드러난다.

 

이 책에서는 전반적으로 성교(聖敎)라는 단어를 주로 사용하였고(26회), 그다음으로 천주교(天主敎)라는 단어를 많이 썼다(16회). 그 외에도 성교회(聖敎會, 2회), 천주정교(天主正敎, 3회), 천주성교(天主聖敎, 2회)라는 표현을 섞어 써서 천주교가 곧 거룩한 가르침[聖敎]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성교라는 표현과 동시에 ‘정교(正敎)’라는 표현도 의도적으로 많이 썼다(6회). 심지어 28항에서는 진교이자 정교[眞敎正敎]라고 더욱 강조하기도 하였다. ‘바름[正]’, ‘참[眞]’이라는 용어는 다른 사교(邪敎)와 의도적으로 구별되도록 표현한 것이다.

 

둘째, 천주교가 다른 ‘그릇된 이단’과 다르다는 것을 여러 항목에서 드러내놓고 말했다. 예컨대 25항은 제목부터가 「왜 천주교를 성교라 하는지 논하다(論爲何稱天主敎爲聖敎)」이다. 천주교가 ‘성교’라는 것을 직접적인 표현으로 설명하는 것이므로 더 말할 것이 없겠다. 28항에서는 더욱 강하게 이 점을 말했다. 여기에서 외교인이 던진 문제는 이렇다.

 

“성교회가 참 종교이고 바른 종교라면 어찌하여 제왕이 따르며 높이지 않고, 도리어 때때로 이를 금지하고 없애려고 하였는가? 대개 위에서 행하면 아래에서 본받는 것이 세상 사람의 일반적인 규칙이니, 만약 제왕이 봉교하고 천주를 공경한다면 아래 백성도 모두 그러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15)

 

외교인이 문제 삼은 것은 왕이 금한 종교라는 사실이었다. 참 종교 바른 종교가 아니기에 제왕이 금하고 따르지 않은 것 아니냐는 질문이다. 천주교 금령(禁令)이 막 풀린 시기에 새로 선교활동을 시작해야 하는 입장에서 중요하게 다룰 질문이다.

 

이에 대해 봉교인은 먼저 “종교가 참인지 거짓인지는 윗사람이 행하고 아랫사람이 본받는 것으로 증거를 삼지 않고 다만 도리가 진실인지 아닌지만 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도리가 진실이면 그 종교는 참이고, 도리가 허망하면 그 종교는 그릇된 것이다.”16)라고 전제하고는, 진시황부터 송나라 휘종 등에 이르기까지 임금들이 불교에 혹은 도교에 심취했다가 내쳤다가를 반복한 예들을 나열했다. 그러고는 ‘왕이 금한 종교이니 따르지 못한다’는 외교인의 질문에 대해 쐐기를 박는다.

 

각각의 임금이 그 종교가 참이거나 거짓인 이유를 따지지 않았던 까닭에 떠들썩하게 받아들였다가도 어쩌다 다른 뜻이 생기면 각기 한 종교를 향하고 나머지 종교는 탄압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조정에서 따르는 종교인지 내치는 종교인지를 가지고는 따를 만한지 따를 만하지 않은지 따질 수 없고, 다만 이치에 맞는지 어긋나는지를 따져야 한다.17)

 

임금은 이유도 따지지 않고 이랬다저랬다 했다. 오직 임금이 따르는지 여부가 아니라 그 종교 자체의 참 거짓을 따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후에 천주교 금령에 대해서도 직접적으로 설명을 한다.

 

건륭 황제 이후로는 천주교가 여러 차례 금지령을 받았으나 까닭을 살펴보면 모두 천주교가 바르지 않거나 참되지 않거나, 말썽을 일으켜 잘못을 해서가 아니었다. 다른 종교의 무리가 질투로 부추기거나 요망한 말로 비방한 까닭이었고, 혹 덕이 없는 관리가 남에게 뇌물을 받고 천주교와 이단 사교를 섞어서 떠들썩하게 위에 망령되이 보고하였는데, 조정에서 속아서 이를 금지하거나 없애려 한 것이다.…그러나 도광(道光, 청나라 선종) 25년(1845) 성교의 근원을 밝히 조사하여 천주교가 참되고 선함을 알고는, 곧 각 성에 유지(諭旨)를 여러 차례 반포하기를, “천주교는 선을 권하고 악을 경계하는 것을 근본으로 하여, 다른 그릇된 종교와는 같지 않으므로, 널리 인민이 배우고 익히도록 인준하니 금지하거나 방해하지 말라. 각 장소에 수경당(修經堂)을 세워 또한 편리하게 들을 수 있도록 하라.” 하였다.18)

 

한마디로 건륭제 이후 천주교 금령이 내려진 것은 교리의 잘못됨 때문이 아니라 다른 무리의 질투로 인한 책략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교인 천주교가 사교인 이단들과 섞여 오해받았을 뿐이다. 덧보태어, 금령 해지를 명한 유지(諭旨) 일부를 제시했다. 특히 천주교가 ‘그릇 종교’와 다른 ‘참된 종교’라는 부분을 직접 인용하면서 그 강조점을 명확히 했다.

 

이처럼, 금령이 풀린 직후이기 때문에 ‘황제가 금지한 종교’라는 인상을 씻기 위해서라도, 『성교리증』에서는 천주교를 두고 ‘성교’라는 명칭을 더 자주 썼고, 이에 덧보태어 직접적으로 천주교가 ‘진교’이며, ‘정교’이지 사교가 아님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셋째, 이 밖에 일일이 다 인용하고 설명하지는 않지만, 다른 항목들의 설명이나 단어 표현도 해금 직후의 상황에 대한 대응 전략에 맞춰져 있음을 볼 수 있다.

 

바로 이어지는 29항 「외국의 종교라 따라서는 안 된다고 할 수 없음을 논하다(論不可言外國之敎不當從)」에서, 외교인은 천주교가 비록 참되다 해도 외국 것이라 따를 수 없다19)고 한다. 이에 대해 봉교인은 불교도 외국에서 왔으나 당신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느냐 반문하며 ‘외래 유입’이라는 특징에서 볼 때 천주교와 불교를 같은 자리에 세웠다. 하지만 내용 면에서는 불교를 말할 때는 항상 ‘그릇된 종교[佛氏之邪敎]’라는 수식어를 추가하며 설명했다. 그릇됨[邪]은 바름[正] 혹은 참됨[眞]과 대비되는 단어이다. 불교를 말하면서 특별히 ‘그릇됨[邪]’이라는 표현을 써서 의도적으로 강조한 것이다.

