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화)
(홍)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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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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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1] 쪽지 캡슐

2010-07-06 ㅣ No.253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야기 (1)

 

 

이번 호부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현대 가톨릭 교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공의회로서, 우리 신앙인들이 나아가야 할 바를 가장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공의회 정신을 되새기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1962~1965년에 개최된 제21차 보편공의회입니다. 왜 새삼스럽게 50여년 전에 있었던 공의회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오늘 우리가 공의회 정신을 되새겨야 할 필요가 있는지를 먼저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매우 불안정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과학 기술은 계속 발전하고 있건만 어찌된 일인지 뉴스를 통해서 비극적인 소식들을 끊임없이 듣게 됩니다. 그리고 지구 온난화로 인류의 생존 자체가 위협받고 있다는 끔찍한 경고를 거의 매일 접하게 됩니다. 인간 생명의 가치가 최우선시 되지 않으며, 대자연의 여러 경고 앞에서도 인간의 탐욕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인류 문명은 발전해 가는데 왜 인간성의 어두운 그늘이 더 많이 드러날까요? 그리고 왜 지구 환경은 계속 파괴되어만 가는 것일까요? 여기에 강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듯 시대적 혼란과 인류의 파국에 대한 불안감이 교차되는 가운데,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디를 향하여 가고 있는 것인가?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러한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산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러한 실존적인 질문을 던지는 우리들에게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주시는 답변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찾고 실행하라는 것(마태7,21 참조)’입니다. 바로 성모 마리아의 충실한 응답과 순종처럼 말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산다고 해도 그것이 하느님의 뜻을 찾는 식별과 식별된 바를 실천하는 투신에 기초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 진실한 고민과 작업에 투신하지 않을 때,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그 모든 것들은 마치 모래 위에 지어진 집처럼 어느 날 모두 무너져 떠내려가고 말 수도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모두가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시련이 닥치면 그 참 모습이 드러나게 됩니다. 내진 설계 없이 지어진 건물과 고속도로가 지진 앞에서 마치 엿가락처럼 휘어지고 찢겨진 종이처럼 힘없이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경제학의 개념에서는 이것을 거품에 비유합니다. 거품이 가라앉으면 참된 실체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전 세계의 많은 이들이 한국 교회가 이룩한 경이로운 성장에 경탄의 눈길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더욱 깨어 있는 자세로 우리의 교회 공동체가 지금 하느님 뜻에 맞게 잘 살아가고 있는지 스스로 질문하고 성찰해야 합니다.

 

역사가 우리에게 말해주듯, 양적 팽창은 질적 하락과 연결될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박해 받던 초대 교회가 313년의 밀라노 관용령, 그리고 392년의 황제 칙령을 통해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된 이후에 걸어갔던 길이 바로 이를 잘 말해 줍니다. 4세기 초엽 이후, 교회가 양적으로 팽창하고 수많은 개종과 입교가 이루어졌지만, 정작 찾아온 것은 하느님 나라의 온전한 실현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속화(俗化)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세의 수적이고 양적인 팽창이나 외부로부터의 인정과 기대감에 너무 기뻐하거나 안주해서만은 안 됩니다. 지금 쉬는 신자들이 얼마나 늘어나고 있는지, 청소년층과 젊은 층이 왜 교회에 나오지 않는지, 그리고 가난한 지역에서의 복음화 비율이 경제적으로 부유한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등을 점검해보면서 우리 교회가 안고 있는 내적 문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는 어떠한 전망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성찰해야 할 것입니다.

 

서구에서는 아름답고 고색창연한 성당들이 더 이상 그 유지관리비를 감당할 수 없어 팔리는 일이 가끔 생기곤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매각된 성당 건물은 서점, 극장, 레스토랑, 술집, 나이트클럽 등의 용도로 개조되어 사용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번성과 혜택은 순교자들의 피로써, 예언자적 증거를 하였던 분들의 희생으로써 이룩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방심하여 내적 쇄신과 질적 성장을 위한 노력을 소홀히 할 때, 비바람이라도 몰아치면 우리는 마치 거품처럼 혹은 모래 위에 지어진 집처럼 무너져 내릴 수도 있음을 생각하고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의 집을 모래 위에 짓는 어리석음을 범할 것이 아니라 반석 위에 세우는 슬기로움이 진정 필요한 시점입니다(마태7,24-27 참조).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초대 교회의 정신으로 되돌아가고자 전반적인 쇄신 작업을 이룩하였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대하여 보다 자세하게 알 필요가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을 새로이 되새기며 이루어지는 세상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철저한 교회의 쇄신 작업은 복음의 정신으로 거듭나고자 하는 우리 모두의 과제일 것입니다. [소공동체모임길잡이, 2010년 7/8월호, 박준양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및 생명대학원 교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역사적 배경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년), 러시아 혁명(1917년)과 공산주의의 출현, 이탈리아 파시즘과 독일 나치즘의 등장, 1930년대 전 세계를 휩쓴 경제 대공황,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1939~1945년) 등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비극적인 사건들로 점철되었던 암울한 20세기 전반기를 보낸 후, 가톨릭교회는 서서히 변화의 조짐과 기운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동안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라는 명제로 대변되는 성속이원론(聖俗二元論)에 입각하여, 세상에 대해 폐쇄적인 입장을 취하던 가톨릭교회에 개방의 새로운 분위기가 형성되기에 이릅니다. 그것은 아마도 인간의 비극을 깊이 체험하였던 시기를 거치면서 이루어진 복음적 재성찰의 결과일 것입니다. 교회는 결코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을 외면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은 결과였습니다. 사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아픔을 손수 어루만져 주셨습니까? 그리고 얼마나 큰 자비를 보여 주셨습니까?

