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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순교자의 땅, 프랑스를 찾아서: 김보록 신부님 고향, 파리외방전교회 본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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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12-08 ㅣ No.1528

[성지에 가다] 순교자의 땅, 프랑스를 찾아서(김보록 신부님 고향, 파리외방전교회 본부 등)

 

 

이태리, 독일, 오스트리아에 베네딕도 수도원의 총원, 모원 등 아름다운 풍경의 경치와 수도원의 발원지를 순례하고 일행들과 헤어진 다음, 김보록 신부님의 고국인 프랑스로 향하였다. 그동안(2주) 지도 신부로 함께 했던 박준용(유스티노) 신부와 함께 프랑스 벨포르(Belfort)교구 몽벨리아(Montbeliard)로 가기 위하여 독일 뮌헨(M nchen)에서 일행들과 작별을 하고, 뮌헨에서 현지사목을 하고 계시는 권병일(요한) 신부님께서 공항까지 마중 나오셔서 신부님과 함께 권 신부님 사제관으로 갔다. 신부님께서 손수 요리해 주신 가자미찜이 너무 맛이 있어서 저녁밥을 맛있게 배불리 먹었다. 신부님께서는 견진을 준비하시느라 식사를 마치자마자 성당으로 가시고 신부님이 돌아오시기도 전에 잠자리에 들어 곤하게 잠이 들었다. 새벽 6시에 프랑스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하여 새벽 5시에 일어나 준비하고 뮌헨 기차역으로 갔다. 권 요한 신부님께서 일찍부터 우리를 안내하느라 잠도 제대로 못 주시고 기차역까지 배웅해 주셨다. 너무나 고마웠다. 다시 한 번 더 감사드린다.

 

처음 타보는 떼제베(TGV) 열차였다. 목적지인 몽벨리아까지 가려면 독일 국경을 넘어 환승하는 스트라스부르(대구교구 초대교구장이신 드망드 주교님의 출신지)까지는 3시간 정도 걸린다. 자리에 앉고 보니 특등석이다. 박 신부와 세 사람이 마주보며 타고 가는 좋은 자리였다. 권 신부님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손을 흔들며 건강하게 지내시도록 인사를 나누는 동안 기차는 서서히 플랫폼을 빠져 나갔다. 출발후 얼마 되지 않아 아침 도시락이 왔다. 아침을 먹는 동안 여명이 걷히면서 희뿌옇게 동이 트기 시작했고, 이어 푸른 초원과 누렇게 익은 곡식들과 내 키보다 훨씬 더 큰 옥수수 밭이 끝없이 펼쳐졌다. 밤이 새도록 풀을 뜯어 먹고 있었는지 황소들이 일찍부터 노닐고 있으며 어떤 놈들은 되새김을 하는지 편안한 자세로 엎드려 있는 놈들도 있다. 참 평화롭고 아름답게 펼쳐져 있는 풍경에 넋이 나가 어느덧 독일 국경을 넘어 프랑스로 들어서면서 옛 독일 영토였던 스트라스부르에 도착하였다. 목적지인 몽벨리아로 가는 기차를 타려면 1시간의 여유가 있어서 복잡한 대합실을 빠져 역 광장으로 나와 순교자들의 땅 프랑스에 발을 디뎠다. 잠시 쉬면서 스트라스부르의 역사(驛舍) 건축 구조가 돔 모양으로 특이하게 건축되어 있는 모습이 일본 하네다 공항 대합실을 떠올리게 했다. 유럽의 국제기구 중에 많은 국제기구가 여기 스트라스부르에 있다는 설명을 들었다. 초대교구장이신 드망드 주교님의 출신지라 기록되어 있지만 주교님께서 한국 땅에 들어오시고 난 다음 가족들은 멀리 외국으로 가셨기 때문에 현재 주교님의 후손들을 아무도 찾을 수가 없다고 한다.

