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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자 수도회의 사회복지 활동2: 샬트르 수녀회의 한국전쟁 시련과 사회복지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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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9-05 ㅣ No.1589

여자 수도회의 사회복지 활동 (2) 샬트르 수녀회의 한국전쟁 시련과 사회복지 활동

 

 

초창기 샬트르 수녀회의 활동 영역

 

한국에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이하 ‘샬트르 수녀회’) 활동은 고아원 운영의 소임을 맡았던 데서 시작한다. 당시 조선대목구장 블랑(J. Blanc, 白圭三) 주교는 1885년부터 종현(鐘峴, 곤당골)에서 고아원을 운영 중이었는데,1) 양육 전담 수녀가 필요하다고 보아 프랑스의 샬트르 수녀회에 선교 수녀 파견을 요청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4명의 수녀가 1888년 7월 인천 제물포항을 통해 입국함으로써 한국 땅을 밟은 최초의 수녀가 되었다.2)

 

이렇듯 시작부터 아동 보육의 사명을 안고 출발한 샬트르 수녀회였기에 활동 영역은 고아원, 유치원, 교육기관, 그리고 여러 본당에서의 선교 활동이 주를 이루었다. 제물포 분원이 생기면서 1894년부터는 이곳에서도 고아를 돌보았고, 1896년 이후에는 ‘해성(海星) 보육원’이라고 불렸다. 1899년에는 최초의 여학교 교육도 시작했는데 이는 훗날 박문(博文)학교로 발전하였다. 1901년 서울 인현(仁峴)학당에서의 여학생 교육을 시작으로 1910년까지 평양 관후리 본당의 성모(聖母)여학교, 안악 매화동 본당의 봉삼(奉三)학교, 제주도 신성(晨星)여학교, 진남포 본당의 지정(智貞)여학교 등에 파견되어 교육 사업의 영역이 확장되었다. 1909년 당시 한국인 수녀가 지원자를 포함하여 총 49명이었는데, 그중 14명이 교육 사도직을 감당하고 있었다는 데서 수녀회의 활동성과 그 방향성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이때의 교육은 당시의 사회적 요구인 중등 이상의 고급 인재 양성에는 미치지 못하고 초등교육 수준에 그치고 있었다.

 

 

 

일제 시기를 거치면서 수녀회 활동 영역은 대폭 늘어났다. 기존의 고아원 사업 역시 시설이 개선되어 1926년에 종현 고아원 건물을 3층으로 새로 지었고, 1936년에는 용산에 보육원 분원을 설치하는 등의 변화가 있었다. 천주교의 성장세에 따라 지역 본당이 늘어나면서 수녀회의 활동 영역도 넓어졌다. 특히 이 시기에는 의료 분야가 크게 확장되었다. 서울 본원의 의료 사도직 수녀들이 운영하던 시약소는 1936년에 성모병원으로 발전했고, 제물포 본당의 시약소도 1937년에는 진료소 건물을 지을 수 있었다. 서울 원효로와 제기동에도 진료소가 세워졌고, 논산 및 서산 등지에서도 시약소 사업이 이루어졌다.

 

