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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한국교회와 시노달리타스10-11: 200주년 사목회의와 시노달리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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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7-10 ㅣ No.721

[한국교회와 시노달리타스] (10) 200주년 사목회의와 시노달리타스 (상)


시노달리타스 강조하는 상황은 ‘위기’에 직면했음을 의미한다

 

 

- 1984년 12월 1일 서울 가톨릭 의대 강당 마리아홀에서 거행된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사목회의 폐막미사. 평신도와 여성의 교회 참여에 대한 적극적 권고 등 교회 쇄신과 변화를 위한 의견들이 포함됐지만, 안타깝게도 한국교회 사목 지침으로 승인 공포되지는 않았다. 가톨릭신문 사료사진

 

 

시노달리타스의 문이 닫히기 전에

 

시노달리타스는 여전히 낯선 개념으로 다가온다. 이 낯섬은 단지 외국어라는 데서 오지 않는다. 모두 열심히 외침에도 불구하고 크게 변하는 것이 없을 때, 더 나아가 앞으로도 크게 변하지 않을 듯 보일 때 느끼는 낯섦이다. 시노달리타스를 추진하는 동안 코로나바이러스라는 큰 변곡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큰 희망을 갖지 못함을 고백한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로 전 세계와 교회가 흥분하던 시기를 기억한다. 한국에 돌아와서 느끼는 온도 차이가 있었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무언가 변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또한 분명하게 느끼며 지냈던 바는 한국교회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신학의 간극이었다. 공의회 정신을 끊임없이 외쳐야 할 만큼 변화에 저항하는 흐름이 우리 교회에 분명히 존재했다.

 

결코 밝지만은 않았던 시기에 큰 희망의 빛은 200주년 사목회의 의안을 준비하고 완성하는 기간에 밝혀졌다. 교회 내의 모든 구성원이 모여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아직 포기할 수 없는 교회의 변화를 꿈꾸었다. 그러나, 모든 노력의 시간이 허탈할 만큼 사목회의 의안은 그저 하나의 문서 작업으로 남아있다고 말할 수 있다. 평신도사도직협의회에서 본당 총회장을 제외하는 결정은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고, 허탈감을 넘어 자괴감을 안겨주었다.

 

 

비어가는 교회 직시하고 거듭 태어냐야

 

시노달리타스를 두고 누군가는 신나게 손을 잡고 달리자는 의미로 설명한다. 쉬운 설명임이 분명하지만, 신나게 달리다 탈이 나지 않을까라는 걱정이 앞선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클 터인데, 다시 희망을 품기가 쉽지 않다. 무엇보다 사제중심주의를 결코 내려놓지 못하는 우리 교회의 분위기에서 시노달리타스가 실현될 가능성을 품기 어렵다.

 

시노달리타스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교회론, 곧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 이해를 다시 천명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절대 새롭지 않은 내용을 다시 천명하는 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교회 스스로 시인하는 장면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그러했듯, 현대교회도 결코 녹록지 않은 위기를 직면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현재 한국의 많은 지방 도시가 소멸 위기를 실감하고 있다. 특히 빠르게 비어가는 초등학교는 수년 내에 중학교와 고등학교, 대학교 순으로 빠르게 비어가는 학교로 이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떨까? 지금도 빠르게 비어가지만, 유럽이 경험했던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비어가리라고 많은 사람들이 예상한다. 이를 보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못하는 곳에서 시노달리타스는 공염불로 간주되고 있다.

 

교회가 비어가는 현상을 직시하고 교회다운 교회로 거듭나야 한다. 이러한 변화 안에서 많은 이들이 신나는 교회의 자리로 들어와 구원의 기쁨을 경험할 수 있다. 시노달리타스는 근본적으로 구원을 선포하고 증거하는 교회를 밝히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시노달리타스가 공염불로 보인다면, 선교의 시급함이 체감되지 않음을 의미하며, 안정된 교회라는 허상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드러낸다.

 

- 1984년 12월 1일 서울 가톨릭 의대 강당 마리아홀에서 거행된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사목회의 폐막미사. 가톨릭신문 사료사진

 

 

사제 중심성, 교구 울타리 넘어서는 시노달리타스의 논의

 

지금까지 한국교회가 보여준 시노달리타스 논의의 무게중심은 사제와 수도자, 평신도의 관계에 놓여있는 듯하다. 환경문제나 아시아 지역교회와의 문제를 검토하는 움직임도 있지만, 무게중심을 이동할 만큼 큰 영향력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러한 모습은 한국교회가 사제 중심의 모습을 결코 내려놓지 못하는 가운데, 본당과 교구의 높은 벽을 결코 낮추지 못하는 고리를 보여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교회는 세상의 복음화를 실천하는 큰 장애물을 교회 안에서 맞닥뜨리게 된다. 세상 안에서, 자신의 전문지식과 기량을 쏟아 그리스도교의 정신을 통해 변화를 이룩하려는 모든 노력은 사제나 교구의 울타리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청소년 사목 활성화를 위한 청소년 교리 및 교육과정을 고민하거나, 진정한 평화를 동아시아 지역에 정착시키려는 노력, 평신도 선교사를 양성하여 외국에 파견하는 활동 등은 소수의 사제와 교구라는 울타리로 담아낼 수 없다.