 

1958년 10월 9일 교황 비오 12세(재위 1939~1958)가 서거하게 되자, 급변하는 이 시대에 새로이 가톨릭교회를 이끌어갈 후임 교황을 선출하는 일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었습니다. 당시 검사성성 장관이었던 오타비아니 추기경을 적극 지지하였던 이탈리아 추기경들과 변화와 개방을 요구하였던 프랑스 추기경들의 팽팽한 대립 속에 홍역을 겪으면서, 끝내는 당시 베네치아 교구장이었던 안젤로 론칼리(Angelo Roncalli) 추기경이 선출되어 요한 23세라는 교황명을 택하게 됩니다.

 

교황 요한 23세(재위 1958~1963)는 1881년 12월 25일 이탈리아 소토 일몬테(Sotto il Monte)의 가난한 가정에서 여러 형제자매들 가운데 출생하였습니다. 가톨릭 사제가 되어 신학자로 살다가, 1925년 사도좌 순시자로 임명되어 불가리아에 파견되었고 바로 이때 주교로 서품되었습니다. 이후 그리스와 터키 주재 교황 대사로 일하였고, 1944년에는 프랑스 주재 교황 대사로 임명되었습니다. 이 때 쌓아놓은 프랑스 주교들과의 친분은 훗날 교황 선출 과정에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게 됩니다. 1953년에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교구장으로 임명되면서 동시에 추기경 서임을 받았습니다. 그가 1958년 10월 28일에 극적으로 교황에 선출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이 의외의 결과에 놀라워하였습니다. 당시 그는 별로 유명한 인물도 아니었고, 77세의 고령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콘클라베(conclave, 교황선거) 과정 중에 있었던 이탈리아 추기경들과 프랑스 추기경들의 팽팽한 대립이 이런 과도기적 인물을 뽑는 데에 잠정적으로 동의하게끔 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요한 23세는 교황 즉위 후,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매우 의욕적인 행보를 보입니다. 그는 매사 엄격하고 보수적이며 귀족적이었던 전임 교황 비오 12세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세상의 주임신부(il parroco del mondo)’라는 이름으로 매우 소박하고 서민적이며 마치 시골 사제와도 같은 모습을 보이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자애로운 사목자 상(像)을 보여 주었습니다. 또 갈라진 그리스도인들의 일치에도 큰 관심을 기울이며 이를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요한 23세는 크게 세 가지 과제를 의욕적으로 추진하였습니다. 첫째는 1960년 1월 24~30일에 개최되었던 로마 교구의 시노드(Synodus)였습니다. 둘째는 교회법을 새로이 편찬하는 일이었습니다 . 그래서 이때 시작된 교회법 편찬 작업의 결과로 현재까지도 사용되는 1983년 교회법전이 탄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가장 중요한 과제가 바로 새로운 보편공의회(Concilium oecumenicum)를 소집하는 일이었습니다.

 

1959년 1월 25일에 교황 요한 23세는 새로운 공의회의 소집 공고를 내립니다. 이는 전적으로 그의 개인적 확신과 결단에 의한 것이었으며, 그 자신은 이를 하느님께서 내리신 영감(靈感)의 결과였다고 여러 차례 확언하였습니다. 많은 이가 이런 의외의 결정에 매우 놀랐습니다. 이후 본격적인 공의회 준비 과정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전 세계는 이를 큰 기대 속에 지켜보았습니다.

 

요한 23세는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시대의 표징을 읽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였습니다. 즉, 교회는 더 이상 세상의 아픔과 관심을 외면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세상에 대한 교회의 개방과 시대적응을 외쳤으며, 전통주의자들의 많은 우려와 반대 속에서도 결국 1962년 11월 11일, 역사적인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막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이 개막식에는 전 세계 약 2,500명 이상의 교부들이 참석하였습니다. [소공동체모임길잡이, 2010년 9월호, 박준양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및 생명대학원 교수)]

 

 

보편공의회란 무엇인가

 

1962-1965년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역사상 맨 마지막에 있었던 보편 공의회(Concilium Oecumenicum)입니다. 그렇다면 보편 공의회란 과연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말해, 초대 교회에서부터 교회의 심각하고 큰 문제가 있을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전 세계의 교부들이 모여 논의했던 회의를 가리켜 ‘보편 공의회’, 또는 ‘세계 공의회’라고 부릅니다. 특히, 이는 동방과 서방이 함께 모여 회의를 했다는 점에서 보편적이고 세계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당시 교회를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들이란 주로 교리상의 문제들이었습니다.

 

