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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전협정 70주년 - 외국인 선교사들의 수난과 선교: 죽음의 행진에서 선교의 행진으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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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9-05 ㅣ No.1591

[정전협정 70주년 - 외국인 선교사들의 수난과 선교] 죽음의 행진에서 선교의 행진으로 (2)

 

 

수용소 생활 - 자유를 향한 긴 기다림

 

1952년 8월 12일 민간인 포로들은 중공군이 주둔하는 만포 부근의 작은 마을로 이동하였다. 그곳에서 중공군이 민간인 포로 40명에게 생필품을 공급해 주고, 북한군은 감독만 하였다.1) 퀸란(T. Quinlan, 具仁蘭) 몬시뇰은 중공군 마차가 싣고 온 쌀·밀가루·야채 등을 받아왔는데, 손수건과 양말 등 배급물자에는 중국 공산당의 붉은 별표가 찍혀 있었다. 포로들은 수용소에서 100m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제한되어 시장에 갈 수 없었고, 수녀들은 구해 온 암탉 몇 마리를 길러 달걀을 얻기도 하였다. 고통과 시련의 수용소 생활 2년을 겪으면서 민간인 포로들의 도덕 수준은 인간적 미약함과 비참함을 드러내었다. 하지만 퀸란 몬시뇰은 도덕적 위풍으로 종교와 나이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았다. 힘겨운 노동일이 생기면 앞장서서 맡고, 다른 종교를 비난하거나 반대하여 시간을 허비하는 일도 없이 침묵 속에 희생적으로 봉사하였다.2) 1952년 8월 15일 북한군 부대장은 전원을 집합시킨 뒤 일장 연설을 하면서 모든 종교 행사를 할 수 있는 자유를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당시 구세군 목사 로드 씨는 가르멜의 마리 베르나데트(M. Bernadette) 수녀가 가지고 온 『준주성범(遵主聖範)』을 빌려 열심히 읽고 감리교 선교사에게도 소개하여 수용소의 유일한 영적 서적이 되었다. 어느 날은 북한의 젊은 청년 둘이 코요스 신부에게 와서 “우리는 천주교 신자입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죽을 때까지 신덕을 지키겠습니다.”라는 다짐을 하기도 하였다.3)

 

포로들은 혹한이 닥치기 전에 땔나무를 구해 와야 했는데, 거의 퀸란 몬시뇰 혼자 나무를 베기 위해 매일 몇 시간 동안 무릎까지 빠지는 눈 속의 가파른 야산에 나가 있었다. 신부들은 비행기에서 내버린 연료 탱크 등을 구해 와서 겨울용 난방 기구를 만들었다.4) 수용소에서 세 번의 겨울 중 가장 혹독하게 춥고 길었던 겨울이 지나고 1953년 봄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석방 - 수용소를 떠나 평양으로 가다

 

1953년 3월 초 선교사들은 중공군과 북한군 간수·관리들이 모두 검은 완장을 두르고 있고, 수용소 소장실 앞에 걸린 스탈린 사진에 검은 헝겊이 둘러진 것을 발견하였다. 이들은 스탈린이 죽었음을 직감하고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지 궁금해하였다. 과연 평양에서 장교 2명이 오더니 퀸란 몬시뇰과 성공회 쿠퍼(C. Cooper, 具世實) 주교, 구세군 로드(H.A. Lord) 부장 등 영국인들은 한 시간 이내로 출발 준비를 하라고 하였다. 예상하지 못한 일에 모두들 매우 놀랐다. 자유를 얻게 되면 모두 한꺼번에 얻을 줄 알았지, 국적으로 구분할 줄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퀸란 몬시뇰이 마지막 강복을 주고 떠날 때, 모두들 어버이를 잃은 듯이 슬퍼하며 이구동성으로 ‘우리 감옥의 태양을 잃은 것 같다.’며 어쩔 줄 몰라 잠을 못 이룬 사람이 다수였다.5)

 

