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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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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순교자들의 영성: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 - 제6대 평양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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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7-13 ㅣ No.1562

[순교자들의 영성]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 - 제6대 평양교구장

 

 

홍용호 주교. 사진 제공 메리놀외방전교회 본부, 평양교구 80주년 준비위원회.

 

 

해마다 6월이 되면 이 민족의 깊은 시련과 함께 생각나는 ‘침묵의 교회’와 가슴 저미는 북녘 땅의 순교자들을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일어나 가자!(마태 26,46)

 

최초 한국인 주교인 노기남 대주교 다음으로 두 번째 한국인 주교로 서품되신 분이 호가 석초인 홍용호입니다. 제6대 평양교구장 주교로, 세례명은 프란치스코 보르지아입니다. 우리는 지금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가,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사제,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신상원 보니파시오 사우어 아빠스와 동료 37위와 함께 시복의 영광을 입어 후손인 우리가 그들을 본받아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홍용호 주교님은 1906년 8월 24일 평남 평원군 한천면 감육리 살구재에서 태어나 일찍 부모님을 여의고 매부인 최남현 다니엘의 집(누나는 홍 마리아)에서 보통학교를 마쳤습니다. 1920년 9월 서울 용산 예수 성심신학교에 입학하고, 방학 때에는 평남의 마산성당에 기거하며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그는 노기남 대주교, 윤형중 신부, 양기섭 신부들의 아랫반으로 1932년 5월 서울 명동성당에서 부제품을 받고 이듬해 5월 25일 평양 관후리성당에서 라리보 주교의 주례로 사제서품을 받고, 관후리본당 보좌로 부임했습니다.

 

1934년에는 가톨릭 연구사 사장을 겸하며 《가톨릭 조선》(가톨릭 연구 강좌, ‘가톨릭 연구’로 개칭된 것을 ‘가톨릭 조선’으로 제호 변경)을 창간하고 조선 가톨릭 기관지로 발전시키며, 평양대목구 출판사를 전담하여 주필 겸 사장으로서 잡지 기사의 대부분을 직접 집필하였습니다.

 

그는 식민통치하의 한국 천주교가 해야 할 중요한 사명의 하나가 문맹퇴치와 민족자각이라 생각하고 문맹퇴치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일제의 압박으로 《가톨릭 조선》은 폐간되고 홍 신부는1939년 순천본당으로 겸임됩니다.

 

1941년 일제는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러고는 1939년 이래 평양지목구를 대목구로 승격시키며 열악한 조건에서 가장 헌신적이고 활발하게 사목활동을 전개하던 미국의 메리놀외방전교회 신부들을 전승국민이란 이유로 미국 출신 신부와 수녀들은 즉시 감금하고 나머지는 추방했습니다. 이때 홍용호 신부도 이들과 가깝게 지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3개월 동안 감금생활을 했으며 이 기간에 평양대목구의 사목활동이 마비되고 정지된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때인 1942년 서울 대목구장으로 평양 대목구장을 겸하게 된 노기남 신부(아직 주교서품 받기 전)는 그해 2월 평양을 방문하고 홍용호 신부를 평양대목구장 서리 직무 대리로 임명했습니다. 이에 홍 신부는 이러한 비상사태 연금 중이던 오세아 주교로부터 대목구 사무를 인수받고 노기남 주교의 협조를 받아 본당사목의 정상화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교황청에서는 1943년 3월 9일 홍용호 신부를 평양대목구장으로 임명하고 1944년 4월 17일 주교로 임명했습니다. 이때 1944년 2월 일제는 평양대목구청과 관후리성당과 부지 건물을 강제 징발했습니다.

 

홍 신부는 주교 임명 소식을 받고 그 직을 사양하는 겸손을 보였는데, 일제가 일본인 신부에게 주교직을 맡게 하여 주교직이 일본인에게 넘어갈 당시의 어려운 상황을 설명하며 노기남 주교가 설득하자 심사숙고 끝에 주교직을 수락함으로써 한국인 두 번째 주교로 성성되었습니다. 그때 그의 각오는 비장했습니다.

