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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성당 건축 이야기25: 산타 폴리나레 누오보 대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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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6-27 ㅣ No.973

[김광현 교수의 성당 건축 이야기] (25) 산타 폴리나레 누오보 대성전


좌우 벽면 모자이크, 시편 교송하듯 마주 보며 주님 찬미

 

 

- 왼쪽 벽면, 산타 폴리나레 누오보 대성전. 출처=urixblog.com설명



- 오른쪽 벽면, 산타 폴리나레 누오보 대성전. 출처=urixblog.com설명

 

 

505년 테오도릭 대왕의 궁전 성당으로 건립

 

이탈리아 라벤나에서 가장 화려한 건물 중 하나는 의심할 여지 없이 라벤나 동부에 지어진 산타 폴리나레 누오보 대성전(Basilica of Sant‘Apollinare Nuovo)이다. 이 대성전은 505년쯤에 동고트족 테오도릭 대왕(Theodoric the Great)의 궁전 성당으로 세워졌다.

 

테오도릭은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아리우스파 신자였다. 이후 도시가 비잔티움에 넘어갔을 때, 이 성당은 561년에 가톨릭 성당으로 다시 봉헌되었다. 이때는 아리우스파와 싸워 “이단자의 망치”라 불린 산 마르티노 디 투르(S. Martino di Tours)에게 바쳐졌다. 그런데 856년 아드리아 해에 해적이 빈번히 습격하고 위협을 받게 되어 클라세의 산타 폴리나레 대성전(Basilica of Sant’Apollinare in Classe)에 있던 라벤나의 초대 주교 성 아폴리나리스(Apollinaris)의 유해를 이곳으로 옮겼고, 그의 이름을 따되 ‘새’, ‘신(新)’이라는 뜻의 ‘누오보’를 덧붙여서 산타 폴리나레 누오보로 바꾸었다. 대신 클레세에 있는 산타 폴리나레 성당은 그 뒤에 ‘인 클라세’를 덧붙여서 이름이 같은 두 성당을 구별하였다. 그렇다고 ‘신(新)’이라는 말이 붙었다고 이 성당이 클라세의 성당보다 나중에 지어졌으려니 오해하면 안 된다. 오히려 클라세의 것보다 수십 년 더 오래되었다.

 

 

아리우스파 관련 건물과 장식 대부분 없애

 

이 성당은 중랑 좌우의 아케이드 위의 벽에는 엄청나게 유명한 모자이크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라벤나가 비잔티움의 손에 들어가자 540년부터 정통 복원 작업이 시작되어 고트족과 아리우스파와 관련된 건물들은 없애거나 변형했다. 특히 산타 폴리나레 누오보 성당은 이러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중랑의 좌우 벽면에는 한 바퀴 돌아 아리우스파와 관련된 모자이크가 있었는데, 아그넬로(Agnello) 대주교가 이를 없애고 다시 그렸다.

 

다만 그리스도와 성인과 예언자가 그려진 가장 수준이 높은 장식은 그대로 남겨 두었다. 그러나 수준이 조금은 낮고 문제가 되는 것은 적절하게 다시 장식되었다. 클라세 항구와 테오도릭 대왕의 궁이 보이는 마지막 장면들은 남겼지만, 테오도릭과 궁정에 속한 것으로 보이는 초상화는 모두 제거되었다. 그래서 윗단에 있는 26개의 장면은 아리우스파의 테오도릭 대왕 치하였던 500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그리스와 로마의 영향을 받았다. 아래 단에 있던 모자이크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인 6세기 가톨릭에 봉헌되었을 때 거의 다 없앴고, 비잔티움의 영향을 크게 받은 성인과 순교자 모자이크로 바꾸었다.

 

건물은 바실리카 식이고 박공지붕을 덮었다. 오른쪽에는 11세기 로마네스크의 벽돌 구조물인 높이 38m의 원형 탑이 서 있는데, 이는 라벤나 건물의 특징이기도 하다. 전면에는 5개의 아치로 된 포치가 있다. 정면에는 원래 네 면이 포르티코로 둘러싸인 중정이 있었지만, 지금은 전면에 16세기 대리석으로 만든 단순한 포르티코가 붙어있다. 그 이후 이 도시는 오랫동안 평화로워 건물에 변화가 없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 중 오스트리아의 포격을 받아 건물 정면의 일부분이 크게 파괴되기도 했다.