1911년 대구대목구가 분리되고 1915년에 샬트르 수녀회가 초청됨에 따라 대구 지역에서의 사업도 활발해졌다. 드망즈(F. Demange, 安世華) 주교가 당시 계산 본당 신자 가정에 위탁·양육 중인 고아 30명을 수녀들에게 맡겼는데 당시에는 시설이 마련되지 않아 수녀원 내 작은 방에서 양육하기 시작한 것이 백백합(白百合) 보육원의 시작이었다.3) 1925년 보육원 건물이 지었고, 아동의 수가 점점 늘어나 1947년경에는 원아 수가 250명에 달했다. 보육원 원아들과 대구 성직자들을 위해 1931년에 세워졌던 의무실에서 지역민에게 무료 진료를 제공하던 것이 확대되어 1934년 ‘성 요셉의원’의 신설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 중일전쟁으로 시작된 일제의 전시 체제하에서 수녀회의 사도직 활동 또한 적잖은 제약을 받았다. 교육기관에 대한 통제가 심해져서 창씨개명을 강제하거나 조선말 사용을 금지하였고, 종교 교육 또한 제한되었다. 태평양전쟁 시기에는 일제의 적성국인 프랑스와 미국에서 온 수녀와 사제들에 대한 추방과 연금 등의 조치로 활동 영역이 축소되기도 하였다. 일례로 관후리 본당에서 운영하던 양로원과 고아원 그리고 시약소 사업은 1940년에 방인(邦人, 현지인) 수녀회인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로 인계되었다. 진남포 본당에서 스위니(Leo A. Sweeney, 徐) 신부와 함께하던 고아원, 양로원, 시약소도 1941년 스위니 신부의 추방으로 해산하고 말았다. 수녀회의 외국인 수녀는 모두 활동하던 곳에서 떠나 본원으로 귀환해서 건물 안에 머물러야 했고, 현장에서는 방인 수녀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그마저도 극심한 식량난 등으로 고통받았다. 전쟁 막바지에는 용산 보육원 건물이 징발당했고, 서울 본원 건물 일부는 전투를 위해 헐려서 일부 수녀와 원아들을 지역으로 소개(疏開)하기도 하였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수녀회 활동도 정상화되기 시작하였다. 무엇보다 일제에 징발당한 건물 등을 찾는 일이 급선무였다. 전쟁 막바지에 파괴된 건물을 재건하는 일도 필요했고, 수녀원 운영을 위해 미군의 빨래를 맡아서 하는 세탁 사업을 벌이기도 하였다.4) 소련군 점령 지역에서는 공산당 세력에게 종교 박해를 당하였다. 그럼에도 수녀회 활동과 규모는 확장되어 갔다. 이북 지역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진 만큼 한반도 남쪽으로 방향을 돌렸고, 경주·김천·청주 수동·진주 옥봉동·진해 등에 새롭게 진출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여러 어려움 끝에 1948년 11월에는 한국 관구를 설립할 수 있었고, 초대 관구장으로 베아트릭스(Béatrix de Marie Odouard, 1874~1950) 수녀가 임명되었다. 이듬해에는 샬트르 수녀회가 교황청 직할 수도회가 되는 기쁨을 한국에서도 함께 나누기도 하였다. 이렇게 활동의 전기를 맞아 새롭게 시작하려는 찰나에 한국전쟁이라는 시련이 다가왔다.

 

 

한국전쟁으로 겪은 시련

 

전쟁 발발 이튿날인 6월 26일 주교회의에서는 본당 사목 사제를 제외한 이들은 최대한 피신할 것을 결정했고, 다음 날 수녀회와 신학교 등의 기관에도 이러한 결정 사항이 전달되었다.5) 수녀회에서도 수련원을 해산하고 가능한 한 많은 수녀를 본가로 보내는 조치를 취했다. 그런데도 미처 피난하지 못한 이들이 있었는데, 서울을 떠나면 갈 곳이 없던 300여 명의 고아와 이들을 돌보던 일부 수녀들이었다. 이들은 고스란히 인민군 점령의 현실을 견뎌야 했다. 관구장 베아트릭스 수녀와 수련장 에우제니아(Eugénie de S.C. Demeusy) 수녀는 인민군에 포로로 잡혀 ‘죽음의 행진’을 겪어야 했고, 베아트릭스 수녀는 끝내 목숨을 잃기까지 했다.6)

 

남은 한국인 수녀들은 고아들에 대한 책임감을 안고 열악한 환경에서 어떻게든 인민군의 통제와 감시를 피해 굶주림을 면하고 폭격에서 살아남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성모병원을 비롯한 의료기관도 인민군 통제하에서 지속적인 의료 활동을 펼쳤으나 병원에 주둔하는 인민군의 간섭이 심하였고, 약품과 비품 보급이 안 되어 곤란을 겪어야 했다. 인민군에게 점령당했던 다른 지역에서도 피해 상황이 허다했지만, 수류(水流) 본당에서는 인민군이 발전기를 가지고 트집 잡아 신부와 수녀들을 잡아 가두고 무전기를 숨기고 있지 않으냐는 구실로 여러 날 심문을 하는 등 그 고통이 특히 심했다. 이북 지역에서는 인민군에게 신부와 수녀들이 학살당하기까지 하였다. 매화리 성당에 머물던 김 안젤라, 김 마리안나 수녀가 순교했고, 강 마리 레지스 수녀는 가까스로 살아나 서울 본원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3개월의 인민군 치하를 견디고 서울 수복의 기쁨도 잠깐, 그해 12월 중공군 참전으로 전선이 남하하면서 피란 짐을 꾸려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당시 서울시 사회과에서는 10세 미만의 고아는 안양으로, 큰 아이들은 제주도로 소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과정에서 안양으로 떠나던 50여 명의 아이들이 미군의 오인 폭격으로 모두 사망하는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인천 고아원 아이들은 미군의 도움을 받아 덕적도로 소개되었고, 수녀들은 남쪽으로 피란하였다.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일부 수녀들은 부산으로 가고, 나머지 수녀들은 대구 분원에서 피란 생활을 시작했다. 여러 수녀원의 인원이 한곳에 모여 있게 되니 장소가 비좁은 것도 어려움이었지만, 무엇보다 급선무는 모여든 적잖은 이들의 현실적인 생존 문제의 해결이었다. 부산으로 피란 간 수녀들은 육군병원에서 의료 봉사를 하며 환자들과 침식을 같이하는 것이 한가지 방편이었다. 고아들을 데리고 제주도로 피란 갔던 수녀들은 지역 신자들의 후한 도움에 의존하기도 하였다.

