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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수원교구에서 만난 한국교회사7: 안산 정약종 묘- 회장제와 명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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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9-04 ㅣ No.1588

[교구에서 만난 한국교회사] (7) 안산 정약종 묘- 회장제와 명도회


한 명뿐인 사제 도와 복음 전파할 평신도 지도자 조직화

 

 

- 안산시 상록구 사사동 61에 위치한 정약종의 묘와 비석. 묘비문에는 ‘조선천주교 명도회 회장(朝鮮天主敎 明道會會長)’이라 쓰여있다.

 

 

안산시 상록구 사사동 61에는 나주 정씨의 가족묘가 있다. 그리고 그 가족묘 중 가장 높은 곳에는 큰 비석과 함께 제단이 차려진 묘가 있다. 바로 복자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의 묘다. 묘비문은 정약종을 ‘조선천주교 명도회 회장(朝鮮天主敎 明道會會長)’이라 소개한다. 명도회는 복자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조선교회 조직을 정비하면서 만든 조직 중 하나다.

 

 

주문모 신부의 회장제도

 

주문모 신부는 단순히 성사를 집전하는 역할만 수행하지 않았다. 조선교회가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교회 지도자들을 조직화했다. 그 가장 큰 줄기가 회장제와 명도회다.

 

1801년 황사영(알렉시오)이 작성한 「백서」에 따르면 주문모 신부는 총회장에 복자 최창현(요한)을, 명도회장에 정약종을, 여회장에 복자 강완숙(골룸바)을 임명한 것으로 나타난다.

 

신부가 주문모 신부 1명뿐인 상황에서 조선 전역의 신자들을 돌보기 위한 방법으로 신부를 대신해 신자들을 돌볼 회장을 임명했던 것이다. 주문모 신부는 서울을 몇 구역으로 나눠 회장들에게 관리를 맡겼고, 서울 외 지역도 회장을 임명해 주문모 신부의 사목을 돕도록 했다.

 

주문모 신부가 세운 회장제도는 주문모 신부 이후에도 신자들을 돌보는 중요한 제도로 자리잡았다. 회장들의 왕성한 활동으로 박해시대에도 교리교육과 선교가 원활하게 이뤄질 수 있었다. 103위 성인과 124위 복자 중 회장으로 활동한 이들만도 40명 가까이 된다.

 

‘여회장’을 임명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조선시대 여성은 사회 지도자나 대표로 활동할 수 없었음에도 주문모 신부는 ‘여회장’이란 직분을 만들어 운영했다. 물론 여회장은 남녀가 유별하던 조선 사회에서 여성 신자들을 돌보기 위한 좋은 방법이기도 했지만, 여회장은 남녀를 떠나 ‘회장’으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첫 여회장으로 임명된 강완숙은 성직자 영입 운동을 주도한 사람 중 한 명이었을 뿐만 아니라 주문모 신부에게 피신처를 제공하며 가장 가까이 보필했다. 그밖에도 신자들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했는데, 강완숙의 활동에 신자들은 한결같이 “골룸바는 슬기롭게 모든 일을 권고했으며, 열심인 남자 교우들도 기꺼이 그의 교화를 받았다. 그것은 마치 망치로 종을 치면 소리가 따르는 것과 같았다”고 말했다고 한다. 강완숙 이후로도 성 현경련(베네딕타) 등 여회장들은 남녀를 막론하고 회장으로도 지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교리 연구 및 선교 단체, 명도회

 

총회장, 여회장이 신부를 도와 신자들과 공소를 돌보는 역할을 했다면, 정약종이 초대회장을 맡은 명도회는 교리 연구와 선교를 위한 단체였다.

 

주문모 신부가 명도회를 조직한 것은 아직 조선교회 신자들의 교리지식이 높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성직자 영입 운동이 전개되기 전 조선교회 지도층은 교계제도와 성사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가성직제도를 운영하기도 했다. 주문모 신부는 명도회를 통해 체계적인 교리교육이 이뤄질 수 있도록 했다.

 

명도회는 회장인 정약종을 중심으로 육회(六會)로 구성돼 있었다. 육회는 홍문갑의 집, 홍익만의 집, 황사영의 집 등 6곳에서 각각 3~6명으로 구성된 회원들이 모임을 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또 명도회에는 남성만이 아니라 여성들도 가입할 수 있었다.

 

명도회는 교리교육을 연구하는 연구단체에 머물지 않고 선교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신자들의 입교는 주로 가족 안에서 이뤄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런 방식으로 교회가 확장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명도회의 활동은 교세가 빠르게 성장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황사영의 「백서」에는 “회원들은 물론이고 신자들도 이에 감화되어 모두 전교를 일삼았으므로 경신년(庚申年, 1800년) 가을과 겨울에 걸쳐 하루하루 입교자가 불어나갔다”고 명도회의 활동 모습이 기록돼 있다.

 

정약종이 한글로 쓴 최초의 교리서 「주교요지」.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한글 교리서 「주교요지」

 

정약종은 명도회장으로서 무엇을 연구하고 무엇을 가르쳤을까. 그 기록은 정약종이 저술한 「주교요지(主敎要旨)」를 살피면 알 수 있다.

 

2권으로 구성된 「주교요지」는 상권에서는 천주의 존재, 사후의 상벌, 영혼의 불멸을 다루고, 도교와 불교 등 동양 문화권의 전통 종교와 비교해 천주교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권에서는 천주 강생과 구속의 도리, 상선벌악 등을 밝히면서 신앙의 실천을 강조한다.

 

「주교요지」는 한글로 쓴 최초의 교리서다. 주문모 신부가 활동하던 당시 교회 지도자들은 신자들이 교리지식을 얻을 수 있도록 교회 서적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총회장이었던 최창현은 「성경직해」를 비롯한 여러 교회 서적을 번역했고, 여러 신자들과 함께 서적을 베껴 신자들에게 팔거나 나눠줬다. 이런 한글 서적들은 한문을 모르는 서민들이 교리를 접하는데 큰 도움이 됐지만, 천주교 교리의 전반을 알기 쉽게 정리한 책은 아직 없었다.

 

그러던 중에 정약종이 조선인으로서, 그리고 교리를 연구하는 모임인 명도회의 회장으로서 우리말로 저술한 「주교요지」는 박해시대 신자들이 교리를 쉽게 배울 수 있는 가장 요긴한 교리서였다.

 

「주교요지」는 기존 교리서를 옮기거나 수정한 것이 아니라 명도회장인 정약종의 연구 결실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황사영은 「백서」에서 정약종이 여러 서적을 참조하고 자신의 의견도 반영해 「주교요지」를 저술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주문모 신부는 「주교요지」가 예수회 선교사 마이야가 저술한 교리서 「성세추요(聖世蒭蕘)」보다 낫다고 칭찬하면서 「주교요지」를 감수해 펴내도록 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3년 9월 3일, 이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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