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일 (목)
(백)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너희 기쁨이 충만하도록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레지오ㅣ성모신심

레지오의 영성: 뭣이 중헌디?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8-03 ㅣ No.822

[레지오 영성] 뭣이 중헌디? (1)

 

 

하느님의 소망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계명을 잘 지키고 열심히 미사참례라도 하는 것, 죄 안 짓고 착하게 사는 것, 다른 사람을 사랑으로 보살피는 것 등등 …… 어렸을 적에는 나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요구하시는 하느님이 싫었습니다. 신자로서 지켜야 할 것도 너무 많아서 하느님 없는 세상에서 편하게 내 마음대로 살고 싶다는 생각도 자주 했습니다.

 

성당에 안 나가도 공부도 잘하고 아무 어려움 없이 재미나게 사는 친구들을 보면 어쩌다가 이런 구교우 집구석에 태어나 이렇게 힘든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 부모님이 원망스럽기도 했지요. 그래서 기회만 되면 슬금슬금 하느님의 눈을 피해서 살고, 그럭저럭 신앙생활을 하다가 결국 하느님께 붙잡혀 사제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제가 되고서도 하느님께 서약한 약속을 지키며 사는 일이 힘에 부칠 때도 많았습니다. 말하자면 하느님은 내 인생에 걸림돌인 셈이었지요.

 

사제가 되어 한참이 지난 어느 해에 ‘영신수련 피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40일 동안 말씀의 기도 안에서 나 자신을 살펴보고 하느님 앞에 선 나의 모습을 성찰하는 시간 속에 지내면서 그동안 내가 살아온 신앙의 여정이 얼마나 잘못된 길이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피정 동안 성령께서 저에게 주신 은총은 우리를 사랑으로 내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참 행복’을 누리는 것이라는 것을 마음 속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뭣이 중헌디?

 

‘어차피 인생살이 새옹지마, 딱 한 번만 살고 가는 세상.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헌디’ 요즘 유행하는 노랫말이 마음을 건드립니다. 행복을 찾아 살지만 참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우리에게 건네는 물음이기도 합니다. 행복은 누구나 바라고 추구하는 인생의 목적이지요. 그래서 행복을 보장해 주는 것을 더 많이 소유하고 누리려고 고군분투하며 치열하게 살아갑니다. 하느님을 제대로 알기 전까지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 행복은 잠깐 누리고 나면 사라지고 마는 것이어서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우는 것처럼 늘 허덕이는 삶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허망한 욕망과 호기심으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삶이 됩니다. 권태 속에서 긴 그림자를 끌며 터덕거리는 발걸음으로 서성거리는 자신의 모습에 실망하고 외로움 속에 절망하는 삶으로 끝나고 맙니다. 성경은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그러한 삶을 ‘멸망’이라고 합니다.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잘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 있지요. 신앙은 한 번만 살고 가는 인생에서 참으로 잘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가는 지도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교리서로 외워 익혔던 ‘천주교요리문답’의 첫 문답입니다.

 

문> 사람이 무엇을 위하여 세상에 났느뇨?

 

이 물음은 인간의 근원적인 갈망과 인생의 목적에 관한 질문입니다. 어차피 딱 한 번 살고 가는 인생에서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답을 내시겠습니까?

 

보통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세상의 답이지요. 남보다 더 좋은 것,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그것에 의해 인생의 행복이 보장된다고 믿는 것이 세상이 주는 행복이고 사람들이 가장 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그 사랑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신앙인들의 답은 다릅니다.

 

답> 사람이 천주를 알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세상에 났느니라.

 

성경은 “하느님을 아는 것이 의를 완전히 이루는 것이며 하느님의 힘을 아는 것이 불멸의 근원이다.”(지혜 15,3)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으로 내셨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그 사랑을 이렇게 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영적인 삶의 원리와 기초

 

이냐시오 성인은 영적인 삶의 원리와 기초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 만물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며 우리가 하느님을 더 쉽게 알고 그 사랑을 더욱 기꺼운 마음으로 돌려 드리게 하려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내가 가난하거나 부유하거나, 곤경에 처했거나 평안하거나 어떤 처지에서든 하느님 당신을 찾고, 만나고, 알게 하려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이 사랑을 깨닫는 사람은 기꺼이 자신의 은사와 재능을 다하여 기쁘게 그 사랑에 응답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겠지요.