 

한국교회가 평신도의 목소리와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이들이 교회 안에서뿐 아니라 교회 밖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신을 실천하는 데 버팀목이 되어주어야 한다. 이런 여건 안에서 교회는 세상과 더불어 구원의 길을 걷는 시노달리타스를 실현할 수 있다. 지금처럼 사제 중심성을 얼마나 양보하는지가 논의의 중심점에 남아있다면 시노달리타스는 공염불에 머물 것이다.

 

 

시노달리타스의 강조는 직면한 위기를 증거한다

 

시노달리타스는 결코 새롭거나 파격적인 내용을 담지 않는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꾸준하고 조직적인 노력은 교회가 가야 할 길을 제대로 가자는 독려이다. 이 바람이 어느 날 던져진 거북한 숙제로 여겨지는 한, 한국교회는 빠른 출산율 감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빈 교회를 직면하게 될 것이다. 시노달리타스를 강조하는 상황은 위기에 직면했음을 의미한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위기는 그리스도인이 세상 안에서 신나게 복음을 선포하고 증거하는 삶을 살 때, 교회 안에서 이를 위한 충분한 열기와 동력을 충전 받을 때 그 수위가 낮아질 것이다.

 

아직 늦지 않았다. 시노달리타스 열기가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아직 담론을 나눌 수 있는 여건이 제공될 때, 교회다운 교회로 변화되려는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사제 중심주의, 본당 중심의 사목방침, 교구 간의 견제 등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때 시노달리타스는 탈만 남기는 신나지 않은 기억이 될 것이다.

 

다시금 평신도 회장이 평신도협의회의 구성원이 되고, 교회 안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청소년 문제와 낮은 출산율, 높은 낙태율과 자살률 등을 교회가 교회답지 못함을 보여주는 지점으로 받아안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이럴 때 한국교회의 시노달리타스는 신나게 달리는 교회로 우리를 이끌어 줄 것이다. 그날이 오리라는 희망마저 버리기 전에, 변해야 한다. [가톨릭신문, 2023년 7월 9일, 심상태 요한 세례자 몬시뇰(수원교구 원로사목자·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 명예소장)]

 

 

[한국교회와 시노달리타스] (11) 200주년 사목회의와 시노달리타스 (하)


껄끄러워도 속내 말하고, 함께 복음화의 길로 기쁘게 달려가자

 

 

- 제주교구가 시노드 정신 구현을 위해 지난 5월 21일 제주 동광성당에서 ‘성소’ 주제로 마련한 교구 시노드 모임. 시노달리타스는 세상과 함께 구원의 길을 걸어가려는 교회의 임무인 선교를 방해하는 요소를 제거하려는 노력의 일부다. 제주교구 성소위원회 제공

 

 

시노달리타스, 끊기지 않는 희망의 맥박

 

시노달리타스에 시달리느라 탈이 났다고 말한다. 어느 날 위에서 날아온 과제를 완수하기 위해 주어진 빈칸을 부지런히 메꾸는 형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제시한 시노달리타스 사업(?)이 요구한 문서 만들기를 완수하기에 모두 바쁘다. 교회의 선교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희망의 지평을 열라는 초대장이 과제 지시서로 받아들여진 모습을 자주 본다.

 

여전히 많은 신자가 시노달리타스 개념의 번역어를 요구한다. 바람직한 문제의식이다. 초대장보다 과제 지시서로 느껴지는 이면에 외국어라는 낯섦이 자리잡기 때문이다. 그런데 외국어이기에 좀 더 모호한 채 많은 느낌을 담아볼 여지를 발견할 수 있다. 가장 주요하게는 희망의 느낌을 들 수 있고, 여기에 우애, 기쁨, 자식이기에 받아 안은 묵직하고 뿌듯한 정체성 등을 더해볼 수 있다.

 

시노달리타스는 희망의 몸짓이다. 이 희망은 벽에 그려진 창과 문이 아니다. 시노달리타스는 마주 앉아 경청하며 함께 알아차린 껄끄러운 지점을 드러내는 불편함을 피하지 않는다. 교회이기에 마주서야 하고, 고민해야 하며, 해결해야 할 과제를 식별하는 일은 갈등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 예로, 최근 세계 곳곳의 교회가 현장 문제를 비치며 제기했던 문제, 동성 결합, 사제독신제, 교회 통치에 관한 교회법의 개정 요구를 들 수 있다.