3월 27일에는 북한군이 프랑스인 7명을 평양으로 데리고 갔다. 4월 17일 판문점에서 포로교환 협정서가 서명되었고, 4월 20일 미국인들이 트럭에 실려 갔다. 수용소에 남은 선교사들은 며칠 후 신문에 실린 새 옷을 차려입은 이들의 사진과, 이들이 소련을 거쳐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기사를 보고 낙담하였다. 이들은 모두 판문점에서 석방되어 자신의 선교지로 되돌아가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호주 출신의 골롬반회 크로스비(P. Crosbie, 趙善喜) 신부는 수용소장이 이름을 확인한다며 시간을 끌다가 5월 17일 이름이 맞다는 평양의 메시지를 받고 수용소를 떠났다. 신부는 평양으로 가는 도중 북한 장교들로부터 “선교사들이 왜 공산주의를 반대하느냐?”는 질문에 “공산주의 체제가 인간이 당연히 누려야 할 정치적 자유와 종교적 자유를 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답하였다. 북한군은 “공산정권이 그런 자유를 주고 있다.”고 강변하였다.6)

 

프랑스 국적 포로들이 평양에 도착했을 때, 북한 적십자사 수석이 찾아와 그들에게 아무것도 못 해준 것에 용서를 청하였다. 그러면서도 베아트릭스(Béatrix de Marie Odouard) 원장 수녀의 죽음을 아무도 보지 못한 것에 당황해하며, 선교사와 일반인 포로 모두에게 심장병 증세로 죽었다는 서류에 서명하도록 강요하였다. 1950년 11월 3일부터 1951년 1월 6일까지 ‘죽음의 행진’ 동안 한꺼번에 사망자가 많이 생긴 기록은 그들에게 민감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평양에서 선교사들은 소련 선전 영화를 매일 관람하였고, 포로 생활 중 후대하여 준 북한 수령 김일성에게 감사장을 쓰고 서명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1953년 4월 15일 북한 측은 프랑스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포로들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시베리아 철도로 송환한다고 전하였다.7)

 

 

귀국 여정과 고국의 환대

 

1953년 4월 17일 프랑스 민간인들과 함께 평양을 떠난 가르멜회 마리 앙리에트(M. Henriette), 마리 마들렌(M. Madeleine), 마리 베르나데트(M. Bernadette) 수녀들은 신의주 세관에서 『준주성범』을 빼앗겼다. 이들은 압록강 다리 건너 국경에서 하창리의 두 무덤8)을 바라보고 기도하며, 서울에 있는 가르멜 수녀회의 딸들을 축복하였다. 중국 단둥(丹東) 세관을 거쳐 시베리아 철도에 오르자, 중국인들이 친절을 베풀고 간호사가 지친 수녀들을 진찰하였다. 수녀들은 이제야 죽음의 행진이 아닌 ‘삶의 행진’이 시작되었다고 느꼈다.

 

프랑스 국적 포로들은 4월 30일 모스크바 주재 프랑스 대사의 환영을 받았다. 소련 비행기로 베를린의 러시아 구역에 내린 후, 다시 프랑스 군용기로 갈아타고 파리 공항에 도착하였다. 그들을 영접하러 나온 많은 환영 인파 속에서 가르멜회 파리 관구장 신부가 기쁨의 함성을 올렸다. 수녀들은 몽마르트르 가르멜에서 33개월 만에 성체를 다시 모시는 기쁨에 감사드렸다.9) 수녀들의 귀환 소식과 사진이 신문에 실렸고, ‘죽음의 행진’에서 선종한 데레사 수녀의 고향인 벨기에 생 뱅상(Saint Vincent)시에서는 전쟁 용사들의 기념 비석에 데레사 수녀의 이름을 새기고 ‘팔마의 월계관’이라는 훈장을 수여하였다.10)

 

크로스비 신부는 5월 25일 평양을 떠나, 중국 단둥을 거쳐 시베리아를 횡단하였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후 호주 대사관 직원의 환대를 받았고, 다시 독일 본(Bonn) 주재 호주 대사의 영접을 받았다. 크로스비 신부는 배가 고프지 않고, 전깃불이 들어오며 뜨거운 물이 풍부한, 책과 신문이 자유로이 발행되고 그것을 자유로이 읽을 수 있는 나라로 돌아온 데 감격하였다.