 

영적진실이라고 부르는 이 신앙의 원리와 기초는 삶을 위해 내가 선택하고 투신하는 방향을 가리켜 줍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이어서 말합니다. “그 결과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주신 이러한 모든 선물에 감사하면서 하느님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에 맞추어 사용한다. 하지만 이러한 선물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우리 삶의 중심을 차지하면 그것은 하느님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어 하느님의 사랑을 향해 성장하는 데 방해가 된다.” 따라서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사는 사람은 일상생활에서 어떤 선택을 할 때 먼저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방향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신중합니다.

 

영적인 삶은 건강이나 질병, 부 또는 빈곤, 성공 또는 실패, 장수 또는 단명에 대해서조차도 하느님 안에 있는 우리의 생명에 대해 더욱 깊은 응답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시적인 감정이나 충동에 따라 자신의 만족을 위해 어떤 일을 결정하거나 선택하지 않도록 마음의 중심을 하느님께 유지하는 것을 불편심, 혹은 중용이라고도 합니다.

 

성화의 길은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응답하는 길을 식별하는 노력입니다. 영적인 삶은 이 식별을 통해 선택한 것에 기쁘게 헌신함으로써 성장하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축복을 누리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레지오 마리애는 성모님과 함께 그 길을 기쁘게 걸어가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2년 8월호, 김영수 헨리코 신부(전주교구 치명자산 성지 평화의 전당)]

 

 

[레지오 영성] 뭣이 중헌디 (2)

 

 

하느님을 찾아라

 

베트남 순교자 집안의 후손으로 태어나 39세에 사이공 대교구의 주교가 되신 구엔 반 투안 추기경님은 베트남이 공산화되자 1975년 성모승천 대축일에 체포되어 수감생활 13년간 대부분을 독방에 투옥되셨습니다. 1988년 조국에서 추방되어 바티칸에서 성 요한 바오로 2세와 함께 일하시다가 2001년 추기경으로 서임되었고 2002년 74세의 나이로 선종하셨습니다.

 

젊은 주교로서 교구와 신자들을 위해 열정적으로 일하다가 갑작스런 감금상태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과 괴로움 속에서 무기력하게 지내던 어느 날 밤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네 자신을 그렇게 괴롭히고 있느냐? 너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일을 식별해야 한다.” 그 음성은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해온 모든 일과 계속해서 행하기를 원하는 모든 것들, … 이 모든 것들은 훌륭한 일이고 ‘하느님의 일’이다. 그러나 그 일 자체가 ‘하느님’은 아닌 것이다!”

 

그 말씀을 듣고 나서 그를 묶어둔 감옥이 그의 교구가 되었고, 그곳에 있는 죄수와 간수들이 그의 양떼임을 깨달았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지금,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 현장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오직 한 가지,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야 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새로운 평화가 그의 마음을 감쌌습니다. 그 후 13년간의 감옥 생활동안 그 평화가 그의 마음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감옥 안에서 배급되는 밥과 국으로 매일 미사를 바쳤고, 감옥에 오기 전에 외우고 있던 말씀을 묵상하여 수인들과 나누고, 간수들을 회개시키며 공산화된 베트남의 영적 지도자요 목자로서 살았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기적이지요.