 

전쟁 참화는 고아 수의 급격한 증가로 이어졌고, 이는 고아를 대상으로 하는 사도직 활동의 확대를 의미했다. 전쟁 기간 임시 수도였던 부산의 소화(小花) 보육원은 보호 아동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자 1951년에 건물을 새로 지었고, 대구 백백합 보육원도 보호 아동의 수가 크게 늘어 해방 직후 250명이던 것이 400명이 넘기도 했다. 여기에 더하여 서울에서 피란 온 120여 명의 고아도 수녀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서울 재수복 후에도 전쟁으로 파괴된 건물이 아직 복구되지 않은 상태였기에 고아들은 곧바로 귀환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이들을 위해 1952년 9월 새로운 거처를 마련하였고, 전쟁이 끝나고 1954년 10월 드디어 서울에 고아원 건물을 새로 지어 전쟁고아 110여 명을 수용했다. 대구에 남아 있던 고아 120여 명이 서울로 돌아와 합류한 것은 1957년 11월이었다. 1966년에는 ‘성 바오로 보육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인천에서도 1948년에 미군의 진주로 야기된 혼혈 고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설했던 용현동의 보육원을 1964년도에 개축했고, 주변에 경작 농지를 장만하는 등 시설을 정비히였다. 1970년대에는 답동에 있던 아동들도 용현동으로 옮겨서 현재의 해성 보육원 형태를 갖추고 답동에는 유아동 보육 시설만 남겼다. 전쟁으로 어려운 시기에 보육원 건물을 새로 짓거나 옮길 수 있었던 것은 세계 교회에서의 도움의 손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캐롤(G. Carroll, 安) 몬시뇰이 총책임자로 있었던 가톨릭 구제회(CRS)의 역할이 컸다.

 

 

 

 

샬트르 수녀회의 사회복지 활동

 

전쟁이 끝났어도 경제적 어려움은 지속되었다. 전후의 복구·재건기에는 성모병원 등 의료기관의 운영 또한 원조 없이는 유지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1954년의 ‘성 요셉 자선병원’ 개원도 가톨릭 자선회(CAC)의 지원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는데, 처음에 병원을 운영하던 성가 소비녀회에서 새로운 병원7)을 설립하면서 1959년부터는 샬트르 수녀회에서 관리 책임을 맡게 되었다. 또 메리놀 수녀회가 1950년에 설립하여 부산교구에 헌납한 메리놀병원의 운영을 위탁받아 1967년 2월 24일 샬트르회 수녀들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샬트르 수녀회는 활동의 시작이 곤당골 고아원 운영이었던 만큼 고아원과 유아동 교육, 그리고 의료 시설 등 돌봄 노동 사도직에 특화되어 있었다. 전문적인 직업 훈련을 받은 수녀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전통적 여성 노동력이 집약된 곳인 만큼 수녀회에 파견 요청이나 의뢰가 들어오는 곳도 대부분 돌봄 노동이나 교육 사도직이 많았다. 1966년 캐롤 몬시뇰의 요청으로 안양의 ‘성 라자로 마을’에 수녀들이 파견되어 기관의 운영과 미감아 돌봄을 맡았던 것도 그러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다만 성 라자로 마을은 수원교구 관할이 되면서 1년 만에 철수하고 말았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의 경제 상황이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가고 고아 수도 줄어듦에 따라 1977년에는 성 바오로 보육원을 폐원하였다. 동시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회의 사회적 책임, 그리고 평신도 사도직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한국에도 적용되었다. 수녀회에서도 시대의 요청에 따라 기존의 보육원 운영 체제를 새롭게 전환하고 사회사업과 특수 사도직에 힘쓰기 시작하였다. 이는 돌봄 노동에 특화된 수녀회 특성상 사회복지 시설이나 기관의 운영으로 이어졌다. 성 바오로 보육원 폐원에 이어 다른 보육원에서도 수용 아동의 연령대를 대폭 낮추어 영아원만 남기는 등 고아원 사업은 예전에 비해 줄어들었다. 반면에 장애인과 장애아동, 그리고 노인을 위한 사업이 확장되었다. 미혼모를 위한 사업이 영아원 사업과 결합되기도 하였다. 장애인을 위한 사도직은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의 장애인 재활사업부, 애덕의 집, 부산의 심장 환자 상담소 등이 대표적이었다.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도시 빈민을 위한 사도직이 새롭게 추가되기도 하였다. 한국은 1960년대부터 도시화가 촉진되었고, 도시 빈민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그때는 대도시 중심의 경제 개발 정책으로 인한 이촌향도(離村向都) 현상이 심했고, 이에 따라 도시로 몰려든 인구를 충분히 수용하기 힘들어서 발생한 주택난이 심각했다. 그렇지만 국가의 정책 중에 이들을 위한 자리는 없었다.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이 모여 살던 판자촌 등이 도시 개발 정책에 따라 여건이 열악한 도심의 주변부로 밀려나는 일이 허다했다. 1970년에는 급기야 ‘광주 대단지 사건’이라는 대규모 분규가 발생했고, 이후로 도시 빈민의 문제가 가시화되었다. 이를 위해 투신하는 활동가들도 적지 않았다. 1980년대에는 경제가 어느 정도 성장하고 도심지가 확대됨에 따라 재개발 문제가 대두되었다. 수녀회가 도시 빈민을 위한 사도직을 시작했던 것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도시 빈민 사도직의 시작은 1970년대 초부터 도시빈민운동을 하던 예수회 정일우(鄭日佑, John Daly, 1935~2014) 신부의 복음자리 공동체에서의 활동이었다. 수녀회에서 이 공동체에 파견되어 부모들이 일터에 나가 있는 동안 돌봐주는 보육 사업과 신협 운동 등을 감당하였다. 1980년대 후반에는 서울 봉천동에서 탁아소를 운영하기도 했다. 낮 시간에 아이들을 돌보아주는 것으로 여성들의 경제 활동이 가능해지고, 이를 통해 극심한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수녀회는 고아원을 비롯하여 탁아소나 유치원 등 아동의 보육을 위한 시설 운영 경험, 그리고 교육 사도직의 경험이 풍부했기 때문에 이러한 방향 전환이 비교적 손쉽게 가능했다. 1970년대에는 시내버스 ‘안내양’의 인권 문제가 사회적으로 대두됨으로써 대구 관구에서는 이들을 위한 교양 및 기술 강좌를 열었다. 박복주(스텔라) 수녀를 중심으로 M.B.W(More Better World)라는 공동체 영성 훈련 프로그램이 1971년부터 약 10여 년간 운영되기도 했다.

