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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문헌ㅣ메시지

공의회 문헌 풀어보기: 교회헌장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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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9-24 ㅣ No.586

[공의회 문헌 풀어보기] 교회헌장 해설 (1)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이하 교회헌장 혹은 헌장)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체 문헌 16편 가운데서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과 함께 가장 비중 있는 문헌으로 꼽힌다. 

 

“교회의 본질과 보편 사명”(1항)을 신자들과 세상에 명백하게 밝히는 것을 주목적으로 하는 교회헌장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준비 단계 때에 이미 예비 초안이 마련됐으나 본회의가 개막하기 전부터 수정을 거쳐야 했다. 본 회의가 시작된 후에도 여러 번 수정돼 제3회기(1964. 9.14~11.21)에 가서야 최종안이 만들어져 일차 통과된 후 제3회기 마지막 날인 1964년 11월 21일 최종 투표에서 찬성 2151, 반대 5의 압도적 지지로 가결돼 공포됐다.

 

전체 8장으로 된 헌장은 제1장에서 교회의 신비에 대해 살펴본 후, 제2장에서 하느님 백성인 교회에 대해 고찰한다. 이어 하느님 백성을 이루는 두 신분인 성직자(교회의 위계 조직)와 평신도를 각각 3장과 4장에서 다룬다. 제5장에서는 모든 하느님 백성이 거룩하게 되라는 부름을 받았다는 교회의 보편적 성화 소명에 대해 살핀다. 헌장은 이어 6장에서 수도자를 다룬 후 제7장에서 천상 영광을 향해 순례 여정에 있는 교회의 종말론적 성격을 살펴본다. 공의회 교부들은 교회헌장 마지막 제8장에서 마리아에 관해 다루고 있는데(제8장), 이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가 교회에 탁월한 모범 곧 전형(典型)이 되기 때문이다.

 

 

제1장 교회의 신비(1~8항)

 

“인류의 빛은 그리스도이시다”(1항)로 시작하는 헌장은 교회를 신비로 이해한다. 신비라는 말은 인간적인 것, 현세적인 것을 뛰어넘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를 신비라고 하는 것은 교회가 인간들로 이뤄진 조직이지만 신적 기원을 지니고 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조직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차원을 지니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8항 참조). 

 

교회의 이런 신비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성사’(聖事)다. 성사란 쉽게 말하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을 전달하는 볼 수 있는 표징’이다. 헌장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성사’라고 표현한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성사인 것은 하느님 은총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충만히 실현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은총이 교회를 통해 드러나고 전달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성사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실현된 하느님의 구원을 세상 마지막 날까지 계속 선포해야 할 사명을 지닌다. 교회헌장은 이를 “하느님과 이루는 깊은 결합과 온 인류가 이루는 일치의 표징이며 도구”(1항)라는 말로 표현한다. ‘일치의 표징이며 도구’라는 말은 바로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가리킨다. 교회의 본질이 ‘하느님과 이루는 일치의 표징’ 곧 그리스도의 성사라면, 교회의 사명은 인류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일치를 이루게 해야 할”(1항) 도구 역할을 하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헌장은 이 교회의 신비를 구원 역사의 관점에서 설명한다(2~5항). 곧 교회는 세상 창조 때부터 이미 예표됐고,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 곧 구약의 역사를 통해 오묘하게 준비됐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때가 차자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당신 제자들을 불러 모으셨다. 이로써 교회는 눈에 보이는 공동체로 시작됐다.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신 성령께서는 이 교회를 “끊임없이 젊어지게 하시고 새롭게 하시며 자기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도록 이끌어주신다”(4항). 이제 “지상에서 하느님 나라의 싹과 시작이 된” 교회는 “조금씩 자라나는 동안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분투하며, 온 힘을 다해 자기 임금님과 영광스럽게 결합되기를 바라고 갈망한다”(5항). 

 

헌장은 이어 구약과 신약에 나오는 교회의 다양한 표상들에 대해 언급한다(6항). △ 교회는 양 우리이며 그리스도는 그 문이시다 △ 교회는 양 떼이며 그리스도는 착한 목자이시다 △ 교회는 하느님의 밭이다 △ 그리스도는 참된 포도나무이며 우리는 그 가지다 △ 교회는 하느님의 집이며 그리스도께서는 그 집의 모퉁이 머릿돌이시다 △ 교회는 하늘의 예루살렘이다 △ 교회는 순결한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다.

 

교회에 관한 다양한 표상 가운데 헌장은 특별히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의 신비체’라는 표상에 주목한다(7항).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신자들은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됐다. 신자들은 주님의 몸인 성찬의 빵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주님과 일치를 이룬다. 사람 몸의 지체가 여럿이지만 모든 지체가 한 몸을 이루듯이 신자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룬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이시며, 신자들은 그 몸의 지체들이다. 모든 지체는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닮아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형성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몸인 교회 안에 봉사 직무의 은총을 끊임없이 마련해 주신다. 우리는 그 은총을 받아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구원을 위해 서로 봉사함으로써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향해 자라게 된다.

 

 

교회는 비움과 버림의 자세 지녀야 

 

교회의 신비에 관한 제1장 마지막(8항)은 교회의 두 가지 측면 즉 영적 측면과 가시적 측면을 비교적 자세히 언급한다. 교회는 △ 교계 조직으로 이뤄진 단체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신비체이며 △ 가시적 집단인 동시에 영적 공동체이고 △ 지상의 교회인 동시에 천상의 보화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이 교회는 두 개가 아니라 “인간적 요소와 신적 요소로 합성된 하나의 복합체를 이룬다.” 이 교회가 바로 “그리스도의 유일한 교회”이고, 우리가 신경을 통해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믿으며”라고 고백하는 그 교회다. 

 

공의회 교부들은 이 교회, 곧 그리스도의 유일한 교회가 “베드로의 후계자와 그와 친교를 이루는 주교들이 다스리고 있는 가톨릭교회 안에 존재한다”고 언명한다. 또 “그 조직 밖에서도 성화와 진리의 많은 요소가 발견되지만, 그 요소들은 그리스도 교회의 고유한 선물로서 보편적 일치를 재촉하고 있다”고 밝힌다. 

 

여기서 두 가지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그리스도의 유일한 교회가 가톨릭교회 안에 존재한다고 해서 다른 그리스도 교회들 안에는 그리스도의 유일한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바꿔 말하면 갈라진 그리스도 교회들을 배격하거나 경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둘째는 가톨릭교회 밖에도 성화와 진리의 요소들을 있음을 인정하고 이를 일치를 위한 촉매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의 신비에 관한 제1장의 마지막 대목은 일치의 표징이요 도구인 교회가 지녀야 할 기본 태도에 대해 언급한다. 우선, 교회는 우선 인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모범으로 보여주신 비움과 버림의 자세를 지녀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오신 것처럼, 교회도 인간의 나약함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감싸 안아야 하며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교회 또한 끊임없이 참회와 쇄신을 추구해야 한다. 영적 공동체이면서 또한 인간들의 조직인 교회는 “자기 품에 죄인들을 안고 있어 거룩하면서도 언제나 정화돼야” 하기 때문이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3년 6월호, 이창훈 알퐁소(평화신문 편집국장)]

 

 

[공의회 문헌 풀어보기] 교회헌장 해설 (2)

 

 

교회를 ‘신비’로 이해한 교회헌장 제1장의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실상 교회의 본 모습을 우선적으로  ‘신비’로 이해하지 않는다면, 교회를 설명하기 위한 다른 어떠한 시도도 적절치 않을 것이다. 교회가 신비인 것은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 자체가 인간의 눈으로는 모두 헤아릴 수 없는 ‘신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첨단 과학 문명의 시대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신비’라는 표현이 얼마나 설득력과 호소력을 지닐 수 있을까. 교회는 분명 하나의 ‘신비’이지만 이를 현대인들에게 더욱 설득력 있게 제시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설명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공의회 교부들이 채택한 용어가 ‘하느님(의) 백성’이다. 

 

‘하느님 백성’은 그러나 결코 새로운 용어가 아니다. 성경에 자주 나오는 용어다. 실제로 고대 교회 교부들은 하느님 백성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했다. 하지만 중세 이후 이 표현은 차츰 잊혔고 대신에 교회의 위계적 제도적 가시적 측면을 강조하는 용어들이 전면에 등장했다. 그러다 20세기에 들어와 그리스도교 계시의 원천인 성경으로 돌아가려는 관심이 높아지면서 하느님 백성이라는 표현이 다시 부각되기 시작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부들은 이를 받아들여 신비로서의 교회 본질을 개관한 후(제1장) 하느님 백성이라는 관점에서 교회 본질과 특성을 조명하는데 이것이 교회헌장 제2장을 이루고 있다.

 

 

제2장 하느님 백성(9~17항)

 

헌장은 우선 하느님 백성이 어떤 이들인지를 설명한다(9항). 하느님께서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을 뽑아 그들과 계약을 맺으셨지만 이 백성은 새 계약의 백성, 새 이스라엘 백성의 예표다. 새 계약의 하느님 백성은 “그리스도께서 당신 피로 새로운 계약을 맺으신” 백성으로,  혈육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 하느님 소유가 된 백성이다.