 

나는 더 중요하고 귀중한 하느님을 믿을 자유,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얘기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됨에 감사하였다. 그리고 살아서 함께 이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의 안식과 ‘죽음의 행진’을 강요한 ‘호랑이’ 수용소장도 포함하여 모두 마지막 날에는 주님과 함께 있게 되기를 기도하였다.11)

 

퀸란 몬시뇰은 평양에서 출발해 모스크바에 도착한 후, 2년 10개월 만에 처음으로 미사를 봉헌하였다. 베를린과 런던에서 마중 나온 관리들과 친구들로부터 따듯한 환영을 받았다. 그가 고국인 아일랜드 더블린 공항에 나타나자, 그를 기다리던 친구들과 수많은 환영객의 환호성과 갈채가 터져 나왔다. 『아이리시 프레스(Irish Press)』는 퀸란 몬시뇰을 환영하는 인파와 그의 손을 잡으려는 형제자매들, 친척들과 귀국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감격적 장면을 보도하였다.12 아일랜드에 머물고 있던 퀸란 몬시뇰은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주한 교황사절 서리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를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였다.13)

 

 

정전협정 체결 이후 다시 한국으로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자, 선교사들은 그것이 영구적인 평화로 이어지기를 바라면서 한국의 평화 건립을 위해 일하고자 하였다.14 죽음의 행진에서 살아남은 선교사들은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가르멜회 마리 앙리에트와 마리 마들렌 수녀는 1953년 12월 4일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배를 타고 요코하마(横浜)에 하선한 후, 1954년 1월 27일 비행기로 부산에 도착하였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와 성 바오로 수녀회, 메리놀병원의 수녀들이 사랑으로 반겨주었다. 1월 29일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 도착해 감격한 수녀들에게 한국의 신부들, 유엔군 종군 사제들,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들, 그리고 많은 신자가 환영의 박수를 보냈다.

 

 

 

환영인들이 한국 순교 복자 찬가를 우렁차게 부르자 수녀님들은 이 치명 노래를 1839~1896년의 박해, ‘죽음의 행진’ 때 순교하신 분들에게 바쳤다. 이들은 명동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혜화동 봉쇄 수녀회로 가서 기쁨의 포옹을 나누고 ‘마니피캇’을 노래하였다.15)

 

프랑스에서 함께 돌아오지 못한 베르나데트 수녀는 북한의 형편없던 수용소에서도 산속에서 온갖 종류의 먹을 것을 모으고, 음식을 좀 더 낫게 만들기 위해 헌신적으로 애를 썼다. 미군 포로들까지 잘 돌보아 주었기에 생존 미군 포로가 자신과 동료들은 베르나데트 수녀 덕분에 살았다는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16)

 

퀸란 몬시뇰은 번(P. Byrne, 方溢恩) 주교의 뒤를 이어 새로운 교황사절이 되어 1954년 4월 서울에 부임하였다. 수백 명의 가톨릭 신자·주교와 사제들·관리들이 그를 영접하였다. 7월 7일 춘천에서 환영 행사가 대대적으로 열렸는데, 이 행사에는 악대를 앞세운 큰 행렬이 온 시가를 행진했으며 봉헌과 의식들이 진행되었다.17) 북한 수용소에서 석방되어 다시 남한으로 돌아온 선교사들도 자신의 종교적 소명에 따라 사회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남한 사람들을 도와 교회를 재건하였다.

 

 

남한 교회 재건을 위한 골롬반회 사제들의 선교 행진

 

한국전쟁 초기 가톨릭교회는 성직자들이 구금·납치·피살되어 전례를 드리지 못하고 교회가 운영하던 교육·의료 사업들도 중단되었으며, 신자 20만 명 중 절반 이상이 난민으로 떠도는 등, 신앙 자체를 제외한 모든 것이 뿌리 뽑혔다.18 가톨릭 선교회는 전쟁 기간에도 계속 선교와 재건 활동을 펼쳤다.