종교사회학에서는 보통 종교의 3대 요소로서 교리(敎理), 예식(禮式), 조직(組織)의 세 가지를 꼽습니다. 즉, 주요한 세계 종교들을 살펴보면 첫째로 그 종교가 추구하는 믿음의 내용, 둘째로 그 믿음이 구체적으로 표현되는 예식적 행위, 셋째로 그 종교를 이루어나가는 인간들의 조직체라는 세 가지 요소가 근간(根幹)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러한 세 가지 요소는 종교가 발전하는 세 단계를 통하여 더욱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는데, 종교가 발전하는 세 단계란 ‘원체험’, ‘증언’, 그리고 ‘역사화’의 세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 ‘원체험(源體驗)’의 단계는 우리 믿음의 근거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역사 안에서 발생하여, 최초의 추종자인 사도들에게 주어진 근원적(根源的) 체험의 단계를 의미합니다. 사실, 신약성경 전체가 이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 체험으로 말미암아 송두리째 변화되어 증언하기 시작합니다. 두려움에 떨며 다락방에 숨어 있던 제자들이 만방으로 나아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선포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두 번째의 ‘증언’(證言) 단계입니다. 내가 체험한 것이 너무도 소중하고 강렬하기에 이것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보통 이 시기에는 이렇듯이 증언되는 새로운 메시지가 기존의 가치체계와 갈등을 빚기에 박해를 받게 됩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복음 선포도 당시 이스라엘 사회를 지배하던 유다교의 기존 가치체계, 그리고 황제를 신격화(神格化)하려는 로마제국의 가치체계와 충돌하면서 박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시기에 수많은 순교자들이 탄생하게 되는데, ‘순교자(殉敎者)’를 뜻하는 영어 단어 ‘martyr’의 어원이 바로 희랍어의 ‘증언(μαρτριον)’이라는 사실에서, 순교의 본질과 핵심은 곧 ‘증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내가 선포하는 메시지가 너무도 귀중한 것이기에 그것을 내 생명을 바쳐서까지 증언하는 것이 바로 순교입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위기를 겪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위협은 외부의 박해뿐만이 아니라 내부의 거짓된 증언으로부터도 오게 됩니다. 즉, 무엇이 정통(正統, orthodoxy)이고 무엇이 이단(異端, heresy)인지의 식별 작업이 또한 시작되는 것입니다. 기원 후 2-3세기의 시기에 그리스도교 교부들은 바로 이러한 교회 내부와 외부의 위협들에 각기 대항하여 교회의 정통 신앙교리를 수호하고자 투쟁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가 진행되면서 이러한 새로운 메시지와 가치관이 점점 사람들부터 공감을 얻고 반향(反響)을 불러일으키게 되면, 어느 순간 외부로부터 사회적인 공인을 받게 됩니다. 서기 313년에 로마제국의 대황제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재위 306-337)가 그리스도교를 믿을 수 있는 자유를 선포한 것이 바로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4세기 이후의 시기는 그동안 피 흘려 증언하던 메시지를 후대에도 전하기 위한 조직화, 체계화 작업이 이루어지는 세 번째의 ‘역사화(歷史化)’ 단계입니다. 따라서 이 단계에서는 무엇보다도 정통과 이단의 싸움을 통해서 믿음의 내용인 교리(敎理)가 분명하게 정립되고 체계화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교회가 공적으로 선포한 믿음의 신조를 바로 ‘교의(Dogma)’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여 4세기부터 여러 차례의 보편 공의회들이 열리게 되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 메시지인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론에 관한 교의들이 점차 체계적으로 정립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역시 이 단계에 이르러 체계화된 예식을 우리 그리스도교에서는 ‘전례(典禮, Liturgia)’라고 부릅니다. 동일한 종교를 신봉하는 인간들의 조직체 역시 이 단계에서 체계적인 틀을 갖추게 되는데, 바로 그리스도교의 ‘교계제도(敎階制度, Hierarchia)’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렇듯이 종교의 3대 요소가 각기 조직화, 체계화되어 ‘역사화’ 단계에 진입하는 것은 바로 종교의 핵심인 ‘원체험’에 관한 ‘증언’을 역사 안에서 후대에도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보편 공의회는 주로 믿을 교리에 관한 역사화 작업을 했지만, 전례나 교계제도 등 교회 문제 전반을 폭넓게 다루며 신앙생활의 보편적 역사화 작업을 이루었습니다. 초세기의 보편 공의회들 중 특히 중요한 것은 325년 니케아 공의회(Concilium Nicaenum), 381년의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Concilium Constantinopolitanum I), 431년의 에페소 공의회(Concilium Ephesinum), 그리고 451년의 칼케돈 공의회(Concilium Chalcedonense) 등 네 차례의 첫 공의회들입니다. [소공동체모임길잡이, 2010년 10월호, 박준양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및 생명대학원 교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기본 윤곽

 

오늘의 그리스도교는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 현상의 강력한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한편으로는 타종교 전통들과의 대화를 요청받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대화에 임하기에 앞서서 혹은 대화를 진행해 나가는 중에 올바른 그리스도 신앙관과 구원관 정립의 필요성을 새삼 절감하게 됩니다.

 

사실, 오늘의 시대적 지평 속에서, 사도들에게 전수되고 위탁된 계시 진리, 즉 거룩한 ‘신앙의 유산(depositum fidei)’을 어떻게 올바르게 해석할 것인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커다란 과제입니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1962-1965년에 열렸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고 그 근본정신을 실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2001년의 교서 『새 천년기』57항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제 막 시작된 이 세기에 우리의 위치를 확인할 확실한 나침반을 우리는 공의회에서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전체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적인 시각을 견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의회 전체의 기본 준거로서의 그리스도 중심적 전망 속에서도 삼위일체론적인 차원이 등한시되지는 않았고, 그와 동시에 중요한 성령론적 전망들도 함께 제시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브 콩가르(Yves Congar, 1904-1995) 추기경이 지적하듯이, 공의회 문헌들에 나타나 있는 총 258회에 달하는 성령에 관한 모든 언급들을 일일이 분석하기란 쉽지도 않고 별의미 없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발터 카스퍼(Walter Kasper, 1933~) 추기경이 언급하는 것처럼, 아마도 중요한 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공의회의 가르침에 대한 성찰과 응답의 차원에서 성령론이 역동적으로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의 인식, 그리고 그러한 발전의 단초가 되었던 근거 문헌들의 발견일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양대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두 헌장(constitutio)들, 즉 『교회헌장』과 『사목헌장』을 매우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다른 여러 교령들과 선언들 속에 나타난 의미를 더욱 자세히 살펴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선교 교령』(Ad Gentes Divinitus) 4항에 나오는 다음의 텍스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체 윤곽을 파악하기 위하여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이는 교회와 세상 간의 관계를 숙고하면서 ‘안으로 향한 교회(Ecclesia ad intra)’와 ‘밖으로 향한 교회(Ecclesia ad extra)’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공의회의 전체적 전망을 성령론적 관점에서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는 어떤 의미에서, 성령론적 관점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체를 총괄적으로 요약하고 있는 상징적인 대목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부에게서 성령을 보내셨다. 성령께서는 구원 활동을 내적으로 수행하시며 교회가 스스로 확장되도록 부추기신다.[…]오순절에 성령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영원히 머무시려고 그들 위에 내려오셨으며, 그날 교회는 많은 사람 앞에 공공연히 나타나, 설교를 통하여 여러 민족들 사이에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성령께서는 모든 시대를 통하여 온 교회가 “친교와 봉사 안에서 일치하게 하시고 교계와 은사의 여러 가지 선물을 주시어”(『교회헌장』, 4항 참조), 교회 제도에 마치 그 영혼처럼 생명을 불어넣어 주시며 바로 그리스도를 재촉하신 그 선교정신을 부어 주신다.