 

이 백성은 △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고 △ 하느님의 자녀라는 품위와 자유를 지니며 △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 안에 머무르시고 △ 사랑의 새 계명을 법으로 지니며 △ 하느님 나라를 목적으로 삼는 백성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생명과 사랑과 진리의 친교를 이루도록 세우신 이 백성을 또한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의 도구로 삼으시고, 세상의 빛으로서 땅의 소금으로서 온 세상에 파견하신다.” 인간 역사 속에서 시련과 고난을 거쳐 나아가는 하느님 백성인 교회는 “성령의 활동 아래에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쇄신하여 마침내 십자가를 통하여 결코 꺼질 줄 모르는 빛에 이를 것”이라고 공의회 교부들은 진술한다. 

 

헌장은 이어 하느님 백성이 수행하는 보편 사제직 그리고 보편 사제직과 직무 사제직의 관계에 대해 언급한다(10항). 세례 받은 사람은 성령의 도유를 통해 거룩한 사제직으로 축성됐기에 모든 그리스도인은 사제직 곧 보편 사제직을 수행한다. 

 

그런데 공의회 교부들은 신자들의 보편 사제직과 사제들의 직무 사제직은 “정도만이 아니라 본질에서 다르다”고 지적한다. 어떻게 다를까. 사제들은 사제 축성으로 지니는 거룩한 힘을 통해 신자들을 사목하고 그리스도를 대신해 성찬의 희생 제사를 거행하고 하느님께 봉헌한다. 이에 비해 신자들은 성찬례에 참여하는 것을 비롯해 여러 성사를 받고 기도하고 감사를 드리며 거룩한 삶을 증언하고 극기와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사제직을 수행한다.

 

하지만 사제들의 직무 사제직은 신자들이 보편 사제직을 제대로 수행하는 데 필요한 은총과 도움을 제공하고, 신자들의 보편 사제직은 사제들이 수행하는 직무 사제직을 통해서 삶의 증거와 성덕으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두 사제직이 “서로 밀접히 관련돼 있으며, 그 하나하나가 특수한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유일한 사제직에 참여하고 있다”고 헌장은 강조한다. 

 

헌장에서 주목할 한 가지는 하느님 백성의 신앙 감각에 관한 것이다(12항). 성령께 도유된 신자 전체는 믿음에서 오류를 범할 수 없는데, 특히 주교에서 마지막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신앙과 도덕 문제에 관해 보편적인 동의를 보일 때 그러하다. 이렇게 하느님 백성 전체가 일치된 의견을 보일 때 오류를 범할 수 없는 것은 바로 하느님 백성이 지니는 초자연적 신앙 감각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신앙 감각을 “초자연적”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 곧 성령의 힘에 의한 것인 까닭이다.  

 

헌장은 또 성령께서 베풀어주시는 특별한 은사에 대해서도 언급한다(12항). 성령께서는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로 각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시지만 그것은 모두 공동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따라서 이 은사에 대해서는 감사와 위안으로 받아들여야 하지만, 또한 특별한 은총을 함부로 간청하지 말아야 한다. 유념해야 할 것은 △ 이 은사의 진실성과 올바른 실천에 관한 판단이 교회를 다스리는 이들 곧 교도권자들에게 있으며 △ 교도권자들은 성령의 불을 끄지 않고 오히려 좋은 것을 붙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보편성은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

 

하느님 백성에 관한 2장에서 눈여겨봐야 할 또 한 가지는 하느님 백성 곧 교회의 보편성에 관한 것이다(13항). 보편성이란 특별한 이들에게만 통하거나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두루 통하고 다 같이 적용된다는 뜻이다. 이 보편성으로, 한국에 있는 신자나 로마에 있는 신자가 모두 가톨릭 신자로서 똑같이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한 몸을 이룬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 백성이 지니는 보편성은 획일성이 아니라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를 의미한다는 사실이다. 헌장은 이렇게 강조한다. “하느님의 백성은 어떠한 민족이든 그 현세적 선을 결코 없애 버리지 않으며 오히려 정반대로 민족들의 역량과 자산과 관습을 좋은 것이라면 촉진하고 받아들이며, 받아들임으로써 실제로 정화하고 강화하며 승화시킨다”(13항).

 

이것이 보편성이 지니는 힘이다. 이 보편성의 힘으로 하느님 백성을 이루는 다양한 지체들은 자신의 고유한 은혜를 서로 나누는 가운데 일치 안에서 충만을 도모하며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헌장은 하느님 백성이 지니는 보편성의 관점에서 이미 하느님 백성에 속해 있거나 아직 속해 있지 않은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의 구원과 관련한 교회의 기본 입장을 제시한다(14~16항). 우선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에 들어온 가톨릭 신자들은 구원을 받는다. 그러나 가톨릭교회가 구원에 필요한 문임을 알면서도 교회에 들어오기 싫어하거나 그 안에 머물기를 거부하는 사람 또는 교회에 들어오더라도 “교회의 품안에 마음이 아니라 몸만 남아 있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14항).

 

입으로만 ‘주님, 주님’이라고 고백하지만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반면에 교회에 들어오기를 간절히 바라나는 예비신자들은 그 소망 자체로 교회와 결합돼 있다. “어머니인 교회는 이미 자기 자녀가 된 그들을 사랑과 배려로 감싸 안는다”(14항).   

 

하느님 백성에 관한 2장은 계속해서 비가톨릭 그리스도인, 나아가 비그리스도인의 구원에 대한 교회의 기본 입장을 제시한다. 이 부분은 다음 호에서 좀 더 살펴보기로 한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3년 7월호, 이창훈 알퐁소(평화신문 편집국장)]

 

 

[공의회 문헌 풀어보기] 교회헌장 해설 (3)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까지 비(非)가톨릭 그리스도인 곧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지니지만 가톨릭교회와 온전히 일치하지 않는 정교회 신자와 개신교 신자들에 대해 가톨릭교회는 부정적이었다. 그들을 마치 아버지 품을 떠난 ‘방탕한 아들’(루카 15,11-32참조)처럼 여겼다. 하지만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이런 부정적 전망에서 벗어났다. 교회헌장 15항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헌장은 교회 곧 가톨릭교회와 친교의 일치를 보존하지 못하는 비가톨릭 그리스도인들도 “여러 가지 이유로” 가톨릭교회와 결합돼 있다며 긍정적인 측면들을 제시한다. △ 성경을 신앙과 생활의 규범으로 삼고 △ 참다운 종교적 열정을 보여주며 △ 하느님 아버지와 그 아들 구세주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결합되고 △ 다른 성사들까지도 자기 교회나 공동체 안에서 인정하고 받는다는 것이다. 헌장은 더 나아가 이들 비가톨릭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 주교직을 누리고 △ 성찬례를 거행하며 △ 성모 마리아 신심을 존중하는 이들도 있음을 거론한다. 정교회 신자들이 특히 그러하다.

 

그러기에 이들 비가톨릭 그리스도인들과의 관계에서 필요한 것은 일치를 향한 노력이다.  헌장은 우선 성령께서는 이 모든 이들이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방법대로” 한 양떼 안에서 한 목자 밑에 평화롭게 일치를 이루도록 하는 열망과 활동을 일으켜 주신다고 밝힌다. 이어서 “이 일치를 이루고자 교회는 끊임없이 기도하고 희망하고 행동하며 그리스도의 표지가 교회의 얼굴에서 더욱 찬란히 빛나도록 자녀들에게 정화와 쇄신을 권고한다”고 덧붙인다.  이로써 헌장은 일치 노력의 방법적 원칙을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우선 일치는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방법대로’ 이뤄져야 한다. 또 이 일치를 위해 신자들은 끊임없는 정화와 쇄신을 통해 그리스도의 표지를 드러내야 한다.

 

 

비그리스도인에게도 구원이 열려있음 명시

 

헌장은 이어 교회와 비그리스도인, 즉 타종교 신자들이나 종교가 없는 이들의 관계에 대해서도 언급한다(16항). 한 마디로 이들도 여러 가지로 이유로 ‘하느님 백성’인 교회와 관련돼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계약의 백성인 유다인들이다. 하느님께서는 이들을 선택해 당신 백성으로 삼으시는 큰 사랑을 베푸셨고, 또 그리스도께서 이 백성에게서 태어나셨다. 더욱이 하느님께서는 한 번 주신 선물이나 소명을 다시 거두지 않으시기에, 이 백성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서 결코 제외되지 않는다. 

 

하지만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유다인만이 아니라 “창조주를 알아 모시는 사람들을 다 포함”하는데, 이슬람교 신자들인 모슬렘, 곧 무슬림도 여기에 해당한다. 이들은 △ 아브라함의 신앙을 간직하고 있을 뿐 아니라 △ 우리와 마찬가지로 마지막 날에 사람들을 심판하실 자비로우시고 유일하신 하느님을 흠숭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이렇게 유다인과 모슬렘을 포함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헌장은 “어둠과 그림자 속에서 미지의 신을 찾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하느님은 결코 멀리 계시지 않으신다”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고, 구세주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 받게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이어서 헌장은 아주 놀라운 선언을 한다. “자기 탓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분의 교회를 모르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양심의 명령을 통하여 알게 된 하느님의 뜻을 은총의 영향 아래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는 것이 가톨릭교회의 일반적 가르침이었다.

