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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전협정 70주년 - 외국인 선교사들의 수난과 선교: 죽음의 행진에서 선교의 행진으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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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9-05 ㅣ No.1590

[정전협정 70주년 - 외국인 선교사들의 수난과 선교] 죽음의 행진에서 선교의 행진으로 (1)

 

 

외국인 선교사들의 수난과 기록

 

2023년은 한국전쟁 정전협정 70주년이다. 정전협정 체결이 늦어지면서 3년간이나 진행된 전쟁으로 가톨릭교회가 파괴되는 등 물적 피해도 컸지만, 특히 인적 피해는 더욱 심각하였다. 많은 외국인 선교사가 본당과 신자들을 지키기 위해 피란을 가지 않았기 때문에 북한군에 체포되거나 희생되었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메리놀 외방전교회, 파리 외방전교회, 가르멜 수녀회, 샬르트 성 바오로 수녀회 소속 선교사와 수도자들이 납북되었다. 그분들 상당수가 북한에서 장기간의 포로 생활을 경험하였고, 일부 생환자가 있었지만 나머지는 선종하거나 행방불명이다. 100명이 넘는 외국인 선교사들과 80여 명의 국내 성직자들이 희생되었으며,1) 이외에 북한에서 한국전쟁 전부터 구금되어 있던 독일 베네딕도회 수도자들, 연길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더한다면 희생된 천주교인과 사제의 수는 훨씬 더 많다.

 

납치 · 피살된 그분들은 박해에 굴하지 않고 신앙을 실천하였고, 생환한 이들 또한 수용소와 죽음의 행진 속에서 기도와 수도 생활을 영위하고자 노력하였다. 1950년 11월 혹독한 추위 속의 ‘죽음의 행진’에서 살아남아 1953년 생환한 신부·수녀들의 생생한 수기 덕분에 ‘죽음의 행진’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다.2) 전쟁 기간 희생된 이들을 순교자로 현양하기 위한 자료 발굴과 기록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3) 여러 기록과 증언을 기반으로 순교하신 성직자·수도자들을 복자품에 올리기 위한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4) 당시 골롬반회는 납북되거나 선종한 선교사들에 대한 현황 보고, 정전 협상과 포로 석방을 위한 노력 등의 기록을 남겼다.5) 이 글에서는 골롬반회 자료를 새롭게 추가하여, 선교사들이 죽음의 행진을 겪은 후 수용소에서 석방과 생환 과정, 남한에서 교회 재건을 위해 선교의 행진으로 나아간 발자취를 밝혀보고자 한다.

 

 

선교사들의 납북과 순교

 

1950년 6월 25일 삼팔선을 넘어 남침한 북한군은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종교를 대표하는 선교사들의 국적, 나이, 성별, 병약(病弱)에 관계없이 모두 체포하였다.6) 가톨릭교회에서는 교황대사인 패트릭 번(Patrick Byrne, 方溢恩) 주교와 그의 비서 윌리엄 부스(W. Booth, 夫文化), 골롬반회 선교사 7명,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프랑스 선교사 13명, 가르멜회 수녀 5명, 샬트르

회 수녀 2명이 연행되었다.7) 대전에서 체포된 프랑스 선교사 9명과 목포에서 체포된 골롬반회의 패트릭 브레넌(Patrick Brennan, 安) 몬시뇰, 토머스 쿠삭(Thomas Cusack, 高)·존 오브라이언(John O’Brien, 吳) 신부 등은 대전에 수감되었다가 9월 24일경 희생되었다. 인천상륙작전(9월 15일) 이후 서울이 미군에게 함락될 가능성이 커지자 북한군이 신부들을 총살한 것으로 보인다.8) 전쟁 발발 후 춘천교구에서 활동한 골롬반회 신부들부터 먼저 체포되기 시작하였고, 15명의 본당 신부 중 7명이 공산군에 희생되었다. 골롬반회 서울 지부장 브라이언 제라티(Brian Geraghty, 池) 신부는 춘천에서 외국인 사제 최초로 순교한 앤서니 콜리어(Anthony Collier, 高) 신부가 죽음을 맞이한 상황을 아래와 같이 보고하였다.