 

「이단에 대해 논하다(論異端)」에서도 이런 의도적 대비·강조가 이어진다. 외교인이, ‘천주를 공경하는 것은 마땅하지만 오자패를 붙이는 일 등 세속에서 하는 모든 버려야 한다는 것은 과도하다’고 문제를 제기한다. 이에 대해 봉교인은 “그릇됨과 바름은 나란히 갈 수 없다.…미세한 검은 점 하나라도 찍히면 순백이라고 할 수 없으니, 그릇됨은 바름을 받아들일 수 있어도 바름은 그릇됨을 받아들일 수 없다.”20)고 단호히 선언하였다. 앞서 제시한 항목들처럼 그릇됨과 바름을 대비하여, 천주교가 바르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자 한 알브랑의 저술 의도를 확인할 수 있다.

 

넷째, 항목 구성 순서를 주목해 보더라도 알브랑의 저술 의도가 천주교를 다른 이단의 ‘그릇됨’과 구별하고자 한 것에 있음이 드러난다. 앞서 본대로 25항 및 28~30항에 걸쳐 다른 그릇된 것들과 구별되는 천주교의 바름을 강조한 후에 바로 이어서 총 28개 항목을 할애하여 이단들을 하나하나 논박하는 내용으로 구성했다. 30항에서 외교인이, 천주교 외에도 ‘이러저러한’ 다른 것들에도 바른 것이 있지 않느냐 했던 그 말을 받아, 그가 ‘이러저러한’ 예로 든 것들을 먼저 하나하나 논박하고 추가로 봉교인이 당시 사회에 횡횡하는 삿된 이단에 대해 하나하나 논박한다. 그렇게 하여 31항 「신 자 패와 다섯 글자 패를 붙이는 것을 논하다(論貼神字或五字牌)」부터 57항 「장재 또는 밀밀교에 대해 논하다(論長齋或密密敎)」까지가 이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길고도 철저하게 이단을 공박함으로써, 천주교는 그것과 다른 정교라는 구별을 명확히 한 것이다.

 

요컨대, 이 책에서는, 천주교가 ‘성교’이며 ‘정교’이며 ‘진교’라는 사실을 말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는 것이 명확하다. 이런 특징은 이 책이 나온 시대적인 맥락과 연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의례논쟁(儀禮論爭)의 여파로 1724년 강희제가 천주교 선교 금지령을 내렸다가, 아편전쟁 패배의 결과로 맺은 남경조약으로 1840년에 와서야 천주교 선교가 다시 허가되었다. 100여 년이 넘는 금지령 시대에 천주교는 ‘황제에 의해 금지된 그릇된 종교’라는 인식이 퍼져 있었다. 그런 분위기 가운데 포교서 『성교리증』이 나온 것이고, 그 시대와 관련하여 강조점을 조절했던 것이다.

 

2) 일반 민중 중심의 선교 전략을 실행하다

 

『성교리증』의 또 다른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일반 민중 중심의 선교 전략을 분명히 하였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알브랑은 싱가포르 및 방콕 등에서 활동하던 시기부터 이미 빈민 가운데 살면서 직접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선교하는 방식을 택하였다.21) 특히 파견 초기 싱가포르에서 활동할 때, 1829년 페낭 사절단으로 왔던 어느 인물의 전도로 개종한 중국인 요리사와 친하게 지내며 중국말을 배워22) 그 지방에 사는 중국인을 위한 선교활동에 집중하였다. 쿠르베지 주교는, 다른 선교사들과 구별하여, 알브랑에게 특별히 방콕에 있는 중국인들의 개종 업무에 집중시키기도 했다.23) 중국어를 익히고 빈민과 함께 살면서 중국인들을 돌본 선교 방식은 중국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1847년 6월 중국 귀주로 임지를 옮긴 이후에도, 알브랑은 빈민가에서 선교활동을 했다. 알브랑이 빈민들을 위해 세운 부생당이라는 약국의 존재가 이를 대변해 준다. 알브랑은 그렇게 빈민들을 위한 전도 활동에 힘쓰되, 현지인들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며’ 선교하는 방식을 사용했고 그것의 증거가 바로 이 책 『성교리증』이다. 「소인」을 보면 그 내용이 더 명확해진다.

 

일찍이 내가 보니, 많은 교우들이 문리가 낮고 얕아 외교인의 조잡한 질문에도 답하지 못하여 끝내 말이 막히고 이치에서 멀어지고 말아서, 성교회의 빼어난 이름을 어지럽히고 외교인의 비웃음을 사게 되기까지에 이르니, 진실로 슬픈 일이다. 이제 내가 천박하고 좁은 식견을 가졌지만 피하지 않고, 여러 책 중에서 가장 쉬운 말을 널리 모아 한 책을 이루고 이름하기를 『성교리증』이라 하였다. 이것으로 외교인이 평소에 묻는 것에 답하여서 그들 마음을 굴복시키고 그들의 의혹을 해소해 주면, 비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면하면서도 어쩌면 그들이 성교를 믿도록 이끌 수도 있을 것이다.24)

 

알브랑이 문제의식을 느꼈다고 한 장면은 교우들과 외교인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다. 교우들이 문리가 낮고 얕아 외교인이 하는 아주 기본적인 질문조차 답을 못하거나 엉뚱하게 답해서 성교회에서 더욱 멀어지게 만들므로 교우들의 ‘문답 전도’를 위한 책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직접 전도에 의한 포교 방식을 스스로도 하고 교우들에게도 권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소인」 뒷부분에서는 ‘어떻게’ ‘문답’하며 이 책을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도 말한다. “또 마땅히 논박하는 법을 알아야 하니, 예를 들어…(又當知辨駁之法, 比如…)” 하면서 자세히 말하는데, 요약하면 이렇다.

 

① 상대가 논박하려 할 때, ‘오직 이치’로 ‘시비’를 명확히 답변하겠다고 말하여 신뢰를 쌓아라. ② 상대가 먼저 묻기를 기다려 그 물음에 대한 답을 하라. ③ 만약 상대가 먼저 입을 열지 않으면, 도를 분명히 해야 믿든지 말든 할 것이니 마음에 의혹이 있거든 거리끼지 말고 말해 보라고 권하라.25)

 

이렇게 책 활용법까지 자세히 안내하면서 직접 만남과 문답을 통한 선교의 도구로 마련해 준 것이 바로 이 책인 것이다. 사람들을 직접 만나고 직접 이야기를 나누어 선교하는 이 방식이 바로 알브랑의 선교 방식이요, 그가 이끈 교우들의 선교 방식이었던 것이다.