 

하지만 공의회는 이 표현으로 교회를 모르고 하느님을 모른다 하더라도 진실한 마음으로 선을 행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구원이 열려 있음을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뿐 아니다. 헌장은 깜짝 놀랄 진술을 계속해 나간다. “하느님의 섭리는 자기 탓 없이 아직 하느님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지만 하느님의 은총으로 바른 생활을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에 필요한 도움을 거절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또 그들이 지닌 좋은 것, 참된 것은 무엇이든지 다 교회는 복음의 준비로 여길 뿐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제자라면 신앙 전파의 책임져야

 

교회헌장 16항의 이 대목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타종교인이나 종교가 없는 이들에 대해 종전과는 아주 다른, 열린 자세를 보이고 있음을 잘 드러낸다. 물론 2000년 역사에서 가톨릭교회가 타종교에 대해 전향적이고 열린 자세를 보인 사례들이 없지 않다.

 

16~17세기 중국에서 선교한 예수회 선교사들이 택한 보유론(補儒論) 입장(천주교의 가르침이 유교의 가르침을 보완한다는 입장)도 그 하나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특히 중세 이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 타종교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일반적 입장은 배타적이었고 부정적이었다. 이런 부정에서 긍정으로의 획기적 전환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이뤄진 것이다. 

 

비가톨릭 그리스도인 및 비그리스도인들과 교회의 관계에 대한 15항과 16항의 이 내용은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 “일치의 재건”과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 “우리 시대”와 같은 다른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들의 토대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제기된다. 이렇게 하느님을 잘 모르고 교회를 잘 모르는 이들도 구원받을 수 있다면, 교회가 굳이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헌장 16항 마지막 부분이 이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흔히 악마에게 속아 허황한 생각에 빠져 하느님의 진리를 거짓과 뒤바꾸고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더 섬기며 또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 없이 살다가 죽어가며 극도의 절망에 놓인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영광과 이 모든 사람의 구원을 증진하고자” 교회는 선교 촉진에 매진하는 것이다. 

 

헌장은 그래서 교회의 선교 특성을 언급하는 것으로 ‘하느님 백성’에 관한 제2장을 마무리한다(17항). 교회의 선교적 특성은 ‘파견’에 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파견하신 것처럼, 성자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 19-20). 그리스도의 이 명령을 사도들을 통해 받은 교회는 땅 끝까지 복음 선포의 이 장엄한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 복음 선포 활동을 통해 교회는 △ 사람들을 신앙 고백으로 이끌어 세례를 받도록 준비시키고 오류의 예속에서 구출하고 △ 그들을 그리스도께 합체시켜 사랑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히 자라나게 한다. 교회는 또 △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에, 또는 민족들의 고유 의례와 문화에 심어져 있는 좋은 것은 무엇이든지 없어지지 않도록 할 뿐 아니라 △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과 악마의 패배와 인간의 행복을 위해 치유되며 승화되며 완성되게 한다. 

 

따라서 하느님 백성인 교회를 이루는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누구나 다 제 나름대로 이 신앙을 전파해야 할 책임을 지고 있다”고 헌장은 강조한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3년 8월호, 이창훈 알퐁소(평화신문 편집국장)]

 

 

[공의회 문헌 풀어보기] 교회헌장 해설 (4)

 

 

교회헌장 제3장은 ‘교회의 위계조직, 특히 주교직’이라는 제목이 말해주는 것처럼, 주교직을 중심으로 교회의 위계조직을 다루고 있다. 위계란 교황과 주교, 신부, 부제로 이뤄진 성직자들의 품계를 말한다.

 

이 위계조직은 지난 2000년 동안 가톨릭교회 조직과 운영의 근간을 이뤄왔다. 제목에서 ‘특히 주교직’이라고 표현했듯이, 이 위계조직 중에서도 중심이 되는 것은 주교직이다. 신자들은 일반적으로 교회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본당-정확한 교회법적 표현으로는 본당사목구-을 연상하지만, 교회법적으로 ‘개별 교회’ 하면 주임 신부가 사목을 책임지는 본당이 아니라 주교가 관할하는 교구를 가리킨다. 그래서 가톨릭교회 제도와 관련해 개별 교회라고 이야기하면 교구로 이해해야 한다. 

 

위계조직에 관한 교회헌장 제3장은 거의 4분의 3을 주교직에 대해 할애하고 있다. 우선 주교직에 대해 살펴보자.

 

 

주교직의 근거는 ‘성사성(聖事性)’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도록 파견하기 위해 특별히 열 두 제자들을 뽑아 당신 곁에 두고 가르치셨다. 이들을 열두 사도라고 부른다. 이 사도들은 주님의 부활과 승천 후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 땅 끝까지 복음의 증인이 되라는 사명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사도들은 그리스도께 받은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다양한 협조자들을 두었을 뿐 아니라 이 사명이 세상 마지막 날까지 이어지도록 후계자들을 세우는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사도들이 세운 후계자들은 또 자신이 받은 직무를 다른 훌륭한 후계자들이 이어받도록 하는 법규를 마련했다. 이렇게 해서 사도들이 받은 사명이 그 후계자들을 통해 교회 안에 계속 이어지고 있는데 이를 ‘사도전승’이라고 한다. 그리고 ‘사도전승’에 의해 사도들의 직무를 이어받은 이들을 주교라고 부른다(19~20항). 

 

헌장은 계속해서 주교들의 역할에 대해 언급한다. 주교들은 △ 하느님의 대리로서 양 떼를 다스리는 목자들이 되고 △ 교리의 스승이 되며 △ 거룩한 예배의 사제가 되고 △ 통치의 봉사자가 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주교들은 단순히 인간적 제도에 따라서가 아니라 “신적 제도에 따라”(20항) 사도들의 자리를 계승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헌장은 이렇게 천명한다. “주교들은 교회의 목자들이므로, 주교의 말을 듣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고, 주교를 배척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그리스도를 보내신 분을 배척하는 사람이다”(20항). 

 

이 단언은 주교직이 그만큼 무겁고 중요한 임무라는 것을 부각시키고 있다. 헌장은 이어 이토록 중요한 주교직의 근거를 제시한다. 그것은 주교직의 ‘성사성’(聖事性) 때문이다(21항 참조). 성사란 ‘보이지 않는 하느님 은총을 전달하고 드러내는 거룩한 표징’이라고 간단하게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성사’라고 할 때, 교회가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표징이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성령을 충만히 받음으로써 성사성을 지니게 됐다. 이 성사성은 주교 축성을 통해 사도들의 후계자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진다.

 

 

주교의 임무는 교계적 친교 안에서만 행사

 

그런데 “사도들은 자기 협조자들에게도 안수를 통해 영적 선물을 전해주었으며, 그것은 우리에게까지 주교 축성 안에서 전해 내려온다”(21항)고 교회헌장은 밝힌다. 여기서 ‘자기 협조자’란 오늘날의 신부와 부제를 가리킨다. 그리고 이 표현으로써 헌장은 주교들이 사제품과 부제품을 수여하는 근거를 제시한 것이다. 그래서 주교 축성은 사제 축성이나 부제 축성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성품성사이지만, 사제품이나 부제품과 달리 “충만한 성품성사”(21항)다. 주교직을 ‘대사제직’이라고, 또는 ‘거룩한 봉사 직무의 정점’이라고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그런데 주교 축성은 사제직, 곧 거룩하게 하는 임무 외에도 가르치는 임무와 다스리는 임무도 함께 부여한다. 다시 말해 주교로 축성되면 교회에서 성화 임무와 교도 임무 그리고 통치 임무라는 세 가지 주요 임무를 다 행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헌장은 이 임무가  “그 본질상 오로지 주교단의 단장과 단원들과 이루는 교계적 친교 안에서만 행사될 수 있다”(21항)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 

 

이 주교들의 교계적 친교에 관한 이 짧은 표현에는 좀 더 들여다봐야 할 몇 가지 중요한 측면이 있다. 한 가지는 주교단과 그 단장인 교황과의 관계다(22항). 베드로와 사도들이 하나의 사도단을 이루었듯이,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과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들도 서로  결합돼 있다. 주교들은 그 ‘단체적 본질과 특성’ 혹은 ‘단체성’에 의해 주교단을 이뤄 교계적 친교 안에서 교류하고 협력하며 보편 교회에 대해 최고 권력의 주체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단장인 교황과 함께 할 때만 가능하다. 헌장은 이렇게 천명한다. “주교들의 단체인 주교단은 동시에 그 단장으로서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과 더불어 이해되지 않을 때에는 권위를 가지지 못한다”(22항). 반면에 그리스도의 대리이자 온 교회의 최고 목자인 교황은 보편 교회(전 세계 교회)에 대해 완전한 최고 권력을 지니며 이를 자유로이 행사할 수 있다. 이것이 교황 수위권이다.