 

이 대목에는 Aggiornamento(개방, 시대 적응, 현대화, 현재화)라는 기본 정신에서 출발하여 교회와 세상과의 관계에 관하여 고민하였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노력이 성령론적 차원에서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교회와 세상을 분리하여 바라보던, 그래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라는 명제로 대변되던 종래의 배타적인 성속이원론(聖俗二元論)의 시각을 복음의 빛에 입각하여 재해석하고자 한 것이 바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시도였고 공헌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공의회는 교회와 세상을 더 이상 분리시키는 대신에, ‘안으로 향한 교회(Ecclesia ad intra)’와 ‘밖으로 향한 교회(Ecclesia ad extra)’라는 새로운 견지에서 교회와 세상의 관계를 재고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교회를 중심으로 한 이러한 통찰은 『교회 헌장』에서 ‘친교(communio, koinonia)’ 개념을, 『사목 헌장』에서는 ‘봉사(diakonia)’ 개념을 각기 천명하면서 구체화되어 드러나게 됩니다.

 

『선교 교령』4항의 위 텍스트는 『교회 헌장』과 『사목 헌장』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기본 노선을 성령론적 측면에서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즉, 창조 때부터 활동하시며 이 세상 안에 충만하여 계시는 성령께서는 오순절에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해서 결정적으로 교회에 주어져 교회 내부에서(Ecclesia ad intra) 그 구원 활동을 수행하시면서,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가 세상에 대한 개방과 대화와 선교를 통해서 그 외연을 넓혀감에로(Ecclesia ad extra) 인도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공동체모임길잡이, 2010년 11월호, 박준양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및 생명대학원 교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론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무엇보다도 교회론적인 공의회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교회 내부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교회 밖, 즉 세상을 향해서도 활짝 열린 공의회였습니다. 이러한 공의회의 기본 노선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중 무엇보다도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Lumen Gentium, 1964.11.21, 이하 "교회 헌장")과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Gaudium et Spes, 1965.12.7, 이하 "사목 헌장")이라는 양대 기둥을 통해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교회 헌장"은 1545-1563년 트렌토 공의회(Concilium Tridentinum) 이후의 전통적인 교계 제도적 교회관을 견지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신비체(Corpus Christi mysticum)’와 ‘하느님의 백성(Populus Dei)’이라는 성서적 관념을 통해 친교와 성사로서의 교회 개념을 도입하였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백성(De Populo Dei)”이라는 제목의 제2장이 제1장인 “교회의 신비(De Ecclesiae mysterio)”와 제3장 “교회의 위계 조직, 특히 주교직(De constitutione hierarchica Ecclesiae et in specie de Episcopatu)” 사이에 위치하게 된 것은 트렌토 공의회 이후 20세기 중반까지를 이끌어 왔던 강력한 교계 제도 중심적 교회관의 극복을 의미합니다. 이는 더 이상 교회를 성직자 중심의 법률적이고 제도적인 시각에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향한 여정 중에 있는 성사적 공동체로서도 생각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로써 제도적 교회관의 특징인 전투적 혹은 개선주의적 교회상이 물러나고, 대신에 종말론적 완성을 기다리는 순례적 교회상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론에서 교차되고 있는 상이한 두 가지 교회관, 즉 제도로서의 교회관과 신비적 공동체로서의 교회관의 결합은 바로 성령의 작용에 의해서 가능하게 됩니다. 제도라는 틀에 친교적 일치라는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어 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목 헌장"에서는 이러한 친교적 일치의 교회 공동체의 모습이 교회 내부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동선의 증진과 세상을 위한 봉사로 연결되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즉, 교회의 내부에 그 숨결을 불어넣어 주시는 성령께서는 그 역동적인 생명의 기운이 교회 밖을 향한 선교 정신으로 자라나게끔 인도하시고 격려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헌장"에서도 교회를 안팎으로 인도하시는 성령에 관한 성령론적 성찰이 나옵니다. 즉, 교회의 내부로부터(Ecclesia ad intra) 활동하시어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에 관하여 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의 "교회 헌장" 4항 텍스트는 성령께서 교회 안에서 어떻게 활동하시는지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께서 교회를 끊임없이 거룩하게 하시도록 파견되셨다. […] 이 성령께서는 바로 생명의 영, 곧 영원한 생명으로 솟아오르는 샘이시다(요한 4,14; 7,38-39 참조). […] 성령께서는 교회 안에 그리고 바로 성전인 신자들의 마음 안에 머무르시고(1코린 3,16;6,19 참조), 그 안에서 기도하시며 그들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언하여 주신다(갈라 4,6; 로마 8,15-16. 26 참조). 교회를 온전한 진리로 인도하시고(요한 16,13 참조) 친교와 봉사로 일치시켜 주시며, 교계와 은사의 여러 가지 선물로 교회를 가르치시고 이끄시며 당신의 열매로 꾸며 주신다(에페 4,11-12; 1코린 12,4; 갈라 5,22 참조). 복음의 힘으로 성령께서는 교회를 젊어지게 하시고 끊임없이 새롭게 하시며 자기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도록 이끌어주신다(이레네오, "이단 반론", III, 24, 1 참조).