 

또, 선교하는 대상이 학식 높은 사대부들, 고위 관리들이 아니라 일반 민중이었던 것도 잘 드러난다. 위에 인용했듯이, 알브랑은 교인들이 ‘조잡한 질문’에도 답을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고, 여러 책 중에서 ‘가장 쉬운 말’을 널리 모아 한 책을 이루었다. 깊이 있는 논박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받을 수 있는 가장 쉬운 질문들에 대해 ‘가장 쉬운 말로’ 답할 수 있도록 정리한 것이다.

 

실제로 『성교리증』에서 인용하고 증명하는 데 사용한 책은 매우 기본적인 유학 서적이어서 일반 민중들도 대체로 아는 책들이었다. 유학 서적 중 사서삼경을 인용하더라도 비교적 잘 알려진 구절만 인용하였다. 또 사서삼경을 인용하면서도 전체적으로 볼 때는, 9항 「사서오경에 천주라는 명칭이 없는 것을 논하다(論四書五經内未有天主之名)」 등 일부 항목에서만 유교 경전 등을 인용했고, 나머지 부분에서는 일상의 논리로 설명하고 서적 인용은 최소한으로 했다.

 

또, 같은 내용이라도 사서삼경에서 직접 인용하지 않고, 송나라 왕응린(王應麟)이 유교 경전을 발췌해서 만든 『삼자경(三字經)』이라는 기초 교육 서적을 이용함으로써 좀 더 쉽게, 좀 더 기본적인 내용으로 설명하려고도 했다. 예를 들어 3항 「왜 천주는 사람에게 악이 있도록 하셨는지 논하다(論天主爲何生人有惡)」에서 사람의 성질이 습관에 따라 달라진다는 내용을 말하면서 『논어』 「양화」편의 “성품이 서로 가까웠지만 습관이 서로 멀어지게 했다(子曰, 性相近也, 習相遠也).”를 인용하지 않고, 『삼자경』에 있는 4구 표현을 그대로 사용해서 “사람은 처음에는 성질이 본래 선하다. 성질이 사람마다 비슷하나 습관에 따라 서로 달라진다(人之初, 性本善. 性相近, 習相遠).”라 하였다. 11항 「어찌하여 공자를 공경하지 않는지 논하다(論爲何不敬孔子)」에서 공자가 항탁을 스승으로 삼았다는 내용을 말하면서도 『사기(史記)』 「감무열전(甘茂列傳)」 구절을 인용하지 않고, “또 『삼자경』에 이르기를 ‘옛날에 중니가 항탁을 스승으로 삼았다’ 하였으니(又三字經曰, 昔仲尼, 師項橐…)”라며 『삼자경』에서 인용한다.

 

질문으로 선택된 내용만 하더라도, 학자들의 논쟁거리라기보다 일상의 선교현장에서 만나기 쉬운 비근한 질문을 선택했다. 유학자들의 관심거리인 태극(太極), 인성·물성(人物性), 이기(理氣) 등의 문제는 구체적으로 다루지도 않았다.

 

이 책의 항목으로 구성한 질문은 이런 것들이었다. 천주가 있다면 왜 맹수가 사람을 해치도록 놓아두는지(4항), 세계는 넓으니 천주 한 분이 다 다스리기 어렵지 않을지(5항), 왜 천주가 악인을 벌하여 선인의 원수를 갚아주지 않는지(23항), 왜 천주가 모든 사람에게 재물을 고루 나누어 주지 않는지(24항) 등을 질문으로 구성하였다. 이것들은 옛날에도 그렇고 지금도 성교회를 모르는 사람들이 질문할 만한 내용이다.

 

또 성교회의 교리나 규칙에 대한 질문으로 구성한 것도 사람들이 일상에서 자주 질문하는 것들이다. 왜 성교에는 혼인하지 않는 여인(정녀)이 많은지(60항), 왜 선교사는 자기 부모를 섬기지 않고 집 떠나 여기 와 있는지(61항), 선교사(신부)는 왜 결혼을 하지 않는지(62항) 등을 묻는다.

 

이렇듯 질문 항목만 보더라도 이 책을 통해 이야기를 나누고 문답하여 성교로 이끌고자 하는 선교 대상자가 사대부나 학자가 아니라 일반 민중들, 가까운 주변에서 늘 만나는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알브랑의 선교 방식이 이 책 항목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이 있다. 알브랑이 취한 선교 전략은 마테오 리치를 비롯한 예수회의 선교 전략 및 그들의 책과 연관이 있는 것이 확실하다는 점이다. 알브랑은 확실히 그것을 염두에 두고 이 책을 편찬하였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명말청초에 활동했던 마테오 리치 등 예수회 선교사들이 취한 선교 원리는 소위 적응주의 원칙이었다. 현지의 문화를 최대한 인정하는 차원에서 선교를 한다는 원칙에 따라 조종(祖宗)에 대한 제사도, 공자 숭배도 인정하고, 상제(上帝)를 Deus의 번역어로 인정하기도 하였다. 이런 원리에 따라 예수회 선교가 크게 성공을 거두자 후발주자인 도미니코회, 프란치스코회, 파리외방전교회 등 다른 수도회에서 이를 문제 삼아 의례논쟁이 나고 그것이 결국 천주교 금령까지 이어졌다.26)

 

의례논쟁에서 핵심이 되는 세 가지 중에 조종에 대한 제사, 공자 숭배에 대해서는 알브랑도 인정하지 않았다(11항, 13항). 하지만 상제를 Deus의 명칭으로 할 수 있느냐는 문제에서는, 알브랑은 마테오 리치 등 예수회의 주장을 수용했다.

 

그 내용과 연결되는 것이 8항과 9항이다. 문제가 되는 구절은 8항의 “우리들이 공경하는 천주는 곧 사서오경에서 ‘상제’라고 일컫는 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當知, 我等所敬之天主, 卽四書五經內所稱之上帝也).”와 9항의 “앞에서 설명하였으니, 우리들이 공경하는 ‘천주’가 곧 사서오경에서 말하는 ‘상제’라는 것은 당연히 알았을 것이다. ‘천주’라는 두 글자는 ‘상제’라는 두 글자와 음은 비록 같지 않지만 의미는 다름이 없다(先已說明, 當知我等所敬之天主, 卽四書五經內, 所稱之上帝. 天主二字, 與上帝二字, 音雖不同, 義理無別).”이다.