 

 

교황 수위권과 최고 권위 존중

 

따라서 주교들은 그 단장인 교황의 수위권과 최고 권위를 충실히 존중하면서, 성령의 비추임에 따라, 교회의 선익을 위해 고유한 권력을 행사한다. 보편 교회에 대해 주교단이 지니는 최고 권력은 “세계 공의회에서 장엄한 양식으로 행사된다. 그러나 베드로의 후계자(교황)가 세계 공의회로 확인하거나 적어도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세계 공의회는 결코 인정되지 않는다”(22항).   

 

요컨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주교단의 단체성 개념을 통해 주교단이 보편 교회에 대해 최고 권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긍정하면서도 이 권력 행사가 오로지 교황과 함께 하고 교황의 동의를 얻을 때만이 가능하다고 밝힘으로써 거의 한 세기 전인 18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천명한 교황 수위권 교리를 그대로 존중하고 수용하고 있다. 

 

교계적 친교에 관한 또 다른 한 가지는 주교단 안에서 주교들 간의 관계다(23항). 주교들은 개별교회의 으뜸으로서 자기에게 맡겨진 개별 교회에 대해 최고 권한을 행사한다.

 

하지만 이는 그 주교가 주교단의 일원으로서 교황 및 주교들과 이루는 교계적 친교 안에 머물러 있을 때만 그러하다. 주교들은 또 자기에게 맡겨진 개별 교회 안에서는 최고 권력을 행사하지만 다른 교회나 보편 교회에 대해서는 그러하지 못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주교단의 일원으로서 또 사도들의 후계자로서 개별 주교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명령에 따라”(23항) 보편 교회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래서 온 교회의 공통 규율과 신앙의 일치를 증진하고 수호하며, 가난하고 고통당하며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받는 지체들을 사랑하도록 신자들을 가르쳐야 한다. 또 사정이 허용하는 대로 주교들끼리 공동 활동을 하고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과 협력해야 한다고 헌장은 제시한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3년 9월호, 이창훈 알퐁소(평화신문 편집국장)]

 

 

[공의회 문헌 풀어보기] 교회헌장 해설 (5)

 

 

그리스도께서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것처럼, 그리스도에게서 파견된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들이 수행하는 임무는 섬기는 직무, 곧 봉사 직무다. 교회헌장은 이렇게 설명한다. “주님께서 당신 백성의 목자들에게 맡기신 저 임무는 참 섬김이다. 성서에서는 이를 뜻 깊게도 ‘디아코니아’(diakonia) 곧 봉사라고 한다”(24항). 주교들의 봉사 직무는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가르치는 임무(교도 직무)와 거룩하게 하는 임무(성화 직무) 그리고 다스리는 임무(통치 직무)이다.

 

가르치는 임무는 무엇보다도 복음 선포와 관련된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하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셨듯이, 복음 선포야말로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인 주교들이 수행해야 할 첫째 임무다. 주교들은 △ 자기 백성들이 믿고 살아가야 할 신앙을 선포하고 △ 그 신앙을 성령의 빛으로 밝혀 주며 △ 그 신앙이 열매 맺도록 인도하고 △ 신자들이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해 줘야 한다. 반면에 신자들은 “신앙과 도덕에 관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린 자기 주교의 판단에 일치해야 하고 마음의 종교적 순종으로 그를 따라야 한다.”(25항)

 

신자들은 특히 교황의 유권적 교도권에 대해서는 “비록 교좌(敎座)에서 말하지 않을 때에도 ··· 의지와 지성의 이 종교적 순종을 드러내야 한다”(25항)고 헌장은 강조한다. 교황의 교도권적 가르침은 여러 방식으로 이뤄진다. 교좌에서 장엄하게 선포하는 무류적 가르침 외에도, 회칙이나 교서, 권고, 담화, 연설, 강론, 훈화 등 다양한 방식으로 교황은 교도권을 행사한다. 신자들은 교황의 이런 유권적 가르침을 성실하게 따라야 한다. 

 

이 가르치는 임무와 관련, 헌장은 특별히 교황의 무류성과 주교단의 무류성에 대해 언급한다. 우선 교황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최고 목자이며 스승으로서 신앙과 도덕에 관한 교리를 확정적 행위로 선언하는 때에” 그 선언은 무류성을 지닌다. 이는 주교단의 단장인 교황이 “신앙 안에서 자기 형제들의 힘을 북돋워 주는 사람”일 뿐 아니라 “한 개인으로서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교회 자체의 무류성의 은사를 특별히 지니고 있는 보편 교회의 최고 스승으로서 가톨릭 신앙의 교리를 설명하고 옹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25항).

 

이에 비해 주교들은 개별적으로는 무류성의 특권을 누리지 못한다. 하지만 “베드로의 후계자(교황)와 친교의 유대를 보전하면서 신앙과 도덕의 사항들을 유권적으로 가르치는 주교들이 하나의 의견을 확정적으로 고수해야 할 것으로 합의하는 때에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오류 없이 선포하는 것”(25항)이라고, 곧 무류적이라고 헌장은 밝힌다. 주교단의 이 무류적 선언은 세계 공의회에서 보편 교회를 위해 신앙과 도덕에 관한 교리를 확정적으로 선포할 때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주교 “참으로 자기가 다스리는 백성의 수장”

 

주교들은 거룩하게 하는 임무, 곧 성화 직무를 성사 집전, 특별히 성찬례 거행과 지도를 통해 수행한다. 교회는 성찬례, 곧 성체성사로 끊임없이 생명을 얻고 자라나기에, 주교는 성찬례 거행을 통해 자기 교회 신자들을 그리스도의 신비체 안에 하나로 일치시킨다. 그뿐 아니라 자기 교구에 적합한 지침을 마련해 신자들이 하느님께 더욱 합당한 예배를 드리도록 해야 한다. 견진성사의 원집전자이고, 성품성사의 관리자이며, 참회 규율의 지도자인 주교는 또한 교구민들이 합당하게 성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권고하고 가르쳐야 한다. 나아가 삶의 모범을 통해 교구민들에게 도움을 줘야 하며, 온갖 악을 끊어 버리고 주님의 도우심으로 악을 선으로 바꾸어 자기에게 맡겨진 양 떼와 함께 영원한 생명에 이르러야 한다(26항). 

 

헌장은 이어 주교의 다스리는 임무 곧 통치 직무에 대해 언급한다(27항). 주교들은 그리스도의 대리자이자 사절로서 자기에게 맡겨진 개별 교회를 다스리는데, 조언과 권고와 모범과 권위와 거룩한 권력을 통해서 다스린다. 하지만 주교의 권위와 권력은 “오로지 진리와 성덕 안에서 자기 양 떼를 기르는 데에만”(27항) 행사해야 한다. 이 권력 행사에서 유념해야 할 원칙이 있다. ‘높은 사람은 낮은 사람처럼 처신해야 하고, 지배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처럼 처신해야 한다’는 것이다(루카 22,26-27 참조). 

 

주교들은 자기에게 맡겨진 양 떼를 돌보는 일에 있어서 고유한 권력을 행사하기에, 교황의 대리자가 아니라 “참으로 자기가 다스리는 백성의 수장”(27항)이다. 따라서 교계적 친교를 이루고 있는 한 교황이라 할지라도 주교들의 권력을 없애지 못한다. 오히려 이를 강화하고 옹호한다. 

 

주교들은 자기의 고유한 권력을 행사함에 있어서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않고 섬기러 오신, 그리고 양들을 위해 당신 목숨을 바치러 오신 착한 목자의 표양을 본받아야 한다. 그래서 △ 무지하고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동정할 수 있어야 하고 △ 아랫사람들을 친자식처럼 사랑하고 자기와 함께 기꺼이 협력하도록 권고하며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 기도와 설교와 온갖 사랑의 행동으로 그들을 돌봐야 하며 △ 신자가 아닌 사람들도 주님 안에서 자기에게 맡겨진 사람들로 여겨 돌봐 줘야 한다. 나아가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신자들에게도 사도직 활동과 선교 활동을 권장해야 한다. 

 

헌장은 신자들에게는 교회가 그리스도와 결합되고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결합되어 계시듯이 주교와 결합돼야 하며 모든 일에서 일치해 한 마음을 이루고 하느님의 영광이 넘쳐흐르게 해야 한다고 권고한다.

 

 

신부 · 부제, 주교의 봉사 직무에 참여하는 협력자

 

교회헌장은 위계제도에 관한 마지막 두 항을 각각 신부와 부제에 관해 할애한다(28~29항). 신부와 부제는 주교의 봉사 직무에 참여하는 협력자들이다. 신부는 “대사제직의 정점에는 이르지 못하고 권력의 행사에서 주교들에게 의존하고 있지만 성품성사의 힘으로···참 사제로서 복음을 선포하고 신자들을 사목하며 하느님께 예배드리도록 축성된”(28항) 신분이다. 