 

살펴본 바와 같이 샬트르 수녀회 활동은 고아원 사업에서 시작해서 아동을 돌보고 교육하였으며, 노인을 돌보았고, 병자·장애인 그리고 도시 빈민까지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기꺼이 찾아가 돌봄 노동의 사도직을 성실하게 감당하였다. 이러한 수녀회의 노력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고아원인 곤당골 고아원의 운영에서부터 현대적 사회복지법인의 운영까지 활발하게 이어지고 있다. 현재 샬트르 수녀회 홈페이지에 정리되어 있는 수녀회의 사회복지 사도직 현장은 14군데나 된다. 시대 상황에 따라 구체적인 형태나 방법은 조금씩 바뀌어 갔지만, 어려운 이들과 함께하고자 했던 이들의 노력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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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시설을 영해회(嬰孩會), 영해원(嬰孩院)으로 부르기도 하나 이는 1854년부터 있었던 가정 위탁 형태의 아동 사업과는 다르므로 ‘곤당골 고아원’ 혹은 ‘종현 고아원’으로 부르는 게 더 타당하다(자세한 것은 『교회와 역사』 2023년 5월호 참조).

 

2) 최초의 수녀 4명은 프랑스인 자카리아(Zacharie Heurtault, 1842~1889) 수녀, 에스텔(Estelle Vest, 1896~1927) 수녀와 두 명의 중국인 수련 수녀 비르지니(Virginie Axung, 1863~1927), 프란치스카(Francisca Si Mouille, 1862~1937)였다.

 

3) 다만 대구에서 관리하는 고아원이 이때 처음 생긴 것이 아니라, 1885년경에 이미 이 지역에서 고아 60~70명을 돌보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한국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1991, 159쪽).

 

4) 샬트르 수녀회의 세탁 사업은 1901년에 서울 본원에서 수녀회와 고아원 운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손탁호텔과 당시 한양에 거주 중이던 외국인들의 세탁물을 맡으면서 시작되었다.

 

5) 강인철, 「한국전쟁」, 『한국가톨릭대사전』 12, 2006, 한국교회사연구소.

 

6) 에우제니아(예전에는 ‘으제니’로 표기하였음) 수녀는 ‘죽음의 행진’을 겪은 뒤 1953년 3월 생환하였고, 이듬해 5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 관구장을 역임하다가 1959년 본국 프랑스로 귀국하였다.

 

7) 1958년 8월 5일 서울 미아리 성당 내에 있던 건물을 개조하여 개원한 ‘성가의원’으로, 1962년 8월 1일 경기도 부천으로 옮겨 ‘성가병원’으로 발전하였다.

 

[교회와 역사, 2023년 8월호, 김가흔(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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