 

마테오 리치는 『천주실의』 상권 2편 「세상 사람들이 천주를 잘못 알고 있는 것에 대해 해석한다(解釋世人錯誤天主)」에서 경서의 여러 용례를 설명하면서 “서양에서의 ‘천주’는 중국말 ‘상제’와 같다. 도가에서 빚어 만든 현 제옥황의 소상과는 같지 않다.…옛 경서들을 살펴보면 상제와 천주는 다만 이름만 다를 뿐임을 알 수 있다(吾國天主卽華言上帝. 與道家所塑玄帝玉皇之像不同. …歷觀古書, 而知上帝與天主, 特異以名也).”라고 했다. 『성교리증』 8항과 9항의 표현이 이 책 『천주실의』와 거의 같음을 알 수 있다.

 

단순히 표현이 비슷한 것이 아니라, 알브랑이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를 보고 직접 그것을 받아들여 인용한 것을 보여주는 증거도 있다. 위에 말한 대로 9항에서 ‘상제와 천주가 음만 다를 뿐 뜻이 같다’는 표현 바로 다음에 이렇게 써 놓았다.

 

명나라 왕조 때에 우리들 성교회의 책에서 ‘천주’를 ‘상제’라 하였다. 다만 성교회 밖에 있는 자 중에 ‘상제’라는 명칭을 섞어서 써서 ‘옥황’을 상제라고 하는 자, ‘진무’를 상제라고 하는 자, ‘노군’을 상제라고 하는 자가 많았기 때문에 우리들이 따로 ‘천주’라고 불러서 삿된 신[邪神]의 부류와 섞이게 되는 일을 면하려 한 것이다.27)

 

명나라 왕조 때 ‘천주’를 ‘상제’라 한 성교회의 책은 당연히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이다. ‘천주와 상제는 같다는 표현 바로 다음에 위에 인용한 것과 같은 표현을 이었으니 확실하다. 또한 설명을 덧붙여 외교인이 옥황과 진무와 노군에 ‘상제’라는 표현을 함부로 붙여 섞어 버린 탓에 구별하기 위하여 ‘천주’라는 명칭을 따로 정해서 부른 것이라 했다. 구별하려고 ‘천주’라는 명칭으로 따로 부를 뿐이라고 했으므로, ‘천주’가 ‘상제’와 같다는 것을 한 번 더 말한 것이다. 알브랑이 실수로 ‘상제’와 ‘천주’가 같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명확히 그 둘이 같다고 반복해서 설명함으로써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를 따르고 있음을 명확히 했다.28)

 

파리외방전교회는 예수회의 적응주의 원리에 반대 입장을 취했으나, 알브랑은 ‘상제’라는 용어 사용에 대해서는 자신의 소속 수도회 입장과는 분명히 다른 의견을 가졌다는 것을 이 책에 분명히 드러냈다. 이것이야말로 알브랑의 독특한 생각이 담긴 표현이다.

 

이런 알브랑의 사상은 이후 이 책이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개정 · 중간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알브랑의 『성교리증』을 개정해서 펴낸 것은 여러 종류이다. 1858년 라자로회 소속 북직예 대목구 물리 주교 중간본, 1863년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귀주 대목구 포리 주교 중간본, 1878년과 1884년 등 두 차례에 걸쳐 펴낸 예수회 소속 중국인 신부 황 베드로 중간본 등 여러 판본이 있고, 우리나라 성교회에서 개정하여 편찬한 것도 있는데, 이들 모든 판본에서 ‘상제’가 ‘천주’와 같다는 표현은 삭제되었다. ‘상제’를 ‘천주’와 같은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알브랑만의 독특한 생각이었던 것이다.

 

다른 수도회나 선교사들과 달리, 알브랑은 사서오경에 나오는 ‘상제’라는 명칭이 ‘천주’와 다른 것이 아니라, 사교(邪敎)들에서 ‘상제’라는 표현을 여기저기에 함부로 사용함으로써 ‘상제’라는 명칭을 오염시킨 것이 문제임을 제시하였다. 세상에서 그릇되게도, 옥황을 옥황상제라 부르고, 진무를 진무현천상제(眞武玄天上帝)라 부르며, 노군을 원시상제라고 부르면서 벌어진 문제라는 것이다. 이 세 가지에 대해서는 이단을 논박하는 41항·42항·45항에서 각각 다루어 이것들이 사교(邪敎)이며 전혀 ‘상제’라 부를 수 없는 것임을 제시하였다. 다른 이들은 ‘금지’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오히려 알브랑은 ‘사교’의 그릇된 사용을 논증함으로써 사서오경에 나오는 ‘상제’로 ‘천주’를 이해해도 된다는 것을 주장한 것이다. 유교 서적 중에서도 가장 쉽고 널리 알려진 책을 이용했던 특징과 함께 생각할 때, 알브랑은 중국인들이 이미 익숙히 알고 있는 ‘상제’ 개념 사용이 더 많은 사람이 쉽게 성교를 이해할 수 있는 길이라 여긴 것이다.

 

3) 민간 미신 타파에 힘쓰다

 

『성교리증』의 지향과 내용 특성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민간 미신 타파에 힘쓴 점이다.

 

이는 항목 숫자만 보아도 증명된다. 앞서 『성교리증』의 총 65항목을 구분 제시하며 언급한 것처럼, 이 책은 총 65항목 중에 30항부터 57항까지 중국 이단에 대한 논변에 집중되어 있다. 이외에도 공자에게 제사하는 문제를 말한 11항, 조종에게 제사하는 문제를 말한 13항, 지전을 태우는 풍속 문제를 말한 14항, 시신에 절하는 문제를 말한 15항도 보기에 따라서는 이단 혹은 우상을 섬기는 문제를 다룬 것이라고도 볼 수 있으므로 65개 전체 항목 중 절반을 이단을 논박하는 데 할애한 것이다. 그렇게 하여, 오자패 붙이는 것, 풍수, 택일, 운수 점치기, 관상 보기, 부처, 윤회, 옥황, 관음, 재동, 진무, 성황, 관우, 재신에 대한 숭배 등 당시 중국에서 행해지는 온갖 미신 풍속을 나열하며 일일이 그 잘못됨을 논하였다.