 

자기 주교와 더불어 한 사제단을 구성하는 신부는 “각 지역 회중 안에 주교를 어느 모로든 현존하게 하며 주교의 임무와 관심사를 일부분 받아들여 일상 사목을 수행”함으로써 주교의 사제직과 사명에 참여한다. 신부는 고해성사와 병자성사를 집전하고 특별히 성찬의 예배에서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행동하며 그리스도의 신비를 선포하고 신자들의 예물을 그리스도의 희생 제물과 결합시켜 성찬의 희생 제사를 봉헌한다. 또 신자들의 요청과 기도를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며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칠 뿐 아니라 “주님의 법 안에서 묵상하며 읽은 것을 믿고, 믿은 것을 가르치며, 가르친 것을 실천한다”(28항). 

 

주교의 협력자로서 자기 주교와 더불어 한 사제단을 이루는 신부들은 주교를 신뢰하며 넓은 마음으로 주교와 결합돼 있다. 신부들은 “각 지역 신자들의 회중 안에 주교를 어느 모로든 현존하게 하며, 주교의 임무와 관심사를 일부 받아들여 일상 사목을 수행한다”(28항). 말하자면 주교의 봉사 직무, 곧 가르치는 직무와 거룩하게 하는 직무와 다스리는 직무를 주교의 위임을 받아 수행하는 것이다. 

 

신부들은 이렇게 주교의 사제직과 사명에 참여하므로 “주교를 참으로 자기 아버지로 알아 존경하는 마음으로 순종해야 한다”고 헌장은 적시한다. 반면에 주교는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벗이라고 부르신 것처럼 “자기 협력자들인 사제들을 아들로 또 친구로 여겨야 한다.” 이는 교구 사제이든 수도 사제이든 마찬가지다. “모든 사제는 주교단과 결합되어 있으며, 자신의 소명과 은총에 따라 온 교회의 선익에 봉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28항). 또 이 공통된 성품과 사명의 힘으로 모든 신부는 서로 친밀한 형제애로 결합되기에, 영성적·물질적·사목적 상호 도움으로 형제적 친교가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신부들은 △ 신자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로서 돌봐야 하며 △ 양 떼의 모범이 되어 자기 지역 공동체를 섬기고 다려야 하고 △ 신자들에게나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참으로 사제답고 목자다운 봉사자 모습을 드러내야 하며 △ 모든 이에게 진리와 생명의 증거를 보여 주어야 하고 △ 신앙에서 멀어진 이들도 착한 목자로서 찾아 나서야 한다고 헌장은 제시한다. 

 

부제는 위계제도의 가장 낮은 품계다. 헌장은 부제들이 안수를 받는 것은 “사제직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봉사 직무를 위해서”(29항)라고 명시한다. 부제들의 일은 “주교와 그의 사제단과 친교를 이루어 전례와 말씀과 사랑의 봉사로 하느님 백성을 섬기는” 것이다. 그래서 △ 세례를 집전하고 △ 성체를 보존하고 분배하며 △ 혼인을 주례하고 축복하며 △ 병자영성체를 해주며 △ 신자들에게 성경을 봉독해 주며 가르치고 권고하며 △ 신자들의 예배와 기도를 지도하고 △ 준성사를 집전하며 △ 장례식을 주재하는 것이 부제들의 직무다. 때에 따라서는 자선과 관리의 직무를 부여받을 수도 있다. 

 

헌장은 부제직이 사제직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봉사 직무를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지만 우리나라 교회에서는 아직도 사제직을 위한 준비 단계로만 부제직을 수여하고 있을 뿐 부제직 그 자체를 위해, 곧 종신 부제직을 위해 부제직 제도를 두고 있지는 않다. 

 

헌장은 어떤 형태의 부제직을 둘 것인지는 지역 주교회의들이 교황의 승인을 받아 결정할 일이라고 밝힌다. 그런데 부제직은 교황의 동의를 얻으면 나이 많은 기혼자들에게도, 적합한 젊은이들에게도 수여할 수 있지만, 젊은이들의 경우에는 독신제 법이 확고히 존속돼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29항).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3년 10월호, 이창훈 알퐁소(평화신문 편집국장)]

 

 

[공의회 문헌 풀어보기] 교회헌장 해설 (6)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이룩한 결실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하나가 바로 평신도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한 것이다.

 

공의회 이전에 평신도는 교회 안에서 성직자나 수도자에 비해 늘 열등하고 수동적인 존재로 여겨졌다. 하지만 공의회는 이런 부정적 시각에서 벗어나 평신도가 성직자, 수도자와 마찬가지로 똑같은 하느님 자녀로서 동등한 품위를 지니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 

 

교회헌장 제4장(30~38항)은 이렇게 새롭게 이해한 평신도의 본질과 사명을 다루고 있다. 헌장은 우선 평신도 신원을 “성품의 구성원과 교회가 인정한 수도 신분의 구성원이 아닌 모든 그리스도인”(31항)으로 규정한다. 이들은 △ 세례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하느님 백성을 이루고 △ 그리스도의 삼중 사명 곧 사제직과 예언자직과 왕 직에 나름대로 참여하여 △ 하느님 백성의 일원으로서 수행해야 할 나름의 사명을 교회와 세상 안에서 실천하는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런데 평신도들에게는 그들만의 “고유하고 독특한” 성격이 있다. 바로 “세속적 성격”이다. 물론 성직자들도 때로는 세속에 살며 세속적 직업을 갖기도 하지만 그들의 고유한 직무는 성직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평신도들은 “현세의 일을 하고 하느님의 뜻대로 관리하며 하느님 나라를 추구하는 것”이 본연의 임무다. 평신도들은 세속 안에서 살면서 거기에서 하느님께 부르심을 받아 복음정신을 실천하고 “누룩처럼 내부로부터 세상의 성화에 이바지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무엇보다도 “삶의 증거로써 믿음과 바람과 사랑으로 빛을 밝혀 다른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31항). 

 

이처럼 세속적 성격을 특징으로 하는 평신도의 신원은 성직자나 수도자들과 직무상으로 뚜렷이 구별되지만 한 하느님 백성으로서 같은 품위를 지닌다. 헌장은 이렇게 적시한다.

 

“선택된 하느님 백성은 하나뿐이다.···그리스도 안에서 태어난 지체들의 품위도 같고 자녀의 은총도 같고, 완덕의 소명도 같으며, 구원도 하나, 희망도 하나이며, 사랑도 갈라지지 않는다.···따라서 교회 안에서 모든 이가 똑 같은 길을 가는 것은 아니지만···모든 신자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공통된 품위와 활동에서는 참으로 평등하다”(32항).

 

 

교회와 세속에서 사도직 수행하는 평신도

 

평신도의 신원과 사명을 이와 같이 언명한 헌장은 계속해서 평신도 사도직과 그 구체적인 수행 방법에 대해 제시한다(33~36항). 사도직이란 말 그대로 사도로서 수행하는 직무를 말한다. 또 사도란 ‘열두 사도’라는 표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사명을 수행하도록 파견 받은 이를 뜻한다.

 

인류 구원을 위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수행하시고 완성하신 구원 사업이 세상 끝까지 계속 이어지도록 제자들을 파견하시고 교회를 세우셨다. 이렇게 교회에 맡겨진 이 구원 사명에 참여하는 일을 사도직이라고 한다. 따라서 하느님 백성이면 신분의 구별 없이 누구나 사도직을 수행하며, 특별히 평신도가 수행하는 사도직을 평신도 사도직이라고 부른다. 

 

평신도들은 두 영역에서 사도직을 수행한다. 하나는 교회 안이다. 평신도는 교회의 일원으로서 교회 공동체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나름대로 협력하고 참여한다. 다른 하나는 세속이다. 세속은 세속적 성격을 특징으로 하는 평신도들이 사도직을 수행하는 고유한 자리다. 헌장은 이렇게 적시한다. “평신도들은 특별히 교회가 오로지 평신도들을 통해서만 세상의 소금이 될 수 있는 그러한 장소와 환경 안에서 교회를 현존하게 하고 활동하게 하도록 부름 받고 있다”(33항). 

 

그리스도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수행하신 직무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사제직과 예언자직과 왕 직이다. 이를 전통적으로 그리스도의 삼중 직무 혹은 그리스도의 삼중 사명이라고 부른다. 헌장은 그리스도께서 수행하신 사제직과 예언자직과 왕 직을 평신도들도 나름대로 실천함으로써 평신도 사도직을 수행한다고 제시한다. 

 

그래서 평신도들이 그들의 모든 일을, 곧 기도와 사도직 활동과 부부 생활과 가정생활 그리고 일상 노동은 물론 심신의 휴식까지도 성령 안에서 행하고 또 삶의 괴로움을 꿋꿋이 견디어내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하는 것이다. 평신도들이 수행하는 이 사제직은 사제들이 수행하는 직무 사제직과 구별해 ‘보편 사제직’이라고 부른다(34항).  