 

“나의 표어는 ‘일어나 갑시다.’(마태 26,46)라는 성경 말씀입니다.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고 어려운 시기에 중책을 맡은 이 몸은 어떠한 난관을 당할지라도 하느님의 교회를 위하여 온전히 희생함으로써 극복해 나갈 것을 결심합니다.”

 

홍용호 주교는 1944년 6월 29일 사우어 주교의 주례로, 교구청과 관후리성당을 강제 징발당한 상태에서 일제가 징발해 넘겨준 평양시 계리의 산정현교회 건물에서 주교서품식을 가졌습니다.

 

 

아! 그날의 한

 

1945년 8월 15일, 전쟁은 끝나고 조국은 광복되었습니다. 그러나 국토는 38선을 경계로 남북이 양단되었습니다. 소련군이 진주한 북한에서는 일제보다 더한 박해를 받게 됩니다. 홍 주교는 해방을 맞아 가장 먼저 일제가 징발해 간 관후리성당을 찾는 일에 나서 끈질긴 교섭으로 1946년 3월에 성당은 회복할 수 있었으나 교구장 비서 강창희 야고보가 피살되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공산화된 북한은 종교에 대한 탄압을 갈수록 더해갔고 홍용호 주교는 이에 당당히 저항했습니다. 조작한 사이비 단체인 ‘기독교연맹’ 가입요구를 거부했습니다. 1947년부터는 교회학교 폐쇄가 시작되어 그 이듬해에는 천주교 재단에서 경영하는 교회학교는 하나도 남지 않게 됩니다. 이에 대항하여 평양대목구는 관후리성당 터에 주교좌대성당을 건립해 신앙의 승리를 드러내려 했습니다. 그래서 1946년 8월 5일 기공식을 갖고 공사 중에 주교좌본당을 옮겨놓았습니다.

 

관후리성당. 그림 이승구.

 

 

그런데 1948년 12월 관후리성당 건물을 평양 인민위원회에 양도하라는 조치가 전달되었습니다. 홍 주교가 이를 거부하고 공사를 지속하자 공산정권은 1949년부터 노골적인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1949년 1월에 덕원 베네딕도 수도회의 엠머링 신부와 배 그레고리오 수사를 강제연행하고 5월에는 홍 주교가 구금되고 6월부터 계속해서 평양시내 성직자들이 체포 연행되어 15명이 평신도와 어린 복사들과 함께 수난을 당했습니다. 덕원 수도원과 신학교가 점거되고 성직자와 신학생들을 체포 추방시키는 사태에 이르자 홍용호 주교는 공산당국에 항의문을 발송했습니다.

 

그 요지는 이러했습니다. 첫째, 한국에서 40년간 농업, 교육, 과학, 문화 등에 허다한 공헌을 한 선교사들을 불법 체포한 사실을 해명하라. 둘째, 교회를 폐쇄한 것은 확실히 종교 박해로서 북한 정권 헌법 위반이다.(당시 북한 헌법은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었습니다.) 셋째, 교회와 개인과는 구분되어 있는 것으로 한 개인의 범죄(만약 있었다면)로 교회를 폐쇄한 것은 상식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 넷째, 체포된 전원을 무조건 석방하고 교회를 즉시 개방하라.

 

이를 받아 본 북한 내무상 박일우는 홍용호 주교에게 면담을 요청하였습니다. 5월 14일 면담 통지를 기다렸으나 아무런 연락이 없어 오후에 홍 주교는 서포에 있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의 첫 종신자 서원 면담으로 서포로 갔습니다. 그런데 오후 4시경에 내무성으로부터 오후 6시에 내무상실에서 면담을 하자는 전화가 왔습니다. 대성당에서 전화로 통지를 받은 부주교 김루수 신부가 홍 주교를 모시러 주교관에 갔을 때 홍 주교는 이미 서포로 떠난 뒤였습니다.