 

“그의 어머니와 가족들의 슬픔에 깊이 공감하지만, 그들의 혈육 중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사제로서 의무를 수행하다가 선종했다는 사실에 대해 축하를 전합니다. 죽은 사제에게 이보다 더 큰 영예는 없을 것이며, 그를 하느님을 섬기는 데 기꺼이 바친 가족에게도 큰 영광입니다.”9)

 

체포되어 서울에 감금된 선교사들에게 북한군 장교는 “선교사들이 자신의 고국을 위해 일하는 주재관임을 잘 알고 있다. 서양이 적에 대항하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는 원자폭탄이 아니라 종교이다. 공산군이 곧 전국을 통제하고 모든 외국인은 본국으로 송환될 것”이라고 말했다.10) 그러나 선교사들은 송환되지 않고 외국 민간인들과 함께 기차에 실려 평양으로 보내졌다. 선교사들은 7월 21일 평양에 도착하여 조사를 받고, 9월 5일 700명의 미군 전쟁 포로와 함께 밤에만 이동하는 기차를 타고 이동해 9월 12일 압록강 근처의 국경 도시인 만포(滿浦) 외곽 가옥에 수용되었다.11) 토마스 퀸란(Thomas Quinlan, 具仁蘭) 몬시뇰은 수용소에서 신발도 없고 걷지도 못하는 미군 병사 중에 사망자가 나오자, “장례식을 치를 수 있게 해 달라.”며 싸워 공동 무덤을 만들었다. 유엔군이 10월 20일 평양을 함락하자, 수용소장은 포로들을 학대하고 더 멀리 이동시켰다.

 

 

죽음의 행진과 순교

 

‘호랑이’로 불린 새 수용소장이 10월 31일 만포에서 중강진(中江鎭)으로 행군을 명령하였다. 앞장선 미군 포로들을 민간인 포로가 뒤따랐다. 밤에는 옥수수밭 맨땅 위에서 자야 했다. 추위로 아침에 미군 포로 10명이 얼어 죽었으나 행군은 계속되었고 음식은 삶은 옥수수뿐이었다. 퀸란 몬시뇰과 크로스비 신부가 여든두 살의 비에모(P. Villemot, 禹一模) 신부를 업고 가기도 하였다.12) 행진 나흘 때 계속된 재촉으로 너무 약해져 걸을 수 없게 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베아트릭스(Béatrix de Marie Odouard) 원장 수녀는 기진맥진한 죄로 처형당하였다. 그 일주일 후 비에모 신부는 딱딱한 음식을 먹을 수 없어 기아 상태에서 사망하였다. 100명에 달하는 포로가 수용소장의 “빨리빨리” 걸으라는 과도한 몰아붙임, 영양부족, 치료 결여, 설사, 폐렴, 동상, 학대 등으로 죽음의 행진 기간에 목숨을 잃었다.13 가르멜회와 샬트르회 수녀들은 행진 중에 함께 ‘깊은 구렁 속에서’로 알려진 시편 130편과 망자를 위한 기도를 올리고 묵주 기도를 꽃다발로 만들어 길가에 뿌렸다.14)

 

만포에서 중강진으로 행진해 들어간 날에는 미군 B-29 비행기들이 머리 위로 윙윙거리며 날아다녔고 중공군들이 끊임없이 지나갔다. 더 이상 행군을 할 수 없게 된 포로들은 11월 9일 중강진의 여러 학교 건물들에 수용되었다. 번 주교와 캐너밴(F. Canavan, 孫) 신부는 행진 도중 감기가 폐렴으로 악화하였지만, 수용소장은 매일 아침 영하 15도의 추위에 외투를 벗고 밖으로 나와 운동하도록 명령하였다. 번 주교는 한 번도 고통을 호소하지 않았지만 걸을 수도 없고 의약품도 없는 상태에서 11월 25일 선종하였다. 그는 마지막 순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제로서 이제껏 많은 특권을 누려 왔지만 여러분과 함께 예수님을 위해서 고난을 겪는 이번이야말로 제 생애 최고의 특권입니다.”

 

퀸란 몬시뇰은 후에 유해를 확인하는 증거물이 되길 바라면서 단단한 빨간 단추가 달린 자신의 수단을 번 주교에게 입혀드리고 매장하였다. 12월 6일 아침 캐너밴 신부가 뒤이어 선종하여 번 주교 곁에 묻혔다. 퀸란 몬시뇰은 다음과 같이 추도하였다.