 

평신도들은 또 자신의 “신앙생활과 신앙 고백을 확고히 결합”시킬 때, 곧 자신이 살아가는 세속 환경 안에서 생활의 증거와 말씀의 선포를 통해 그리스도를 전할 때, “자기의 모범과 증거로 세상에 죄악을 밝히고 진리를 찾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어 줄” 때, 그리스도의 예언자직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 헌장은 “평신도들은 현세의 일에 종사하면서도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 귀중한 활동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35항). 

 

평신도들은 그리스도의 왕 직에도 참여한다. △ 극기와 거룩한 생활로 자신 안에서 죄를 극복하는 일 △ 겸손과 인내로 다른 이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일 △ 현세 사물들의 질서를 바로 잡아 세상이 그리스도의 정신에 젖어들게 하는 일 △ 창조주의 섭리와 그분 말씀의 비추심에 따라 참으로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해 창조된 재화를 계발하고 더욱 적절하게 분배하는 일 △ 인간적이고 그리스도교적인 자유 안에서 나름대로 세계의 진보에 기여하는 일 △ 인간 활동과 문화에 도덕 가치가 스며들게 하는 일이 모두 그리스도의 왕 직 사명에 참여하는 것이다(36항).

 

 

성사의 도움을 목자들에게 받을 권리 있어

 

헌장은 이어 교계와 평신도의 관계에 언급한다(37항). 평신도들은 필요한 영적 도움 특히 “하느님 말씀과 성사들의 도움”을 목자들에게 받을 권리가 있으며 필요와 소원을 목자들에게 표명해야 한다. 또 교회의 선익을 위해 자신의 견해를 밝힐 권리와 때로는 의무까지 지닌다.

 

이 경우 교회가 설립한 기구들을 통해 솔직하고 대담하고 지혜롭게 또한 존경과 사랑을 지니고 의견을 밝혀야 한다. 아울러 목자들이 스승과 지도자로서 교회 안에서 결정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순종으로 즉각 받아들여야 한다. 자기 목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일도 잊지 말아야 한다. 

 

반면에 목자들은 “교회 안에서 평신도들의 품위와 책임을 인정하고 향상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 △ 평신도들의 현명한 의견을 참작하고 △ 신뢰로써 봉사 직무를 맡기며 △ 행동의 자유와 여지를 남겨 주고 △ 자발적으로 활동하도록 격려해야 한다. 또 평신도들이 제기하는 계획과 요청에 어버이다운 사랑으로 관심을 기울여 깊이 헤아려야 한다. 

 

헌장은 “평신도는 저마다 세속에서 주 예수님의 부활과 생명의 증인이 되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표지가 돼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평신도에 관한 4장을 마무리한다. ‘금구’(금구 황금의 입)이라고 불리는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의 강론 말씀을 인용한 마지막 대목은 두고두고 되새기며 음미할 만하다. “영혼이 육신 안에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안에서 그 혼이 돼야 한다”(38항).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3년 11월호, 이창훈 알퐁소(평화신문 편집국장)]

 

 

[공의회 문헌 풀어보기] 교회헌장 해설 (7)

 

 

“교회헌장” 제5장(39~42항)은 ‘교회의 보편적 성화 소명’을 다룬다. ‘보편적 성화(聖化) 소명’이란 교계에 속하는 성직자든 그렇지 않은 평신도든 교회 안의 모든 이가 다 거룩하게 되라는 부름을 받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다 거룩함으로 부름 받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교회가 거룩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거룩한 것은 △ 거룩하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당신의 신부로 삼아 사랑하실 뿐 아니라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려고 당신 자신을 내어주셨으며 △ 교회를 당신과 결합시켜 당신 몸이 되게 하시고 △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성령의 선물로 가득 채워 주셨기 때문이다. 

 

교회의 이 거룩함은 “성령께서 신자들 안에 맺어 주시는 은총의 열매로 끊임없이 드러나며 또 드러나야 한다”(39항)고 헌장은 강조한다. 여기서 두 가지를 특별히 고찰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거룩함이 신자들에게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신자들은 그 자체로 거룩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스스로 이룩한 업적 때문이 아니다. 다만 “하느님의 계획과 은총에 따라 부름 받고, 주 예수님 안에서 의화되고, 믿음의 세례 안에서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하느님 본성에 참여하였기”(40항) 때문이다. 

 

둘째는 거룩함이 신자들에게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자녀가 됨으로써 거룩하게 된 신자들은 이제 “하느님의 은총으로 거룩하게 살며 이미 받은 성덕을 보존하고 완성해 나가야”(40항)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 성도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고 △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로서 자비와 친절과 겸손과 온유와 인내로 마음을 새롭게 하고 △ 성덕에 이르는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또 연약한 인간으로서 많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기에 언제나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구하며 날마다 기도해야 한다. 

 

그리스도 신자들에게서 드러나고 또 드러나야 하는 이 거룩함은 현세 생활에서 인간다운 생활양식을 소홀히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증진하게 한다. 헌장은 이렇게 강조한다. “신자들은 그리스도께 받은 힘을 다하여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며, 그분의 모습을 닮아 모든 일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하느님의 영광과 이웃에 대한 봉사에 온 마음으로 헌신하여야 한다.”(40항)

 

 

거룩함의 실천 방식은 각 사람마다 달라

 

이렇게 거룩하게 되라는 소명을 받고 있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똑같지만, 그 거룩함을 실천하는 방식은 각 사람이 받은 고유한 은사와 직무에 따라 다양하다(41항). 우선 ‘충만한 사제직’인 주교직에 뽑힌 목자들은 △ 기도하고 희생 제사를 드리고 설교하며 주교로서 하는 온갖 배려와 봉사를 통해 목자다운 완전한 사랑의 임무를 수행해야 하며 △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양 떼의 표양이 되어 교회를 날러 더욱 큰 성덕으로 이끌어가야 한다. 이런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는 것은 주교들 자신에게도 성화의 탁월한 수단이 된다. 

 

신부들 또한 △ 날마다 자기 직무를 수행함으로써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 안에서 자라나야 하고 △ 사제들 간에 친교의 유대를 보존하고 온갖 영적 보화로 풍요로워져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의 산 증거를 보여주어야 한다. 신부들은 또 △ 하느님 백성 전체와 자기 백성을 위해 기도하고 희생 제사를 봉헌하며 △ 자신이 거행하는 것을 알고 실천하며 △ 사목 직무 수행이 힘들거나 위험하다고 해서 주저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일을 통해서 더 높은 성덕에 이르고 하느님과 온 교회에 위안을 주어야 한다. 

 

부제들 역시 자신을 깨끗이 지켜 하느님의 마음에 들고 사람들 앞에서 온갖 좋은 것을 마련해야 한다. 끊임없는 기도와 불타는 사랑으로 참되고 옳고 명예로운 것을 생각하며 모든 일을 하느님의 영광과 영예를 위해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 부부와 부모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길을 따라 △ 충실한 사랑으로 평생 은총 안에서 서로 도와야 하며 △ 하느님께 받은 사랑스러운 자녀들을 그리스도의 교리와 복음적 덕행으로 교육해야 한다. 이를 통해 △ 너그러운 사랑의 모범을 모든 사람에게 보여 주며 △ 사랑의 형제 관계를 이루고 △ 어머니인 교회의 증인이 되고 협력자가 돼야 한다. 

 

노동자들은 △ 인간다운 노동으로 자기 자신을 완성하고 △ 동료 시민들에게 도움을 주며 △ 온 사회와 창조계를 더 나은 상태로 진보시켜야 한다. 또한 △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랑을 실천하고 희망으로 기뻐하며 서로 다른 사람의 짐을 져 주어야 하며 △ 일상 노동을 통해 더 높은 성덕과 사도적 활동에 이르러야 한다. 

 

헌장은 가난과 질병을 비롯해 온갖 고통에 짓눌리는 사람들이나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세상 구원을 위해 수난하시는 그리스도와 그들이 특별히 결합돼 있음을 일깨운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삶의 처지와 환경이 어떠하든 간에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오는 믿음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뜻에 협력한다면 날마다 성덕에 증진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현세적 봉사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 그 사랑을 모든 이에게 드러낼 수 있다.

 

 

성화 위해 필요한 것은 하느님과 이웃 사랑

 

헌장은 이어 성화를 위한 수단과 방법에 대해 언급한다(42항).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사랑이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는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표시가 난다”(42항). 그런데 사랑이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처럼 열매를 맺으려면 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 하느님 말씀을 기꺼이 듣고 △ 하느님 은총에 힘입어 하느님 뜻을 행동으로 드러내야 하며 △ 성사들 특히 성체성사와 전례에 자주 참여하고 △ 기도와 극기를 비롯해 형제들에 대한 적극적 봉사와 덕의 실천에 꾸준히 헌신해야 한다. 