 

주교관에서는 이 급한 통보를 주교관 소사로 있던 김운삼(당시 17세) 복사에게 주어 홍 주교에게 전하게 했습니다. 김운삼 복사가 떠난 30분 뒤에 다시 송은철 복사(당시 18세)도 뒤따라 보냈는데 송은철 복사는 이때 개 한 마리를 끌고 자전거를 타고 갔습니다. 이 두 소년들은 확실히 서포에 도착하여 홍 주교에게 그 편지를 전했습니다(장선홍 신부, 《붉어진 땅의 십자가》중에서).

 

아! 그날 1949년 5월 14일, 그 이후 한국인 두 번째 주교로 제6대 평양교구장이던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심부름 간 두 복사 김운삼, 송은철과, 개(셰퍼트) 그리고 자전거도 행방불명이 되어버렸습니다. 홍 주교가 이렇게 납치된 지점은 서포와 평양 사이에 있는 감북이거리일 것입니다. 나머지는 증거를 없애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 후 홍 주교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시체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이후 교화소의 한 직원을 통해 홍용호 주교가 평양 인민교화소 특별 정치범 감옥에 수감된 것이 확인되었으나 1950년 1월 이후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1950년 10월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으로 평양이 수복되었습니다. 당시 강현홍 신부와 장선홍 라우렌시오 신부는 종군사제로 평양에 입성하여 주교와 신부 및 수녀 그리고 신자들의 모습을 찾아보았으나 그들의 모습은 볼 수 없었고, 국군이 평양을 탈환하기 직전 이들 전원을 비밀리에 북방으로 이송하였다는 풍문만 들릴 뿐이었다고 합니다.

 

 

새로운 박해와 순교

 

평소 홍 주교는 박식한 문장가로, 명강론으로 신자들의 심금을 울려주던 강직하면서도 덕망 높은 분이었습니다. 노기남 대주교는 “홍 주교는 의지가 굳고 성격이 직선적이어서 그 당시 일본 경찰 고등계에선 홍 주교를 감목 대리로 임명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고 회상했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홍 주교는 조금이라도 교회가 박해당하는 일이 있으면 주교정장을 하고 소련군 사령관을 찾아가 엄중 항의하였으므로 소련군 사령부에서도 홍 주교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였습니다.

 

해방 후 안 신부(평양교구 서리)가 힘써서 평양 주재 미군 연락 장교단을 통해 원조 물자를 평양교구에 보내던 일이 어제 같다고 하였습니다. 오기선 신부는 “신학교 시절의 홍 주교는 글쓰기를 좋아하고 시를 잘 쓰던 ‘책벌레’였다.”고 기억하며 또 유머를 잘 구사했고 휴식시간에도 밖에 나가 놀지 않고 독서에만 열중했다고 하면서 남달리 신심이 강한 분이었다고 하였습니다.

 

평양교구 신우회 회장으로 홍 주교와 신학생 시절부터 가까이 지낸 김택관 씨는, 홍 주교는 어린 시절부터 가난하게 지내며 신학생 시절 방학 동안 평남 강서군 성태면 원당리본당에 와서 기거하며 주일학교 아동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다고 회상합니다. 한마디로 덕망이 높고 그릇이 큰 분으로 강론은 청산유수로 교리만 국한하지 않고 사회문제를 다각도로 분석하여 가톨릭적 신앙으로 매듭짓는 그분의 강론에 감명 받지 않는 신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김일성도 처음 홍 주교를 이용해 보려다 실패했고, 조만식 선생은 나중에 홍 주교와 의논하는 일이 많았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홍용호 주교의 생사여부를 알 수는 없지만 이들의 죽음은 새로운 박해로 인한 순교로 이해되고 있으며 이로써 평양대목구를 비롯한 북한의 전 교회는 한국전쟁 이후 침묵의 교회로 남게 되었습니다.

 

[평신도, 2016년 여름(계간 52호), 김길수 사도 요한(전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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