 

“캐너밴 신부는 오랜 피난길 동안 병자들과 노인들을 보살폈습니다. 그의 사제로서의 덕망을 나는 어떤 말로도 충분히 찬양할 수 없습니다. 아일랜드는 이 나라가 낳은 선교사 아들을 충분히 자랑할 만합니다.”15)

 

죽음의 행진 자체는 멈추었지만, 그 후유증으로 사망자가 계속 나왔다. 중강진에서 성공회의 메리 클레어(Mary Clare) 수녀 포함 3명, 하창리(下昌里) 수용소에서 뷜토(J. Bulteau, 吳) 신부 등 민간인 포함 11명이 사망하였고, 미군 포로들의 사망은 200명이 넘었다. 민간인과 사제, 미군 포로들의 귀중한 생명이 이 기간 북녘땅에 파묻혔다. 매번 신부 · 수녀와 민간인들의 묘를 파는 데 퀸란 몬시뇰은 빠지지 않았다. 언 땅을 파헤쳐 시체를 묻고 나면, 빨리 돌아오라는 감시병의 호령과 영하 40도의 무서운 추위 속에서도 퀸란 몬시뇰은 언제나 망자를 위한 경문을 다 염하신 뒤에야 돌아왔다.16) 중병에 걸리고 굶주린 포로들을 이때라도 제대로 먹여주고 적절한 치료를 해주었더라면 아마 그들 중 대부분은 생명을 구했을 것이다. 크로스비 신부는 중병에 걸렸지만 퀸란 몬시뇰의 헌신적인 간호와 보살핌 덕분에 회복되었다.17) 이같이 사제들은 죽음의 행진 속 공포와 고통 중에서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병자를 돌보고 죽은 자를 묻어주었으며, 슬퍼하는 자를 위로해 주고, 절망의 문턱에 서 있는 많은 사람에게 살려는 의지와 위안을 주었다.

 

 

골롬반회 종군 사제의 기록과 정전협상의 포로 문제

 

골롬반회 종군기자(N.C.W.C. News Service 특파원) 패트릭 오코너(P. O’Connor) 신부는 1950년 10월 유엔군이 함락한 원산과 평양 등지에서 납북된 선교사들을 찾아다녔으나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선교사들이 만포 수용소에서 나와 죽음의 행진을 강행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18) 1951년 7월 정전 협상이 시작되자 오코너 신부는 1년이 넘는 동안 북한군이 포로에 관한 규정을 위반했기에,19) 협상 조건으로 국제 적십자사 같은 기관이 포로수용소를 조사하고 전체 포로 명단을 확보해야 하며 유엔군 사령관이 민간인 석방을 주장해야 한다고 하였다.20) 북한에 수감된 선교사들의 소속은 가톨릭 외에도 감리교 · 성공회 · 구세군 등이 있으며 각 선교회뿐만 아니라, 아일랜드 미국 등에서 소식을 기다리는 가족들도 계속 긴장과 불안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었다. 

 

오코너 신부는 1951년 7월 27일 북한 측 협상 대표단장 남일(南日)에게 납북된 선교사들의 이름과 국적을 전달하고, 정전회담에서 논의된 ‘전쟁포로 관련 협정’에 민간인이 포함되는지 정보를 요청하였다. 8월 2일 “이후 적절한 당국에 회부하겠다.”는 답신을 받고 기다리던 오코너 신부는 11월 9일 다시 선교사들의 정보를 요청했지만 답장은 없었다. 정전 협상에 참여한 공산당 특파원들도 납치된 미국 · 호주 · 벨기에 · 프랑스 · 독일 · 아일랜드 국적의 약 130명의 선교사 포로들에 관한 정보를 줄 수 없다고 답했고, 심지어 “그들이 자유의지로 북으로 갔다고 전해 달라.”고 하였다.21) 12월 판문점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전 세계가 포로들의 소식을 기다렸지만, 북한이 어떤 정보도 제공하지 않아 포로로 잡힌 종교인이 있다는 징후조차 알 수 없었다.22)

 

오코노 신부가 “선교사를 포함한 민간인 포로 문제 해결 없이 휴전 회담이 완료되고 휴전협정이 체결될 수 있느냐”고 질문하자, 유엔군 사령부 대변인 윌리엄 너콜스 준장은 “앞으로의 과정이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다.”고 답하였다.23)

 

정전 협상이 시작된 1년 반 후에야 북한은 수용소에 퀸란 몬시뇰 포함 3명의 사제와 4명의 수녀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고, 정전협정 체결을 앞두고서야 죽음의 행진에서 살아남은 이들을 석방하였다.24)

 

 

수용소 생활 - 고난 속의 연대와 동료애

 