 

시노달리타스가 불러온 자유의 바람이 잘 정돈되고, 먼지 하나 없이 닦아놓은 장소를 망가뜨린다는 비판은 이런 분위기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이 흐트러짐과 싸움처럼 보일 수 있는 큰 목소리에서 시노달리타스의 실체를 감지한다. 이는 현재 우리가 목격하고 우리에게 들리는 시노달리타스의 노력이 간신히 얌전한 모습을 유지하던 교회가 위험에 빠졌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갈등으로 인한 아픔은 함께 걸어가야 하는 동료에게 느끼는 감정이다. 따로 걸어도, 다름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관계는 친구라고 말하지 않는다. 시노달리타스 과정에서 마주하는 갈등은 어떻게든 친교를 활성화하려는 이들의 노력과 이 때문에 결코 쉽게 벗어던지지 않고 묵묵히 감수하는 쓰라림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화성악을 예외 없이 지키며 그려낸 인위적인 악보보다는 불협화음처럼 들릴 수 있는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가 시노달리타스의 참모습이다. 친구의 자리를 포기하지 않는 시노달리타스가 미래를 향한 문을 희망의 색채로 드러낸다.

 

시노달리타스는 기쁨이다. 많은 학자가 언급하기 이전에 모든 신자는 시노달리타스를 알고 있었다. 이는 시노달리타스가 다름 아닌 교회의 본질, 곧 친교와 참여, 그리고 선교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낯선 개념이 우리에게 던져지기 이전에 교회가 지향하고 걸어온 모든 여정은 시노달리타스가 말하는 바로 그 지점이다. 오늘날의 시노달리타스 노력이 기쁨인 이유는 그 여정의 의미와 가치, 교회다움의 의미를 다시 한번 분명하게 확인시켜 주기 때문이다.

 

200주년 사목회의 의안이 각인한 한국교회의 모습은 이제는 현장에서 사라진 과거의 기록이 아니다. 지금도 한국교회다움을 지칭하는 모습으로 현존하고, 많은 이들이 교회를 떠나게 하는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시노달리타스 논의는 ‘한국교회’(Korea Church)라는 독립된 섬에서 벗어나 한국에서 뿌리내린 신앙을 증거하는 ‘한국의 교회’(Church of Korea)로 가는 길로 우리를 인도한다. 로마보다 더 로마스러운 교회임을 은근히 자랑하는 자화상은 더 이상 자리 잡을 곳이 없다.

 

시노달리타스는 그리스도의 자녀에게 부여된 자랑스러운 과제이다. 세상과 함께, 세상 안에서, 세상을 통해 구원자이심을 드러내시는 그리스도가 시노달리타스 노력 안에 더욱 또렷이 나타난다. 과학기술 발전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아파하며 죽어가는 형제 지구를 지켜주기 위해 무엇을 자발적으로 희생하고 어디서 발걸음을 멈추고 되돌아서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자리가 시노달리타스의 자리이다.

 

시노달리타스의 무게중심은 교회 안의 권위 배분이 어떻게 하면 민주적이고, 동등한 방식을 형성할까를 묻는 지점에 있지 않다. 매우 중요한 이 사안은 세상과 함께 구원의 길을 걸어가려는 교회의 임무인 선교를 방해하는 요소를 제거하려는 노력의 일부에 자리 잡는다. 더욱 근본적인 과제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선포하고 구원의 기쁨으로 초대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시노달리타스 노력이 본질적으로 선교적인 교회의 모습을 밝히 드러낼 때 교회의 심장 소리를 힘차게 들려줄 수 있다. 이 맥박이 피동적이고 습관에 젖어버린 우리 믿음살이에 강한 여운을 미치며 그리스도교 진리가 지닌 파동을 우리 안에 공명시킨다. 이럴 때만이 시노달리타스는 결코 멈추지 않는 역동성으로, 일회적인 과제 완수 기억을 넘어 초대교회의 심장 박동을 오늘 여기서 들려줄 것이다.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혀 시노달리타스를 외면한다면 교회는 새로운 교회이며 동시에 교회의 진정한 전통을 가장 잘 실현하는 교회로 변화될 수 없다. 회의론에 머물러 한 걸음 물러서기보다, 껄끄러워도 서로의 속내를 말하고, 왜 이 문제를 그냥 넘길 수 없는지를 복음에 비추며 함께 복음화의 길을 걸어가자.

 

시노달리타스가 우리에게 공명시킨 성령의 맥박에 언제나 귀를 기울이자. 과제를 제출하고 시원한 마음으로 이제 다시 잘 정돈된 기계적인 화성악으로 되돌아가려는 노력과 이 맥박이 충돌할 때 시노달리타스는 과제가 아닌 초대장으로 끊임없이 작용할 것이다. 시노달리타스는 희망의 몸짓, 교회다움을 실현하는 노력이다. 쉬지 말고 함께 신나는 교회, 세상과 함께 달리는 교회로 살아가자. 시노달리타스는 교회가 존재하는 한, 절대 바래지 않는 초대장이다. 신나게 달리자는 성령의 친교 초대장이다. [가톨릭신문, 2023년 7월 16일, 심상태 요한 세례자 몬시뇰(수원교구 원로사목자·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 명예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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