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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수원교구에서 만난 한국교회사6: 어농성지 - 첫 박해, 그리고 첫 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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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8-21 ㅣ No.1587

[교구에서 만난 한국교회사] (6) 어농성지 - 첫 박해, 그리고 첫 미사


박해의 폭풍 속에서도 사제의 손으로 봉헌될 미사를 갈망하다

 

 

어농성지 순교자 묘역.

 

 

어농성지는 복자 윤유일(바오로)이 속한 파평 윤씨의 가족묘역이다. 파평 윤씨는 초기 교회부터 신심이 깊은 신자들이 많은 집안으로, 윤유일을 비롯해 그의 동생 윤유오(야고보)와 사촌동생 윤점혜(아가타), 윤운혜(루치아)가 모두 순교자다.

그런데 성지 순교자묘역 한 구석에는 파평 윤씨가 아닌 순교자들의 묘역도 조성돼있다. 복자 강완숙(골롬바)·지황(사바)·최인길(마티아), 그리고 주문모(야고보) 신부의 묘다. 바로 조선 땅에 처음 발을 디딘 성직자와 성직자 영입을 주도했던 신앙선조들이다.

 

 

첫 번째 박해, 신해박해

 

윤유일은 1790년 구베아 주교에게 성직자 파견을 약속 받았지만 실패했다. 중국 국경에서 레메디오스 신부와 엇갈린 것도 그 이유지만, 이후로 진행되지 못했던 것은 1791년 첫 번째 박해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 박해가 진산사건이라고도 불리는 신해박해다.

 

신해박해는 복자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이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운 사실이 알려져 벌어진 천주교인에 대한 탄압이다. 윤지충과 권상연이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운 이른바 폐제분주(廢祭焚主)를 한 것은 구베아 주교의 제사 금지 명령을 따르고자 했던 것이었다. 제사 금지 명령문은 조선교회 지도자들이 윤유일 파견 당시 중국교회에 신주와 제사에 관해 질문한 것에 대한 답변이었다.

 

당시 유교 사회였던 조선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것은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다는 것과 다름없었고, 폐제분주라는 사건은 조선 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 결국 윤지충과 권상연은 사형을 당했다.

 

박해는 윤지충과 권상연의 순교에서 끝나지 않았다. 신해박해로 형벌을 받던 복자 원시장(베드로)은 끝내 목숨을 잃었고, 하느님의 종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은 유배형을 받고 가던 중 고문 후유증으로 순교했다. 이밖에도 여러 신자들이 체포됐고, 배교를 강요받았다.

 

박해의 영향은 컸다. 이 박해로 천주교는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비인륜적인 종교라는 인식이 퍼지게 돼, 이후 수많은 박해로 이어지게 됐다. 신자들도 많은 수가 교회를 떠났다.

 

주문모 신부 묘.

 

 

조선교회의 첫 미사

 

어농성지 순교자묘역 윤유일의 묘 둘레석의 포도장식이 눈에 띄었다. 윤유일은 생전 포도나무를 키웠다. 농부도 아니었던 윤유일이 포도나무를 재배했던 것은 우리나라 땅에서 처음으로 봉헌되는 미사에 사용할 포도주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어농성지에 있는 윤유일의 동상과 초상화가 들고 있는 잔은 성작을 상징한다.

 

윤유일은 1790년 베이징에서 구베아 주교에게 성직자 파견에 대한 약속을 받으면서 그와 함께 포도나무 묘목을 받았다. 조선에서 미사주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교회 전례규정에 따르면 미사주는 순수하게 포도만으로 담가야 한다. 그렇기에 조선에서 미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미사주를 담그는데 적합한 포도종자와 포도주 주조기술도 필요했다. 그렇기에 윤유일은 포도나무 묘목을 들여온 것과 함께 재배법과 미사주 주조법을 배워왔을 것으로 보인다.

 

어농성지 성직자 묘역에 서 있는 주문모 신부 동상.

 

 

신해박해라는 큰 폭풍 속에서도 많은 신자들이 여전히 신앙을 지키고 있었다. 신자들은 다시 성직자 영입을 계획했다. 이를 주도한 것이 윤유일, 최인길, 지황, 강완숙 등이었다. 신해박해 속에서도 윤유일과 신자들은 언젠가 사제의 손으로 봉헌될 미사를 꿈꾸며 포도나무를 기르고, 포도주를 담갔던 것이다.

 

다시 중국교회를 찾은 것은 지황과 박 요한이었다. 지황은 1794년 1월 박 요한과 함께 베이징을 방문해 구베아 주교에게 신해박해를 비롯한 그동안의 사정을 전하고 다시금 선교사를 파견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구베아 주교는 주문모 신부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했다.

 

지황이 조선으로 떠나고 1794년 2월 주문모 신부도 베이징을 떠나 조선 국경의 책문에 도착했다. 그러나 조선 입국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압록강의 얼음이 녹아 강을 쉽게 건널 수 없었고, 박해로 국경 감시가 삼엄해졌기 때문이었다. 주문모 신부는 다시 겨울이 되기를 기다리면서 10개월간 만주 지방을 순회하면서 사목했다. 마침내 12월 겨울이 왔고, 지황은 윤유일, 최인길과 함께 주문모 신부를 맞기 위해 의주로 갔다. 12월 23일 자정 무렵 얼음이 언 압록강을 건너 입국했고, 1월 4일 마침내 서울에 도착했다.

 

서울에 도착한 주문모 신부는 우리말과 조선의 정세를 익히면서, 미사에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시키며 사목 준비를 했다. 또 성목요일에는 여러 신자들에게 세례와 보례를 주고, 고해성사를 집전했다. 마침내 1795년 4월 5일 주님 부활 대축일에 우리나라 땅에서 처음으로 미사가 거행됐다. 이 미사를 시작으로 주문모 신부는 본격적인 사목활동에 들어갔다. 주문모 신부에게 성사를 받고자 열망하는 신자들이 모여들었고, 주문모 신부의 사목에 힘입어 많은 이들이 신자가 됐다. 입국할 당시 4000명이었던 신자 수가 주문모 신부가 활동한 지 5년 만에 1만 명으로 늘어났다.

 

샤를르 달레 신부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이 풍경을 “천주교인들은 그들의 소원이 극도에 달해 모두가 신부를 보고 성사를 받기를 원했다”면서 “오래지 않아 굉장히 많은 사람이 모여오게 됐다”고 기록했다.

 

 

포도장식이 새겨져 있는 윤유일 묘 둘레석.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3년 8월 20일, 이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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