 

이 텍스트는 "교회 헌장" 제1장인 “교회의 신비”에서 교회를 성령론적 차원에서 설명하는 부분에 속합니다. 1항에서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사(聖事, sacramentum)와 같다. 교회는 곧 하느님과 이루는 깊은 결합과 온 인류가 이루는 일치의 표징이며 도구”라고 정의하면서 시작된 교회의 신비에 관한 설명은 2항에서의 “성부의 보편적인 구원 계획”, 그리고 3항에서의 “성자의 파견과 활동” 이후에 4항에서의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에로 이어지면서 그 신비의 삼위일체론적인 근거와 기반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4항에서 성령과 교회와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는 위 텍스트는 무엇보다도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도록 파견된 성령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여러 단계와 방식들을 신약성경의 진술에 근거하여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 이를 통하여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향해 성장해 나가는 교회의 일치와 성화(聖化)의 핵심 원리로서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소공동체모임길잡이, 2010년 12월호, 박준양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및 생명대학원 교수)]

 

 

교회의 친교를 인도하시는 성령

 

한마디로 말해 교회론적 공의회였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의회 문헌 중 양대 기둥이라 할 수 있는 「교회 헌장」과 「사목 헌장」을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지난 호부터 「교회 헌장」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교회 헌장」에서는 교회를 안팎의 활동으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역할이 중요하게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호에서는 교회를 인도하시는 성령의 역할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교회 헌장」의 7항과 8항에서는 ‘그리스도의 지체(Corpus Christi)’로서의 교회 개념 안에서의 성령의 역할이 제시됩니다. 사실, 신약 성경에서 친교와 일치 원리로서의 성령에 관한 사상은 “성령에 의한 친교(koinonia pneumatos)”라는 표현으로 드러납니다(2코린13,13; 필리2,1 참조). 이는 성령에 의해서 위로부터 선물로서 주어지는 친교 개념을 뜻합니다. 친교를 뜻하는 희랍어 단어 ‘코이노니아(koinonia)’는 신약 성경에서 총 19회, 그리고 바오로 서간에서 13회가 나옵니다. 바오로는 그리스도인의 실존과 사명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는 믿음 안에서 신적인 주도권에 수직적으로 연결됨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또한 신앙인들 사이에서의 수평적 친교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즉, 주님과의 수직적 코이노니아는 그 하느님의 은총을 분유(分有)받는 사람들 사이에서 수평적 코이노니아를 가능케 합니다. 이 수평적 코이노니아는 서로 상대방을 인정해 주는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를 이루게 합니다.

 

다음의 「교회 헌장」 7항 텍스트는 그리스도의 신비체로서의 교회 안에서 친교와 일치의 원리로서 활동하시는 성령 개념에 관하여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끊임없이 새로워지도록(에페4,23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당신 성령을 주셨으며, 머리와 지체들 안에 현존하시는 한 분이신 똑같은 성령께서는 온몸에 생명을 주시고 온몸을 일치시키시고 움직이신다. 그래서 거룩한 교부들은 성령의 임무를 생명의 원리인 영혼이 인체 안에서 하는 일과 비교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는 그리스도로부터 파견되어 믿는 이들을 거룩하게 하시고 쇄신하시는 성령께서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그 지체들 안에서 생명과 일치의 원리로서 작용하심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비록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와 동일한 개념은 아니었지만, 교회는 머리이신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나오는 초자연적 은총에 의해서 하느님과 결합된 모든 이들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던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25-1274)에게서, 이미 성령은 그리스도와 믿는 이들을 결합시키는 일치의 원리로서 간주되었습니다. 그리고 1943년에 발표된 교황 비오 12세(재위 1939-1958)의 회칙 「그리스도의 신비체」 (Mystici Corporis Christi)에서도 성령은 마치 ‘교회의 영혼(anima Ecclesiae)’처럼 모든 지체들 간의 일치, 그리고 그들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이루어 내는 비가시적 원리로서 제시되고 있습니다. 사실, 교황 비오 12세의 회칙 「그리스도의 신비체」는 1897년 교황 레오 13세(재위 1878-1903)가 발표한 회칙 「그 신적 책무」(Divinum Illud Munus)를 인용하여 ‘교회의 영혼(anima Ecclesiae)’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레오 13세의 회칙 「그 신적 책무」에서는 이 표현을 히포(Hippo)의 주교였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의 성령 강림에 관한 설교(PL 38, 1231D 참조)로부터 인용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머리이시고,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영혼이라고 말합니다. 한편, 성령께서는 ‘교회의 영혼’이라는 표현은 바오로 6세의 1975년 교황 권고 「현대의 복음 선교」(Evangelii Nuntiandi) 75항에서도 다시 사용됩니다.

 

이러한 일치 원리로서의 성령 개념은 「교회 헌장」의 제2장인 “하느님의 백성”에서도 동일하게 드러납니다. 「교회 헌장」 13항은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을 이루는 교회 안에서, “성령께서는 온 교회를 위하여 또 개인과 모든 신자를 위하여 사도들의 가르침과 친교에서, 그리고 빵의 나눔과 기도에서 모임과 일치의 근원이 되신다(사도2,42 참조).”라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일치 원리로서의 성령 개념은 가톨릭 교회 내부에서만이 아니라 다음과 같이 “갈라진 교회들과 공동체들”, 즉 “가톨릭 교회와 아직 완전한 친교를 맺지는 않은 교회들과 공동체들”과의 관계에서도 또한 적용됩니다.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Unitatis Redintegratio, 1964.11.21, 이하 「일치 교령」) 2항의 다음 텍스트는 교회 일치의 원리가 되시는 성령에 관하여 설명합니다.

