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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수원교구에서 만난 한국교회사5: 어농성지 - 성직자 영입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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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7-31 ㅣ No.1586

[교구에서 만난 한국교회사] (5) 어농성지 - 성직자 영입 운동


위험 무릅쓰고 조선교회 소식 전한 ‘밀사’ 윤유일

 

 

- 어농성지 전경.

 

 

경기도 이천시 모가면 어농로62번길 148. 논길을 따라 어농성지 묘역 입구에 다다르니 머리에 갓을 쓴 선비의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한 손에는 책을 펴들고, 또 다른 한 손에는 잔을 들고 있는 이 인물은 복자 윤유일(바오로), 바로 조선교회에 성직자가 들어올 수 있도록 활동한 신앙선조다.

 

 

미션(Mission=선교) 임파서블

 

윤유일을 일컫는 말 중에는 눈에 띄는 말이 있다. 밀사(密使). 비밀리에 보내는 사자, 요즘 말로 바꿔 말해보자면 비밀요원이다. 윤유일의 저 점잖은 동상을 보면 어쩐지 ‘비밀요원’이라는 말은 와닿지 않는다. 물론 윤유일이 수행한 작전 중에는 영화에서 보는 듯한 화려한 액션은 없었다. 그러나 그 긴장감만큼은 영화의 비밀요원 못지않은 것이었다.

 

당시 조선교회 지도자들은 중국교회에 보내는 연락원으로 윤유일을 파견했다. 윤유일은 하느님의 종 이승훈(베드로)과 하느님의 종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이 작성한 서한을 받아들고 임무에 착수했다. 윤유일은 1789년 10월 중국을 향한 동지사 일행 속에 장사꾼으로 변장하고 잠입해, 중국에 입국한다.

 

여주의 점들에서 태어나 양근에서 살던 양반 가문의 윤유일은 하느님의 종 권철신(암브로시오) 문하에서 학문을 닦던 선비다. 조선교회 지도자들이 윤유일을 밀사로 파견한 이유도 온순하고 심지가 굳은 성격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학식이 높고 교리에도 밝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사농공상의 계급이 명확했던 조선시대에 가장 높은 신분인 양반집 자제가 가장 낮은 신분인 상인으로 위장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계급이 다른 것은 단순히 신분의 문제가 아니라 생활, 문화, 언어 습관에 이르기까지 삶의 양상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상황에서 수개월에 걸친 여정 중에 정체가 발각되지 않았다는 것은 윤유일이 의심을 살 법한 수많은 고비를 지혜롭게 넘겼다는 소리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조선교회의 서한, 그는 하얀 명주 천에 깨알같이 적힌 글을 옷 속에 꿰매어 운반했다.

 

게다가 글을 공부하던 선비가 한 겨울에 1200㎞에 달하는 거리를 걸어서 이동한다는 것 자체도 위험한 행동이었다. 오늘날처럼 길이 잘 닦여있지도, 위생이 좋지도 않았던 당시에는 이동 자체도 험난했지만, 여정 중 부상이나 병으로 쓰러지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윤유일이 중국에 입국했다는 것은 그런 모든 역경을 이겨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윤유일은 마침내 중국교회와의 접촉에 성공한다. 윤유일은 라자로회 로 신부를 만나 한문 필담으로 대화를 나누고, 조선교회의 서한을 전했다. 그 편지는 당시 베이징교구장이었던 구베아 주교에게 전달됐고, 조선 신자들과 관련된 질문에 대한 대답은 라자로회 선교사들이 준비했다. 또 이때 윤유일은 세례와 견진을 받을 수 있었다. 윤유일은 구베아 주교의 사목교서와 선교사들의 답변을 다시 옷 속에 숨겨서 조선으로 복귀했다.

 

구베아 주교는 조선 신자들이 보낸 편지에 크게 기뻐하면서 사목교서를 작성했다고 전해진다. 사목교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지만, 구베아 주교가 당시 포교성성 장관에게 보낸 보고서를 통해 어떤 내용이 담겼는지는 확인할 수 있다. 사목교서에는 조선교회 신자들이 하느님께 감사하며 믿음을 지킬 것을 당부하는 말과 신자로서 반드시 믿고 실천해야하는 도리, 사제가 없을 때 신앙생활을 하는 요령, 향후 성직자를 조선으로 들이거나 조선인 신학생을 사제로 양성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도록 하는 지시 등이 담겼다.

 

어농성지 묘역 입구에 서 있는 윤유일 동상. 한 손에는 책을, 또 다른 한 손에는 잔을 들고 있다.

 

 

성직자 영입 시도와 좌절

 

윤유일은 1790년 봄 조선으로 돌아가는 사신들을 따라 귀국했다. 조선교회 지도자들은 구베아 주교의 사목교서에 크게 기뻐했다. 그러면서 본격적으로 성직자 영입운동을 계획하게 됐다.

 

때마침 1790년 9월은 청나라 건륭제의 80회 탄신 축하 행사가 있었다. 조선교회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윤유일을 파견했다. 다만 이때 윤유일이 구베아 주교에게 가져간 서한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고, 선교사들에게 보낸 편지의 프랑스어 번역본만이 전해지고 있다. 이 편지에서 이승훈은 가성직제도의 잘못을 꾸짖지 않은 선교사들에게 감사하면서 조선교회 지도자들이 성직자를 영입하기로 결정했다고 알린다.

 

윤유일을 통해 서한을 받은 구베아 주교는 조선에서 활동할 선교사를 임명했다. 구베아 주교는 윤유일이 중국을 다녀간 1791년 2월 마카오 출신 중국인 레메디오스 신부를 선교사로 임명해 파견했다. 레메디오스 신부는 중국인 안내인과 함께 20일간의 여행 끝에 조선과 중국의 국경지대에 다다랐다. 해마다 조선 사신들이 귀국할 때 조선과 중국 국경에 장이 서고 많은 상인들이 모여들기 때문에 그 틈을 타 조선에 입국하려는 것이었다.

 

국경에 열린 장에 도착한 레메디오스 신부는 약속한 표식을 한 조선인 신자를 찾았지만, 조선인 신자를 만나지 못했다. 윤유일도 선교사를 맞이하기 위해 국경을 찾았지만, 그때 레메디오스 신부는 아직 도착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접견하지 못한 채 장이 걷혔고, 레메디오스 신부는 결국 베이징으로 복귀하고 말았다.

 

구베아 주교는 레메디오스 신부가 귀국하고 꼬박 3년 동안 조선교회 소식을 받지 못했다. 구베아 주교는 1792년 조선 사신 행차에서 온 사람들을 통해 조선에서 박해가 일어나고 있는 정황을 알게 됐다. 진산사건이라고도 불리는 조선교회의 첫 박해, 신해박해가 일어났던 것이다. 게다가 첫 번째 조선 선교사로 임명된 레메디오스 신부도 1793년 선종하기에 이렀다.

 

그러나 조선에 성직자를 파견해야 한다는 구베아 주교의 생각은 흔들리지 않았다. 구베아 주교는 다시 신앙심이 깊고 조선인과 닮은 신부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하고, 성무 집행에 필요한 모든 권한을 부여했다. 복자 주문모(야고보) 신부였다.

 

 

어농성지에 있는 윤유일 순교 200주년 현양비.

 

 

 

- 성지의 십자가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3년 7월 30일, 이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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