정전 회담이 오래 지연되는 동안, 선교사들은 여러 수용소를 거치며 이동하였고, 생존에 필요한 것을 직접 해결하기 위해 더 많은 일을 해야 했다. 매일 물을 길어오고, 식량과 나무를 운반해 오고 옥수수와 콩을 가는 일도 해야 했다. 크로스비(P. Crosbie, 趙善喜) 신부는 하창리에서 처음 부엌 불 때는 일을 하게 되었고, 퀸란 몬시뇰은 수용소 반장을 맡아 일거리가 더 늘어났다.25) 안농리(安農里) 수용소에 머물던 1951년 3월 29일부터 10월 8일까지는 형편이 조금 나아져 처음으로 감자가 배급되었다. 퀸란 몬시뇰은 배급 식량을 모두 맡았다가 똑같이 분배하였다. 이들은 수용소 주변의 산딸기 · 산포도 · 머루 · 다래 등 많은 야생 과일을 채집하여 먹으며 건강을 지켰다.26)

 

공산군은 선교사들이 포로들에게 영적 도움을 주는 것을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전쟁 포로의 대우에 대한 제네바협정을 위반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이 선교사들을 북한으로 데려갔을 때는 생각지 못했지만, 선교사들은 포로 생활을 영적 승리로 바꾸었고, 동료 포로들의 영적 패배를 막도록 도왔다. 사제들은 기아와 질병, 치료 부족으로 사망하고 공산주의자들이 방해하였음에도 비밀리에 사목하였다. 공산군은 포로들이 선교사들의 용기와 자선에 감명받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공산주의자들이 허락했다면 선교사들은 포로들을 위해 훨씬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선교사들과 죽음의 행진을 함께 겪은 미군 오키프 하사는 석방된 후 “공산주의자들이 우리에게 어떤 종교적 행위도 허용하지 않았지만, 퀸란 몬시뇰은 묵주 기도를 몰래 하곤 했다. 크로스비 신부와 부스 신부 등 선교사들은 모두 훌륭했고 퀸란 몬시뇰은 지상의 성인”이라고 회고하였다. 다른 생존자들도 “수녀님들, 특히 으제니 수녀님은 항상 바느질을 하였고 이질에 걸렸을 때에도 남자 포로들을 위해 옷을 빨아주었다.”고 감사와 찬사를 쏟아냈다.27)

 

안농리에서 선교사들은 땔감을 마련하고, 초막집을 흙으로 바르는 등 추운 겨울을 보낼 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월동 준비가 막 끝나자 갑자기 다시 출발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10월 11일 만포에서 약 10km쯤 떨어진 곳으로 이동해서 감시병들은 수용시설을 못 찾아 허둥대면서, “당신들을 위해 준비해 놓은 집을 중공군이 차지하였다.”라고 변명하였지만, 언제나 준비도 없이 상습적으로 포로들을 끌고 다닌 공산군의 말을 아무도 믿지 않았다.28)

 

결국 이들은 북한 죄수들이 수용된 참혹한 움막으로 인도되어 죄수들과 같은 음식을 먹으며 그들이 죽어 나가는 것을 목격해야 하였다. 러시아인 고문관이 민간인 포로들이 지내는 누추한 움막을 보고 놀랄 정도였다. 하지만 사제와 수녀들은 계속 동료애를 발휘하였다. 퀸란 몬시뇰은 썩고 축축한 움막집 수리의 책임을 맡았고, 마리 마들렌(M. Madeleine) 수녀는 수용소에서 포로 어린이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면서 교사로서의 타고난 재능을 과시하였다. 퀸란과 크로스비 신부는 아침 식전 땔나무 다발을 끌어오는 힘든 노동을 하면서도 일요일 아침이면 산허리에 앉아 함께 묵주 기도를 바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29) 이렇게 죽음의 행진과 포로수용소의 고난 상황을 공유한 사제·수녀들과 민간인들은 서로를 돌보면서 함께 ‘고난 속 연대’와 ‘희망’을 나누는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었다.30)

 

한편 포로들을 면담하러 온 러시아인들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한국전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내려고 하였다. 선교사들은 라디오 방송을 청취한 북한 사람을 통해 정전 회담 소식을 듣고 희망을 얻었지만, 이후 진전된 협상 소식이 없자 낙담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이들은 성탄절을 맞아 즐겁게 노래하고 자신들의 소식을 기다리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깊이 일치하여 기도하며 수용소에서의 두 번째 성탄절을 평화롭게 보냈다.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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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윤선자, 「한국전쟁과 교회의 피해」, 『한국 천주교회사의 성찰과 전망 - 해방공간과 한국전쟁을 중심으로』, 한국사목연구소, 2001, 164~167쪽.