 

다시 기차를 타고 몽벨리아로 향하였다. 기차를 타는 도중에 집사람에게 소매치기가 따라 붙었는데 예쁜 학생 같은 아가씨 둘이서 못된 짓거리를 하는 것을 보고 프랑스에 대한 좋은 이미지가 머리를 혼돈스럽게 하였다. 잃어버린 것들은 없지만 마음은 불편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2시간여 만에 박 신부가 사목하고 있는 몽벨리아에 도착하였다. 역에 마중 나온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유스티노 신부가 홈스테이하면서 불어 회화를 도와주고 있는 가정에 자녀를 아홉 명이나 둔 집이었다. 30여 년 전만 해도 세계에서 가장 낮은 자녀 출산율을 기록하였던 것이 자녀들을 아홉명이나 출산하였다니 대단히 놀라운 일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과 3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뒤바뀌어 있는 상황이다. 우리는 저출산이 교육비 때문이라 이유를 대면서 아기를 한 둘만 낳아서 기르려고 하고 있는데 저출산을 바꾸려면 우리의 교육 정책등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만 저 출산이 해결될 것 같다. 아홉 자녀의 교육비가 걱정이 되서 아이들 교육비는 어떻게 하느냐고 물어 보니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까지 무료라고 했다. 역시 사회보장제도가 잘 되어있는 나라여서 부러웠다. 잘 살기 위해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려온 우리나라와 비교가 된다. 정쟁에 휘둘려 싸우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정의의 하느님께서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이 나라를 위하여 당리당략을 버리고 올바로 정치를 할 수 있도록 지혜와 용기를 주시도록 화살기도를 바쳐본다.

 

며칠을 유스티노 신부의 숙소에서 푹 쉬었다. 주일 벨포르교구 주교님께서 몽벨리에 성당을 방문하셨는데, 그날 박준용 신부의 사령장(인사발령)을 전달하시러 오신 것이다. 몽벨리에 성 망버프 성당의 본당 주임신부의 협조 사제로 교구 청소년 담당 사제로 발령을 내린다고 말씀하셨다. 작년(2014. 1)에 대구대교구에서 프랑스 벨포르교구로 파견 받고 20여 개월 동안 언어와 생활과 문화를 익히고 서툴지만 불어로 대화하고 강론을 하는 것을 보고 그곳 환경에 적응해 나가는 박 신부의 노력과 열정에 찬사를 보내며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다. 매 기도 때마다 해외 선교를 하고 계시는 성직자, 수도자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를 바쳤으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해야 할 것이다. 주교님과 신자들과 함께 한 점심식사 자리에서 주교님께 인사를 드리면서 “프랑스 교회가 우리나라에 선교를 위하여 순교를 각오하고 또 순교를 하면서까지 복음을 심어주신데 대하여 감사드리며 이제 우리 교회도 미력하나마 이렇게 프랑스 교회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선교는 아니지만 프랑스 교회를 위하여 갚음을 할 수 있도록 해주셔서 감사드리며 파견된 사제가 오래 동안 사목에 임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리니 주교님께서는 “본인이 잘 적응하고 생활한다면 언제까지나 함께 할 수 있으며 여기에 파견된 이상 여기 교구장인 주교의 사랑하는 아들로서 잘 돌볼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을 해주셨다. 주교님의 권유로 노래를 청해서 프랑스 선교사와 관련된 구노의 “아베마리아”를 뜨거운 감정으로 불렀다.

 

다음날 벨포르 교구청을 들러서 대구본당 초대신부로 부임하신 김보록 신부님의 고향을 찾아 나섰다. 가는 길에 현대건축의 3대 거장 중 한 사람인 <르 꼬르뷔지에(LE CORBUSIER. 1887~1965)>가 설계한 롱샴성당을 방문하였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 빛의 건축, 침묵의 장소, 평화와 내적기쁨의 장소 등 여러 가지 미사여구가 붙여진 성당이다. 성당 외부로부터 성당 내부에 투사된 빛의 조화는 저절로 기도의 분위기로 안내한다. 더욱 특이한 것은 동력이나 전기기구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내부조명을 밝게 하고 있으며 촛불과의 은은한 조명은 성당 내부를 더욱 거룩하게 만들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성당을 설계한 동기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있었던 자신의 행위를 하기 위해서 설계를 하였다는 이야기를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다. 성당아래 지어진 수도원 건물도 위의 성당에 시각적으로 불편함이 없도록 성당 마당 아래쪽 지하벙커처럼 지어진 수도원의 건축물도 함께 볼 수 있었다. 수도원 입구 성당 내 감실이 모셔져 있어 발길을 멈추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김보록 신부님의 고향 동네로 가는 길은 우리나라의 시골길을 가는 것처럼 꼬불꼬불한 길을 가는 동안 잘 익은 벼, 옥수수, 가을걷이 곡식들이 연이어 펼쳐져 있는 풍경들이 더욱 마음을 풍요롭게 해 주고 있다. 평화로운 마을에 들어서면서 붉은색 건물의 성당이 눈에 들어온다. 김보록 신부님께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세례를 받은 성당이라고 박 신부가 설명을 해준다. 타고 간 차를 도로 가에 세우고 오래된 성당을 한 바퀴 돌아보고 성당 정문을 밀어 보았으나 성당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양옆에 있는 출입문도 잠겨 있었다. 다시 돌아 정문 앞에서 조배를 드리며 김보록 신부님의 어린시절을 떠올려보며 상상의 나래를 펴본다. 지금부터 140년 전 사제서품을 받고 이듬해 아직 박해가 완전히 끝나지 않은 한국땅에 자원해서 오신 젊은 사제보다 앞서 오신 선배 신부님들의 박해와 순교를 하신 신부님들의 소식을 접하고서도 뒤를 이어 오신 신부님. 낯설고 물 설은 이국땅의 어려운 생활들을 자료를 통해 신부님의 선교활동 상황들을 적어 볼까한다.