 

사제들은 전쟁 중임에도 공산군이 물러간 지역의 파괴된 본당으로 돌아와 임시 교회를 세우고 일하기 시작하였고, 이는 지역 사회 전체의 사기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한국 군대는 사제들이 다시 집을 짓기 시작하자, 한국 사람들을 기꺼이 돕고 안정감을 심어주는 선교사보다 일을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높이 평가하였다.19)

 

골롬반회 선교사들은 각지의 난민들에게 음식·숙소·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전쟁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군인과 시민들에게 종교 의식과 인도적 지원을 제공하였다. 특히 파괴된 명동 성당 재건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고, 여러 훼손된 교회 건물을 복원하는 데 참여하는 등 피해 복구와 회복에 기여하였다. 미국 가톨릭 구제회(NCWC) 특파원인 골롬반회 패트릭 오코너(P. O’Connor) 신부에 의하면 1952년 남한에 한국인 사제 159명과 외국인 사제 41명(그중 22명이 골롬반회 소속)이 있었고, 골롬반회는 1953년에 7명을 더 파견하기도 하였다.

 

12명의 골롬반회 선교사가 활동한 광주지목구에서는, 지목구장 하롤드 헨리(W.H. Henry, 玄海) 신부가 1950년 10월 본당으로 돌아가 파괴된 성당을 재건하였으며, 가톨릭 구제회가 보낸 의약품·의류 등 구호 물품으로 70만 명에 달하는 피난민들을 구제하였다. 망간(K. Mangan, 萬) 신부가 새로 문을 연 송정리(현 원동[元洞]) 본당은 1년 만에 성인 입교자 수가 100명이 넘는 등, 1952년 광주지목구에만 총 1,037명이 입교하였다. 목포(현 산정동) 본당의 토마스 모란(T. Moran, 安) 신부는 공립학교가 수용하지 못한 150명의 피난민 어린이들을 위해 학교를 열었고, 포격을 피해 흑산도로 이주한 신자들을 찾아가 미사를 집전하고 세례를 주었다. 흑산도에서 예비 신자 50명이 나왔으며 신자들은 공소를 짓기도 하였다. 골롬반회 선교사 8명과 한국인 신부 6명이 활동한 춘천지목구에서는 일부 지역이 여전히 북한 수중에 있고 공방전이 여러 번 벌어진 상황에서도 157명이 입교하였다.

 

오코너 신부는 이 같은 선교 활동의 성취는, 골롬반회 선교를 후원하는 고향의 신자들도 자부심을 가질 만한 것이라고 하였다.20) 특히 3년간의 전쟁 기간 피해가 컸던 춘천 지목구는, 지목구장 대리 헤이워드(H. Hayward, 吳) 신부 등 선교사들과 한국인 사제 20명이 불굴의 선교 의지로 춘천의 기적이라 불리는 재건을 이루어냈다. 이들은 폭격으로 완전히 파괴되거나 부서진 성당 열두 곳을 다시 지었고, 북한 공산군 수중에 있거나 신자가 없어진 곳을 대신하여 본당 세 곳을 설립하였다. 38선 남쪽 강릉(현 임당동)에서 넬리간(T. Neligan, 干) 신부가 성당 · 학교 · 고아원 문을 다시 열었고, 삼척(현 성내동) 본당에서 희생된 매긴(J. Maginn, 陳) 신부 후임으로 온 패트릭 버크(P. Burke, 表) 신부는 성당과 사제관 건물을 수리하고 흩어진 교구민을 찾아 보살폈다. 속초(현 동명동) 본당의 맥고완(P. McGowan, 元) 신부는 본당이 없던 마을에 새 성당 건축을 위해 터를 닦았고, 횡성 본당의 맥마흔(A. McMahon, 安) 신부와 원주(현 원동[園洞]) 본당의 패트릭 디어리(P. Deery, 李) 신부도 한국인 신부들과 함께 재건과 선교에 매진하였다.21 새 교황사절이 되어 서울에 부임한 퀸란 몬시뇰은 1953년 20만 명이 안 되는 신자에서 거의 100만 명에 이르는 가톨릭교회의 빠른 성장을 목격했다. 이런 성장의 배경으로 골롬반 선교사들이 행한 역할을 과소평가할 수 없다. 티모시 코널리(T. Connally) 신부는 전쟁기 신자 수 증대의 기적을 이룬 골롬반회 선교사들이 수도회 지원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며 다음과 같이 썼다.