 

 

영적인 나태

 

언젠가 교우 한 분이 저에게 기쁘게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 오늘 저는 너무나 감사한 날입니다. 제가 성당에 들어갔더니 신부님이 혼자서 기도하고 계시더군요. 성당 다니면서 처음으로 기도하시는 신부님의 모습을 보니 마치 예수님을 뵙는 것 같아서 저도 덩달아 기도를 바치고 나왔어요.” 부끄러움에 제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고요히 하느님 앞에 머물며 기도하는 시간보다 해야 할 일들에 떠밀려 늘 바쁘게 사는 사제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기도할 시간도 없이 바쁘게 사는 사제의 삶은 어떻게 될까요? 하느님의 일을 하느라 하느님을 잃어버리는 삶이 되겠지요. 하느님을 잃어버린 사제는 여러 가지 활동에 열중하고 자신의 관심사에 몰두하게 되지요. 그리고 점점 하느님보다 자신을 만족시키는 것들에 매여 살게 됩니다. 구엔 반 투안 추기경님의 체험을 묵상하며 하느님의 일을 하다가 하느님을 잃어버린 제 삶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사제로서 해야 할 일도 많고, 만나야 할 사람들도 늘 그치질 않습니다. 모두 다 하느님을 위해 하는 일이고 하느님의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바쁘게 살다 보면 기도하는 시간은 일 속에서 묻혀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는 일도 소홀해지게 됩니다. 생활은 점점 일이 중심이 되고 남은 시간은 쉬는 일과 처진 일을 처리하는 시간으로 보내고 맙니다. 그래서 영적인 나태는 많은 일에 바빠서 하느님을 만나는 일에 소홀한 사람이 빠지는 함정이지요.

 

 

하느님의 일

 

요한복음 6장에서 빵의 기적을 체험한 군중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8-29)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믿는다’는 것은 ‘아는 것’이고, ‘함께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아는 것이고 그분과 항상 함께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선교 수도회를 창설하신 캘거타의 성녀 마더 테레사 수녀님의 일화입니다. 어느 날 한 수녀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원장 수녀님, 지금 환자가 많고 돌볼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니 지금 하고 있는 기도 시간을 좀 줄여서 봉사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마더 데레사 수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오늘부터 기도 시간을 한 시간 더 늘리겠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데 기도가 선행되지 않고는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과 일치하지 않고 주님의 일을 내 힘으로 하다 보면 하느님 앞에(Coram Deo) 사는 삶이 아니라 사람 앞에(Coram hominibus) 사는 삶이 되기 쉽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인정과 평가에 매여 기도할 시간도 줄여서 일에 매달리게 되지요. 그러다 보면 몸도 마음도 쉽게 지치게 됩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영혼과 연결되어 있어서 영혼을 돌보는 일에 소홀해 지면 몸도 마음도 중심을 잃게 되지요.

 

 

꼭 필요한 것 한 가지

 

루카복음에는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마르타라는 두 자매를 방문하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둘은 주님을 기꺼이 맞아들였지만, 그 방식에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 앞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경청하였지만, 마르타는 이것저것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바로 이 점이 문제였습니다. 마르타는 무엇이 더 중요한지 잊은 것이지요. 이에 예수님께서는 분주한 마르타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 10,42)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이야말로 우리를 비추시고 지탱해주신다는 것을 알 때 우리가 하는 하느님의 일도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레지오 마리애도 성화를 위한 노력을 소홀히 한 채 인간적인 친교나 활동에 치중하다 보면 신심단체가 아니라 세속적인 모임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미사는 못 해도 주회는 해야 하는 레지오 마리애, 1차 주회는 못해도 2차 주회(酒會)는 빠지지 않는 레지오 마리애, 맛있는 음식은 꼬박꼬박 먹으러 다니면서도 피정 한 번, 성지 순례 한 번 가는 일은 꿈도 꾸지 못하는 레지오 마리애는 세속적인 일에는 바쁘지만 영적인 일에는 게으른 단체, 하느님의 일이라 여기며 열심히 활동하지만 하느님을 잃어버린 채 껍데기만 남은 신앙인으로 남게 되는 것이지요. 성화는 ‘뭣이 중헌지’를 식별하고 그것을 실제로 살아내는 열매를 맺는 사람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2년 9월호, 김영수 헨리코 신부(전주교구 치명자산 성지 평화의 전당)]



489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