 

내부는 3랑식의 바실리카다. 깊이가 42m인 공간의 좌우에는 각각 12개씩 코린트식 열주가 늘어서 있다. 그리고 주두 위에 다시 부주두를 더 얹어 반원 아치와 그 위의 세 단의 벽면을 받치게 했다. 그중 고창층은 가운데 단에 배열되어 있다. 라벤나의 다른 건물들처럼 침하가 심해져서 1514년부터 20년 동안 대수리를 하면서 바닥을 약 1.25m나 들어 올렸다. 열주도 높였고 기둥 위에 얹은 아치의 바로 밑을 잘라서 치수를 조정한 탓에 아치가 빠듯하다. 그래서 아치가 인접해 있는데도 아치의 쇠시리가 이어지지 않고 부주두 돌 위에서 잘려 있다.

 

당시의 성당과는 달리 측랑은 좁고 그 대신 중랑은 더 넓어서 공간이 제단을 향해 완전히 열려 있다. 이 때문에 공간 전체로서는 빛이 더 많이 들어왔고 이전보다 훨씬 가벼워졌다. 대리석 원기둥의 디자인도 세련되어 있는데, 모자이크 벽과 함께 보면 마치 황금 양탄자에서 가볍고 얇은 줄무늬가 줄지어 서 있는 듯이 보인다. 게다가 아치는 작지만 길게 물결치는 리듬을 갖고 있어서 전례 행렬의 움직임과 함께 하고 있다.

 

지금의 산타 폴리나레 인 클레세에서 보듯이 이전에는 목조 지붕 구조를 드러내 보였으나, 17세기 초 바로크 양식의 격자 천장으로 바뀌었다. 반원 제단도 원래는 벽처럼 모자이크로 덮여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16세기 보수 공사 중에 제거되었고 대신 호화로운 바로크 양식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1950년에는 그 장식을 제거하여 지금은 흰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제단 한가운데는 네 개의 아름다운 비잔틴 시대 기둥과 제단 칸막이의 왼쪽에 있는 6세기의 대리석 부조가 남아 있다.

 

산타 폴리나레 누오보 대성전 내부. 출처=photoguides.org

 

 

제단 향해 일직선으로 전진하는 모자이크

 

이 대성전의 모자이크는 그야말로 압도적이다. 모든 모자이크 그림은 열주의 리듬과 동조하여 천천히 장축형의 중심인 제단을 향해 일직선으로 전진한다. 이렇게 볼 때 벽의 위에 묘사된 성모 마리아와 거룩한 순교자들은 중랑에 서서 바라보는 감상의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하느님 백성인 우리와 함께 함께 거룩한 전례를 거행하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대하는 순간 공간은 옆으로, 앞으로, 그리고 위로 크게 확장한다. 이것이 이 모자이크의 힘이다.

 

왼쪽에 있는 벽면을 보자. 제일 위에 있는 층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기적 등을 그린 13장면이 있다. 사이에는 한 장 걸러 파빌리온과 그 위에 비둘기 두 마리가 그려져 있다. 그렇지만 꽤 높아서 그것을 보고 읽는 데는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중간층에는 창과 창 사이에 13명 성인과 예언자가 자기가 쓴 책을 손에 들고 서 있다. 제일 아랫단은 클라세 항에 들어오는 세 척의 배로 시작한다. 이어서 황금색과 흰옷을 두른 22명의 성녀가 봉헌물을 들고 행렬하고 있고, 그 앞을 동방 박사 세 사람이 이끌고 있다. 그 앞에는 성모에 안긴 아기 예수가 네 명의 천사에 둘러싸여 옥좌에 앉아 계시다.

 

오른쪽 벽면의 제일 윗단에는 최후의 만찬에서 부활하여 제자들 앞에 나타나시기까지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그렸다. 하단에는 천사에 둘러싸여 옥좌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를 향해 26명의 순교자가 행진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반대쪽에 있는 수염이 없는 젊은 그리스도와는 대조적으로 수염을 기르고 어둡고 괴로운 표정을 하고 있다. 중간층에 흰옷을 입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창을 통해 그림자도 없이 들어오는 순수한 빛 속에 존재한다.

 

산타 폴리나레 누오보 대성전의 좌우 벽면에 그려진 장대한 모자이크는 마치 시편을 교송하듯이 서로 마주 보며 주님을 찬미하고 있다. 그리스도와 고통을 나눈 오른쪽의 26명의 순교자와 동정 성모를 닮아 주님의 삶을 나눈 왼쪽의 22명의 성녀는 성인과 예언자와 함께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따로 있지 않다. 이곳에서 전례를 거행하고 있는 우리와 함께 전례에 참여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제대를 향해 그리스도께 부단히 나아가자고 우리를 격려하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6월 25일, 김광현 안드레아(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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