 

미신을 논박할 때는 일상의 가까운 일을 쉬운 말로 예로 들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예를 들어 택일하는 미신 풍속의 허망함을 지적하는 대목은 이렇다.

 

셋째, 택일의 허망함을 말하자면, 주나라 무왕은 갑자일(甲子日)에 흥하고, 은나라 주왕(紂王)은 갑자일에 망한 것만 보면 된다. 두 왕이 같은 날 서로 전쟁을 하여 한쪽은 승리하고 한쪽은 패하였다. 전쟁이 이와 같고 다른 일도 그러하다. 예를 들어 같은 날에 자리를 펴고 같은 날에 혼인하더라도 그 효험을 조사해 보면 같지 않은 경우가 많다. 또 하루 동안에, 온 세상에 태어난 이도 무수히 많고 죽은 이도 셀 수 없다. 때가 비록 같더라도 저 사람에게는 사는 때라 하고 이 사람에게는 죽는 때라 한다. 그러니 날과 시는 모두 길흉의 구별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오직 우리들이 선을 행하면 길한 날이고, 악을 행하면 곧 흉한 날이다. 그런 까닭에 말하기를 ‘화와 복은 자기가 구하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니, 날과 시를 어찌 가리겠는가.29)

 

좋은 날짜라는 것이 정말 있다면 그날은 다 좋아야 하는데, 한날한시에도 사람들은 좋은 일, 나쁜 일을 한꺼번에 겪으니 길한 날과 흉한 날을 구별한다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 했다. 그런 후에 화나 복은 스스로 구하는 것이라는 『맹자』 「공손추(公孫丑) 상」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해당 풍속의 잘못을 강조하면서 끝냈다.

 

관상 보는 것에 대해 말한 「논상면(論相面)」도 마찬가지로 했다. 사람의 근육과 뼈대, 오장육부 등은 천자부터 일반 백성까지 대동소이한 점, 사람이 살다가 살이 찌거나 빠져서, 혹은 병에 걸려서, 혹은 부유하고 가난한 것 때문에 섭생이 달라서, 혹은 하는 일에 따라 얼굴 등이 달라지는 점을 말하여 관상으로 길흉 따지는 것의 허망함을 지적했다. 그리고 중국 역사에서 순임금과 항우가 똑같이 눈동자가 두 개인 중동자(重瞳子)였지만 인품 등이 전혀 달랐다는 점도 말했다.

 

「풍수에 대해 논하다(論風水)」 등 여러 이단 논박 항목이 이런 식으로 구성되었다. 당시 민간에서 행해지는 이단 풍속을 찾아 논박하되, 누구라도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일상의 예로 잘못을 깨닫게 하며, 널리 알려진 중국의 역사적 사건을 예로 들고, 필요할 경우 결론적으로 유교의 경전 중 잘 알려진 것을 하나 인용하면서 강조하며 끝내는 방식이다.

 

쉬운 일상의 말로 설명하는 것과 동시에 해당 ‘미신의 내력’을 제시하는 방식도 많이 썼다. 내력을 살피고 역사적으로 그를 섬긴 이들의 최후를 보여주는 형식으로 서술했다. 「옥황에 대하여 논하다(論玉皇)」를 예로 들면 이렇다.

 

『송사(宋史)』를 살펴보면, 옥황은 한나라 말에 태어났으며, 성은 장이요 이름은 의이고 진정부 행당현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노군의 가르침(도교)을 익히더니 무당산에 은거하여 약초를 캐고 단약을 만들어 병든 사람을 치료하였다. 송나라 휘종(재위 1100~1125) 때에, 방술사 임영소도 노군의 가르침을 익혀서 헛된 말로 임금을 속였다. 휘종도 미혹되어서 그를 의(儀) 땅에 봉하여서 옥황상제(玉皇上帝)로 삼고, 나라의 복이 영원히 이어지도록 보우해 주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의에 봉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휘종 부자와 처첩은 금나라 사람에게 모두 잡혀가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모욕을 당하다가 오국성(五國城)에서 죽었다. 아아! 옛날부터 경건한 마음으로 옥황을 공경한 사람 중에 휘종보다 더한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나라를 잃고 몸이 죽을 때에도 옥황이 구해주지 못하였다. 애석하도다! 지금 옥황을 공경하는 자는 어찌 그를 거울로 삼아 경계하지 않는가.30)

 

옥황이 장의 혹은 방술사 임영소라는 점, 휘종이 임영소를 옥황상제로 봉하였다는 것을 밝혔다. 분명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후 그를 봉하고 극진히 섬기기까지 한 휘종이 비참하게 죽을 때 옥황이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했다. 이 항목은 앞서 ‘상제’라는 용어가 미신에 의해 훼손되었을 뿐임을 보여주는 항목이기도 하다.

 

이런 식으로 민간에서 신으로 봉해지는 것들의 내력을 밝혀서 섬기는 대상이 될 수 없음을 깨닫게 하고, 그들을 섬긴 이들이 아무런 효험 없이 끝났음을 말해주는 형식으로 많은 이단을 논박했다. 「소공에 대해 논하다(論蕭公)」, 「안공에 대해 논하다(論晏公)」, 「허진군에 대해 논하다(論許眞君)」, 「재신에 대해 논하다(論財神)」 등에서 이런 방식으로 이단의 그릇됨을 드러내었다.

 

물론, 이단 인물의 내력 서술 부분은 알브랑 편찬본의 아쉬운 부분으로 지적되기도 했다. 1884년 중국인 신부 황 베드로는 개정, 중간본을 펴내면서 쓴 서문에서 “이 『성교리증』이라고 한 책은 이런 까닭에 말을 꾸미지 않고 표현이 모두 소박하였다. 다만 여러 신의 내력을 서술한 것은 대략 전해 들은 것들이라 책에 기록하기에 부족하였다.”31)고 하면서,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수정, 보완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쉬운 언어와 일상에서 널리 보이는 예로 그릇된 미신을 논박하는 것은 알브랑의 의도적 집필, 편찬 방식이었다. 「소인」에서 ‘여러 책 중에서 가장 쉬운 말을 널리 모았다’고 했고, 이 책을 중간한 이들도 이 점 때문에 이 책을 선택하여 다시 펴낸다고 했다.