 

<김보록(金保綠) 신부, 로베르(Robert, Achille Paul, 1863~1922. 파리외방전교회원, 대구교구 선교사, 한국명 김보록)

 

병인박해(1866) 이후 지하에서나마 꾸준히 신앙을 지켜온 삼남(三南:경상도, 충정도, 전라도)지방은 한불수호조약의 체결로 선교사들의 활동(活動)이 어느 정도 자유로워지자 1886년에 대구본당을 창설하면서 경상도를 담당하던 김보록 신부가 신나무골에 첫 본당을 맡으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두세(Doucet) 신부와 뮈텔(M tel) 신부를 만나 함께 공부하고 한국으로 건너와 오랫동안 함께 일하게 되었다. 즉 1876년 12월 23일 사제품을 받은 그는 1877년 1월 25일 두세 신부와 함께 한국을 향해 파리를 떠났다. 만주에서 리델(Ridel)주교와 만나 셋이서 함께 배를 타고 서울 근해에 도착하여, 리델 주교는 서울로 갔고, 두세 신부와 그는 함께 황해도로 상륙하여 산중에 숨어서 전교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리델 주교로부터 강원도 이천(利川)의 고메골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1878년 음력 정월 초에 리델 주교의 투옥사실을 전해듣고 곡산(谷山) 산중으로 피신하였다.

 

1881년부터 1885년까지 그는 경기도와 강원도의 낭천(狼川), 지평, 부흥골 등 여러지방을 돌아다니며 전교활동을 하였는데, 점차 선교사의 수가 늘어나 1886년부터는 경상도 지방을 전담하게 되었고, 신나무골을 거쳐 1890년 대구 부근 새방골로 갔다. 그러나 불량배들이 선교사와 교우들을 모욕하고 사제관을 습격하는 사건이 자주 일어났고 심지어는 대구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정부 당국이 로베르 신부를 대구로 호송함으로써 이것이 계기가 되어 1891년 대구 시외에 정착할 수 있었다. 그후 30년 간 이곳에 천주교의 뿌리를 내리게 하는데 온갖 정력을 쏟아 삼남지방은 1911년 조선교구로부터 서울교구와 대구교구로 분리되어 독립된 교구로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대구교구가 탄생하기까지는 신부님의 공로가 지대하였다. 그러나 갖은 고난을 겪어 가면서 대구교구의 기반을 다지느라 몸이 쇠약해져 급기야 병석에 눕게 되자 요양을 위해 고국인 프랑스로 돌아갔다. 1913년 건강이 회복되어 다시 한국으로 나와 전교사업에 종사하였으나 1919년에 또다시 몸이 쇠약해져 더 이상 전교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주교관으로 은퇴하여 회고록을 집필하며 얼마 남지 않은 생을 정리하던 중 1922년 1월 2일 주교관에서 선종하셔서 대구교구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었다. 감사한 일이다. 아니 무엇으로도 그 고마움을 잊을 수도 갚을 수도 없는 훌륭한 사제의 직분을 충실히 완수하셨다. “주님께서는 그의 공로를 보시고 천상의 낙원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시며 저희들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열흘의 프랑스 일정을 마치고 파리에 도착하여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 마련된 게스트하우스에 여장을 풀고 전교회에 파견된 나영훈(안토니오) 신부님의 안내로 파리외방전교회의 이야기와 선교 파견미사를 하였던 성당, 정원, 마지막 고별식을 하고 성모당에서 파견지로 떠나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는 부탁드렸던 고별노래의 악보도 구해주셨다. 파리외방전교회와 한국천주교회는 죽음을 함께 나눈 형제애로 한국교회 발전에 지대한 공로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한국교회사자료 일부를 보면 이렇다.