 

이러한 성화의 수단과 방법 가운데서 가장 큰 것은 주님과 이웃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것이다. 이를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사랑의 ‘순교’라고 부른다. 순교는 “최상의 은혜로 또 사랑의 최고 증거”이지만 모두에게 주어지는 은혜는 아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신자들은 또한 특별히 정결과 청빈과 순종이라는 복음적 권고의 실천을 통해 성화에 이를 수 있다. 동정과 독신 생활, 곧 정결은 갈리지 않는 마음으로 더욱 수월하게 하느님께만 헌신하게 한다. 모든 사람이 동정과 독신 생활의 은혜를 입는 것은 아니지만 하느님 나라를 위한 이 금욕은 “사랑의 표시와 자극제로 또 세상에 있는 영적 풍요성의 어떤 특별한 원천”으로 여겨져 왔다.

 

순종은 모든 것을 내어놓고 종의 모습을 취하셔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겸손과 사람을 닮는 행위다. 청빈 또한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을 더욱 철저히 따르고자 하는 사랑의 실천이다. 

 

헌장은 5장을 마무리하면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덕과 자기 신분의 완성을 추구하도록 권유받으며 또 그러할 의무가 있다”는 말로 신자들의 보편적 성화 소명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그리고 특별히 “복음적 청빈 정신에 어긋나는 현세 사물의 사용이나 재산에 대한 과도한 집착으로 완전한 사랑의 추구를 가로막지 않게 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물질 만능주의가 지배하는 오늘날 특별히 유념해야 할 지적이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3년 12월호, 이창훈 알퐁소(평화신문 편집국장)]

 

 

[공의회 문헌 풀어보기] 교회헌장 해설 (8)

 

 

교회헌장 제6장(43~47항)은 수도자에 관한 내용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 수도자는 성직자와 평신도 중간 계급 정도로 이해됐다. 그래서 교회에서 수도자는 성직자에 이어 제2의 계급이고 제일 아래 계급이 평신도라고 여기는 경향이 심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런 경향을 거슬러 세례로 하느님 백성에 든 사람은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할 것 없이 모두가 하느님 자녀로서 똑같은 품위를 지닌다고 밝혔다(교회헌장 2장 참조). 나아가 교회헌장은 수도자에 관한 6장에서 수도자 신분이 성직자와 평신도의 중간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수도자 신분은 “교회의 신적이며 교계적인 구조를 헤아려볼 때, 성직자와 평신도 신분의 중간이 아니라 그 양편에서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께 부르심을 받아 교회의 삶에서 특별한 은혜를 누리며 각자 자기 방식대로 교회의 구원 사명에 이바지하는 것이다”(43항).

 

이 구절은 수도자 신분이 이전에는 성직자 다음의 제2계급이었지만 이제는 그것도 아니라는 식의 수도자 폄하가 아니다. 오히려 수도 신분이 지니는 독특한 본질과 중요성을 강조한다. 

 

수도자는 청빈과 정결과 순명의 복음적 권고를 서원을 통해 의무로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 이 복음적 권고를 수행함으로써 수도자들은 수도회의 고유한 성소 혹은  카리스마에 따라 “기도나 적극적 활동으로 그리스도의 나라가 사람들의 영혼 안에 뿌리내려 굳세어지게 하고 하느님 나라를 모든 지역에 전파하도록 힘껏 노력해야 할 의무”(44항)를 지닌다.

 

한 마디로 수도자들은 복음적 권고를 서약하고 실천함으로써 하느님 나라를 앞당겨 보여주는 “표지” 역할을 하는 이라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를 앞당겨 보여주는 표지 ‘수도자’

 

교회헌장은 수도자들의 이 표지 역할을 크게 세 가지로 설명한다(44항). 첫째, 이미 이 세상에 있는 천상보화를 모든 신자에게 보여주고,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얻은 새롭고 영원한 생명의 증거를 드러내며, 미래의 부활과 하늘나라의 영광을 예고하여 준다. 둘째, 성자께서 세상에 오시어 받아들이셨고 당신 제자들에게 제시하신 그 생활양식을 더 철저히 본받고 교회 안에서 재현한다. 셋째, 그리스도의 탁월하고 위대한 힘과 교회 안에서 기묘하게 활동하시는 성령의 무한한 능력을 모든 사람에게 드러내 보여준다. 

 

그래서 교회헌장은 수도자들에게 “자신들을 통해 교회가 참으로 나날이 신자들에게나 비신자들에게 그리스도를 더 잘 드러내 보여야 한다는 것을 깊이 명심해야 한다”(46항)고 당부한다. 말하자면 교회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드러내 보여야 하는데, 특별히 수도자들이 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산 에서 기도하시는 그리스도 △ 군중에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그리스도 △ 병들고 상처 입은 이들을 치유하시고 죄인들을 회개시키시는 그리스도 △ 아이들에게 복을 내려주시는 그리스도 △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언제나 순명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교회는 수도 생활의 다양한 형태로 드러낸다.

 

전통적으로 수도회들을 ‘교회의 꽃’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다양한 형태의 수도 생활이 그리스도의 모습을 다양하게 드러내고 교회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런 수도자들이나 수도 단체들에 대해 교회의 권위, 즉 교계는 수도자들의 복음적 권고 실천을 교회법을 통해 지혜롭게 지도해야 한다. 수도 단체들이 설립자의 정신에 따라 자라나고 꽃피우도록 감독하고 보호해야 하는 것이다. 반면에 수도 단체나 회원들은 교회법에 따라 주교들에게 존경과 순명을 보여줘야 한다. 특별히 교황은 공동선을 위해 필요하다면 특정한 수도 단체나 혹은 개별 회원에 대해 지역 교회의 재치권에서 제외시켜 자신에게 직속시킬 수 있다(45항). 

 

그런데 혼인과 가정생활을 포기하고(정결 서원), 살아가는 데 필요할 뿐 아니라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물질 재화를 포기하고(가난 서원), 하느님에게서 받은 천부의 권리인 자유의 행사를 포기하는(순명 서원) 수도 생활이 보통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 이에 대해 헌장은 “복음적 권고의 서원은 분명히 크게 존중해야 하는 선의 포기를 가져온다 하더라도 인격의 발전에 지장이 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그 본질상 크게 도움이 된다”(46항)는 점을 강조한다.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복음적 권고는 마음의 정화와 정신적 자유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줄 뿐 아니라 사랑의 열정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키고 순수한 동정과 청빈의 생활양식에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하도록 해준다.

 

 

7장 순례하는 교회의 종말론적 성격 제시

 

교회헌장은 6장에서 하느님 나라를 앞당겨 보여주는 표지인 수도자에 대해 언급한 후 7장에서 순례하는 교회의 종말론적 성격을 제시하면서 지상 교회와 천상 교회의 관계에 대해 설명한다(48~51항).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루카 17,21)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처럼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세우신 교회 안에 이미 하느님 나라, 곧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되고 있다. 하지만 그 나라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고 정의가 깃드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완전히 이루어질 때에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교회의 자녀들인 신자들은 그때가 올 때까지 끊임없이 자신을 쇄신하면서 악마의 속임수에 맞서 대항하며 언제나 깨어 있어야 한다. 그 날과 시간이 언제일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48항). 

 

교회가 이렇게 새 하늘과 새 땅이 완성될 그 날을 향해 순례의 여정을 가는 동안에 어떤 이들은 이미 이 지상 생활을 마치고 정화의 과정을 겪고 있고(정화중인 교회), 또 어떤 이들은 하느님의 영광에 들어 천상행복을 누리고 있다(천상 교회). 하지만 모두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같은 사랑 안에서 참으로 친교를 이루며 하느님께 같은 찬미의 노래로 영광을 드린다. “그리스도께 딸린 모든 사람은 그분의 성령을 모시고 하나의 교회로 뭉쳐서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결합돼 있기 때문이다”(49항). 그래서 헌장은 이렇게 밝힌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평화 속에 잠든 형제들과 나그네들의 결합은 조금도 중단되지 않으며, 더욱이 교회의 변함없는 신앙에 따르면 영신적 선익의 교류로 더욱 튼튼해진다”(49항). 이것이 바로 ‘성인들의 통공’이다. 

 

성인들의 통공에 따라 교회는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이 죄에서 벗어나도록 기도를 드려왔다. 또 이미 천상행복에 든 성인들을 특별한 정성으로 공경하면서 성인들의 전구(轉求)를 통한 도움을 열심히 간청해 왔다. 이렇게 성인들을 사랑하고 성인들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성인들의 “기도와 힘과 도움에 의지하는 것은 매우 합당하다”(50항)고 헌장은 밝힌다.  

 

성인들과의 이 결합은 특별히 미사 전례 안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미사 전례, 곧 성찬의 희생 제사를 거행하면서 우리는 “천상 교회의 예배와 밀접히 결합되고 일치되어, 영광스러운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를 비롯해 성 요셉과 복된 사도들과 순교자들과 모든 성인들을 기억하며 공경”(50항)하기 때문이다. 