 

예를 들어 1858년 중간본 「서문」에서, 물리 주교는 “그 의도가, 오로지 그릇된 것을 막고 바른 것을 높이는 것으로 임무를 삼아서, 말이 간단하면서도 뜻은 잘 갖추고 있었고, 삿된 신의 내력을 널리 파헤쳐서 성교회가 으뜸이 됨을 증명하고 있었다.”32)고 했다.

 

1863년 중간본 「서문」에서 포리 주교도 “임 감목이…여러 책에서 쉬운 말들을 널리 모아서 한 책으로 완성했다. 도를 말하는 자로 하여금 대답하고 변론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게 하고, 또 듣는 자로 하여금 미혹된 길에서 깨어서, 감히 억지스러운 말로 이치를 빼앗지 않고 자연스레 마음으로 기뻐하고 진실로 복종하여, 마음을 돌리고 선을 향하며 근본으로 돌아가게 할 것이다.”33)라 하였다.

 

조선 성공회 트롤로프(M.N. Trollope, 趙瑪可, 1862~1930) 주교도 1898년 판본 「서문」에서 “가령 사람이 와서 성교회의 도리를 물으면, 복잡한 말로 가슴속에 있는 참 도리를 말하지 않고, 우선 눈앞의 보통의 이치로 간략하게 말하여 얕은 곳에서부터 깊은 곳으로, 쉬운 것에서 어려운 것으로 들어가며, 오로지 뜻과 이치를 바르게 논한다면 그 사람의 의혹 풀림이 마치 바람이 연기를 내쫓고 불이 초를 태워버리는 것과 같아 끝내 반드시 믿고 복종할 것이다.”34)라면서 『성교리증』이야말로 그런 책이어서 펴낸다고 밝혔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있듯이 『성교리증』은 쉬운 말로, 일상의 보통의 이치로 간략하게 말함으로써 사람들을 바른 곳으로 이끄는 책이었다. 앞서 말한 대로, 알브랑 주교가 일반 민중 중심의 선교 전략을 세우고, 그릇된 것을 물리치고 바른 가르침인 천주교로 돌아오게 하기를 의도했으며, 그런 의도를 쉬운 표현으로 민간의 이단을 논박하는 형식으로 구현했음이 잘 드러난다.

 

미신에 대해 나열하고 그것의 그릇됨을 하나하나 논박하는 데 중점을 둔 이 서술 방식은, 『성교리증』이 각 나라, 각 지방의 선교현장에서 시대를 떠나 널리 활용될 수 있는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각 나라나 지방의 풍속을 살피고 해당 이단 풍속이 없는 경우는 해당 항목을 삭제하는 방식으로 수정하여 다시 펴내기가 쉬웠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조선 성공회에서 『성교리증』을 펴낼 때에 본래 알브랑본 65항목 중에서 11항목을 삭제하고 54항목으로 구성했는데, 이 중 12항은 11항과 겹친다고 하여 뺀 것이고, 나머지 10항목은 모두 이단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뺀 것이다. 해당 미신은 조선 땅에 없다고 판단하여 그렇게 구성한 것이다. 1898년 한문본을 펴내고 1905년 한글본을 펴내면서도 12항목을 더 삭제함으로써 그 몇 년간의 풍속의 변화를 반영했다.

 

일본에서도 여러 번 『성교리증』을 일본어로 출간하여 선교활동에 활용했다. 예를 들어 류코쿠대학(龍谷大學, Ryukoku Univ.) 도서관 소장본은 명치 초기에 일본 공회역서(公會譯書)로 출간했다는 표시가 있는 판본인데, 여기에서는 총 19항목을 삭제하여 46항목으로 편찬했다. 1876년 판본과 1893년 판본도 일본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각기 47항목, 45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삭제한 항목은 대부분 이단 항목에서이다. 일본어로 출간을 하면서, 일본 문화를 고려하여 논할 필요가 없는 이단 항목 몇 개를 삭제한 것이다.

 

이처럼 『성교리증』은 알브랑이 처음 책을 만들 때 이단 항목이 반을 차지할 만큼 당시 그릇된 이단 문화를 논박하는 데 집중한 책이고, 또 이런 특징 때문에 이단 풍속 부분을 가감하기만 하면 어디서나 활용될 수 있어서 더 잘 활용될 수 있었다.

 

앞서 알브랑이 『성교리증』을 펴낼 때, 100여 년에 걸친 금교(禁敎) 시절에 따른 오해를 씻기 위해 의도적으로 천주교를 ‘성(聖)’, ‘정(正)’, ‘진(眞)’ 등으로 표현하면서 이단인 ‘사(邪)’와 구별하려 했고, 일반 민중들을 직접 만나 문답하면서 쉽게 그들에게 전도하는 방식을 취했다고 했다. 그리고 이 장에서 미신 타파에 매우 집중했다는 것을 밝혔다. 장을 구별하여 말했으나 실은 이 모든 것은 하나로 연결된다. 민간에 널리 퍼진 오해를 풀고, 민간 미신의 그릇됨이 드러날 때 결국 천주교의 바름이 드러나 사람들이 그 바름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을 담은 것이 바로 이 책인 것이다.

 

 

4. 결론

 

이상 중국에서 초간된 한문서학서인 『성교리증』의 편저자 알브랑의 생애와 이 책의 주요 특징에 대해서 논하였다. 이밖에도 불교나 도교를 누르고 유교를 높여 이를 통해 천주교를 전하려 한 점, 유교의 용어를 이용하여 천주교 효용을 이해시키려 한 점 등 다양한 특성이 있으나 지면의 제약으로 다 쓰지 못하였다.

 

해금 이후 출간된 한문서학서에 대한 연구는 국제 정치·외교적인 맥락, 천주교 선교의 역학 관계 변화, 중국 천주교의 조선 천주교로의 영향 등과 연결되어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이어질 것으로 기대되는 분야 중 하나이다.

 

『성교리증』에만 한정해도 이 책의 내용을 살핀 후, 이 책의 여러 개정 · 중간본을 밝히고 그것들 중 대표적인 몇몇 것을 선택하여 그 개정자와 그 판본의 특징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 조선 성공회에서 중국으로부터 이 책을 들여와 개정·출간한 한문본 『성교리증』과 한글본을 구체적으로 비교하며, 또 천주교 측에 남아 있는 한글 필사본 2종에 대해서도 그 특징 등을 살피는 연구가 진행되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한 지면에 담을 수 없어서 다음 연구를 기약하고자 한다.