 

『십자가에 높이 달려 영광을 받으신 주 예수님께서는 약속하신 성령을 부어 주시어, 성령을 통하여 신약의 백성인 교회를 하나인 믿음과 바람과 사랑으로 불러 모으셨다. […] 믿는 이들 안에 살아 계시는 성령께서는 온 교회를 가득 채우시고 다스리시어 신자들의 저 놀라운 친교를 이루시고 모든 이를 그리스도 안에서 깊이 결합시키시어, 교회 일치의 원리가 되신다. […]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양한 임무를 주시는 성령의 활동으로 이루어지는 교회 일치의 거룩한 신비이다.』

 

이렇듯 교회 일치의 원리가 되시는 성령에 대한 진술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여러 주요 문헌들에서 잘 발견되고 있습니다. [소공동체모임길잡이, 2011년 1월호, 박준양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및 생명대학원 교수)]

 

 

교회의 친교와 일치를 이루시는 성령

 

지난 호에 이어 교회의 친교와 일치를 인도하시는 성령의 역할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 헌장」에서 어떻게 설명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고찰해야 할 요점은 「교회 헌장」 8항에서 교회의 가시적인 제도적 차원과 비가시적인 영적 차원을 결합시키는 원리로서의 성령 개념이 제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앞서 살펴본 바 있는 비오 12세의 1943년 회칙 「그리스도의 신비체」(Mystici Corporis Christi)에서 나오는 개념보다 더 구체화된 일치 원리의 모습을 제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 헌장」 7항에 나오는 교회관이 회칙 「그리스도의 신비체」 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신비체’로서의 교회 개념을 받아들여 거듭 확인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회칙 「그리스도의 신비체」에서와는 달리 「교회 헌장」 8항에서는 교회의 제도적 요소와 영적인 측면을 분명히 구분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차이를 보입니다. 사실 회칙 「그리스도의 신비체」에서는 이에 대한 별다른 구분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헌장」과 회칙 「그리스도의 신비체」와의 또 다른 중요한 차이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와 가톨릭교회와의 동일성에 관한 표현 문제입니다. 회칙 「그리스도의 신비체」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체’라는 말로써 가장 잘 정의되고 묘사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진정한 교회는 곧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로마 교회‘이다(est)’라고 표현합니다. 반면에 「교회 헌장」 8항에서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유일한 “이 교회는 이 세상에 설립되고 조직된 사회로서 베드로의 후계자와 그와 친교를 이루는 주교들이 다스리고 있는 가톨릭교회 안에 존재한다.”라고 말함으로써, ‘이다(est)’라는 말 대신에 ‘안에 존재한다(subsistit in)’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교회 헌장」 8항의 다음 텍스트에서는 제도와 신비적 공동체라는 두 가지 요소들이 구별되면서도 분리 불가능하게 결합되어 교회의 유일한 실체를 구성함을 역설합니다. 앞서 「선교 교령」 4항을 설명하면서 이미 언급한 바 있듯이, 이 두 가지의 상이한 차원의 결합은 바로 일치 원리로서의 성령에 의해서 가능하게 됩니다.

 

『교계 조직으로 이루어진 단체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신비체, 가시적 집단인 동시에 영적인 공동체, 지상의 교회인 동시에 천상의 보화로 가득 찬 이 교회는 두 개가 아니라 인간적 요소와 신적 요소로 합성된 하나의 복합체를 이룬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기에 훌륭한 유비로 교회는 강생하신 말씀의 신비에 비겨지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께서 받아들이신 본성도 구원의 생명체로서 말씀과 떨어질 수 없도록 결합되어 말씀에 봉사하듯이, 다르지 않은 모양으로 교회의 사회적 조직도 교회에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성령께 봉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한다(에페4,16 참조).』

 

이 텍스트는 ‘그리스도의 신비체’라는 성서적 관념(로마12,4-5; 1코린12,12-27 참조)과 교계제도(hierarchia)라는 가시적 차원을 결합시킨 새로운 교회관을 제시합니다. 즉, 가시적 조직과 영적 공동체로서 각기 구분은 가능하지만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유일한 실체로서의 교회 개념을 잘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비가시적-가시적, 영적-제도적, 수직적-수평적, 천상적-지상적, 신적-인간적 결합을 지향하는 통합적이고도 성사적인 교회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위 텍스트는 이러한 교회관에 있어서의 상이한 두 가지 차원의 결합을 인간의 본성을 취하여 강생하신 말씀의 신비 개념에 유비적으로 비교하고 있습니다. 교회 역사상 네 번째 보편공의회(concilium oecumenicum)였던 451년 칼케돈 공의회(Concilium Chalcedonense)에서 선포된 “그리스도의 위격(位格) 안에서의 두 본성(本性)의 결합(De duabus naturis in Christo)”,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위격적 일치(位格的一致, unio hypostatica)’라는 중요한 그리스도론적 공리(公理)가 여기에서는 교회론적인 차원에로 유비적 의미에서 적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령은 교회의 외적이고 가시적인 측면을 교회의 영적 차원에로 연결시키는 중요한 원리로서 제시되고 있습니다. 말씀의 육화 신비에서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여(루카1,35 참조) 그리스도의 위격 안에서 신성과 인성의 일치를 이루어 내신 성령께서 교회론적인 차원에서의 일치와 통합에 있어서도 그 근본 원리가 되시는 것임을 위의 텍스트는 함축적으로 제시합니다.

 

이 텍스트의 마지막 부분은 성령에 의한 친교적 일치가 제도에 우선하는 것임과, 교회의 가시적 조직은 이러한 성령께 봉사하는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러한 통합적 교회관을 통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오늘날의 시대적 전망 안에서 교회를 인도하는 역할을 성령에로 귀속시키고 있다고, 프랑스의 유명한 신학자 이브 콩가르(Yves Congar, 1904-1995) 추기경은 말합니다.