 

2) “한국에서 새로운 순교자들의 영광스러운 죽음을 증명하기 위해 누군가가 살아남아야만 한다.”며 수기를 쓴 셀레스탱 코요스(Célestin Coyos, 具仁德) 신부의 『나의 북한 포로기―죽음의 행진에서 아버지의 집으로』, 분도출판사, 1983 ; 마리 마들렌 수녀 지음, 서울 가르멜 여자 수도원 엮음, 『귀양의 애가 : 가르멜 수녀들의 북한 피랍기, 1950-1953』, 기쁜 소식, 1974(이하 『귀양의 애가』) ; 필립 크로스비(Philip Crosbie, 趙善喜) 지음, 허종열 옮김, 『기나긴 겨울 - 한 선교 사제의 한국전쟁 포로 수기』, 가톨릭출판사, 2016(이하 『기나긴 겨울』) 등.

 

3) 차기진, 「6 · 25사변과 천주교회의 순교자들」, 『사목』 189호(1994. 10),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34~35쪽.

 

4)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북한의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으제니 수녀, 코요스 신부, 마리 마들렌 수녀, 부스 신부, 크로스비 신부의 증언을 엮은 『동토에서 하늘까지 : 6 · 25 전쟁 순교자 시복 시성을 위한 증언』(나눔 커뮤니케이션, 2019)을 발간하였고,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는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한국천주교주교회의, 2022)를 편찬하였다.

 

5) 『골롬반 문서』 20, “Report by a War Correspondent”, 20-1~8 ; 『골롬반 문서』 21, “Korea (A-5) Hostilities & Satistics”, 21-1~39 ; 『골롬반 문서』 23, “Korean Reports, P. O’Connor(1950+)”, 23-1~183 ; 『골롬반 문서』 26, “Captive in Korea by Philip Deane”, 26-109-121 ; Meath, Aticles on Korea in the Irish The Far East, Vol. 1, 1919~1954, St. Colombans Navan Co.

 

6) 『골롬반 문서』 23, “The Catholic Church in Korea 1950~1953”, 23-7.

7) 『골롬반 문서』 23, “Korean Reports, P. O’Connor(1950+)”, 23-44.

8) 『골롬반 문서』 20, “Report by a War correspondent”, 20-5.

9) “KOREA”, The Far East, 1951. 1, p. 229.

10) 『기나긴 겨울』, 41~42쪽.

11) 『골롬반 문서』 26, “CAPTIVE IN KOREA By Philip Deane”, 26-115.

12) 『골롬반 문서』 26, “CAPTIVE IN KOREA By Philip Deane”, 26-116.

13) 『기나긴 겨울』, 217~255쪽.

14) 『귀양의 애가』, 94쪽.

15) Thomas Quinlan, ‘The Long Captivity’, The Far East, 1953. 8. p. 298.

16) 『귀양의 애가』, 114~115쪽.

17) 『기나긴 겨울』, 258~271쪽.

18) 『골롬반 문서』 20, “Report by a War correspondent”, 20-3.

19) 죽음의 행진으로 선교사들이 순교하게 된 배경에는 북한군의 ‘전쟁 포로 대우에 관한 제네바협정(1949년)’ 위반이 있다.

20) 『골롬반 문서』 23, “Korean Reports, P. O’Connor(1950+)”, 23-19.

21) 『골롬반 문서』 23, “Korean Reports, P. O’Connor(1950+)”, 23-31~32.

22) 『골롬반 문서』 23, “Korean Reports, P. O’Connor(1950+)”, 23-82.

23) 『골롬반 문서』 23, “Korean Reports, P. O’Connor(1950+)”, 23-47.

24) 『골롬반 문서』 20, “Report by a War correspondent”, 20-4.

25) 『기나긴 겨울』, 277~290쪽.

26) 『귀양의 애가』, 123~124쪽.

27) 『골롬반 문서』 23, “Korean Reports, P. O’Connor(1950+)”, 23-107.

28) 『귀양의 애가』, 128~130쪽.

29) 『기나긴 겨울』, 298~311쪽.

30) 윤인선, 「한국전쟁 외국인 선교사 수기 연구」, 『문학과 종교』 23-1, 2018, 134쪽.

31) 『귀양의 애가』, 131~135쪽.

 

[교회와 역사, 2023년 7월호, 김정현 미카엘라(한국교회사연구소 특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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