 

<1831년 9월 9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 의해 브뤼기에 주교가 초대 조선대목(朝鮮代牧)으로 임명된 것을 계기로 파리외방전교회는 1836년 선교사가 처음 한국에 입국하여 제일 먼저 한국인 성직자 배출을 위해 3명의 신학생(김대건, 최양업, 최방제)을 선발하여 마카오로 유학을 보낸 후 1853년 충청도 베론에 신학교를 설립하여 성직자 양성사업에 착수하였다. 1885년 10월 강원도 원주 땅 부엉골에 다시 신학교를 설립한 후 1887년 서울 용산에 예수성심 신학교를 개설하였다. 즉 오늘의 서울 혜화동에 소재한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의 모체가 된 것이다. 이후 1911년 대구교구가 설정된 후 1914년 대구에 성 유스티노 신학교를 설립하여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의 모체가 되었다. 이들이 이 땅에 선교를 하기 위하여 먼저 방인사제 양성에 힘쓴 것을 역력히 볼 수 있다.>

 

순교자의 땅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회원들이 자원해서 이 죽음의 땅, 박해를 무릅쓰고 1836년부터 1866년 병인박해 때까지 파견된 사제는 열두 분이다. 이중 성인이 되신 분들은 모두 열분이다. 1836년 모방 신부를 시작으로 계속 조선에 입국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포교에 전념하다가 기해박해(1839년)에 엥베르 주교, 샤스땅 신부가 순교하시고 이어서 1845년 다블뤼 주교, 1856년 베르네 주교, 푸르티에 신부, 프티니꼴라 신부, 이어서 1863년 오메트르 신부, 1865년 도리 신부, 볼리외 신부, 유스토 신부, 위엥 신부가 들어오셔서 병인박해 때 아홉 분의 성직자가 모두 순교하셨는데 세 분은 갈매못에서, 나머지 여섯 분은 새남터에서 장하 치명하셨다. 이들 중 열분은 성인이 되셨다.

 

10여 년 전 성모님 발현성지 순례를 하기 위하여 파리에서 루르드로 가는 밤기차를 타기 전에 잠시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 들러 미사 참례하는 동안 여기에서 파견미사를 하고, 박해의 땅 조선으로 오신 선교사들을 생각하며 감사와 찬미의 뜨거운 눈물을 흘린 적이 있었다. 10여 년이 지난 오늘 파리외방전교회 기숙사에서 하룻밤을 보내면서 다시 한 번 순교하시고 성인이 되신 분들을 생각할 수 있는 시간과 이곳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시고 특별히 부탁드린 선교사 파견시 고별 노래의 악보를 구해주신 대구대교구 나영훈 신부님께 감사드린다. 언젠가 기회가 주어진다면 한국땅에 파견되어 순교하시고 성인이 되신 세 분의 주교님과 아홉 분의 신부님들의 고향을 찾아 순례를 해보고 싶은 생각을 마음으로 다짐해 보면서 하느님께서 건강과 시간을 주시도록 기도로 청해본다. 이곳 유럽을 순례하면서 도와주신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에서 사목하시는 신성원(세례자요한) 신부님, 독일 뮌헨에서 고생하시는 권병일 신부님, 파리에서 열심히 사목하고 계시는 심탁(클레멘스) 신부님, 나영훈 신부님께 감사드리며 먼 이국땅에서 늘 건강하시도록 기도드린다. 끝으로 3주간 휴가를 내어 순례회원들의 지도신부로, 열흘 동안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프랑스 벨포르 교구, 김보록 신부님 고향, 성녀 오틸리에 수도원 등 함께해 준 박준용 아들 신부에게 감사드리고 늘 건강히 사목할 수 있도록 기도드린다.

 

2년 동안 <성지에 가다>를 마무리하면서 <빛> 잡지를 애독하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우리나라 성지, 순교자들이 살아서 숨 쉬었던 곳, 피난을 가서 생활하였던 곳, 치명하신 장소 등을 보고 느끼고 체험하면서 부족한 글로 기고하였음을 사랑으로 이해해 주시고 격려해 주심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 그동안 유익한 글을 써 주신 박철수 님께 감사드립니다.

 

[월간빛, 2015년 12월호, 박철수 보니파시오(경산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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