 

항상 교회를 이끌고 인도하시는 성령께, 오늘날의 교회가 진정 내적 친교와 세상을 향한 봉사를 위해 헌신하는 빛과 소금의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 봅니다. [소공동체모임길잡이, 2011년 2월호, 박준양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및 생명대학원 교수)]

 

 

시대의 징표

 

‘세상을 향해서 열린 교회’를 표방했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이끈 기본 논거 중 하나가 바로 ‘시대의 표징’에 관한 전망입니다. 아래의 “사목 헌장” 11항 텍스트는 이 개념을 성령론적인 전망에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온 누리에 충만하신 주님의 성령께 인도되고 있음을 믿는 그 신앙에 따라, 현대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참여하는 사건과 요구와 염원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그 계획의 진정한 징표가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노력한다.”

 

이 인용문은 ‘성령의 보편적 또는 우주적 현존’, 그리고 ‘성령께서 하느님의 백성을 인도하심’이라는 두 가지의 성령론적 주제들을 서로 연결시켜 ‘시대의 표징’이라는 성령론적이면서도 동시에 교회론적인 새로운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위 인용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성령의 보편적 현존에 관한 믿음은 “온 세상에 충만한 주님의 영은 만물을 총괄하는 존재”라는 지혜서 1장 7절의 말씀에 그 성경적 근거를 두고 있으며, “사목 헌장” 등의 여러 곳에서 이 주제와 관련한 언급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를 인도하신다는 믿음은 “교회 헌장” 12항에서 ‘신앙 감각’ 개념을 제시하면서 두드러지게 드러나게 됩니다. 즉, 하느님의 백성은 “진리의 성령께서 일깨워 주시고 지탱하여 주시는 신앙 감각으로” 인도받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위 인용문은 하느님 백성인 교회가 현 시대 안에서 현존하시며 활동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시대의 징표를 읽고 하느님의 뜻을 찾아야 함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시대의 표징’이라는 용어와 개념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한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정립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땅과 하늘의 징조뿐 아니라 시대의 표징을 살피라고 촉구하신 마태오 복음서 16장 2-3절(루카12,54-56)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생겨났습니다. 이 용어와 개념은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동시대 사람들과의 연대성 안에서 역사 안에 발생하는 인간 현상에 주목하고 이를 복음의 빛으로 해석해야 하는 교회의 의무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는 또한 계시 진리의 충만한 이해는 오직 종말론적인 차원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교회의 겸허함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물론, 여기에서 언급되고 있는 시대의 표징이 계시 개념 자체로서 이해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계시를 완성하셨기에 더 이상의 공적 계시를 새로이 찾아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시대의 표징에 관하여 말하는 것은 “계시 헌장”에서가 아니라 바로 “사목 헌장”에서입니다. 따라서 시대의 표징 개념은 ‘기초적’ 계시와 ‘종속적’ 계시의 범주적 구분을 통해서 잘 이해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공적 증인들인 사도들에게 전수되고 그들에 의해서 선포된 것은 기초적 계시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의 선포 이후 지금까지 청중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종속적 계시입니다. 기초적 계시는 현재의 체험 안에서 전달됨으로써 오늘날을 위한 종속적 계시가 됩니다. 이러한 구별은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된 하느님의 계시가 현재의 역사 안에서 살아서 체험되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대의 표징이란 현재의 인간에게 통교되는 종속적 계시를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중요한 소인(素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과 성전을 통해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자기 전달은 역사적 맥락 안에서 드러나는 시대의 표징과의 상관관계 안에서 현재의 인간에게 수용됨으로써 계시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지게 됩니다. 여기에서 시대의 표징에 관한 하느님 백성의 경청과 분별, 해석과 판단, 그리고 그에 따른 계시에 관한 이해의 성장을 인도하는 분이 바로 성령이심을 “사목 헌장” 11항의 위 텍스트는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한편, “사목 헌장” 4항에서는 시대의 표징을 발견하고 해석하여야 할 교회의 임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모든 시대에 걸쳐 교회는 시대의 징표를 탐구하고 이를 복음의 빛으로 해석하여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각 세대에 알맞은 방법으로 교회는 현세와 내세의 삶의 의미 그리고 그 상호 관계에 대한 인간의 끝없는 물음에 대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그 세계의 기대와 열망 그리고 때로는 극적이기도 한 그 특성을 인식하고 이해하여야 한다.”

 

시대의 표징에 관한 이러한 식별과 해석은 단순한 이해의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인생의 의미에 관한 세상의 질문에 대하여 제공해야 하는 대답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위 인용문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교회의 이해는 세상에 대한 교회의 대답을 규정합니다. 그런데 세상에 대한 교회의 이해는 결코 일회적일 수 없으며, 그 대답 또한 일회적일 수가 없습니다. 위 인용문이 강조하듯이, “모든 시대에 걸쳐” 끊임없이 시대의 표징을 읽는 연속적인 과정을 통해서 현시대의 상황과 맥락 안에서의 계시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지는 것은, 교회와 세상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종의 발전적인 순환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소공동체모임길잡이, 2011년 3월호, 박준양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및 생명대학원 교수)]

 

 

세상과의 대화를 이끄시는 성령

 

지난 호에서는 ‘시대의 표징’(signa temporum)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이 ‘시대의 표징’ 개념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을 통해 어떻게 보다 구체적으로 심화, 발전되어가는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래의 “사목 헌장” 44항은 ‘시대의 표징’에 대해 언급하면서, 계시 진리를 현대의 사람들에게 적절하게 전달하고 설명해야 할 사명과 의무를 다음과 같이 제시합니다.