 

“골롬반회가 1933년 처음 한국으로 왔을 때 맡은 신자 수가 2,500명이었는데, 두 번의 전쟁을 치르면서도 1만 명으로 늘었다. 2차 세계대전 때 선교사들이 체포 · 투옥 · 추방되었고 한국전쟁 때 여러 선교사들이 희생되었으며, 건강과 모든 물질적 자산을 잃었다. 매번 이전보다 더 부족한 형편에서 새로 시작해야만 했던 사제들은 수도회의 지원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며 그러한 지원을 통해 신자 수를 배로 늘리는 기적을 이룰 수 있었다.”22)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었지만 완전한 평화-종전은 아니었다. 전후까지 이어진 선교사들의 난민 구제와 교회 재건을 위한 선교의 행진은 한반도의 ‘평화’를 기원하는 염원이 담겨 있다. 평화를 기원하는 버나드 스미스(B. Smyth) 신부는 “본당 사제들의 난민 구호와 병자 방문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평화를 이루려는 노력에 비해 너무나 사소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나는 많은 사람으로 붐비고 자부심 강한 예루살렘이 근처 마구간에서 태어난 한 ‘아기’를 전혀 주목하지 못했다는 것을 또한 압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만이 우리에게 평화를 주실 수 있습니다.”23)라고 썼다. 이같이 선교사들은 ‘제국의 평화’와는 구별되는 그리스도의 평화를 추구하는 선교 사명을 실천하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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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필립 크로스비(Philip Crosbie, 趙善喜) 지음, 허종열 옮김, 『기나긴 겨울 - 한 선교 사제의 한국전쟁 포로 수기』, 가톨릭출판사, 2016(이하 『기나긴 겨울』), 331~335쪽.

 

2) 마리 마들렌 수녀 지음, 서울 가르멜 여자 수도원 엮음, 『귀양의 애가 : 가르멜 수녀들의 북한 피랍기, 1950-1953』, 기쁜 소식, 1974(이하 『귀양의 애가』), 151쪽.

 

3) 『귀양의 애가』, 145~150쪽.

4) 『기나긴 겨울』, 334~335쪽.

5) 『귀양의 애가』, 155~156쪽.

6) 『기나긴 겨울』, 337~342쪽.

7) 『귀양의 애가』, 162~168쪽.

 

8) ‘죽음의 행진’ 중에 선종한 서울 가르멜 수녀회 설립자이자 초대 원장 마리 메히틸드 수녀와 제2대 원장 아기 예수의 데레사 수녀의 무덤. 이들은 한국 교회에서 ‘하느님의 종’으로서 시복 대상자로 선정되었다. 『귀양의 애가』, 16쪽.

 

9) 『귀양의 애가』, 170~184쪽.

10) 『귀양의 애가』, 302~303쪽.

11) 『기나긴 겨울』, 342~344쪽.

12) 「퀸란 몬시뇰에 관한 신문 기사와 편지」, 『기나긴 겨울』, 350~351쪽.

13) 『골롬반 문서』 12, “퀸란 몬시뇰이 골롬반회 총장 Timothy Connolly에게 보낸 편지(1953. 6. 26)”, 12-167.

14) 『골롬반 문서』 12, “Gerry Marinan이 Harold Henry에게 보낸 편지(1953. 7. 27)”, 12-173.

15) 『귀양의 애가』, 185~203쪽.

16) 『귀양의 애가』, 354~356쪽.

17) 「퀸란 몬시뇰에 관한 신문 기사와 편지」, 『기나긴 겨울』, 350~352쪽.

18) 『골롬반 문서』 23-93(1951. 7. 2).

19) 『골롬반 문서』 18, “Tape Recording by Fr. Brian Geraghty(1958. 4. 29)”, 18-16~17.

 

20)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지음, 「1953년 6월호, 한국―3년간의 전쟁 후의 선교」, 『극동 : 천주교 선교사들이 기록한 조선인의 신앙과 생활』(이하 『극동』), 살림출판사, 2017, 541~560쪽.

 

21) 티모시 코널리, 「1953년 10월호, 춘천의 기적」, 『극동』, 602~614쪽.

22) 티모시 코널리, 「1953년 9월호, 한국 남서부에서 보내는 소식」, 『극동』, 600쪽.

23) 버나드 스미스, 「1953년 12월, 평화의 서곡」, 『극동』, 616쪽.

 

[교회와 역사, 2023년 8월호, 김정현 미카엘라(한국교회사연구소 특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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