 

 

참고 문헌


1. 자료

 

任斯德範, 『聖教理證』, 上海: 慈母堂, 1852 등 여러 판본

M. Joseph Dourif, Vie de Mgr Albrand : évêque de Sura, vicaire apostolique du Kouy-Tcheou, Paris: Jacques Lescoffre ET Ce. Livraires, 1865.

 

2. 논저

 

김병태, 「명말청초 전례논쟁의 선교사적 이해」, 『한국기독교와 역사』 28,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8, 163~190쪽.

마테오 리치 저, 송영배 등 역, 『천주실의』,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9.

박종혁, 『해학 이기의 사상과 문학』, 상생출판, 2020.4.

방상근, 「성교리증의 서지 연구」, 『교회사연구』 48, 한국교회사연구소, 2016. 6, 195~206쪽.

서신혜, 「성공회의 성교리증 간행과 교리서의 현지화」, 『한국기독교신학논총』 100집, 한국기독교학회, 2016. 4, 65~91쪽.

신의식, 「天主敎 解禁(1840년) 前後의 傳敎 狀況變化」, 『중국학논총』 13, 한국중국문화학회, 2002, 199~214쪽.

林建曾·王路平 等, 『世界三大宗教在云贵川地区传播史』, 中国文史出版社, 2002.

李强, 「华籍神父与晚清天主教神学本地化―以黄伯禄『圣教理证』改稿为中心的探讨」, 『宗敎與歷史』 九輯, 上海: 上海大学宗教与中国社会研究中心, 2018, 33~48쪽.

陈建明, 『近代基督教在华西地区文字事工研究』, 巴蜀书社, 2012.

 

3. 전자 자료

 

천주교 귀주교구 홈페이지 : http://www.gztzj.cn/gyjq/lrzj/

싱가포르 교회사 홈페이지 : https://history.catholic.sg/

프랑스-아시아 연구소 : https://www.irfa.paris/fr/

 

……………………………………………………………………………………

 

1) 서신혜, 「성공회의 성교리증 간행과 교리서의 현지화」, 『한국기독교신학논총』 100, 한국기독교학회, 2016. 4, 65~91쪽 ; 방상근, 「성교리증의 서지 연구」, 『교회사연구』 48, 한국교회사연구소, 2016. 6, 195~206쪽.

 

2) 李强, 「华籍神父与晚清天主教神学本地化―以黄伯禄『圣教理证』改稿为中心的探讨」, 『宗敎與歷史』 九輯, 上海大学宗教与中国社会研究中心, 2018, 33~48쪽.

 

3) 박종혁, 『해학 이기의 사상과 문학』(상생출판, 2020. 4)에 이들 간에 주고받은 편지가 번역 · 영인되어 있다.

 

4) 이 자료는 『梵蒂風敎廷圖書館藏 明淸中西文化交流史文獻總刊』 1집(大象出版社, 2014)에도 영인되어 있고, 이 영인본에 실린 해제에도 알브랑을 저자로 표기하였다.

 

5) 陈建明, 『近代基督教在华西地区文字事工研究』, 巴蜀书社,2012, 第26页 ; 林建曾·王路平等, 『世界三大宗教在云贵川地区传播史』, 中国文史出版社, 2002, 第431页(李强, 앞의 논문, 37쪽 재인용).

 

6) 방상근, 앞의 논문, 197~200쪽.

 

7) M. Joseph Dourif, Vie de Mgr Albrand : évêque de Sura, vicaire apostolique du KouyTcheou, Paris: Jacques Lescoffre ET Ce. Livraires, 1865. 총 436쪽 분량. 프랑스 국립도서관(bnf.fr) 소장.

 

8) https://history.catholic.sg/the-paris-foreign-missions-society-mep-2/ 참조.

 

9) 싱가포르 교회사에서 알브랑 주교의 이름이 거론된다. 다음 사이트 참고 바람 : https://history.catholic.sg/the-role-of-the-chinese-catholic-mission-in-the-growth-of-thechurch/

 

10) 보호권(保護權, Padroado)은 천주교 선교 역사상 독특한 제도 중 하나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국가 후원 선교 제도인데, 1493년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스페인 국왕과 포르투갈 국왕에게 각기 아메리카 대륙, 아시아와 아프리카 대륙에 대한 선교사 선발권과 배치권, 교회 설립권 등을 부여한 제도이다.

 

11) 보호권, 대목 제도 등 중국 선교와 관련된 내용은 신의식, 「천주교 해금(1840) 전후의 傳敎 상황 변화」, 『중국학논총』 13(한국중국문화학회, 2002, 199~214쪽)이 크게 도움이 된다. 이 단락의 내용도 이 논문을 참고로 하여 정리한 것이다.

 

12) “The Catholic pharmacy of Guiyang founded in 1847 by Father Albrand”은 1855년 Seminaire des Missions Etrangères가 그렸다.

 

13) 프랑스-아시아 연구소(irfa) 자료에서 이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 https://www.irfa.paris/fr/notices/notices-necrologiques/albrand-1805-1853 참조.

 

14) 오늘날 천주교 귀주교구 홈페이지(http://www.gztzj.cn/gyjq/lrzj/)에는 알브랑이 귀주의 초대 주교로 기록되어 있으며, 여기에서 그의 사진과 간략한 생애도 볼 수 있다.

 

15) 『聖敎理證』, 「論爲何帝王不遵聖敎」 : 客曰, 聖敎旣是眞敎正敎, 爲何帝王不遵而崇之, 反有時禁之, 而欲滅之. 盖上行下效, 乃世人之常規, 若帝王奉敎敬主, 下民無不皆然耶(이하 『聖敎理證』 인용에서는 서명은 빼고 항목명만 표시함).

 

16) 曰 : 要知敎之眞假, 不以上行下效爲憑據, 只看道理眞實與否. 道理眞實, 則敎爲眞, 道理虛妄, 則敎爲邪.

 

17) 可見各君不依眞假之故, 乃因受哄, 或有别意, 各向一敎, 而壓别敎也. 是以朝廷所遵, 所貶之敎, 非就可從, 或不可從, 如合理反理矣.