 

“하느님의 백성 전체, 특히 사목자들과 신학자들의 소임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현대의 다양한 말을 경청하고 식별하고 해석하며 이를 하느님의 말씀에 비추어 판단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계시 진리가 언제나 더 깊이 받아들여지고 더 잘 이해되고 더욱 적절히 제시될 수 있다.”

 

이 인용문은 시대의 표징을 관찰, 분별, 해석, 판단하여야 할 교회의 임무 중 특별히 사목자들과 신학자들의 소임을 명시하면서, 이들을 도와주고 이끌어 가는 성령의 활동에 관하여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 안에서 시대의 표징을 읽고자 하는 하느님 백성의 노력은 세상에 대한 교회의 자세에 있어서 부정적인 선입견과 그로 인한 폐쇄성이 극복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다음에 나오는 “사제의 생활과 교역에 관한 교령” 22항의 텍스트에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교회와 세상과의 관계에 관하여 제시하는 새로운 전망이 소개됩니다. 이는 예전의 부정적인 측면에만 초점을 맞추었던 세계관과 그로 인해 세상에 대해 닫혀 있던 교회관을 극복하여, 세상과 교회가 서로 주고받는 상호적 통교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 세상은 참으로 많은 죄에 매여 있지만 적지 않은 힘도 지니고 있으며 성령 안에서 하느님의 집으로 함께 세워질 산 돌들을 교회에 제공한다. 같은 성령께서는 교회가 이 현대 세계에 다가서는 새로운 길들을 개척하라고 재촉하시며 또한 사제 교역의 적응에 알맞은 길들을 보여 주시고 보살펴 주신다.”

 

이 인용문은 교회와 세상과의 관계에 있어서 일방적으로 세상에 대하여 주기만 하는 교회 상으로부터, 세상과의 통교라는 상호적 관계를 설정하고 있는 새로운 교회 상에로의 전환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이러한 전망에서는 비단 세상에 대하여 베푸는 능동적인 시혜적 교회 상뿐만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받기도 하는 ‘수용적’(receptive) 교회의 모습도 또한 그려지고 있습니다. 수용적 교회를 가능하게 하는 근거는 바로 성령께 대한 믿음입니다.

 

온 세상 안에서 현존하여 활동하시는 성령의 인도에 따라, 세상 안에서의 감추어진 보화와 좋은 씨앗들을 발견하여 이를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받아들이는 교회의 모습은 종말론적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 속에 있는 ‘순례하는 교회’의 겸손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교회 헌장” 48-50항에서는 순례하는 교회의 종말론적 성격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한편, “사목 헌장” 44항에서는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 누룩으로서의 역할을 하여야 함을 강조하는 한편,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도움을 받기도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이를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교회도 인류의 역사와 발전에서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았는지 모르지 않는다. 지난 여러 세기의 경험, 학문의 진보, 인간 문화의 다양한 형태 속에 숨어 있는 보화들은 인간 자신의 본성을 더욱 충만하게 밝혀 주고, 진리를 찾는 새로운 길을 열어 주며, 교회에도 도움이 된다.”

 

이렇듯이 “사제 생활 교령” 22항과 “사목 헌장” 44항에서 제시된 세계관은 “선교 교령” 11항과 15항에서 ‘말씀의 씨앗’이란 개념을 통해 보다 명시적이고 구체화되어 드러나게 됩니다. 다음의 “선교 교령” 11항 텍스트는 그리스도교 밖에서 감추어진 형태로 존재하는 ‘말씀의 씨앗’을 발견하고 계발하여 하느님께로 향해 성장시켜야 하는 교회의 임무 수행을 바로 성령께서 도와주신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의 민족적, 종교적 전통에 익숙해져야 하고 그들 안에 감추어진 말씀의 씨앗을 기꺼이 존경하는 마음으로 찾아내야 한다. (중략) 바로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마음을 살피시어 참으로 인간적인 대화로써 그들을 하느님의 빛으로 이끄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충만하여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알고 또 그들과 사귀어야 한다. 그들은 진지하고 끈기 있는 대화로 너그러우신 하느님께서 이민족들에게 얼마나 값진 보화를 나누어 주셨는지를 배워야 하며, 그리고 동시에 이 보화들을 복음의 빛으로 비추고 해방시켜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지배 아래로 돌려 드리도록 힘써야 한다.”

 

이 인용문은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세상과의 대화와 통교를 통하여 이미 이 세상 안에 존재하는 좋은 보화들을 찾아내고 복음의 빛으로 계발시켜 하느님께로 이끌어야 할 교회의 사명을 ‘말씀의 씨앗’(semian Verbi) 개념에 의지하여 설명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말씀의 씨앗’이란 표현은 유스티누스(Justinus, 100/110?-165) 교부의 신학 사상에 나타난 ‘말씀 그리스도론’(Logos-Christologia)에서 원용된 개념입니다.

 

유스티누스는 153-155년경에 저술된 “제1호교론”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된 로고스(Logos)이시며 하느님의 지혜로서 악마의 반대편에 계심을 강조합니다. 또한 창조주의 중재자인 로고스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씨를 뿌리는 로고스’라고 서술한다. 따라서 모든 이들 안에서 이러한 ‘말씀의 씨앗’을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에 근거하여, 유스티누스는 악마들의 기만을 밝혀내고 참된 신을 찾을 것을 권유하였던 그리스도 이전의 철학자들도 이미 그 사고와 행동에서 다른 방식으로 그리스도인이었다고 말합니다. [소공동체모임길잡이, 2011년 4월호, 박준양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및 생명대학원 교수)]

 

* 주요 참고문헌: 박준양,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회의 가르침에 나타난 성령론적 전망」, <사목연구> 17(2006/겨울), 가톨릭대학교 사목연구소, 176-179쪽의 내용을 발췌, 수정 및 보완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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