 

헌장은 이와 함께 성인 공경의 올바른 지침을 제시한다(51항). 진정한 성인 공경은 외적 행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실천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인들의 삶에서  모범을 찾고, 성인들의 통공에서 사귐을 찾으며, 성인들의 전구에서 도움을 찾는다. 이러한 성인 공경은 “하느님께 바치는 흠숭 예배를 약화시키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그 반대로 더욱더 값지고 풍요롭게 한다”고 헌장은 제시한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4년 1월호, 이창훈 알퐁소(평화신문 편집국장)]

 

 

[공의회 문헌 풀어보기] 교회헌장 해설 (9)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 안에 계시는 천주의 성모 복되신 동정 마리아’라는 긴 제목을 가진 교회헌장 제8장(52~69항)은 마리아에 관한 내용을 다룬다. 8장에서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마리아에 관한 교리이고(2~3부, 55~65항), 다른 하나는 마리아 공경의 본질과 원칙이다(4부, 66~69항). 마리아에 관한 교리는 다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진다.

 

첫째는 그리스도와 마리아의 관계다. ‘구원 계획과 복되신 동정녀의 임무’라는 제목으로 이뤄진 8장 제2부가 여기에 해당한다(55~58항). 둘째는 교회와 마리아의 관계다. ‘복되신 동정녀와 교회’라는 제목의 8장 제3부가 이에 관한 것이다(60~65항). 

 

공의회 교부들은 마리아에 관한 교리와 마리아 공경의 원칙을 다루면서 한 가지를 분명히 한다. “마리아에 관한 완벽한 교리를 제시하거나 신학자들의 노력으로도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문제들을 종결시킬 마음은 없다”(54항)는 것이다. 공의회 교부들이 이런 견해를  명시적으로 표명한 것은 마리아에 관한 교리나 마리아 공경을 둘러싸고 이견들이 있기 때문이다. 가톨릭교회 안에서도 신학자들 사이에 약간씩 견해 차이가 있지만, 마리아 공경을 탐탁찮게 여기는 개신교 신자들과 관계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신앙과 순종으로 인류 구원에 협력

 

헌장은 ‘구원 계획에서 마리아의 임무’와 관련(55~59항), 구약 성경에서 예언된 구세주의 어머니로 마리아를 제시한다. 예를 들면, 여인과 여인의 후손이 뱀을 이기라는 창세기 3장 15절의 말씀을 비롯해 동정녀가 임마누엘이라고 불릴 아들을 잉태하리라는 예언들(이사 7,14; 미카 5,2-3)은 모두 마리아를 예시한다. 

 

구약의 이런 표상들은 마리아에게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왜 마리아인가.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따른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마치 첫 여인 하와가 “어느 모로 죽음에 이바지한 것처럼 그렇게 또한 여인이 생명에 이바지하기를 바라셨다”(56항).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이것이 가장 탁월한 의미로 드러난다. 마리아는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생명 자체를 세상에 낳아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리아를 죄의 온갖 더러움에서 물들지 않으신 분으로, 원죄 없이 잉태되신 분으로 부르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은혜 덕분이다. 하느님께서 마리아를 선택하시어 천주의 모친이 되는 맞갖은 은혜를 주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마리아의 자발적 순종의 의미를 결코 격하시키지 않는다. 처녀의 몸으로 아들을 낳으리라는 천사의 전갈에 마리아께서는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하고 순종하심으로써 하느님의 아들을 낳으셨다. 헌장은 나아가 이렇게 밝힌다. “마리아께서는 하느님 말씀에 동의하시어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셨고, 온전한 마음으로 아무런 죄의 거리낌도 없이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받아들이시고, 주님의 종으로서 당신 아드님의 인격과 활동에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치시어, 전능하신 하느님의 은총으로 아드님 밑에서 아드님과 함께 구원의 신비에 봉사하셨다”(56항).  

 

이 대목은 한 마디로 마리아께서 순전히 피동적으로 하느님께 이용당하신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신앙과 순종으로 일생을 통해 인류 구원에 협력하셨음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은 예수님의 잉태와 탄생 그리고 유년기 때뿐 아니라 예수님의 공생활과 승천 후에도 한결같다(56~59항).

 

그래서 공의회 교부들은 이렇게 선언한다. “티 없이 깨끗하신 동정녀께서는 △ 지상 생활의 여정을 마치시고 육신과 영혼이 하늘의 영광으로 올림을 받으시고 △ 주님께 하늘과 땅의 모후로 들어 높여지시어 △ 군주들의 주님이시며 죄와 죽음의 승리자이신 당신 아드님과 더욱 완전히 동화되셨다”(59항).

 

 

마리아는 “교회의 전형(典型)”

 

헌장은 이렇게 구원 역사에서 마리아의 역할을 제시한 다음, 계속해서 마리아와 교회의 관계를 밝힌다(60~65항). 우선 구원 역사에서 마리아의 탁월한 역할이 하느님과 인간의 유일한 중개자이신 그리스도의 역할을 “절대로 흐리게 하거나 감소시키지 않는다”(60항)는 점을 분명히 한다.

 

마리아께서는 하느님 은총의 계획에 따라, 또 이 구원 계획에 탁월하게 협력하심으로써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시고 우리의 어머니가 되신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변호사, 원조자, 협조자, 중개자라는 칭호로 불리신다.

 

하지만 이것은 “유일한 중개자이신 그리스도의 존엄과 능력에서 아무것도 빼지 않고 아무것도 보태지 않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62). 구원 사업에 있어서 마리아의 임무는 ‘종속적인’ 것이다. 

 

이 점을 명확히 하고 나서 헌장은 마리아와 교회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고찰한다. 한마디로 마리아께서는 “교회의 전형(典型)”, 곧 모범이시자 본보기이시다. 그래서 교회 또한 어머니요 동정녀가 된다. 교회는 복음 선포와 세례로써 하느님의 자녀들을 불멸의 새 생명으로 낳기에 어머니가 된다. 또 신랑이신 그리스도에게 바친 믿음을 온전하고 깨끗하게 지키는 동정녀이기도 하다. 

 

헌장은 여기에서 교회와 교회의 자녀들인 신자들을 조심스럽게 구별한다. 교회는 “지극히 복되신 동정녀 안에서 이미 완덕에 이르러 어떠한 티나 주름도 없이 서 있지만” 교회의 자녀들인 그리스도 신자들은 “아직도 죄를 극복하고 성덕 안에서 자라나도록 노력하고 있다”(65항). 교회는 거룩하고 흠 없지만 교회의 자녀들인 신자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죄인인 자녀들을 품안에 품고 있는 교회는 아들이신 구세주와 일치하신 마리아의 완덕을 바라보며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더욱 닮아간다. 또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통해 신자들의 마음속에서 태어나시고 자라나시기를 바란다.

 

 

그리스도인 일치를 위한 전구자

 

마리아와 교회의 관계를 ‘교회의 전형이신 마리아’ ‘동정녀요 어머니인 교회’라는 표현으로 압축해서 제시한 헌장은 이를 토대로 교회의 마리아 공경의 본질과 사목 규범을 밝힌다(제4부, 66~67항). 마리아는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다음으로 모든 천사와 사람 위에 들어 높임을 받으셨다. 이로 인해 마리아께서는 교회 안에서 특별한 공경을 받으시는데 대표적인 것이 ‘천주의 성모’라는 칭호다. 

 

하지만 교회가 마리아께 드리는 공경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드리는 “흠숭의 공경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일 뿐 아니라 하느님을 더 잘 흠숭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임을 공의회 교부들은 분명히 한다(66항). 이런 맥락에서 교회는 다양한 마리아 공경 형태를 △ 건전한 정통 교리의 테두리 안에서 △ 시대와 장소의 상황에 따라 △ 또 신자들의 품성과 기질에 따라 승인한 것이다.

 

그러므로 마리아 신심의 본질은 마리아께서 존경을 받으실 때에 그 아드님이신 성자께서 바르게 이해되시고 사랑과 영광을 받으시게 하는 데 있다. 마리아께 드리는 공경으로 인해 성자께서 받으시는 사랑과 영광이 줄어들거나 훼손되는 것이 아니며 또 그래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헌장은 마리아 공경의 핵심적 사목 규범을 제시한다(67항). 그것은 △ 마리아 독특한 품위를 숙고할 때에 온갖 거짓 과장이나 지나치게 협착한 마음을 애써 삼가야 하며 △ 동정 마리아의 임무와 특권이 언제나 모든 진리와 성덕과 신임의 근원이신 그리스도를 향하도록 올바로 밝혀야 하고 △ 말이나 행동으로 갈라진 형제들이나 다른 사람들을 교회의 참된 교리에 대해 오해로 이끌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힘써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마리아에 관해 다루는 교회헌장 제8장은 끝으로 마리아를 하느님 백성의 표지이자 또한 그리스도인 일치를 위한 전구자로 제시한다(68~69항).

 

하늘에서 영혼과 육신으로 이미 영광을 받으시는 마리아께서는 “내세에 완성될 교회의 표상”이 되시고, 지상 여정을 “순례하는 하느님 백성에게 확실한 희망과 위로의 표지로서 빛나고 계신다”(68항). 또 이 마리아의 전구를 통해 모든 인류 가족이 하느님의 한 백성으로 모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게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4년 2월호, 이창훈 알퐁소(평화신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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