 

18) 乾隆之後, 天主敎數次雖受禁阻. 然考其禁之之故, 並非爲天主敎不正不眞, 而滋事爲非. 乃因别敎之徒嫉妬刁唆, 妖言毁謗, 或無德之官, 受人之賄, 混雜天主敎於異端邪敎, 弄哄妄告於上. 朝廷被欺, 欲禁之滅之也.…然道光二十五年, 明查聖敎之根原, 知天主敎爲眞爲善, 即屢頒旨諭各省, 天主敎以勸善戒惡爲本, 與别項邪敎外不相同, 准中迥人民學而習之, 不許禁阻. 各處建修經堂, 亦可聽從其便.

 

19) 客曰 : 道理雖眞, 然是外國之敎, 不必從之.

 

20) 邪正不能並行…若沾些微之黑, 就不爲純白矣. 邪能容正, 正不能容邪矣. 邪能容正, 正不能容邪矣.

 

21) 알브랑의 싱가포르 및 방콕 등지에서의 선교활동에 대해서는 Vie de Mgr Albrand, chapitre Ⅸ-ⅩⅧ, pp. 90~220에 자세하다.

 

22) 싱가포르 교회사 참조 : https://history.catholic.sg/the-paris-foreign-missions-society-mep-2/ 참조.

 

23) Vie de Mgr Albrand, chapitreXII, p. 129 : “Le but de Mgr Courvezy, en appelant Etienne à Bangkok, était de l’employer à la conversion des Chinois, pendant que les autres missionnaires resteraient appliqués à celle du reste de la population.

 

24) 「聖敎理證 小引」 : 嘗見多有敎友, 書理淺薄, 不能回答外敎之駁問, 卒至辭窮理遁, 致玷聖敎之英名, 惹外敎人之恥笑, 實屬可悲. 吾今不避謭陋, 博採諸書中最淺近之詞, 輯成一編, 名聖敎理證. 以爲對答外敎素常之問, 以服其心, 解其疑, 免其毁謗, 而或引其奉敎也.

 

25) 「小引」 : 又當知辨駁之法, 比如有客來駁聖敎道理, 先當曰, 尊台旣要辨駁, 必以義理爲天秤, 理是則是, 理非則非, 不可蠻言, 强詞奪理. 講理者君子, 行蠻者小人. 吾等寧爲君子, 不爲小人. 又當待先問而後答, 否則不中其意. 比如他特來問敬祖宗之禮, 若你先闢風水之妄, 則不合其意, 以致頃刻而去, 不能聞聖敎眞理. 若彼不先開口, 當向彼曰, 我等聖敎之道, 本眞實無妄. 然不辨則不明, 不明則不信, 不信則不行矣. 今尊台旣來, 必定心懷有疑, 不妨眞言問駁, 吾必將謹陳愚衷以解之.

 

26) 의례논쟁의 진행과 그 영향 등에 대해서는 신의식, 앞의 논문, 199~214쪽 ; 김병태, 「명말청초 전례논쟁의 선교사적 이해」, 『한국기독교와 역사』 28,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8, 163~190쪽 등 여러 논문을 참조할 수 있다.

 

27) 「論四書五經内未有天主之名」 : 明朝之時, 我等聖敎書内, 亦稱天主爲上帝. 但因外敎者, 多有混襍上帝之名號, 有稱玉皇爲上帝者, 有稱眞武爲上帝者, 有稱老君爲上帝者, 故我等別謂天主, 以免混於邪神之類.

 

28) 이 밖에 질문 항목의 구성, 내용 설명 서술 등에서도 『천주실의』를 참고하고 차용한 것이 보인다. 다만 이 논문의 초점과 어긋나기 때문에 여기에서 더 말하지는 않는다.

 

29) 「論擇日」 : 三, 要闢擇日之妄, 只看武王以甲子日興, 紂王以甲子日亡. 二王同日交戰, 有勝有敗. 兵事如此, 别事亦然. 譬如同日張場, 同日婚娶, 查其效驗, 多有不同. 又一日之間, 普世之人, 有生者無數, 死者無算. 時候雖同 爲彼可稱爲生時, 爲此可稱爲死時. 由此可知, 日子時候, 並無吉凶之别. 惟我等行善, 可稱謂吉日, 行惡就謂凶日. 故曰, 禍福無不自己求之者也, 與日子何干乎.

 

30) 「論玉皇」 : 考查宋史, 玉皇生于漢末之時, 姓張名儀, 眞定府行唐縣人. 自幼習老君之敎, 隱于武當山, 採藥煉丹, 醫治病人. 至宋徽宗時, 有術士林靈素, 亦習老君之敎, 誑言欺君. 徽宗被其迷惑, 封儀爲玉皇上帝, 望其保佑國祚綿長. 然封儀之後不久, 徽宗父子妻妾, 盡被金人擄去, 受辱難言, 死于五國城. 噫! 自古虔心敬玉皇者, 莫過于徽宗. 然喪國亡身之時, 而玉皇不知救. 哀哉! 今日敬玉皇者, 何不鑑之戒之.

 

31) 此聖敎理證一書, 所以語不雕飾, 詞皆樸實也. 特其所述諸神來歷, 大率得諸傳聞, 未盡爲載籍所記. 황 베드로본은 중국 국가도서관 등 여러 곳에 소장되어 있음.

 

32) 其意專以闢邪崇正爲務, 辭簡意該, 廣搜邪神之來歷, 證明聖敎之有宗. 물리본은 중국 국가도서관에 소장(MG/B976.1/221)되어 있다.

 

33) 任鑑牧…博採諸書淺近之詞, 輯成一編. 俾談道者, 得以助其對答辨論, 且俾聽者, 醒悟迷津, 不敢强詞奪理, 自然心悦誠服, 回心向善, 返本追源. 포리본은 프랑스 파리 소재 예수회 도서관(Bibliothèque des Fontaines) 소장. 『明末淸初耶穌会思想文獻匯編』(제50책)(北京大學宗敎硏究所, 2000)에도 영인됨.

 

34) 假令人來問聖敎道理, 不可驟語, 以胸中眞經, 姑可細陳, 以眼前常理, 由淺入深, 由易入難, 專以義理爲正論, 則其人之解迷惑, 如風驅煙, 如火消蠟, 終泌服膺. 한문본은 연세대학교 도서관 소장, 한글본은 역사정보통합시스템(koreanhistory.or.kr)에서 확인 가능함.

 

* 이 논문은 한양대학교 교내연구지원사업으로 연구되었음(HY-202100000003476).

 

[교회사 연구 제59집, 2021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서신혜(한양대학교 인문대학 부교수)]



파일첨부

1,050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